오후 1시16분, 오랜만의 기차여행이라 설레는 마음을 안고 새마을호 기차에 올랐다. 내 마음처럼 들뜬 눈부신 햇살이 차창 밖에서 축복의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성에 있는 회사연수원으로 연수를 가있던 남편에게서 아침에 전화가 왔다. 오늘이 연수 마지막 날인데 천안으로 기차를 타고 와서 오후에 함께 가까운 곳에 들렀다가 집으로 내려가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가문 날의 단비만큼이나 반가운 데이트 신청에 얼른 좋다고 말하고 큰애에게 기차표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마침 적당한 시간에 자리도 있어 쉽게 표를 예매할 수 있었다.
두 시간 가까이 달려 천안역에 내려 대합실로 나가니 남편이 벌써 도착해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흘 만에 보는 남편인데 밖에서 만나니 연애시절로 돌아간 듯 반가웠다. 지난밤에 천안에서 가까운 거리에 가볼만한 곳을 찾아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다며 ‘석정문학관’으로 가자고 했다, 이렇게 멋질 수가!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남편이 나를 위해 이렇게 좋은 코스를 마련해 놓았다니 고맙고도 감격스러웠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위치한 석정문학관 뜰에는 ‘임께서 부르시면’을 비롯한 여섯 개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문학관 옆에는 옛날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청구원’이라는 편액이 걸린 신석정(申夕汀 1907~1974) 시인의 생가가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 거처하던 고택은 기와지붕이었는데 초가지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시간이 늦어 문학관을 관람하는 이는 우리뿐이었다.
문학관을 안내하는 분이 기다렸다는 듯이 친절하게 영상부터 감상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전시관으로 가서 신석정 시인에 관한 연보를 보며 시인의 일대기와 미발표된 작품들, 해방 이전에 썼던 시들을 유심히 읽어 보았다. 훤칠한 시인의 풍모에서 느껴지는 다감한 목소리가 지금이라도 곧장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하고 귓전에 들려오는 듯했다.
평소 시인의 시를 많이 낭송하고 감상했지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라는 목가적인 시도 깊이 들여다보면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된 아름다운 나라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석정 시인의 많은 시며 그 시 세계는 어떠했을까? 널리 알려진 자연주의적이고 목가적인 시 외에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시들과 해방이 되어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일깨운 시들도 많았다는 사실을 오늘 문학관을 돌아보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동안 시인을 제대로 잘 알지 못했던 사실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전시관을 거의 다 둘러볼 즈음 바쁜 일로 퇴근했던 해설가 선생님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멀리서 찾아왔다는 전화를 받고 일을 보던 중 달려왔다고 하며 문을 닫을 시간이 거의 다 됐지만, 몇 부분을 설명해 주겠다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중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고 석정문학관 사무국장을 맡아, 시인이며 해설사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신석정 선생님을 한 번 뵌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좀 더 가까이 지내며 시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시인이 살았던 서재의 모습을 재현한 방 앞에서 시인이 사용하던 유품들이며 중요한 장면들을 꼼꼼히 짚어가며 설명해 주고, 시집마다 설명서에는 없는 숨은 이야기도 해주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을 비롯하여 박목월, 박두진, 조병화, 조지훈, 정지용, 김용철, 김수영 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 등 그 시대의 많은 시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많은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특히 서정주 시인이 여덟 살 위인 신석정 시인을 형이라 부르며 평소 매우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보낸 편지도 볼 수 있었다.
한학이며 노장철학(老莊哲學)과 같은 동양사상에 심취하며, 시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석전 박한영 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시와 철학을 배웠다. 다른 시인들이 서울에서 같이 공부하며 시를 쓰자는 만류도 뿌리치고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고, 학교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연을 모태로 한 자신만의 정서를 담은 시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좌측 전시관 벽에 붙어있는 시인의 좌우명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 - ‘뜻이 높은 산과 흐르는 물, 즉 자연에 있다’는 뜻으로, 시인은 ‘한정소언불모영리(閒靜少言不慕榮利)’ - '한가롭고 고요하여 말이 적고 영화와 이익을 사모하지 않는다'라는 도연명의 경지를 그리면서 속된 것을 멀리했다. 해설사 김 선생님은 시인의 좌우명을 쓴 글자를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소설가의 아버지인 시조시인이셨던 철운 조종현 선생이 직접 썼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시인은
1939년에 펴낸 제1 시집 『촛불』을 시작으로, 8·15광복 후에 발간되었지만 일제 말기의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쓴 제2 시집 『슬픈 목가』를 비롯해, 1956년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의 아픈 현실을 담은 제3 시집 『빙하』, 1967년 회갑을 맞아 비교적 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든 때, 100여 종의 식물 이름을 등장시켜 자연을 노래하고, 치열한 역사의식과 짙은 현실 참여 그리고 민주주의의 갈구를 담아내었던 제4 시집 『산의 서곡』, 1970년 초기의 명상적인 세계로 회귀하면서 더욱 차분하고 고요한 관조의 세계를 그린 제5 시집 『대바람 소리』를 내었고, 1973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7개월간의 긴 투병생활을 하면서 시집의 제목까지 미리 정해준 유고 시집 『원정의 설화』를 제6 시집으로 냈는데, 후에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으로 개제(改題)되었다.
시인은 순수 자연을 사랑한 인도의 시인 타고르와 만해 한용운의 시에서 형태상으로는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내용상으로는 만해처럼 정면으로 현실을 수용할 수도 없고 타고르처럼 자연에만 안주할 수도 없는 고뇌 속에서 시작(詩作)을 해나갔음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쓴 시 ‘가슴에 지는 낙화 소리’를 읽고 문학관을 나서는데, 마치 시인을 병문안하고 돌아서는 느낌과 함께 ‘가슴에 무더기로 떨어지는 백목련 낙화 소리’가 가슴에 아련히 스며오는 듯했다.
이번 문학기행을 통해 신석정 시인에 대해 가뭄 속의 갈증처럼 궁금했던 많은 것들이 여름날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해갈된 것 같았다. 신석정 시인에 대한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신 해설사 김환생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눈과 마음이 해맑아 보이는 김 선생님은 남편과 함께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주시며 참 좋은 남편이라고 칭찬해 주기도 했다.
문학기행의 덤으로 맛집 탐방에 나섰다. 부안의 어느 맛난 횟집에서 별로 비싸지 않으면서도 푸짐한 회덮밥과 물회를 맛있게 먹음으로써 오늘의 기행을 맛깔스럽게 마무리했다. 짧은 시간 속에도 마음이 풍요롭고도 싱그러워지는 문학기행의 기회를 마련해준 남편이 다시 한 번 고맙게 느껴졌다. 다음에도 연수 마치고 또 깜짝 데이트 신청해오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귀로를 달린다. (2016.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