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근삼대묘(권근,권제,권람) 한동안 묘지답사를 하면서 여러곳을 다녔는데 이곳 권근삼대묘도 두세번 다녀온 기억이 난다. 그런데 블로그에 누락이 되어 이번 음성답사 시 다녀온 권근삼대묘를 올린다. 음성에는 근자에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생가와 조상묘가 있어 관심이 집중되는 곳인데 우리 학회에서도 10월답사로 다녀온 곳이다. 권근삼대묘역은 삼대(三代)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차례대로 권근, 권제, 권람의 순으로 매장되어 있는데 내룡(來龍)의 세력이 활발하고, 당판이 후부(厚溥)하게 길게 이어진다. 주산인 수리산에서 북서쪽으로 진행하는 연맥(連脈)인 안산(案山)을 바라보는 회룡고조(回龍顧祖)로 터를 일구었다. 회룡고조는 진행하던 용이 방향을 회전하여 자신이 지나왔던 산자락과 조종(祖宗)을 바라보는 것을 말하는데, 그만큼 변화가 많고, 용의 기세가 짱짱하다. 앞쪽의 연못 또한 기운을 모아주는 역할을 하여 재물이 넉넉한 가문을 일궜다고 보여진다. 특이하게도 이곳에 충견총과 충복묘가 있는데 모두 권람과 관계가 있다. 다녀온 곳인데도 글을 올리지 않은 곳이 너무 많다보니 이제는 그걸 찾아서 올리느니 아예 다시 가서 사진을 찍어오는 편이 더 편리한 실정이다. ㅎ |
문화재지정 | 충청북도 기념물 제32호 |
문화재명칭 |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 |
소재지 | 충북 음성군 생극면 능안로 377-15 |
관리자(연락처) | 안동권씨 문충공 종중 |
▼ 양촌 권근 삼대 묘 입구의 재실과 사당
▼ 부조묘...왼쪽부터 문충공 권근, 안양공 권반(권제의 셋째 아들), 안숙공 권준(권근의 넷째 아들)
▼ 권근 부조묘 앞에 세워진 천상열차분야지도 모형... 권근이 참여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 상대별곡비... 한글과 한자를 병용하여 각자하고 그아래 ‘양촌 권근선생 지음’이라 써있다.
▼ 권반 부조묘 앞에 세워진 권반 묘정비(廟庭碑)
▼ 능안마을 역사 문화탐방 안내도
양촌(陽村)권근(權近)
1352(공민왕 1)∼1409(태종 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소오자(小烏子). 권보(權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권고(權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권희(權僖)이다.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고려조에서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1393년(태조 2)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 태조의 아버지 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다. 그런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로부터 유문(諛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했다. 그 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 :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속에 표현된 내용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함)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했다. 그리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정종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했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 저술하여 정리함)하고, 하륜(河崙) 등과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였다. 또한,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해 유생 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올려 당시의 여러 가지 문교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해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했다.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陽村集)』 40권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
▼ 양촌 권근 삼대묘 앞 연못(지당수, 소류지, 저수지 등으로 표현함)에서 바라본 묘역과 신도비각
▼ 양촌 권근 삼대묘역
▼ 양촌 권근 삼대묘역 안내판
▼ 양촌 권근 묘 전경
▼ 양촌 권근 묘 장명등
▼ 양촌 권근과 부인 묘표
▼ 양촌 권근 선생 연보 및 연혁
▼ 양촌 권근 묘 측경
▼ 양촌 권근 묘 청룡쪽 문인석
▼ 양촌 권근 묘 백호쪽 문인석
▼ 양촌 권근 묘 측후경
▼ 양촌 권근 묘 후경
▼ 양촌 권근 묘 후경
권제(權踶)
1387(우왕 13)∼1445(세종 27).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도(蹈), 자는 중의(仲義)·중안(仲安), 호는 지재(止齋). 검교시중(檢校侍中) 고(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희(僖)이고, 아버지는 찬성 근(近)이며, 어머니는 우정언 이존오(李存吾)의 딸이다. 부인은 판사(判事) 이휴(李携)의 딸이다. 처음에 음보(蔭補)로 경승부주부(敬承府注簿)에 기용되었으나 감찰 때 대사헌의 비위에 거슬려 파면되었다. 1414년(태종 14) 친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우헌납(右獻納)이 된 뒤 병조정랑과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거쳐, 1416년 사예(司藝), 1418년에 사인(舍人)을 지냈다. 1419년(세종 1)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사은사 경녕군 비(敬寧君裶 : 태종의 제1서자)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과 좌대언(左代言)을 차례로 지냈다. 1423년 집현전부제학이 된 뒤 대사헌·함길도도관찰사를 지내고, 이듬 해에는 평안도도관찰사가 되었다. 1430년 경창부윤(慶昌府尹), 1432년 경기도관찰사, 이듬 해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 1435년 이조판서, 143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계품사(計稟使) 혜령군(惠寧君)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그 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1439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1442년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인 신개(申槩)와 함께 『고려사』를 찬진(撰進)하였다. 1443년 좌참찬으로 전라도도관찰사가 되었고,1444년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 이듬 해에는 우찬성이 되어 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다. 오랜 동안 문형(文衡 : 대제학의 다른 이름)을 역임했으며, 작품으로 「세년가(世年歌)」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
▼ 문경공 권제 묘 전경
▼ 문경공 권제 묘
▼ 문경공 권제 묘표
▼ 문경공 권제 묘 후경 ... 수리산에 향을 맞춰 회룡고조혈로 되어있다. 이곳 묘역은 좌선룡으로 청룡쪽은 급경사를 이루기 때문에 백호로 붙여 점혈해야 한다. 이곳 묘역에서는 권제 묘가 정혈로 판단된다.
권람(權覽)
1416(태종 16)∼1465(세조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검교정승 희(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근(近), 아버지는 우찬성 제(踶), 어머니는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이준(李儁)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크고 기책(奇策)이 많았다. 책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 고적을 찾아다니면서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면서 회포를 나누었다. 한명회와 서로 약속하기를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고 했다. 한명회와의 교우는 관포(管鮑)와 같았다. 35세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있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에 향시와 회시(會試)에서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고, 전시(殿試)에서 4등이 되었다. 그러나 장원인 김의정(金義精)의 출신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장원이 되었다. 그해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교리로서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 歷代兵要≫의 음주(音註)를 편찬하는데 동참했다. 이를 계기로 그와 가까워졌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권력은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 대신들의 손에 들어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대신들과 결탁해 세력을 키워갔다. 이에 불안을 느낀 수양대군이 동지를 규합하고 있을 때,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수양대군에게 접근해 집권을 모의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양정(楊汀)·홍달손(洪達孫)·유수(柳洙)·유하(柳河) 등 무사들을 규합해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김종서·황보 인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이어 승정원동부승지에 특진되었다. 1454년 2월에 우부승지, 8월에 좌부승지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세조가 즉위하자 6월에 이조참판에 발탁되고, 이어 9월에는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세조 2) 2월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3월에 역신(逆臣)들이 가졌던 연안·전주·충주·양주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해 7월에 집현전대제학·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겸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1457년 2월 난신(亂臣)들의 노비를 하사받았고, 3월에는 김문기(金文起)·장귀남(張貴南)·성승(成勝) 등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8월에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승진되었다. 1458년 5월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찬하고, 그해 12월 의정부우찬성에 승진했다. 1459년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 5월 좌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463년 9월 ≪동국통감≫ 편찬의 감수책임을 맡았다. 1464년 신병으로 감악산신(紺岳山神) 설인귀(薛仁貴)에 치성을 드릴 때, 비바람이 몰아치자 “당신(설인귀)과 나는 세력이 서로 같은데 어찌해 이와 같이 몰아치는가.” 하고 호통했다고 한다.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명신(名神)을 숭배해 사람들의 의아심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활을 잘 쏘고 문장에 뛰어났으나,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명산고적을 떠돌아다녔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첩에 혹해 정처를 소박한 데 대한 불만이었다고 한다. 세조를 도와 여러 차례 공을 세운 덕으로 만년에는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남산 아래에 화려한 집을 소유하기도 했다. 시문집으로 ≪소한당집 所閑堂集≫이 있고, 할아버지가 지은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 應製詩註≫는 그의 역사의식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조 때 ≪동국통감≫의 편찬방향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세조묘(世祖廟)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
▼ 익평군 권람 묘 전경
▼ 익평군 권람 묘는 권근, 권제 묘와는 달리 호석이 없다. 세조 이후의 묘제는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데 그런 의미로 분석된다. 묘 앞쪽의 돌출된 부분은 황희정승 묘에서 보는 것과 유사한데 이른바 묘의 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 익평군 권람과 부인 묘표
▼ 익평군 권람 묘 청룡쪽 문인석
▼ 익평군 권람 묘 백호쪽 문인석
▼ 익평군 권람 묘 후경
▼ 권근 삼대 묘의 청룡 끝자락과 수리산
▼ 권근 삼대 묘의 수구처
충견총(忠犬塚)
저수지 왼쪽 방향으로 돌계단위에는 충견묘가있다. 권람을 따르던 개가 한때 권람을 사지에서 살려내고 권람이 죽자 따라 죽은 충견의 무덤이다. 죽어서도 주인을 바라보고 있다. 묘역앞의 묘비명은 최근 새롭게 세워진것이다.비석 앞쪽에있는 네모진 홈통은 술을 따라 놓던곳인데 술한되가 꼭 맡게 따라진다고한다. (권람이 좌의정에서 물러나 남산 아래 머물던 어느 화창한 봄날의 일이다. 친지의 초청으로 상춘연에 다녀오다가 길섶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때 어디선가 산불이 일어나 번져왔는데 권람은 잠에 취해 일어날줄을 몰랐다. 그러자 따르던 개가 냇가로 달려가 털을 적셔 주인의 주변을 적시기를 반복하여 마침내 불길로부터 주인을 구했다. <인터넷 웹에서 발췌> 이 충견총(忠犬塚)은 조선(朝鮮) 세조(世祖)때 정난(靖難)공신(功臣) 좌의정(左議政)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익평공(翼平公)소한당(所閑堂)부군(府君)께서 사육(飼育)하신 애견(愛犬)으로 부군(府君)께서 불의(不意)에 야화(野火)로 생명(生命)이 위급(危急)하자 정신(挺身)구출(救出)하고 세조(世祖)10년 을유(乙酉)에 부군(府君)이 서거(逝去)하자 낙루(落淚)단식(斷食)하고 순사(殉死)하였다.부군(府君) 생존(生存)시(時) 유훈(遺訓)에 따라 조역(兆域)계하(階下)에 매장(埋葬)하고 세사(歲事)후(後)에 일전(一奠)을 내려 음복(飮福)케 하고 있다. <충견총 묘비에서 인용> |
▼ 익평군 권람의 생명을 구했다고 전해지는 충견총
▼ 충견총 내력을 담은 묘비 뒷면 내용
▼ 충견총 후경
▼ 충견총은 지금도 주인인 권람선생을 바라보고 있다.
▼ 삼대묘소 가기전 왼쪽 골짜기에 있는 안숙공 권준의 신도비
▼ 삼대묘소와 신도비 사이 계곡에 있는 도통사(道統祠)... 도학의 법통을 받들어 모신 사당이라는 뜻이다.
▼ 문충공 권근 신도비각
▼ 문충공 권근 신도비
▼ 문충공 권근 묘지석과 처 경주이씨 묘표
▼ 문경공 권제 신도비각
▼ 문경공 권제 신도비
▼ 익평공 권람 신도비각
▼ 익평공 권람 신도비
▼ 양촌 권근 삼대 신도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