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건너 남촌에서
이재익 (2003.5.17)
먼 길 삭은 세월을 돌아
강건너 남촌에서
바라다보는 고향마을은
낯익은 듯 낯선 듯.
강물은 예대로 속삭이는데
메아리 주고받던
멱 감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나.
노고지리가 알을 까던
사래긴 호밀밭은 과수원 숲으로
남촌*에 서서 남촌이 그립다.
유체이탈한 혼이 육신을 보듯이
더러는 내 밖에서 나를 보아야지
스스로 낯설어 서성거리기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 어릴 때 동경했던 강건너 마을에 먼 훗날 찾아가서 느끼는 감회
강건너 남촌에서
이 재 익 (2003.5.17)
여름이면 더위를 식히려고 낙동강에 나가서 멱을 감았다. 진흙탕에 뒹굴고, 게도 잡고, 조개와 다슬기도 잡았다. 강 건너 산 아래 초가집 몇 채가 있어서 ‘어이, 만나자’ 하고 외치면 서로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거리였지만 저쪽 아이들의 응답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언젠가는 강 건너 마을로 가서 아이들을 만나보리라고 소년은 강가에서 꿈을 꾸었다.
어른들은 강 건너 마을의 산중턱 큰 바위께로 구름이 걸리면 어김없이 비가 오는 것으로 예측하던 신비하기까지한 강 건너 마을이었다. 강 건너로 가보고 싶었던 소년의 소원은 직선거리 불과 몇 백m를 돌고 돌아서 실현된 것은 50년이나 지난 먼 훗날이었다.
나는 자동차를 타고 김해 대동에 볼일 보러 간 김에 덕산정수장과 김해 상동면 매리 옛나루터를 지나 외따로이 있는 부산시민이 먹는 매리 상수도 취수장 쪽으로 갔다. 매리 나루터를 지나면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꼈다. 물금 장날에는 김해 상동쪽 사람들이 농산물을 가지고 나룻배를 타고 많이들 건너와서 장날이 장관이었다. 그런데 이제 낙동강에는 나룻배도 없어지고 상동사람들은 물금장에 오는 일이 없어져서 아예 닷새마다 열리던 장날은 없어지고 축소된 그 장터에 전에 보다 더 초라하게 상설로 농산물을 꾀죄죄하게 놓고 팔고 있다.
매리 상수도 취수장쪽으로는 고향 마을을 강 반대편에서 바라보기 위하여 일부러 찾은 것이다. 취수장 철조망 너머로 낙동강 건너 양산시 원동면 쪽으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여기가 고향마을을 최단 직선거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영문을 모르는 취수장 경비는 나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넓은 강폭에는 잦은 봄비로 시위가 내리고 상큼한 풀냄새는 향기로웠다. 고향 마을 뒷산의 스카이라인은 눈부시게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아련한 옛집터 위로 아지랑이가 아롱거리는 평화로운 마을 원경, 노고지리가 알을 품던 경부선 철둑 넘어 강가 사래 긴 호밀밭은 과수원 숲으로 변하여 장관이었다. 낯설기도 하고 낯익은 풍경이 가슴 뭉클하여 하염없는 상념에 잠겼다. 가보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은 언젠가는 실현되는구나,
누구나 꿈 ★을 꾸고 결코 잊지 않는 다면..........
낙동강변로는 취수장까지는 포장이 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감로마을로 가는 길은 이제 막 포장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나는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조금 가다가 큰 돌이 차밑으로 지나가는 바람에 갑자기 차가 이상해졌다. 매리까지 와서 간이정비소에 들렸더니 2번 소음기(마후라)가 우그러져 교체해야 한다고 하였다. 고향마을을 바라보는 대가를 조금 치러야 되나보다 싶었다.
내가 감로마을로 꼭 가보고 싶은 것은 강 건너 감로마을에서 시집온 감로댁 아주머니 내외의 추억 때문이다. 그 댁 내외는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그 댁 복숭아를 따먹다가 들켰으나 다정하게 용서하여주었으며 몇 개 더 따줬다. 그분들은 오래 전에 경기도로 이사를 갔고, 이미 노인이 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스스로 부끄럽고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고마웠던 것은 동생이 그분의 소를 빌려다 밭갈이를 하면서 마른 등겨를 먹이로 줘서 소가 탈이 났던 일이었다. 감로댁 아저씨는 얼른 양산장에 가서 팔아버렸다. 탈이난 소는 오래 가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는 원망도 하지 않았다. 만약에 소가 탈이 났더라면 우리는 어려운 형편에 더욱 큰일 날 뻔하였다.
강 건너로 가서 바라 볼 수 있는 고향을 가까이 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 망향의 한을 안고 임진강으로 가서 북녘 땅을 바라보는 실향민들의 심경을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허전한 것은 동경했던 소년 소녀도 없었고 초가집터에는 거대한 상수도 취수장이 들어섰다. 강가에 전망 좋은 곳 군데군데 들어선 가든 음식점들은 경기가 없는지 인적 없이 한산하다. 부모세대에는 고향 양산쪽에는 공비 출몰이 심해서 여유가 있는 집들은 배를 타고 이쪽 김해쪽으로 피난하여 살기도 했다.
갑자기 50년의 나이를 한꺼번에 먹는 서글픔이여, 흘러간 세월이여, 아직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남촌의 그리움이여. 유체 이탈하여 혼이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듯이 더러는 내 밖으로 나를 보러 나서야겠다. 스스로가 남처럼 낯설기 전에, 그리움으로 응고되기 전에, 너무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