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금수정(金水亭) 포천시 향토유적 제17호 (경기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57)
포천(包川) 8경
포천시는 옛 포천현과 영평군이 합하여 이루어진 곳으로 시의 북부는 옛 영평군 지역이고, 남부는 옛 포천현 지역에 해당한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영평군이 폐지되어 포천에 병합되었으며, 1945년 8·15 해방으로 38˚선 이북에 속하는 포천군 북부가 북한지역에 편입되었다가 6·25전쟁 후 모두 수복되었다. 현재도 북방으로는 민간인통제선과 휴전선을 안고 있는 소위 접적(接敵)지역이다.
포천(包川)은 하천을 품고 있다는 뜻인데 말 그대로 포천지역을 영평천이 가로로, 포천천이 세로로 흘러가며 이들이 만나 한탄강으로 흘러 들어가니 그 하천 주변 풍광이 매우 아름다워 소위 말하는 포천 8경이 이 곳에 몰려있다. 현지에서는 영평 8경이라 부르는 화적연·와룡암·선유담·금수정·백로주·창옥병·청학동·낙귀정지가 그곳인데 이중 금수정(金水亭)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금수정(金水亭)
영평 8경중 2경이 금수정이다. 금수정은 이곳 포천에서 세거(世居)한 안동 김씨 가문의 정자인데 고려의 이순신으로 불리우는 충렬공 김방경의 현손(玄孫)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온공파의 종택이 지금도 이곳에 고택으로 남아 있으며, 김구용(金九容)과 부친, 조부를 모신 금수단(金水壇)이 함께 모셔져 있어 안동김씨 문온공파에게는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다.
<금수정, 정면 2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갖춘 날렵한 모습으로 영평천을 굽어 내려다 보고 있다.>
금수정의 원래 이름은 이곳 지형이 소(牛)의 머리(頭)를 닮았다해서 우두정(牛頭亭)이라고 하였다는데 김구용의 아들 명리가 은퇴 후 아버지를 기려 정자를 짓고 지은 이름이며, 김구용의 5대손 금옹(琴翁) 김윤복에 이르러 아들은 없고 딸만 있어 정자는 사위에게 넘어가게 되었으니 그 사위가 바로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다.
이후 양사언은 정자이름을 금수정(錦水亭, 또는 金水亭)이라 고쳐 지었으며, 어느 때인가 정자는 다시 안동 김씨 문중으로 돌려져 지금까지 전해오는 바 6.25전쟁으로 전소되었다가 1989년 복원되었는데 다행이 보존되던 현판은 양사언 친필이라고 양씨 문중에서 가져갔다고 하며, 현재 금수정에 걸린 현판은 정자 아래 절벽에 암각된 양사언 글씨를 모사후 보필(輔筆)하여 제작 했다고 한다.
<금수정 절벽아래 암각된 金水亭 글씨, 양사언 친필로 전해지며 이 글씨를 본떠서 현재의 현판을 제작하였는데 충실하게 구현(具現)하지 못했다 하여 현재 다시 제작중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금수정 옆에는 양사언과 김구용의 시비(詩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양사언은 잘 알려진 '태산이 높다 하되~'로 시작하는 시조를 새겼으며 김구용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 태조의 명으로 유배길에 올랐을때 지은 시 '범급(帆急)'을 새겼는데 고려말 문인이자 문장가로 많은 시를 남긴 척약재 김구용의 시 세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가 최근 들어 그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양사언 시비와 김구용 시비, 김구용 시비의 뒷면에는 그와 교우(交友)하던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색의 시를 새겨 동시대를 풍미하던 문장가들의 명문을 함께 감상토록 하였다.>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1338(충숙왕 복위 7)∼1384(우왕 10)
충렬공 김방경의 현손인 김구용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16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을 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안동김씨 문온공파의 문장(紋章)이 모란이다. 이후 다양한 관직을 섭렵하며 정몽주·박상충·이숭인 등과 함께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친명파로서 북원(北元)의 사절단을 반대하다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1384년 고려와 명나라의 국교가 어려워지자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갈 때, 국서와 함께 백금 1백냥과 세저(細苧)·마포 각 50필을 가지고 갔는데 사교(私交)를 했다는 죄목으로 모략을 받아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으며,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에서 병사하였다.
그때 지은 시가 ‘범급(帆急)’인데 위 시비에 원문과 한글본을 함께 새겨 이해를 돕고 있다.
“돛단배 빠르니 산이 달아나는 듯/배가 가니 강기슭 절로 옮기는구나./지나는 고장 따라 그 풍습을 묻고 / 배 대고 머무는 곳에서는 시 지을 수밖에 / 오 나라 초 나라 강남 땅 천년 오래이고/ 여기 자연은 5월이 가장 좋은 때라 하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싫어 말게나 / 맑은 바람 밝은 달이 나를 따르고 있으니.”
그는 사장(詞章)을 잘하였고 특히 시로 유명하였는데 목은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며,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그의 유고 문집 '척약재 학음집(小易若齋 學吟集)'이 전하고 있는바, 1400년 아들 명리(明理)가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이 초간본은 보물 제100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후 후손들이 문집을 개간하거나 학자들에 의하여 '척약재 김구용의 문학세계' 논문서적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지난 10. 27일에는 포천시 문화원 대강당에서 '포천을 빛낸 인물 학술연구발표회'가 개최되어 강남대학교 홍순석 교수가 '척약재 김구용의 생애와 시세계'를 발표하였고, 대진대학교 박진태 교수의 '소총 홍유손 · 불정 홍지성 부자의 삶과 문학적 세계관', 대진대학교 박윤선 교수의 '만사 서경우선생 가계의 형성과 정치 활동' 등 3명의 사학계 교수가 참여해 집중 연구하는 자리를 가진바 있다.
척약재 김구용은 1600년대 중반 경북 예천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고조부 김방경과 함께 배향되었으나 대원군 서원철폐 정책으로 훼철되어 복원을 추진중에 있으며, 현재 전북 남원의 용장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금수정 뒷편으로는 안동김씨고택이 발굴조사를 거쳐 2010년에 복원되었으며(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8호) 김구용이 파조가 되는 문온공파 종택이다.>
금수정 주변 암각문(巖刻文)
금수정은 당대의 문인, 학자들이 많이 찾아와 글을 남기고 문장으로 교우(交友)하던 곳이다.
박순 이덕형 한석봉 이서구등 당대의 시인묵객이 찾아와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김구용과 그와 교류한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이 남긴 글을 회고하기도 하면서 지냈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주변 영평천 이곳저곳에는 양사언이나 한석봉 친필이 새겨진 암각문(巖刻文)이 많이 발견되어 탐방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금수정에서 영평천 하류쪽으로 조선중기 영의정을 지낸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낙향하여 지낸 창옥병(蒼玉屛)이 영평 제3경인데 이곳부터 금수정 인근까지 영평천변 바위마다 새겨진 다양한 글씨들이 수십점이며 아직도 정확하게 전체를 발굴해내지 못하였다고 하니 호기심 가득한 답사꾼들의 발길이 연일 이어지고 있으나 상세한 표식과 설명문이 없어 아쉬운 실정이다.
<금수정 아래 영평천 가운데 큰 바위에 새긴 글씨 '경도(瓊島)', 초서에 능한 명필 양사언 친필로 알려져 있다.>
그밖에도 금수정 주변에는 양사언의 장인으로 금수정을 물려준 금옹(琴翁) 김윤복이 앉아서 거문고를 즐겨 탔다는 금대(琴臺)가 새겨진 바위가 있고, 이에 상응하듯 양사언의 초서로 새긴 증금옹(贈琴翁) 시(詩)가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이 시에서 양사언은 금수정이 안동김씨(금옹)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 석봉(石峯) 한호, 한음(漢陰) 이덕형등 여러 시인묵객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학자에 따라 누구의 글씨인지가 분분하기도 한데 영평천 암각문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에 상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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