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기의 일본 속 우리 고대사③ - 스미요시대사의 新羅寺는 왜 파괴됐나? 조선침략의 대전제였던 ‘폐불훼석’과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 정책의 본질을 고발한다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전국의 신궁사를 강제로 철거했다. 일본의 양대 종교의 하나로 한반도에서 전해져 일본인들이 1500여 년간 신앙해온 불교 말살책으로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했다. 이른바 신불분리령에 따른 ‘폐불훼석’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신도(神道)’의 뿌리 역시 한민족의 천신 신앙이었다.
일본 제2의 대도시 오사카(大阪)는 그 중심지 난바(難波)와 더불어 백제인의 큰 터전이었다. 난바라는 지명은 백제인 왕인(王仁) 박사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지은 ‘와카(和歌)’인 <나니와쓰노우타’(難波津歌)>에서 유래했다. 지금도 오사카 일대에 거주하는 재일 한국인이 20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난바 번화가에서 남쪽으로 약 6km쯤 떨어진 곳(오사카시 스미요시구 스미요시 2-9-89)에는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인들이 세웠다는 스미요시대사(住吉大社)라는 큰 사당이 있다. 10세기 초 일본 왕실이 펴낸 <연희식신명장(延喜式神名帳)>에 따르면 스미요시대사는 일본 왕실의 국가사당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쇼와(昭和) 천황(1926~89 재위)이 찾아와 참배했다는 커다란 기념표석이 남아있다.
스미요시대사는 기쓰가와(木津川)와 야마토가와(大和川)의 중간지점에 자리잡았다. 오사카
도심을 지나는 ‘노면전차’가 커다란 스미요시도리이앞(住吉鳥居前) 정류장에 서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다. 이 노면전차를 타려면 서울의 지하철 2호선 같은 역할을 하는 오사카의 JR전철 간죠센(環狀線)의 텐노지(天王寺)역에서 내려야 한다. 노면전차의 시발점이자 종점은 바로 이 텐노지역 남쪽 문으로 나와 건너편 큰 도로 우측에 있다. 여기서 스미요시대사까지는 전차로 약 20여 분 거리다.
스미요시대사의 마유미 쓰네타다(眞弓常忠) 궁사는 필자와 오래전부터 수십 차례 만나왔다. 1923년생으로 올해 90세인 마
미 궁사는 고가쿠칸(皇學館)대학 신도학과 교수이자 일본 고대 신도학계의 태두(泰斗)로 평가 받는다.
新羅寺 함께 모셨던 스미요시대사
2012년 1월14일에도 필자는 스미요시대사를 찾아 그를 만났다. 이날 마유미 궁사는 필자가 그동안 수차례 요청해온 문서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 사당의 오랜 역사가 담긴 <스미요시신대기(住吉神代記)>라는 두루마리 문서와, 역시 옛 문헌인 <스미요시명승도회(住吉名勝圖會)> 5권 5책(1794)이었다. <스미요시신대기>는
731년 처음으로 작성되었고, 789년에 2차로 다시 작성된 소중한 고문서다. 그는 “이 문서를 외부에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마유미 궁사가 펼쳐놓은 두루마리 문서는 20m가 넘었다. 그 첫머리에는 ‘스미요시대사’의 주신이 해신(海神)인 스미요시 대신(大神)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신은 특이하게 몸뚱이가 셋으로 이루어진 3신[住吉三神]이라고 한다. 마유미 궁사는 “우와쓰쓰노오카미(表筒男神, 바다 위의 신), 나카쓰쓰노오카미(中筒男神, 바다 속의 신), 소코쓰쓰노오카미(底筒男神, 바다 밑의
신) 등 세 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사당도 제 1본궁부터 제 3본궁으로 나뉘어 있다.
<신대기>에는 이 스미요시대신이 오사카의 바다와 모든 선박의 항해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신라 해신’임을 입증해주는 기사가 실려있다. “스미요시대사는 신궁사(神宮寺, 신사에서 함께 모시는 불교 사찰)인 시라기데라(新羅寺, 신라사)도 경내에 함께 모신다.” 이는, 일본 고대 신도(神道)의 국가사당인 스미요시대사가 ‘신라 해신’을 모신 사당과 함께 ‘신라불교의 사찰’을 동시에 나란히 한 경내에서 받들어왔다는 의미다.
천신(天神)을 모시는 사당에 불교 사찰을 함께 세웠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의아해할 독자도 있을지 모른다. 우선 그 내용부터 살펴보자. 고대 일본 왕실에서 거국적으로 처음 섬긴 종교는 천신을 신앙하는 신도다. 태양신인 곰신[熊神]을 신앙하는 신도는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 천일창(天日槍) 왕자(연오랑)가 전파해 차츰 널리 퍼져나갔다.(본지 2012년 2월호 참조) 그로부터 훨씬 뒷날인 538년 백제로부터 불교가 들어온다.
이후 일본 왕실에서는 신도와 불교라는 두 이질적 종교가
존재하다 충돌(585~586)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8세기 초 무렵부터 일본 왕실에서는 신도와 불교가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것을 ‘신불습합(神佛習合, しんぶつしゆうごう)’이라고 한다.
이후 두 종교는 더욱 밀착하면서 “불보살도 신(神)으로 나타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됐다. 그와 동시에 일본 주요 지역의 국가신도 사당에서는 신궁 경내에 불교 사찰도 함께 세운다. 이런 사찰을 ‘신궁사’라고 불렀다. 따라서 불교 승려는 신궁 경내에서 신도의 신관과 함께 지냈다.
‘신불습합’에
따라 오사카의 국가사당인 스미요시대사에도 신궁사인 ‘시라기데라’가 세워졌다. 그 발자취는 <스미요시신대기>에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고겐(孝謙)천황(749~758 재위) 2년 신라국에서 본존(本尊) 불상인 약사여래상과 십이지신장(十二支神將)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우리 조정에 보내주었다. 시라기데라에서는 불정존(佛頂尊, 부처님 모습)을 본존의 비불(秘佛)로 삼고 잘 모시려고 돌궤(石櫃) 안에 넣어 신궁사 내전(內殿)의 지하 깊이 묻어 모신다. 이 불상 때문에 우리 사찰은 시라기데라를
사호(寺號)로 삼았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내용의 기사가 <스미요시명승도회(住吉名勝圖會)>의 ‘사원지부(寺院之部)’에도 기록돼 있다.
스미요시대사는 어떻게 신라 해신과 신라 불상을 함께 비불신주로 모시게 되었을까? 사면이 바다인 일본은 선박의 항해가 국가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일본에는 신라처럼 거센 파도를 열어갈 만한 훌륭한 선박 건조기술이 없었다. 반면 신라는 선박 건조기술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궁전과 사찰 등 목조건축술도 빼어났다.(본지
2012년 1월호 참조)
신라 천일창 왕자는 고조선 태양신의 사자(使者)로서 고대 일본 선주민의 절대적 존숭의 대상이었다(<일본서기>). 당시 일본은 선박사고로 무수한 인명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신라의 탁월한 선박 건조기술뿐 아니라 거센 파도가 없는 고요한 바다와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는 태양신이나 부처님 혹은 해신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할 만한 또 다른 기록이 <스미요시신대기>에 실려 있다. 필자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그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여덟 개의 ‘큰 섬나라(大八嶋國, 오야시마노쿠니)’의 하늘 아래로 태양신이 와주시도록 받드는 이는 후나기(船木) 씨의 먼 곳의 신(神) 오타다노카미(大田田神)이시니라.”
‘여덟 개의 큰 섬나라’는 일본이고 그 일본 쪽으로 태양신이 나오시도록 받든 후나기 씨는 당시 일본의 선박건조 가문인 후나기 씨 출신의 후나기무라지(船木連)를 가리킨다. ‘선박담당관의 먼 곳의 신’은 바다 건너 천일창 왕자의 나라, 신라의 태양신이다. 또 ‘오타다노카미’라는 신은 신라신인 오쿠니누시노카미(大國主神)의 아들이다(<新撰姓氏錄> 전 30권, 815년).
오타다노카미는 오쿠니누시노카미와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姬) 사이에 태어난 신의 아들이다.(<일본서기>) 오쿠니누시노카미는 역시 <일본서기>에 하늘나라 고천원(高天原, 다카아마가하라)에서 살다가 그 하늘 밑의 신라 땅 우두산(牛頭山, 강원도 춘천)으로 천손강림해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유명한 신라신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尊)다. 이렇듯 고대 신라신이며 신라인과 연고를 가진 사람이 선박담당관 가문 출신인 신라인 후나기무라지라는 말이다.
조금 복잡하지만 이러한 스미요시대사의 역사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뒤따라 나온다.
“오타다노카미가 만든 배 두 척 중 하나는 목선(木船)이며 다른 한 척은 석선(石船)이다. 그가 훗날 이런 두 가지 배를 만들었음을 증명하려고 이코마산(生駒山, 오사카 남쪽 백제계 사찰 산간지대)의 나가야노하카(長屋墓, 백제계 일본왕족의 묘) 에는 석선을 묻고, 시라기사카(白木坂, 동해쪽 와카사만의 신라언덕)의 사이구사노하카(三枝墓, 신라계 가문의 묘)에는 목선을 묻어둔다.”
이와 같은 목선과 석선의 매장에 관한 <스미요시신대기> 부분을 두고 리쓰메이칸대학 사학과 마쓰마에 다케시(松前健·1922~2002)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스미요시대신을 받들며 항해를 관장했던 호족 쓰모리무라지(津首連, 신라인 항만장관, ‘쓰’는 나루터이며 ‘모리’는 수장인 ‘우두머리’의 한국어 ‘머리’다-필자주)의 부하 지방관으로 선박용 목재를 취급했던 후나기무라지의 전승(傳承)이지만, 이 씨족은 조선(造船)뿐 아니라 장례법과도 연관이 있으며 목선과
석선을 지난 날 그들(신라)의 조상신이 태양신을 배 안에 모셔서 보내주었음을 기념해 두 곳의 묘지에 각각 넣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목선과 석선은 목관(木棺)과 석관(石棺)이라는 설도 있으며, 또한 배의 미니어처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쨌든 일본의 태양선(太陽船)이 외국(신라)의 형식과 똑같게 고분이며 죽은 영혼과 함께 맺어져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다.”(<日本の神々> 1974).
新羅寺를 세운 사람은 자각대사(慈覺大師)
여기서 우리는 돌로 만든 배는 아니지만 1910년대
일본 사이토바루(西都原) 고분에서 발굴된 찰흙으로 빚은 배 모양의 하니와(부장용 토기, 도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우리나라의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출처 미상인 찰흙으로 빚은 신라 배를 거듭 연상케 된다.(본지 2012년 1월호 참조)
스미요시대사의 마유미 궁사는 5년 전인 2007년 6월 15일 스미요시대사의 가구라덴(신전)에서 자신이 입고 있던 하얀 무명 신관복을 가리키며 “이 ‘시라기유후(白木綿)’는 신라 면을 뜻하는 옷감 이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라기유후는 ‘시라기 모멩’이라고도 하는데,
일본 고어에서는 ‘목면(木綿)’을 ‘모멩(もめん)’ 혹은 ‘유후(ゆふ)‘ 두 가지로 표현한다. ‘모멩’은 우리말 ‘무명’에서 왔다고 보여진다.
당시 마유미 궁사는 필자에게 “8년 전 일본 개국신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연고지로 알려진 한국 강원도 춘천의 우두산을 직접 답사했다. 어째서 일본에서 스사노오노미코토를 일컬어 ‘우두천왕(牛頭天王)’이라고 존칭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경북 고령에도 다녀왔는데, 그곳에는 ‘일본 왕실 천손(天孫)의 터전’임을 의미하는 ‘고천원고지(高天原故地)’라는 큰 돌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경북 고령 가야대학 경내) 일본 개국신이 신라에서 건너왔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고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라와 연고가 있는 일본 각지의 국가 신궁 등 사당에 가면 누구나 ‘황소’가 무릎을 꿇고 앉은 ‘우두상(牛頭像)’을 쉽게 보게 된다.
스미요시대사의 신주(神主)가 신라인들이 신앙하던 고조선의 태양신이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시인한 마유미 궁사는 신라신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모시는 일본 최대 야사카신사(八坂神社·교토)의 궁사로도 오랜 세월 봉직했다. 필자와 마
미 궁사의 교류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마유미 궁사는 신라 해신인 스미요시대신을 모시는 현재의 스미요시대사의 궁사로 부임했다. 8년 전의 일이다.
마유미 궁사는 <스미요시신대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스미요시대신은 바다를 지켜주는 신라 해신”이라고 명쾌하게 밝혔거니와, 이 신사에는 고조선의 태양신을 받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바로 마유미 궁사가 보여준 또 하나의 문서인 <스미요시명승도회> 5권5책이다. 이 문헌에는 “신라 사찰이 스미요시대사의 큰 사당과 함께 공존했다”는 중요한
기록이 그림과 함께 실려 있다.
책에는 불교 사찰인 시라기데라 건립을 말해주는 구체적 기사와 함께 삽화까지 곁들여 있어 흥미롭고 해독하기가 쉬웠다. 두 쪽의 그림과 함께 실린 해설문은 시라기데라를 세우게 된 발자취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신궁사는 덴표호지 2년(758)에 건립했으며 시라기데라라고 일컬었다. 시라기데라는 스미요시 지역의 또 다른 사찰인 쓰모리데라(津守寺)·소겐죠도데라(莊嚴淨土寺)와 함께 3대 사찰로 헤아리던 큰 사찰(巨刹)이었다. 스미요시대사
경내에 신궁사를 처음 세운 승려는 지가쿠(慈覺) 다이시(大師)다. 스미요시신(住吉神)이 노옹(老翁)의 모습으로 현신해 당시 지가쿠대사가 머무르던 집으로 찾아와 가람을 세우도록 권했다. 이러한 <고금저문집(古今著聞集)>의 내용을 <스미요시명승도회>의 첫째 권(권1)에 그림으로 그렸다.”
쓰모리데라는 앞의 신라인 항만장관 쓰모리무라지 가문의 사찰이다.
<고금저문집>에 기록된 스미요시대사 안에 신궁사를 처음 세웠다는 지카쿠대사는 누구일까? 지카쿠대사는
교토(京都)에서 동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도착하는 오쓰(大津)시의 히에이산(比叡山, 848m)에 요코가와주도(橫川中堂)를 세운 신라인이다. 일본 불교사에서 이름 있는 고승인 지카쿠대사는 특히 신라명신(新羅明神)의 신당인 세키산구(赤山宮)도 세웠다. 지카쿠대사가 세키산구를 세운 동기 역시 <고금저문집>에 기록돼 있다.
“지카쿠대사가 당나라 유학 길에 거센 바다 폭풍을 만나 사경을 헤맬 때 히에이산 아래 미이데라(三井寺)를 지키는 신라명신(新羅明神)이 나타나 날씨를 잠재워 무사히 유학을 마칠
수 있었다. 이에 지카쿠대사는 귀국 후 히에이산에 요코가와주도를 세우고 그 앞 언덕에는 세키산구를 모셨다.”(<古今著聞集> 1권)
<스미요시명승도해>의 시라기데라 관련 기사에는 “지카쿠대사의 탁선으로 시라기데라를 세우게 되었노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일본 승려 연구의 명저인 <겡코샤쿠쇼(元亨釋書)> 1377년 본에는 “히에이산 천태종의 학승 묘타쓰(明達·877~955)는 텐케이 3년(940) 11월 스미요시대사의 신궁원(神宮院)에서 비사문법(毘沙門法)을 수학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는 곧 스미요시대사의 시라기데라가 명찰임을 말해준다. “묘타쓰의 속성은 하지(土師) 씨이며 셋슈(오사카 옛 지명)의 스미요시현 사람으로 79세에
입적했다”는데,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하지 씨는 일본의 신라인 명문가의 성씨다.
일본에서 ‘신사·신궁·사찰’ 연구로 최초의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오사카쇼인여자대학 이마이 게이치(今井啓一) 교수는 스미요시대사와 시라기데라의 병존 발자취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오사카부 셋쓰국(攝津國, 고대 지명)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스미요시쵸에 진좌한 스미요시대사는 고래로 관폐대사였으며 <연희식신명장>에는 스미요시에 모신 좌신사(坐神社) 4좌로 기록되었으며 셋쓰국의 국가신궁임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이마이
교수가 지적하는 스미요시대사 4좌의 신주 중 마지막 제 4신주는 다름아닌 신라 천일창 왕자의 후손인 신공황후(神功皇后, <일본서기>의 조작된 신라 침공설의 여주인공)다.
에도시대(1603~1867)의 일본 국수주의자들(소위 水戶學派)은 스미요시대사가 설 때는 들어있지도 않았던 신공황후의 제 4본궁이라는 사당을 뒷날 새로 추가했다. 스미요시대사의 ‘평면도’를 보면 무리하게 경내에 억지로 사당을 세운 흔적이 뚜렷하다. 즉, 가장 안쪽의 제 1본궁을 맨 위로 하여 잇대어 서쪽으로 제 2본궁과 제 3본궁이 일렬로 서 있는데 제 3본궁 남쪽으로 제 4본궁(신공황후사당)이 어울리지 않게 서있다. 제 1본궁의 우와쓰쓰노오카미, 제 2본궁 나카쓰쓰노오카미, 제 3본궁 소코쓰쓰노오카미 사당은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데 반해 제 4본궁은 그야말로 억지춘향격으로 제 3본궁 옆에 서 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이곳 스미요시대사의 훌륭했던 신궁사인 시라기데라를 곡괭이질로 무참하게 파괴하고 말았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후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이른바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이라는 악법을 발동했다. 결국 시라기데라는 메이지 초기 ‘신불분리령’에 따라 폐절(廢絶)되고 그 절터는 뒷날 오사카 시로부터 ‘스미요시신궁사사적(住吉神宮寺史蹟)’으로
지정돼 현재는 160cm 남짓한 사적비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지난 1월 14일 마유미 궁사는 140여 년 전 파괴된 시라기데라 폐사 터 석비 앞으로 필자를 안내했다. 마유미 궁사는 “여기가 바로 우리 스미요시대사 경내의 반보다 더 큰 규모로 번성하던 시라기데라가 있던 자리이지만 이제는 표석 하나만 이렇게 서 있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표석을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 마유미 궁사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본래 시라기데라는 천태종(天台宗)
사찰로 본존 약사불을 모시는 본당을 중심으로 저 안에는 법화삼매당·상행삼매당·대일당·경당·오대역보장, 그리고 동서로 두 기의 탑과 구문지당·식당, 동서의 승방, 종루·무대·음악옥 등을 고루 갖춘 당대의 거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라기데라의 흔적으로는 무엇이 남아있느냐”고 필자가 물었다. 마유미 궁사는 “시라기데라의 목탑(서탑) 하나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 탑신은 지금 멀리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건너 시코쿠(四國) 동부지방인
도쿠시마(德島)현 아와(阿波)시 도쿠도산 키리하타지(切幡寺) 경내로 옮겨가 그곳에서 국가중요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천만다행이라고 하겠거니와 스미요시대사 궁사실 옆 가구라덴 앞에는 그 옛날 시라기데라의 2층짜리 서탑 모형(실물의 28분의 1 크기)이 유리상자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어 예전 시라기데라의 잔영을 간신히 살펴보게 한다. 마유미 궁사는 그날 학문적 진실로 그 사실(史實)을 필자에게 알리려는 듯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시라기데라
어째서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전국 각지 국가사당에 있던 신궁사를 강제로 철거했을까? 일본의 권위 있는 한 역사사전은 “‘폐불훼석’이란 1868년 메이지정부 초기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 정책상 불교 억압·배척·파괴운동으로 신사의 불당과 불상 파괴가 전국적으로 자행되었다”(角川版 <日本史辭典> 1976)고 못박았다. 특히 그들에게는 조선 침략에 방해 요소로 작용하는 한반도에서 전래한 불교 사찰 중에서도 국가사당 안의 신궁사가 가장 큰 눈엣가시여서 반한(反韓) 국수주의를 발동해 이들 신궁사를 흔적 없이 파괴했다고
봐야 한다.
신불분리령의 발상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다. 당시 일본의 강력한 지배자였던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1825~83) 우대신의 후광을 업고 프로이센(독일)에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철권전제정치의 근거인 ‘바이마르헌법’과 영국의 식민주의 제국헌법까지 터득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으로 돌아와 앞장서서 ‘제국주의 헌법’을 만들어 대일본제국의 정체(政體)를 드러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서양의 조그만 섬나라 영국이 거대한 인도와
아프리카 각지를 침략해 방대한 식민지를 거느리듯 극동의 작은 섬나라 우리 일본도 역시 영국의 제국주의 전제정치 식민지 침탈정책을 국가모델로 삼아 중국과 조선부터 침략한다”는 흑심을 품고 우선 1868년 3월 17일, 일본의 양대 종교의 하나로 일본인들이 장장 1500년간 신앙해온 한반도 전래의 불교 말살책부터 발동하게 된다.
그 후 17년 만인 1885년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제국의 초대 군국주의 총리대신이 되어 1892년에는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드디어 1904년에는 ‘한일협약’을 강행하고 서울로 침입하여 초대
통감 자리에 앉아 조선 찬탈의 흉책을 도모했다. 그러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역두에서의 의거로 사망했다.
그러나 신불분리령 당시 양대 종교 중 하나인 신도의 근본 역시 한민족 전래 4200여 년의 가장 오랜 천신 신앙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삼족오’ 등 태양신 신앙인 고조선의 천손신앙이 그 뿌리이며, 후일 신라 천일창 왕자가 고대 일본에 전해주면서 일본의 신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도쿄도립대학의 민족학자 오카 마사오(岡正雄·1898~1982) 교수는 1933년
오스트리아 빈대학의 민족학 박사학위 논문에서 “일본 역사의 개국신화는 고조선 단군의 천손강림 개국신화와 가야 김수로왕의 개국신화, 주몽의 고구려 개국신화 등을 바탕으로 모작되었다. 천조대신(아마테라스오미카미)은 중국 묘족(苗族)의 설화를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는 일본 고대사학계가 평가하는 주목할 만한 업적이다. 거듭 밝히자면 한국의 천손 역사문화가 일본의 천손 신도 역사문화로 모작된 것이다.
리쓰메이칸대학 문학부 이와이 타다쿠마(岩井忠熊) 교수는 이토 히로부미는 신불분리령을 실천한
뒤 한발 더 나아가 메이지정부의 국민 통제 이데올로기로서 신·유·불(神儒佛) 삼자를 초월하는 새로운 신도국교(神道國敎)를 설정하는 방법론을 백성의 생활 속에 밀착시키는 데 역점을 두었다면서 “이토 히로부미는 제국주의 헌법을 만들려고 오스트리아에서 그곳 학자 쉬타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쉬타인은 이렇게 강의했다. ‘신대(神代) 이래 일본 왕실에 밀착하는 신도는 귀국(일본)에서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므로, 이것을 종교가 아니라 국가정신을 귀착시키는 대목들을 제시해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을 백성들이 존중하며
따르게 하려면 왕의 탄생·혼인·상례·제사·축하·군사력 등 모든 분야에서 고유한 예절을 새로 만들어 시행하되 인민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예절에 깊숙이 젖어 들어 순응하도록 하는 게 특히 중요하다’는 새로운 절대주의 통치책을 가르쳐주었다”(‘紀元節の制定’ 1957)고 비판했다.
[홍윤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석좌교수]
(월간중앙 201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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