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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시다케 전망대, 러일전쟁 역사/ 만제키바시 2016.11.25. / 청천17기 동기회
에보시타케 전망대주차장에서 2016.11.25.
전망은 아소만 리아스식 해안 경관이다.
아소만 경관 전망대
경관이 아름답고 장엄하다.
전망대는 좁지만 사방이 다 보인다.
육지의 침강으로 생긴 리아스식 해안이다.
대마도 해안선의 총 길이는 915km이다.
* 대마도 하면 고려 말기~조선초기에 우리나라를 많이 침략한 왜구들의 소굴이었다. 그래서 고려말 박위 장군, 조선초 세종때 이종무 장군이 여기를 정벌하여 진정시켰다. * 이 자연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 그리고 일본이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전투가 러일전쟁. 1905년 대마도 해전으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꿰멸시켜 승리하였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벌어졌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과 남만주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각축을 벌인 것이다.
[러일전쟁의 배경 및 원인] * 청일전쟁(1894~95) 결과 일본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 일본이 요동반도(遼東半島) 영유권 획득. * 만주에 야심가진 러시아가 방해.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이 일본에 압력, 소위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얻은 요동반도 영유권을 청에 반환시킴. * 러시아는 러·청비밀동맹, 동청철도부설권 획득, 독일의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를 계기로 러시아는 1898년 여순(뤼순旅順)과 대련(따렌大連)을 25년간 조차(빌림), 만주를 세력권화하려 하였다.
* 한국에서는 을미사변(1895, 일군이 민황후 시해) 이후 4개월 만에 아관파천(1896,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하여 친러정권 수립. * 청의 의화단란(義和團亂, 1898,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대외배척 운동)→열강8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일본)이 진압하고, 베이징 점령, (1901년 신축조약) 러시아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만주를 점령하고, 난이 진압된 뒤도 철수를 거부. * 일본은 1902년 1월 영일동맹 체결하며 러시아에 대항. 러시아의 남하를 세계 도처에서 저지하려는 영국과 공동대응. * 러시아는 1차로 부분적으로 철병했지만, 2차 철병 약속을 위배, 도리어 봉천성(奉天省) 남부와 길림성(吉林省) 전역을 점령하였다.
* 러시아는 일본의 방해로 한국의 마산 조차 실패(1899). 압록강 삼림채벌권 실행을 명목으로 시도한 한국의 용암포 조차도 실패했다.(1903년) * 2차례 러일협상 결렬(1898, 1903) ; -1898년 일본의 38선 분할 제의 러시아가 거절 -1903년 러시아는 만주를 일본의 세력 범위에서 제외시키고, 한국에서의 일본의 군사활동 제한 및 39° 이북의 중립지대 설정 주장, 일본이 거절. 이러한 첨예한 대립은 전쟁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 러일전쟁의 경과 * 1904년 2월 8일 밤, 일본은 여순의 러시아 함대 기습공격. 함대를 여순항에 봉쇄하고, 일본은 9일 인천 앞바다에 있던 두 척의 러시아 군함을 격침시킨 다음날인 10일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 4월 말 한국을 거쳐 북진한 제1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하였고, 도고(東鄕平八郞)함대는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하였다. * 6월 만주군총사령부를 설치하여 총병력이 15개 사단의 일본군은 9월에 랴오양(遼陽)을 점령하였다.
* 노기(乃木希典) 대장 지휘하의 제3부대는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하였다. 일본군은 이어 3월의 봉천전투 승리, 육전을 사실상 마무리지었다. 약 120만 명의 일본군은 3개 보병단과 13개 예비여단으로 이루어졌고, 이 중 사상자는 68만 9,000명(전사자 13만 5,000명 포함)이었다.
* 일본 해군은 전함 7척, 무장순양함 8척, 경순양함 17척, 구축함 19척, 어뢰정 28척, 포함 11척을 보유하였다. * 대부분의 함정이 여순에 기항하고 있던 러시아 극동해군은 전함 7척, 무장순양함 4척, 어뢰정 37척, 포함 7척.
개전 직전 러시아 극동군의 배치 상황은 정규군 9만 8,000명, 철도수비대 2만 4,000명(동청철도 연변의 광활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전쟁 초기 시베리아 철도의 군 수송률은 하루 6량에 불과하였다. 만주로 이동한 120만의 병력은 대부분 1905년에 이동한 것으로, 총 40여 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 전쟁이 장기화되고, 일본은 재정면에서 1년간의 전비를 4억 5000만 원 정도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2년 동안 19억 원을 지출하여 재정적 어려움. * 러시아는 국내사정 악화 ;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하여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육전에서 일본이 간신히 승리하고 있었지만 과도한 전비지출과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어 일본 역시 힘겨운 상황이었다. * 일본은 결정적인 승기(대마도 해전)를 잡은 뒤 미국에 중재를 요청함.
* 대마도 해전 러시아 발틱함대는 라트비아 서쪽 리바우(Libau)항을 떠나, 영일동맹의 영국이 수에즈 운하(1869년 개통)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오느라 34,000km 거리를 7개월 여 오랜 시일이 걸렸고, 전력과 전의가 극도로 떨어졌다. 1905년 5월 27일 새벽 4시 45분, 진해만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 연합함대가 도고 사령관 지휘하에 작전을 개시하여 대마도 쪽으로 유인하고,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24시간 계속된 해전에서 38척 규모의 발틱함대를 격파하였다. 러시아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포로가 되었다.
에보시타케란 까마귀모자 모양의 산 이라는 뜻이네.
▣ 러일전쟁시 열강의 태도 * 러시아와의 대결에 있어 일본을 적극 지원한 세력은 영국과 미국이었다. 영국과 미국의 대러시아 전쟁을 일본이 대리 수행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 1904년 4월과 1905년 5월 사이에 영·미가 네 차례에 걸쳐 일본에게 제공한 총 4억 1,000만 달러의 차관 중 약 40%가 일본의 전비로 충당되었다. * 영국은 엄정중립을 선언하였으나, 러시아에 대한 제3국의 석탄공급 및 원조제공을 저지하는 등 일본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미국은 전쟁이 발발하면 중립을 지키겠다고 공언했지만, 루스벨트(Roosevelt, T.) 대통령은 독일과 프랑스가 만일 삼국간섭 당시처럼 일본에 간섭할 경우, 즉각 일본편에 가담하겠다고 공언하였다. 또한 러·일에 대해서는 전쟁의 범위를 확대시키지 말라고 하였고,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기득권을 부정하였다.
최현욱 * 러시아의 동맹국 프랑스는 혹시나 영국과 충돌할까봐 중립을 선언하고, 4월 8일 영·불협약(Entente Cordiale)을 체결하였다. 독일도 중립을 취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장차 독일과의 대항을 염두에 두고, 러시아 군사력이 약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미국 역시 일본이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는 것을 원히지 않았다. 양경석 / 정진구 ▣ 전쟁 결과 : 포츠머드강화조약 일본과 러시아 두나라는 진이 빠져 있었고, 대마도해전 직후 일본은 미국에 중재를 의뢰하였으며, 국제정세도 전쟁 종결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었다. * 뒤늦게 도착한 러시아 육군이 아직 건재하였기 때문에 강화회담에서 러시아측 대표 위테가 조금도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버텨서 강화회담은 난항을 겪었다.
* 열강은 제각기 러일전쟁 종전 이전에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해 두려고 뵈르케(Bjorke) 밀약(1905년 7.24. 독일 황제 빌헬름2세,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가 핀란드 뵈르케섬에서 영국에 대항하여 상호 협력하는 밀약, 러시아 외상 람스도르프가 반대하여 그해 12월 파기됨), 영일동맹 개정(제2차 영일동맹 ; 일본은 한국의 이익, 영국은 인도의 이익 상호 인정), 태프트·가쓰라(Taft·桂, 미국-일본, 미국은 필리핀 이익. 일본은 한국의 이익 서로 인정)밀약 등이 이루어졌다.
* 러·일 양국은 루스벨트의 중재로 9월 5일의 포츠머스(미국)강화조약을 맺었다. *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얻은 것. 한국에 대한 우월권 / 랴오뚱반도 조차권/ 동청철도남만지선/ 남사할린 획득 / 연해주 어업권 등을 얻음/ 그러나 일본이 요구한 배상금은 거부되었다.
▣ 러일전쟁 영향 * 영·미가 일본을 지원한 이유가 동북아시아에서 러·일 양국의 상호견제를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일본으로 하여금 막자는 데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직후 일본이 선택한 배타적인 만주 진출은 즉각 영·미의 제재를 받았다. * 패전으로 동아시아로의 세력 확장이 저지된 러시아는 그 진출 방향을 중앙아시아와 발칸 지역으로 전환하였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1907년 영국과의 협상으로 타협을 보았으나, 열강의 이해가 쉽게 조정될 수 없었던 발칸반도로의 팽창은 분쟁의 소지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 러일전쟁은 결국 동아시아정세를 크게 바꾸었고, 제1차세계대전으로 가는 세력구도의 형성을 촉진시켰다.
정용호
박인호
박명수
이재익(학정) 러일전쟁 전후 한국에서 러일각축 및, 일제의 국권침탈
(1) 한말 일제의 국권침탈 과정에서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한 국제 조약 * 러시아가 여순 대련 조차(1898)후 마산 목포 조차 기도 실패(1899) * 러시아가 만주에 군대 출동(1901) * 러일간 한반도 분할 협상 - 1차(1898) 일본의 38도선 제의, 러시아 거절 - 2차(1903) 러시아의 39도선 제의 , 일본이 거절
1) 제1차 영일 동맹(1902) - 일본은 조선에서, 영국은 청에서의 이익을 상호 인정 * 러시아의 용암포 조차 실패(1903) * 러일전쟁(1904.2.8~1905.9.5) 발발시 조선은 국외 중립 선언 → 한일 의정서로 무시됨→ 제1차 한일 협약 강요 2)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 러일저쟁중) - 일본의 조선지배, 미국의 필리핀 지배 상호 인정, ☞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거중조정’ 규정을 일방적 파기 3) 제2차 영일 동맹(1905.8, 러일전쟁중) : 일본의 조선지배, 영국의 인도 독점지배 상호 인정 4) 포츠머드 강화조약(1905.9) - 러시아가 일본에 사할린 남부 할양 - 일본의 조선 지배를 러시아 등이 국제적으로 묵인→ 을사조약 강요 ☞ 이시기 국제적 흐름 ; 열강은 잉여자본의 투자 시장 확보를 위한 식민지를 필요로 하던 제국주의 시대
(2)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 (을사조약까지) 1) 한일 의정서 (1904.2) : 러일전쟁중 일본의 군사요지 점령, 조선의 국외 중립 선언(1904.1)이 무시되고, 러시아와 제조약 폐기 2) 제1차 한일 협약(=한일협정서, 1904.8) : 러일전쟁중, 고문정치 - 재정 고문- 일인 메가다/ 외교 고문- 미국인 스티븐스 3)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 1905.11) :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 을사조약을 <을사늑약> 이라고도 한다. 강제로 맺어졌다는 의미.
아소만이 바라보이는 시라타케산(일정에서 빠짐)
만제키바시 ; 万關橋, 운하위의 다리
1900년 해군 함정이 지나갈 수 있게 만든 운하. 이 운하의 효용으로 일본은 1904-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만제키바시(만관교)를 지나가는 벗들의 표정들
정용호/ 정진구 대마도는 <다이슈>라는 메밀국수가 유명하다며? 산지가 90%, 논이 적어 화전농업을 하여, 메밀을 많이 심으니 메밀국수가 특미지.
이상훈/ 박인호/ 귄기원 고구마도 주식이었지? 고구마 국수는? 고구마 가루를 반죽하여 건조 시키고, 다시 물에 풀어서 반죽한 후에 틀어 눌러 국수를 빼면 쫄깃해진다. 생선과 토종닭 우린 육수에 말아 먹는 거지. 그것을 <로쿠베 국수> 라고 한다.
박상길/ 조정래 대마도에 온천은 있는가? 세 곳 있는데. 유타리랜드 쓰시마, 나가사노유, 다나마노유
이남수/ 정용우 등산팀은 어떤가? 시라타케(백악) 은 519m조금 험한 바위 산이고. 360도 조망이 가능하며 아소만이 잘 보인다. 아리아케(유명산, 558m)는 왕복 3시간 30분정도로 쉬운편인데, 이번에는 친구들이 모두 시내관광을 하기로 해, 등산팀은 포기했다.
김영용
안상해
최현욱/ 김기식
김용택/ 김기식/ 정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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