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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
박현수
시조 월평_서구 리듬론의 허점, 시조 정형성의 미스터리
김정남
시 월평_시는 무엇을 말하는가
월평_시조
서구 리듬론의 허점, 시조 정형성의 미스터리
박 현 수
현대시에서 리듬은 추상화, 내면화되었기 때문에 형식적인 면에서는 리듬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현대시에서는 읽는 이의 해석에 따라 리듬이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고, 존재한다고 할 때도 저마다 다른 리듬을 지닌다. 이처럼 추상화, 내면화된 리듬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리듬이 해석의 문제라면 사실상 없는 것이니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해석을 통해 리듬이 발생한다면 신문기사도 충분히 리듬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시의 내면화된 리듬(?)은 현대시론에서 리듬을 언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필자가 시론 책을 쓸 때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이 바로 이 리듬 부분이었다. 시와 산문의 차이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로 리듬을 들어오고 있는데(운문, 산문으로 구분하는 방식은 아직도 통용되는 방식이다), 현대시에서 이것을 다루기에 너무나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해설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존의 관습을 존중하여 필자 역시 결국 리듬을 다루었지만 미완의 글이 되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시조가 정형시지만 기존의 리듬론으로 규정하기 힘든 독특한 정형시다. 이 독특함이 아직도 제대로 규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리듬론은 아직 미개척지대로 남아 있는 시론의 중요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시론 내용을 더듬어 정형시로서의 시조의 독특한 점을 간단하게 짚어 보고 실제 작품을 검토하기로 한다. 이하 리듬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시론 제2판 울력, 2015.의 내용을 발췌한 것임을 밝혀둔다.
흔히 시에서 말하는 리듬, 즉 ‘운율韻律’이라는 말은 두 가지 개념이 결합된 말이다. 운韻은 ‘라임rhyme’, 즉 압운押韻을 의미하고, 율律은 ‘meter’, 즉 율격律格을 가리키는 말이다. 압운은 소리가 동일한 위치에서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현상을 말하고, 율격은 시행 전체를 이루고 있는 소리의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김대행 교수의 다음 말이 이 둘의 차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운과 율이 시행에서 구현되는 소리의 현상이라는 점, 그리고 규칙성과 반복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율격이 소리의 시간적 질서 위에서 나타나는 거리의 반복임에 비해서 압운은 위치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김대행, 「서: 운율론의 문제와 시각」 김대행 편 운율 문학과지성사, 1984, 13쪽.
우리 시에서는 운율 중에 ‘운’은 존재한 적이 없다. 이 운의 대표적인 형태가 마지막 부분에 동일한 음운을 사용하는 ‘각운’인데 우리 시에서 각운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시가 전면적으로 보급되던 시기에도 우리말로 이루어진 시가에서는 압운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배층의 압운시와 피지배층의 무운시無韻詩가 이원적으로 존재하였다.
우리 시에서 압운을 발견하기 힘든 이유는 우리말의 언어적 특성과 관련될 수 있다. 우리말은 종결형 접미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각운을 따로 설정하기 힘들다. 각운을 맞추기 위해 어순을 바꾸어 명사형으로 종결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그리고 두운도 언어유희에서나 발견될 법할 정도로 희소하다는 점에서, 우리 시에서 음운의 반복을 통한 가락 형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압운 형성이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 시가 노래로 가창되어 온 역사가 길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노래에서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마디 단위의 율격이지 특정 부분의 압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에서 압운이 없다는 것이 결코 시적 결함이 될 수 없다. 김대행은 압운의 부재를 단점으로 지적하며 압운을 개발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압운의 부재를 극복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의 문학 전통에서 압운을 사용하는 것은 조롱의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압운은 일상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한국인이 한시를 접하면서 오랫동안 압운에 친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에 압운을 도입하지 않은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가 노래와 오랫동안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우리 시의 가락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정서와 사상을 드러내는 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조의 리듬은 압운이 아니라 율격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율격으로도 시조의 정형성은 명쾌하게 규정되지 않는다. 율격을 나누는 기준은 로츠의 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로츠는 율격을 ‘순수음절 율격’pure syllabic metre과 ‘복합음절 율격’syllabic prosodic metre으로 나눈다. 순수음절 율격은 음절수의 규칙에 의해서 만들어진 율격으로 음수율이라 부른다. 복합음절 율격이란 순수음절 율격에 음운의 제2차적인 특징, 예를 들어 소리의 강약이나 고저, 장단 등이 가미되어 만들어진 율격이다. 로츠는 이것을 다시 장단율durational metre, 강약률dynamic metre, 고저율tonal metre로 나눈다. 고대 그리스 라틴의 운문은 장단율이며, 독일어와 영어의 운문은 강약률이며, 고대 중국어의 운문은 고저율이 된다. 음의 장단, 고저, 강약이 없는 한국 및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운문은 순수음절 율격이다. John Lotz, “Metric Typology”, Style in Language, T. A. Seboek(ed), The M.I.T. Press, 1978, 140쪽; 로츠의 이론 정리는 오세영에 의한 것이다, 오세영 「한국 시가 율격 재론」 한국근대문학론과 근대시 민음사, 1996, 67쪽.
이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율격
metre ---- 순수음절 율격 ---- 음수율
---- 복합음절 율격 ---- 장단율
---- 강약률
---- 고저율
그러나 로츠의 이 분류 속에 정형시로서 시조의 율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시조가 음수율이 아님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 기존의 많은 학자들은 우리 시가의 율격을 주로 음수율에서 찾았다. 우리 시가의 특질을 음수율에서 찾은 것은 조윤제에 의해서이다. 조윤제 「時調의 字數考」 신흥 4호, 1930.
음수율은 ‘자수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한 시행에서 동일한 글자 수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가락을 만들어내는 율격을 가리킨다. 시조나 가사 등의 정형시의 율격을 3․4조, 4․4조 등으로 부르는 것은 음수율의 관점에서이다.
그러나 이때의 음수율은 규칙성이 약하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우리 시의 음수율로 제시되는 3․4조, 4․4조가 실제 시가에서 정확하게 지켜지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음수율은 자수의 정확한 반복이 가장 중요한 규범인데, 그것을 자주 범한다면 고정된 율격으로 볼 수 없다. 가령 다음 작품을 보자.
벽상壁上에 칼이 울고 흉중胸中에 피가 뛴다
살 오른 두 팔뚝이 밤낮에 들먹인다
시절아 너 돌아오거든 왔소 말을 하여라
이 옛시조의 시행은 3행으로 나누어진다. 각 행은 3․4조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 시조는 전통적인 시조의 음수율, 즉 <3, 4, 3, 4/ 3, 4, 3, 4/ 3, 5, 4, 3>에 가장 근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장의 둘째 마디가 정형적 규칙을 벗어나 있다. 심지어 시조의 정형적 규범의 마지막 강제라고도 할 종장 첫 마디의 3음절조차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서도 이런 예외가 매우 많이 등장한다. 이처럼 음수율의 규정을 정확하게 지키고 있는 시조는 아주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언어 구조와 유사한 언어를 지닌 일본의 경우를 볼 때에도 음수율의 정형성, 규칙성이 절대적인 조건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 시조의 리듬은 음수율이라 부르기 어렵다.
음수율이 아니라면 시조는 어떤 율격인가. 음수율의 대안으로 학자들이 제시한 것이 음보율이다. 그러나 로츠의 분류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음보율이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 로츠는 음보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강약률이 음보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음절의 강세가 변별적 자질이고 음보는 음절 강세의 강약이 이루어지는 기본 단위에 불과하므로 강약률이 더 적절한 개념이다. 즉 영어와 같이 악센트가 있는 말에서 ‘강약약 강약약’ 등 동일한 악센트가 반복될 때 반복되는 그 한 부분을 음보라고 하기 때문에 음보율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음보율은 기본적으로 악센트가 존재하는 언어에서만 사용가능한 개념이다. 아직 교육현장에서는 음보율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이 서구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지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마디율격’, 혹은 ‘마디율’이라는 말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음보 개념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서의 마디 개념은 김대행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종래에 흔히 음보라고 해 오던 것을 ‘마디’라고 바꾸어 부를 필요가 있다. 음보란 낭독에서 형성되는 주기성의 최소 단위를 가리키는 용어인데, 실상은 이 마디에서 주기성이 확보되지도 않거니와, 가창을 전제로 이루어진 고시가에서는 더욱이 음보적 성격이 발견되지 않는다. 김대행, 「시의 율격과 시가의 율격」 국어교육 65호, 한국어교육학회, 1989, 87쪽.
이런 지적에 따르면 음보 대신 ‘마디’가 적절한 개념이 된다. 음보의 개념이 없는 음수율의 율격 체계라 하더라도 낭독의 어떤 단위나 매듭은 있기 때문이다. 그 매듭을 마디라 부른다. 그럴 경우 음보의 강제적인 규정을 따를 필요가 없다. 즉 한 시행을 구성하는 마디들이 꼭 같은 음절수를 가질 필요가 없고, 각 마디의 발음 시간도 동일할 필요가 없게 된다. 마디의 반복으로 율격이 생기므로 ‘마디 율격’(오세영)이라는 용어가 제안될 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조의 정형성은 아직 해명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추출할 수 있는 결론은 우리 시조 리듬의 본질은 최소한의 정형성, 규율되지 않은 규율에 있다는 사실뿐이다. 엄격한 정형성이 없이 한 두어 자 자유롭게 넘나드는 여유가 그 본질이라는 것이다. 최소한의 정형성은 일정한 마디의 반복을 말한다. 세 마디나 네 마디를 반복하는 마디 율격이 최소한의 정형성인 것이다. 한 마디 안에는 서너 음절이 기본적으로 들어가지만, 이것 역시 최소한의 규정일 뿐이다. 한 마디에 한 두어 자가 넘치거나 모자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읽는 속도나 가창 방식으로 극복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최소한의 정형성, 규율되지 않은 규율을 인정할 때 우리 가락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본질을 담을 수 있는 이론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 가락의 특성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가락론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시조에서도 이 비정형의 정형성, 규율되지 않는 규율은 여전히 강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체질적으로 어떤 고정된 틀을 거부하는 본능을 타고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떠나는 사람들이 저녁 강을 건너고 있다
새들도 마침내 집착을 버리고 날아간다
이별은 사금파리 같은 것
몇 조각의 아픔.
그러나 잠시 눈을 뜨고 바라다보면
얽혀있던 것들이 서로를 풀고 있다
저렇게 사랑하고 또
미워하고 용서하고
모든 것 다 놓아두고 슬픔까지 털어버리고
끊어져 멀리 날아가는 연처럼…
사람의 뒷모습을 본다
가는 이의 자유를 본다
- 전원범, 「떠난다는 것」 전문 <시와 표현>, 2017. 2.
전원범 시인은 이별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시로 풀어내고 있다. 이별은 아픔이면서 자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중심 생각인데 그것이 경직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장점이다. 이별은 성숙의 바탕이라는 교설적인 인식이 아니라, 사랑과 미움과 용서가 얽힌 가운데 이별의 가치가 있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삶에 대한 성찰이 잘 묻어나는 작품이다.
리듬의 문제에서 보자면 이 작품에 음수율로서 3‧4조가 지켜지고 있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거의 매 행마다 5음절이 등장하여 호흡 단위가 불규칙하게 조직된다. 이 불규칙한 리듬은 사랑과 미움 속에 얽매이면서 또 초월하는 이별의 속성과 어울린다.
오늘 문득 카톡으로
받아든 해고통지,
자일 툭, 끊어지며
추락하는 느낌이다
찢어진
비닐봉지처럼,
허공에서 난 나부낀다.
아내의 문자 메시지
“우리 다시 시작해요”
두 눈에 눈물 넘치고,
참았던 울음 쏟는다.
내 울음
와락 껴안는 별,
별빛으로 날 감싼다.
- 배우식, 「별은 별빛으로 운다」 전문 <시와 표현>, 2017. 2.
배우식 시인의 작품은 회사의 비인간적인 해고 통지와 아내의 위안이라는 우리 시대의 풍경을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슬픔의 상황에서 주는 아내의 위안이 별로 승화되고 있는데, ‘아내=별’이라는 표현이 제목에서 별의 상징성으로 보편화되고 있어 도식성이 사라진다. 리듬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정형성이 더 강하게 나타나지만 5음절이 자주 나타나는 점은 앞에서 다룬 시조와 동일하다. 특히 ‘허공에서 난 나부낀다’에 드러나는 5음절은 이채롭다. 이 ‘나’의 전면적인 등장은 아내의 무게에 대한 균형 의식 때문일까.
시조의 자유로운 정형성을 드러내는 데 사설시조를 제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시조에서도 사설시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사설시조를 과도기적 장르 형태로 규정하는 방식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겨울 밤, 광장에 모여 기침하는 사람들
AI가 휩쓸고 간 골목마다 불 켜지자 곳곳에 병든 이들이 손에 손을 잡는다 그 해 봄날 기억 따라 닻 올리는 세월호, 수장된 네 울음은 우리들의 울음이다 칼바람 불어대자 흔들리는 문고리, 입에 발린 말 속에선 모르쇠의 문장들, 혼잣말의 시간들이 혼밥처럼 쌓여가고 의문의 7시간을 묻고 묻는 촛불들
광화문 하얀 밤들이 춥지만은 않았다
- 이송희, 「서울, 2016년 겨울」 전문 <시와 표현>, 2017. 1.
이송희 시인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의 모습과 의미를 다루고 있다. 6월 항쟁처럼 머지않아 역사로 편입될 장면이 기록되고 있다. 당대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당당함이 묻어난다. 역사로 편입되면 이 작품에 사용된 ‘문고리’, ‘모르쇠’는 이 시대의 비유가 되어 평론가의 해설이 개입되어야 풀릴 것이다. 이 작품이 사설시조의 형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작품이 미해결의 복잡한 문제, 산문적인 사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가 보낸 김치 통, 묶은 매듭이 안 풀린다
긴 끈의 비명을 매듭이 물고 있는 어머니의 문자는 해독되지 않는다. 허공을 더듬던 손이 절벽을 만지듯 모자란 끈들은 자기 삶을 더 당긴다. 뱃속에서 탯줄로 만났던 어머니와 난, 두 갈래 길에서 또다시 헤어졌을까. 어머니가 아픈 다리로 오르던 계단은 길의 주름이거나 수십 번 묶은 매듭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길마다 매듭진 집들, 어머니는 울음 끝에 눈물을 동여맸으리.
인류가 망해도 남을
마지막 문자, 어머니
- 박성민, 「결승문자를 읽다」 전문(<시와 표현>, 2017. 01
박성민 시인은 김치통을 꽁꽁 동여맨 어머니의 매듭을 통하여 어머니의 삶을 인상적으로 되새기고 있다. 매듭의 상징성을 마음껏 살려내고 있는 중장의 사설적 면모가 이 작품을 작품답게 만들고 있다. 이 사설성은 매듭이라는 화제의 상징성과 잘 맞물려 있다. 내용과 형식이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잘 묶여 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런 매듭의 단단함에 비하여 종장이 너무 쉽게 풀려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독자라면 누구나 할 것이라는 점이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다룬 작품들은 정형시로서의 특성을 지녔음에도 서로 다른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다. 내용과 잘 어울리는 형식이다. 앞에서 다루었듯이 이런 시조의 형식은 현존하는 리듬론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미스터리다. 그 미스터리는 현대 시조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에게 그것은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 미스터리인지조차 잘 인식하지 못 하였다. 서구 리듬론이 들어와서야 우리는 그것이 미스터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미스터리를 해명해야 할 것이다. 비정형의 정형, 비규율의 규율의 존재 이유도 그때 명확하게 드러날까, 짐짓 기대해본다.
박현수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외, 평론집 황금책갈피 외. 현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월평_시
시는 무엇을 말하는가*
* 이 글은 본지에 게재된
월평 「시의 본령을 묻다」(2017년 1월호),
「시는 어떻게 오는가」(2017년 2월호)에 이어지는
3부작 평론의 마지막 편이다.
김 정 남
시란 세계고世界苦에 반응하는 리트머스지가 아니다. 시가 현실의 어떤 지점과 길항한다고 했을 때, 참다운 시는 현실에 스며들 수 없는 이물異物일 수밖에 없다. 가령, 연둣빛 새 이파리를 향해 “네가 바로 강철이다”(박노해, 「강철 새잎」)라고 했다면, 이 강철의 이미지는 자본의 세계가 구획한 세계 질서에서 얻어낼 수 없는 이물인 셈이다. 따라서 진정한 시인은 세계고로 인해 고통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멀쩡해 보이는 세계에 고통을 안겨주는 이물적 존재여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시인들은 너무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자신만 아프고 괴롭고 슬프다. 이것은 참으로 ‘웃픈’ 일이다. 세계의 현실에 개입하지 않고 피학의 코스튬을 걸치고 징징거리고 있다는 말이다. 고통의 시선에서 세계고의 현실을 발견하고 응전하며 돌파해 나가는 미학적 길항력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도 시는 쓸모없어 가소로운 것일 뿐이다. 쓸모없어 아름답다는 말은 문학으로 자위행위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가 별 볼 일 없다는 겸허한 자기 절망이 최소한의 미적 응전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심리적 기저로 작동한다.
팔자 편하게 문학하면서도 괴로운 척, 아픈 척, 시니컬한 척하지 마시라는 말이다. 시로 아픈 척을 할 수는 있어도 시로 세계에 괴로움을 안겨주는 일이란 쉬운 것이 아니다. 우울이라는 토성의 기운 아래, 세계가 사물이 되는 것을 보게 될 때 마주치게 되는 피난처, 위안, 환희(Susan Sontag, Under the Sign of Saturn)가 발견이며 아름다움이며 응전인 것이다. “분노처럼 불끈불끈” 돋아나는 “눈부신 강철 새잎”처럼.
마음이 사물이 되는 순간이 있어요.
사물이 되어서 만지면 아픈 날이 있어요.
세탁기가 울어서 방에 홍수가 나고
인형은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는 날이 꼭 있어요.
방이 눅눅한 마음일 때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왕자웨이王家衛 영화를 보죠.
금색 가발을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트렌치코트를 입고
린칭샤林靑霞가 인도인들을 총으로 쏴
마구 죽일 때,
내 친구는 조금 겁먹은 표정을 짓지만…….
쫄지 마, 바보야.
린칭샤는 센 역을 많이 했지만
그건 변장일 뿐.
경찰 223이 호텔방에서 잠든 그녀의 신발을 벗겨줄 때
고단한 신발이 침대 밑에 놓일 때
그건 그녀의 아픈 마음이야.
어른들은 모두 서툰 어른이란 걸 알게 되는 날이 있어요.
그날은 마음이 사물이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아는 날이죠.
그리고 말예요,
그날은 내 친구가 없는 날…….
* 왕자웨이王家衛의 1994년 영화.
―장이지, 「중경삼림重慶森林*」전문, <문장웹진> 2017. 1.
마음이 사물로 현시顯示되는 순간이 있다. 이런 돌연한 정신의 사물적 표상성을 장이지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세탁기가 울어 홍수가 나고, 인형이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는 날들이라고. 이렇게 사물이 된 마음은, 정신의 물질화된 현현으로서, 만지면 아프기까지 한 대상으로 화한다. 가령, 눅눅한 마음을 방이 대신할 때, 화자는 그 방에 틀어박혀 왕자웨이王家衛의 영화 「중경삼림」을 본다.
그 영화에서 화자는, 마약 중개업자인 린칭샤林靑霞가 자신을 배반한 인도인을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을 보고 겁먹은 표정을 짓는 친구에게 이는 피상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 경찰 223(金城武)분이 호텔방에서 린칭샤의 신발을 벗겨줄 때의 상황에 주목한다. 이때 그녀의 “고단한 신발”은 그녀의 “아픈 마음”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경찰 223은 그녀의 구두를 자신의 넥타이로 깨끗하게 닦아놓고 호텔방을 빠져나온다. 이렇게 구두라는 사물이 인물의 정신적 상황을 은유할 때, 이 표상성이야 말로 시적 현현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은유가 함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사회․문화․종교․정치․지리 ․질병 등의 은유의 수사학적 자장으로부터 벗어나 실체적 표상성을 획득하는 것은, 시적 운동의 정치성과도 호응된다. 감각의 위계를 전복시키고 상징적 공간을 재분배하는 시적 언어의 운동이 곧 정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Jacques Rancière, Malaise dans l'esthetique) 그리하여 감각을 대신하고 정신성을 응축하는 대상을 포착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예술이 얻고자 하는 표상성의 원리가 된다. 린칭샤의 고단한 신발처럼 말이다.
그리고를 손에 들고 조금 울었다
눈 코 입을 기억하는 일은 슬펐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난보다 더 질긴 접속사를 남기고 갔다
도처에 상처는 늘어나고 그 흉터마다 접속사 하나씩 자랐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가난은 적절한 접속이었고
그러므로 가난은 간절한 접속이었다
왜냐하면 덥고 잠을 청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상처는 그러나 그리고 그래서 그러므로 늘 우리 곁에서 영역을 넓혔다
미루나무 끝까지 접속을 밀어 올리기도 하고
고양이의 눈 속에서 그런데를 찾아내기도 하고
빨랫줄에 더구나를 말리며 변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언저리만 흔들릴 뿐
물려주고 간 것이 접속사인 것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접속이 안 되는 생 속에서 나는
그러나 추잡한 속셈의 기다림일 뿐이고
그래서 알아야 할 것보다 좀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해 여름 접속의 숲에서
우리는 우리를 거부했다
대학을 포기하고
사루비아는 빨강을 버렸다
불타는 칸나처럼 누나는 집을 나갔다
받아들일 수 없는 접속
그래서
아버지의 전생이 우리에게 왔다
예컨대 접속은 자꾸 끊어지기만 했다
내게 남은 접속사는 상처가 다음 상처를 부르는 데 사용될 뿐이었다
접속사를 껴안으면 피가 났다
접속사는 표정을 짓지 않았고
우리는 자꾸 혼자가 되어 갔다
접속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아버지는 갔다
접속사로 불러들일 사람 하나 없이
그리고 그러나 그래서 그러므로 떠돌기만 했다.
―정진혁, 「접속사」전문, <문예바다>2016. 겨울
이 시는 접속사라는 문법의 단위를 생의 순간순간과 연관지어, 이를 하나의 구체적인 표상으로 제시한 작품이다. 부친이 남기고 간 유산으로서의 가난과 상처가 어떻게 남은 자들에게 질기게 이어지는지 성찰한 이 시는 “그리고”라는 나열의 기능을 지닌 접속사를 시작으로 그 부채의식을 서술해 가고 있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일은 슬프지만 그가 남긴 가난은 “그러나”라는 역접의 접속사처럼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 흉터는 늘어만 간다. 남은 자들에게 “그리고”는 가난과 상처의 연속을, “그러므로”는 그것의 순접이라는 숙명을 의미한다.
남은 자들은 “그리고”, “그래서”, “그러므로”의 상처의 대물림 과정을 고스란히 겪으면서도 변화를 갈망한다. 그러나 언저리만 흔들릴 뿐, 그가 물려주고 간 가난과 상처의 접속은 끊어지지 않는다. 생은 “추잡한 속셈의 기다림일 뿐”이어서 이들은 스스로의 생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대학 진학의 포기와 누이의 가출로 이어진다. 결국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의 전생”은 “그래서”로 우리에게 고스란히 순접 된다. 따라서 화자에게 남은 접속사는 상처가 다음 상처를 부르는 것으로만 기능한다.
생의 순간들을 이어주는 “접속사를 껴안으면 피가 났”고 “우리는 자꾸 혼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그리고”로 남겨진 생의 숙명을 “그러나”로 맞서고 싶지만 결국 “그래서”, “그러므로”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들. 시인은 접속사라는 문법의 기능을 생의 비극적 운명을 형상화하는 데 바쳤다. 언어의 개념적 기능을 삶의 실체적 국면으로 전환시킨 시인의 상상력이 곡진하게 펼쳐진다. 결국 생이란 “그리고”와 “그래서”와 “그러므로”의 현실에서 “그런데”를 찾아내고 “그러나”로 맞서는 일이다. 그것이 고작 미미한 떨림일지라도 모든 생의 몸부림은 진동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졸립니까. 당신은 혼자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은데 말이죠. 생각해보면 가진 게 많지 않습니까. 누울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아내와 자식도 있잖아요. 출근을 안 해도 되잖아요. 지난주엔 혼자 조조영화를 보고 왔지요? 그 다음 날은 술을 마시고 늦잠을 잤지요? 슬픈가요. 초겨울 을씨년스러운 북한산을 오르며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아무 생각도 없으셨겠지요. 솔직히 인간의 사유는 불쾌하기 짝이 없어요. 모두 엄살이고 타살이죠. 매일 똥을 누지 않습니까. 더러운 인간들. 또 졸립니까. 당신은 매일 자지 않습니까. 매일 먹지 않습니까. 매일 기쁘거나 슬프죠. 참혹한 일들을 잘 기억하고, 사소한 일들을 잘 기억하죠. 당신은 글을 씁니까. 글을 쓰며 매일 사람을 먹거나 토하죠. 부인하지 마세요. 계단을 오르면 숨이 차는 것처럼, 인간들은 글을 쓰면 헐떡거려요. 감정을 절제할 줄 모르죠. 현명한 척 마세요. 당신은 구원받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젓가락으로 수없이 많은 음식들을 헤집었죠. 수없이 많은 마음들을 헤집었죠. 수없이 많은 죽음들을 헤집었죠. 더 할 말이 있나요? 많다고요? 많겠지요. 쌓아놓은 기어綺語의 죄는 어쩌지요. 죽지도 못하고 혀가 뿌리째 뽑혀 나갈 텐데요. 운명이라고요.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요. 시인의 운명이라고요?
―이재훈 「괴물」전문, <문학선> 2016. 겨울
이토록 통렬한 오뇌의 과정이 없이 어찌 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반성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오만하고 무치한 인간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고문’에 가까운 시인의 반성적 의식은 우리의 잠든 의식을 각성시킨다. 생각해 보면, 언어에 자신을 바치는 자도 드물고, 언어에 들린 자는 더욱 희박하다. 여기餘技로 태작을 지어내는 이들, 문학으로 패거리를 만들어 정치하는 이들, 졸렬한 글재주로 끼리끼리 모여 도락을 일삼는 이들, 이 무수한 가짜들을 몰아내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이재훈 시인은 시인을 둘러싼 허위의 코스튬을 모두 걷어낸다. 이를 위해 시인은 자신을 심문대에 앉혀 놓고 자신을 낱낱이 문초할 또 하나의 페르조나를 내세워 역할극을 수행한다. 심문관의 역할을 맡은 자아가 “졸립니까”라는 말로 포문을 연다. 혼자 있는 시간도 많은 당신이 이 상황에서 졸음이 오냐는 말이겠다. 없이 산다고 징징거리지만 당신은 사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 아니냐고 화자는 말한다. 출근을 안 해도 되는 프리한 삶의 조건 속에서 조조영화를 보고 술도 마시고 늦잠도 마음껏 잘 수 있지 않느냐고. 그래도 삶이 슬프냐고 그는 재우쳐 묻는다. 산을 오르며 무슨 생각을 했는가. 화자는 인간의 사유는 불쾌한 것이라고 일갈한다. 매일 똥을 싸고 먹는 가운데, 기쁘거나 슬픈 일상들을 사는 당신은 그저 더러운 인간. 화자는 현명한 척 말라고 질책한다. 글을 통해 구원받을 거라는 생각에 대해서도 단념을 요구하며 그동안 “쌓아놓은 기어(綺語: 교묘하게 잘 꾸며대는 말-인용자 주)의 죄”를 꾸짖는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며 “시인의 운명이냐”는 뼈아픈 질문을 의문부호로 남긴다.
여기서 괴물이란 시인을 심문하는 이가 아니라 심문의 대상이 되는 시인 자신을 가리킨다고 봐야 한다. 매일 사람을 먹거나 토하며 “엄살이고 타살”에 불과한 불쾌한 사유로 언어를 빚어내는 괴물 같은 존재가 바로 시인이라는 것. 하지만 화자의 냉혹한 추궁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평범한 일상의 대지에 하나의 오접誤接의 형태로 존재해야만 한다. 따라서 괴물의 의미는 양가적이다. 엄살을 떨며 자기 슬픔에 징징거리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의 일탈자로서 존재 자체가 괴물이어야 한다. 고통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고통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위악적 괴물이 아니라 참된 괴물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예술 하는 이가 나타났을 때, 괴물이 나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백 킬로에 가까운 돗돔이 잡혀
바닷속 물길을 궁금하게 하지만
몇 시간의 사투 끝에 마침내 기진한 어부에겐
뱃전에 눕혀놓은 발광가오리가 괴물 같다
추가 도달하는 곳 해저라 해도
상상이 도사리는 깊이라면 경악할 뿐,
수심을 몰라 닿을 수 없는
바닥엔 무엇이 사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내가 떨어뜨린 한 편이 가라앉아
심란해진 마음 이리저리 뒤적거리지만
우리 심성 어디에 공포를 동반한 심해가 있어
내려갈수록 캄캄하게 좁혀진다면
나는, 옴팍진 해구를 건너뛰려는
장님물고기와 다름없으리!
빛을 엿보는 자 내 안에도 있어
흑암이었을 때 그 기미를 끌어안으면
무언가에 갇혀 있다가 활짝 젖혀진
상상들은 그렇게 이어진다, 심해의 비밀처럼!
저 산봉우리에서 조개 무덤이 발견되지만
일생을 함구한 자의 등을 은밀하게 떠미는
절벽해구 따로 있을까 싶어 지느러미 꿈틀거린다
―김명인, 「수심에 길들여지지 않는 장님물고기」전문, <시와표현> 2017. 2.
우리에게 시가 무엇인가를 가능하게 한다면, 이는 상상력을 통하여 “자신과의 만남을 위해 자신 저 너머로 갈수 있”(Octavio Paz, El arco y la lira)기 때문이다. 김명인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상상력이 작동하는 근본적인 이유와 존재의 심층을 탐사하는 시인의 의미를 형상화한다. 작품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사태의 겹침을 통해 이를 구현해 낸다. 먼저 “백 킬로에 가까운 돗돔”이 잡히는 바닷속이 궁금한 어부와 “몇 시간의 사투 끝에” 뱃전에 누운 “발광가오리”의 관계가 제시된다. 어부는 “수심을 몰라 닿을 수 없는 / 바닥엔 무엇이 사는지” 모른다. 추가 도달하는 곳이 해저라고 해도 그것은 상상일 뿐, 그것이 가닿은 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고, 거대한 돗돔을 기대했다 해도 무엇이 잡혀 올라올지는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우리의 내면으로 옮겨온다. 화자는 어느 날 “떨어뜨린 한 편이 가라앉아” 자신의 마음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는데, 이는 곧 해저에 낚시 추를 드리우고 있는 어부의 상황과 조응한다. 이러한 사고 작용은 우리의 마음에도 저 깊은 해저와 같은 “공포를 동반한 심해”가 있어, “내려갈수록 캄캄하게 좁혀진다면” 자신이라는 존재는 “옴팍진 해구를 건너뛰려는 장님물고기”와 같다는 인식과 만나게 된다. 바다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내면의 깊은 해구를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 마음의 “기미”幾微를 느낄 수 있을 뿐인데, 그것을 붙잡아 마음의 흑암을 열고 “활짝 젖혀진 상상들”로 나아갈 수 있다. 상상력의 힘이란 곧 우리의 캄캄한 마음의 해구를 뛰어넘게 하는, “치명적 도약”(Octavio Paz, 위의 책)의 순간을 만든다. 내면의 절벽해구를 헤엄치며 지느러미를 꿈틀거리는 장님물고기. 이것이 바로 충만한 존재로서 생성을 거듭하는 상상력의 화신, 시인의 표상인 것이다.
별이 떨어지고
어디든 날아가기 좋은 밤이다
나를 가져가서 나를 바꿔놓고 나를 버린
사랑을 잊을 수는 있어도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검은 하늘 검은 구름 검은 공기 속으로 사라져야지
기억을 매어놓았던 별이 떨어지는 날
늙고 느린 강이 혼자서 바다로 가는
그 길을 따라
울어 줄 사람이 없는 곳까지
풍경의 국경을 넘어야지
백 번을 바라보고 백 번을 기억했던 눈빛이 사라지면
구름에 관한 문장 같은 건 농담이 되는
싸늘한 적국에라도 닿아
한 자루 권총보다 더 쓸쓸한 역할을 나에게 줘야지
떠돌이까마귀처럼
당신으로부터 자유가 되어
―이운진, 「떠돌이까마귀처럼」전문, <시와시학> 2016. 겨울
시인은 어딘가로 끊임없이 떠도는 존재다. 정주한다는 것은 그의 사유가 정체되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은 자신이 발 딛고 선 자리를 거부하고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찾아 현재를 돌파해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고상하게 유목이라 말해도 좋고 떠돌이 의식이라 말해도 좋다. 시인은 이런 자신의 자의식을 “떠돌이까마귀”旅鴉로 표상한다.
이 시는 언뜻 보면, 자신을 옥죄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나 탈출을 함의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운진 시인이 이 작품에서 말하는 월경越境은 그것을 넘어선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한다. 별이 떨어지는 하강의 이미지는 우선 화자에게 비상이라는 일탈의 욕망을 부추긴다. 화자에게는 “나를 가져가서 나를 바꿔놓고 나를 버린 사랑”이 있다. 이런 사랑을 “잊을 수는 있어도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그 기억이 별처럼 떨어지는 날, 화자는 “늙고 느린 강이 혼자서 바다로 가는 길”을 따라 가겠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화자가 닿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지금 여기의 기억보다 더 냉혹한 공간이다. 거기는 “울어줄 사람이 없는 곳”이며 “싸늘한 적국”이다. 그 동토를 향해 국경을 넘어가면, 그곳에선 아파했던 생의 기억마저도 “구름에 관한 문장”처럼 헐렁한 농담이 되고 만다. 따라서 화자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현재의 기억이 부려놓은 아픔보다 더욱 가혹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화자는 “한 자루 권총보다 더 쓸쓸한 역할”을 자신에게 부여할 것이라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화자의 각오는 지금 여기의 고통 속에 안주하기보다 그보다 더 혹독한 곳을 찾아 더 아픈 생의 배역을 맡아, 비로소 현실의 아픔을 이겨내겠다는 의지이다.
시인이여, 떠돌이까마귀가 되자. 자유란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한 시인의 말대로 거기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 것이다. 시인이라는 이름의 온갖 허위를 내던지자. 또 다른 피난처와 위안과 환희를 찾아 미래를 향해 기투 해야 한다. 온몸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자만이 진정한 시인이다. 참된 괴물이자 진정한 방랑자가 되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 쓰는 교수들의 아늑한 연구실 책상 위에 그런 것들이 예비 되어 있겠는가. 그들의 기름진 사유 속에서 나오겠는가? 현학의 언어로 무장한 강의실에서 얻어지겠는가? 시인들의 질펀한 술자리에 있겠는가? 촛불의 바다를 이루었던 광화문 광장에서 피어오르겠는가? 진짜는 어디에도 없지만 또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현재의 나타懶惰를 찢고 나오는 돌파의 국면에 언뜻언뜻 나타나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2002년 <현대문학> 평론, 2007년 <매일신문>신춘문예 소설 등단. 문학평론집 『꿈꾸는 토르소』외. 장편소설 『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외. 현재 가톨릭관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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