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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매니저 |
61) 일곱 개의 층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하니
지난 하루하루가 무서웠다.
무엇이나 거리낌 없이 말했고
아무에게도 협의해 본 일이 없던
불행한 연대年代였다.
비가 줄줄 내리는 새벽
바로 그때이다
죽어 간 청춘이
땅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이…
그러나 나는 뛰어들어
서슴없이 어깨를 거느리고
악수한 채 피 묻은 손목으로
우리는 암담한 일곱 개의 층계를 내려갔다.
인간의 조건의 앙드레 말로
아름다운 지구地區의 아라공
모두들 나와 허물없던 우인友人
황혼이면 피곤한 육체로
우리의 개념이 즐거이 이름 불렀던
‘정신과 관련의 호텔’에서
말로는 이 빠진 정부情婦와
아라공은 절름발이 사상과
나는 이들을 응시하면서…
이러한 바람의 낮과 애욕의 밤이
회상의 사진처럼
부질없게 내 눈앞에 오고 간다.
또 다른 그날
가로수 그늘에서 울던 아이는
옛날 강가에 내가 버린 영아嬰兒
쓰러지는 건물 아래
슬픔에 죽어 가던 소녀도
오늘 환영幻影처럼 살았다
이름이 무엇인지
나라를 애태우는지
분별할 의식조차 내게는 없다
시달림과 증오의 육지
패배의 폭풍을 뚫고
나의 영원한 작별의 노래가
안개 속에 울리고
지난날의 무거운 회상을 더듬으며
벽에 귀를 기대면
머나먼
운명의 도시 한복판
희미한 달을 바라
울며 울며 일곱 개의 층계를 오르는
그 아이의 방향은
어디인가.
62) 기적奇蹟인 현대
장미는 강가에 핀 나의 이름
집집 굴뚝에서 솟아나는 문명文明의 안개
‘시인’ 가엾은 곤충이여
너의 울음이 도시에 들린다.
오래도록 네 욕망은 사라진 회화繪畵
무성한 잡초원雜草園에서
환영幻影과 애정과 비벼 대던
그 연대年代의 이름도
허망한 어젯밤 버러지.
사랑은 조각에 나타난 추억
이녕泥濘과 작별의 여로에서
기대었던 수목은 썩어지고
전신電信처럼 가볍고 재빠른
불안한 속력은 어디서 오나.
침묵의 공포와 눈짓하던
그 무렵의 나의 운명은
기적인
동양의 하늘을 헤매고 있다.
63) 밤의 노래
정막靜寞한 가운데
인광처럼 비치는 무수한 눈
암흑의 지평은
자유에의 경계를 만든다.
사랑은 주검의 사면斜面으로 달리고
취약하게 조직된
나의 내면은
지금은 고독한 술병.
밤은 이 어두운 밤은
안테나로 형성되었다
구름과 감정의 경위도經緯度에서
나는 영원히 약속될
미래에의 절망에 관하여 이야기도 하였다.
또한 끝없이 들려오는 불안한 파장波長
내가 아는 단어와
나의 평범한 의식意識은
밝아 올 나의 영역으로
위태롭게 인접되어 간다.
가느다란 노래도 없이
길목에선 갈대가 죽고
욱어진 이신異神의 날개들이
깊은 밤
저 기아飢餓의 별을 향하여 작별한다.
고막을 깨뜨릴 듯이
달려오는 전파電波
그것이 가끔 교회의 종소리에 합쳐
선을 그리며
내 가슴의 운석에 가라앉아 버린다.
64) 불신의 사람
나는 바람이 길게 멈출 때
항구의 등불과
그 위대한 의지意志의 설움이
불멸의 씨를 뿌리는 것을 보았다.
폐에 밀려드는 싸늘한 물결처럼
불신의 사람과 망각의 잠을 이룬다.
피와 외로운 세월과
투영되는 일체一切의 환상과
시詩보다도 더욱 가난한 사랑과
떠나는 행복과 같이
속삭이는 바람과
오 공동묘지에서 퍼덕이는
시발과 종말의 깃발과
지금 밀폐된 이런 세계에서
권태롭게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등불이 꺼진 항구에
마지막 조용한 의지意志의 비는 나리고
내 불신의 사람은 오지 않았다.
내 불신의 사람은 오지 않았다.
65) 1953년의 여자에게
유행은 섭섭하게도
여자들에게서 떠났다.
왜?
그것은 스스로의 기원을 찾기 위하여
어떠한 날
구름과 환상의 접경을 더듬으며
여자들은
불길한 옷자락을 벗어 버린다.
회상의 푸른 물결처럼
고독은 세월에 살고
혼자서 흐느끼는
해변의 여신과도 같이
여자들은 완전한 시간을 본다.
황막한 연대年代여
거품과 같은 허영이여
그것은 깨어진 거울의 여윈 인상.
필요한 것과
소모의 비례比例를 위하여
전쟁은 여자들의 눈을 감시한다.
코르셋으로 침해된 건강은
또한 유행은 정신의 방향을 봉쇄한다.
여기서 최후의 길손을 바라볼 때
허약한 바늘처럼
바람에 쓰러지는
무수한 육체
그것은 카인의 정부情婦보다
사나운 독을 풍긴다.
출발도 없이
종말도 없이
생명은 부질하게도
여자들에게서 어두움처럼 떠나는 것이다.
왜?
그것을 대답하기에는
너무도 준열한 사회가 있었다.
66) 의혹의 기旗
얇은 고독처럼 퍼덕이는 기
그것은 주검과 관념의 거리를 알린다.
허망한 시간
또는 줄기찬 행운의 순시瞬時
우리는 도립倒立된 석고처럼
불길不吉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낙엽처럼 싸움과 청년은 흩어지고
오늘과 그 미래는 확립된 사념思念이 없다.
바람 속의 내성內省
허나 우리는 죽음을 원치 않는다.
피폐한 토지에선
한 줄기 연기가 오르고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감았다.
최후처럼 인상印象은 외롭다.
안구眼球처럼 의욕은 숨길 수가 없다.
이러한 중간의 면적에
우리는 떨고 있으며
떨리는 깃발 속에
모든 인상과 의욕은 그 모습을 찾는다.
195……년의 여름과 가을에 걸쳐서
애정의 뱀은 어두움에서 암흑으로
세월과 함께 성숙하여 갔다.
그리하여 나는 비틀거리며
뱀이 걸어간 길을 피했다.
잊을 수 없는 의혹의 기
잊을 수 없는 환상의 기
이러한 혼란된 의식 아래서
아폴론은 위기의 병을 껴안고
고갈된 세계에 가라앉아 간다.
67) 어느 날의 시가 되지 않는 시
당신은 일본인이지요?
차이니스? 하고 물을 때
나는 불쾌하게 웃었다.
거품이 많은 술을 마시면서
나도 물었다
당신은 아메리카 시민입니까?
나는 거짓말 같은 낡아 빠진 역사와
우리 민족과 말이 단일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황혼.
태번 구석에서 흑인은 구두를 닦고
거리의 소년이 즐겁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여우女優 가르보*의 전기傳記 책이 놓여 있고
그 엽에는 디텍티브 스토리가 쌓여 있는
서점의 쇼윈도
손님이 많은 가게 안을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비가 내린다
내 모자 위에 중량이 없는 억압이 있다.
그래서 뒷길을 걸으며
서울로 빨리 가고 싶다고
센티멘털한 소리를 한다.
(에버렛에서)
*가르보 : 흑백영화 시대의 전설적인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
68) 다리 위의 사람
다리 위의 사람은
애증과 부채負債를 자기 나라에 남기고
암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 놀라
바늘과 같은 손가락은
난간을 쥐었다.
차디찬 철鐵의 고체固體
쓰디쓴 눈물을 마시며
혼란된 의식에 가라앉아 버리는
다리 위의 사람은
긴 항로 끝에 이르른 정막靜寞한 토지에서
신의 이름을 부른다.
그가 살아오는 동안
풍파와 고절孤絶은 그칠 줄 몰랐고
오랜 세월을 두고
DECEPTION PASS에도
비와 눈이 내렸다.
또다시 헤어질 숙명이기에
만나야만 되는 것과 같이
지금 다리 위의 사람은
로사리오 해협에서 불어오는
처량한 바람을 잊으려고 한다.
잊으려고 할 때 두 눈을 가로막는
새로운 불안
화끈거리는 머리
절벽 밑으로 그의 의식意識은 떨어진다.
태양이 레몬과 같이 물결에 흔들거리고
주립 공원 하늘에는
에메랄드처럼 빤짝거리는 기계가 간다.
변함없이 다리 아래 물이 흐른다
절망된 사람의 피와도 같이
파란 물이 흐른다
다리 위의 사람은
흔들리는 발걸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아나코테스에서)
69) 투명한 버라이어티
녹 쓴
은행과 영화관과 전기세탁기.
럭키 스트라이크
VANCE 호텔 BINGO 게임.
영사관 로비에서
눈부신 백화점에서
부활제의 카드가
RAINIER 맥주가.
나는 옛날을 생각하면서
텔레비전의 LATE NIGHT NEWS를 본다.
캐나다 CBC 방송국의
광란한 음악
입 맞추는 신사와 창부娼婦.
조준은 젖가슴
아메리카 워싱턴 주.
비에 젖은 소년과 담배
고절孤節된 도서관
오늘 올드미스는 월경月經이다.
희극 여우女優처럼 눈살을 피면서
최현배 박사의 우리말본을
핸드백 옆에 놓는다.
타이프라이터의 신경질
기계 속에서 나무는 자라고
엔진으로부터 탄생된 사람들.
신문과 숙녀의 옷자락이 길을 막는다.
여송연을 문 전前 수상首相은
아메리카의 여자를 사랑하는지?
식민지의 오후처럼
회사의 깃발이 퍼덕거리고
페리 코모의 〈파파 러브스 맘보〉
찢어진 트럼펫
구겨진 애욕.
데모크라시와 옷 벗은 여신과
칼로리가 없는 맥주와 유행과
유행에서 정신을 희열하는
디자이너와
표정이 경련하는 나와.
트렁크 위에 장미는 시들고
문명文明은 은근한 곡선을 긋는다.
조류鳥類는 잠들고
우리는 페인트칠한 잔디밭을 본다
달리는 유니온 퍼시픽 안에서
상인商人은 쓸쓸한 혼약의 꿈을 꾼다.
반항적인 M. 먼로의
날개 돋친 의상.
교회의 일본어 선전물에서는
크레졸 냄새가 나고
옛날
루돌프 알폰소 발렌티노의 주검을
비탄으로 맞이한 나라
그때의 숙녀는 늙고
아메리카는 청춘의 음영을 잊지 못했다.
스트립쇼
담배 연기의 암흑
시력視力이 없는 네온사인.
그렇다 ‘성性의 십년’이 떠난 후
전장戰場에서 청년은 다시 도망쳐 왔다
자신自信과 영예榮譽와
구라파의 달을 바라다보던 사람은…
혼란과 질서의 반복이
물결치는 거리에
고백의 시간은 간다.
집요하게 태양은 내려 쪼이고
MT. HOOT의 눈은 변함이 없다.
연필처럼 가느다란 내 목구멍에서
내일이면 가치가 없는 비애로운 소리가 난다.
빈약한 사념思念
아메리카 모나리자
필립 모리스 모리스 브리지
비정한 행복이라도 좋다
4월 10일의 부활제가 오기 전에
굿 바이
굿 앤드 굿 바이
VANCE 호텔 …… 시애틀에 있음
파파 러브스 맘보 …… 최근의 유행곡.
모리스 브리지 …… 포틀랜드에 있음.
70)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넓고 개체 많은 토지에서
나는 더욱 고독하였다.
힘없이 집에 돌아오면 세 사람의 가족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차디찬 벽에 붙어 회상에 잠긴다.
전쟁 때문에 나의 재산과 친우가 떠났다.
인간의 이지理知를 위한 서적 그것은 잿더미가 되고
지난날의 영광도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다정했던 친우도 서로 갈라지고
간혹 이름을 불러도 울림조차 없다.
오늘도 비행기의 폭음이 귀에 잠겨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을 위해 시를 읽으면
공백한 종이 위에
그의 부드럽고 원만하던 얼굴이 환상처럼 어린다.
미래에의 기약도 없이 흩어진 친우는
공산주의자에게 납치되었다.
그는 사자死者만이 갖는 속도로
고뇌의 세계에서 탈주하였으리라.
정의의 전쟁은 나로 하여금 잠을 깨운다.
오래도록 나는 망각의 피안에서 술을 마셨다.
하루하루가 나에게 있어서는
비참한 축제이었다.
그러나 부단한 자유의 이름으로서
우리의 뜰 앞에서 벌어진 싸움을 통찰할 때
나는 내 출발이 늦은 것을 고한다.
나의 재산… 이것은 부스럭지
나의 생명… 이것도 부스럭지
아 파멸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냐.
마음은 옛과는 다르다. 그러나
내게 달린 가족을 위해 나는 참으로 비겁하다
그에게 나는 왜 머리를 숙이며 왜 떠드는 것일까.
나는 나의 말로를 바라본다.
그리하여 나는 혼자서 운다.
이 넓고 개체 많은 토지에서
나만이 지각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나는
생에 한없는 애착을 갖는다.
71) 고향에 가서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繪畵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렬과 함께
세상엔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거기 나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엔 싸늘한 바람이 설레고
그림자는 망령과도 같이 무섭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와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황혼 속으로
감상感傷 속으로
차는 달린다.
가슴속에 흐느끼는 갈대의 소리
그것은 비창悲愴한 합창과도 같다.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 부르던
그것뿐이다.
비 내리는 사경斜傾의 십자가와
아메리카 공병工兵이
나에게 손짓을 해 준다.
*박인환 고향은 강원도 인제. 이 시는 종군기자로 고향을 방문했을 때 쓴 시이다.
72) 새로운 결의를 위하여
나의 나라 나의 마을 사람들은
아무 회한도 거리낌도 없이 그저
적의 침략을 쳐부수기 위하여
신부新婦와 그의 집을 뒤에 남기고
건조한 산악에서 싸웠다 그래서
그들의 운명은 노호怒號했다
그들에겐 언제나 축복된 시간이 있었으나
최초의 피는 장미와 같이 가슴에서 흘렀다.
새로운 역사를 찾기 위한
오랜 침묵과 명상 그러나
죽은 자와 날개 없는 승리
이런 것을 나는 믿고 싶지가 않다.
더욱 세월이 흘렀다고 하자
누가 그들을 기억할 것이냐.
단지 자유라는 것만이 남아 있는 거리와
용사의 마을에서는
신부는 늙고 아비 없는 어린것들은
풀과 같이
바람 속에서 자란다.
옛날이 아니라 거저 절실한 어제의 이야기
침략자는 아직도 살아 있고
싸우러 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무거운 공포의 시대는 우리를 지배한다.
아 복종과 다름이 없는 지금의 시간
의의를 잃은 싸움의 보람
나의 분노와 남아 있는 인간의 설움은
하늘을 찌른다.
폐허와 배고픈 거리에는
지나간 싸움을 비웃듯이 비가 내리고
우리들은 울고 있다
어찌하여?
소기所期의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원수들은 아직도 살아 있지 않는가.
73) 식물
태양은 모든 식물에게 인사한다
식물은 이십사 시간 행복하였다.
식물 위에 여자가 앉았고
여자는 반역한 환영幻影을 생각했다.
향기로운 식물의 바람이 도시에 분다.
모두들 창을 열고 태양에게 인사한다.
식물은 이십사 시간 잠들지 못했다.
74) 서정가抒情哥
실신한 듯이 목욕하는 청년
꿈에 본 조셉 베르네*의 바다
반半 연체동물의 울음이 들린다
새너토리엄*에 모여든 숙녀들
사랑하는 여자는 층계에서 내려온다
니자미*의 시집보다도 비장한 이야기
냅킨이 가벼운 인사를 하고
성하盛夏의 낙엽은 내 가슴을 덮는다.
*조셉 베르네 :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화가
*결핵환자 등을 위한 요양소
*나자미 : 페르시아 유명시인
75) 식민항植民港의 밤
향연饗宴의 밤
영사領事 부인에게 아시아의 전설을 말했다.
자동차도 인력거도 정차되었으므로
신성한 땅 위를 나는 걸었다.
은행 지배인이 동반한 꽃 파는 소녀
그는 일찍이 자기의 몸값보다
꽃값이 비쌌다는 것을 안다.
육전대陸戰隊*의 연주회를 듣고 오던 주민은
적개심으로 식민지의 애가哀歌를 불렀다.
삼각주의 달빛
백주白晝의 유혈流血을 밟으며 찬 해풍이 나의 얼굴을
적신다.
*육전대 : 해병대 옛 호칭
76) 장미의 온도
나신裸身과 같은 흰 구름이 흐르는 밤
실험실 창밖
과실의 생명은
화폐 모양 권태하고 있다.
밤은 깊어 가고
나의 찢어진 애욕은
수목樹木이 방탕하는 포도鋪道에 질주한다.
나팔 소리도 폭풍의 부감俯瞰도
화판花瓣의 모습을 찾으며
무장한 거리를 헤맸다.
태양이 추억을 품고
안벽岸壁을 지나던 아침
요리의 위대한 평범을
클로스업한 원시림의
장미의 온도
78) 인제麟蹄
인제
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
설악산 눈이 녹으면
철렵 가던 시절도
이젠 추억.
아무도 모르는 신간벽촌에
나는 자라서
고향을 생각하며 지금 시를 쓰는
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 할까
부질없구나.
그곳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도읍
인간의 이름이 남지 않은 토지
하늘엔 구름도 없고
나는 삭풍 속에서 울었다
어느 곳에 태어났으며
우리 조상들에게 무슨 죄가 있던가.
눈이여
옛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어 준
눈이여
너에게는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
나의 가난한 고장
인제
봄이여
빨리 오거라.
79)이국異國 항구
에버렛 이국의 항구
그날 봄비가 내릴 때
돈나 캠벨 잘 있거라
바람에 펄럭이는 너의 잿빛 머리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내 머리는 화끈거린다
몸부림쳐도 소용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서로 알면서도
젊음의 눈동자는 막지 못하는 것
처량한 기적汽笛
덱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이제 나는 육지와 작별을 한다
눈물과 신화의 바다 태평양
주검처럼 어두운 노도怒濤를 헤치며
남해호南海號의 우렁찬 엔진은 울린다
사랑이여 불행한 날이여
이 넓은 바다에서
돈나 캠벨 - 불러도 대답은 없다
80) 남풍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일찍이 의복을 빼앗긴 토민土民
태양 없는 마레*
너의 사랑이 백인白人의 고무원園에서
소형素馨*처럼 곱게 시들어졌다
민족의 운명이
크메르 신의 영광과 함께 사는
앙코르와트의 나라
월남 인민군
멀리 이 땅에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
가슴 부서질 듯 남풍이 분다
*마레 : 말레이시아
*소형 : 재스민
81) 전원 田園
1
홀로 새우는 밤이었다.
지난 시인詩人의 걸어온 길을
나의 꿈길에서 부딪쳐 본다.
적막한 곳엔 살 수 없고
겨울이면 눈이 쌓일 것이
걱정이다.
시간이 갈수록
바람이 모여들고
한 간 방은 잘 자리도 없이
좁아진다.
밖에는 우수수
낙엽 소리에
나의 몸은
점점 무거워진다.
2
풍토의 냄새를
산마루에서
지킨다.
내 가슴보다도
더욱 쓰라린
늙은 농촌의 황혼
언제부터 시작되고
언제 그치는
나의 슬픔인가.
지금 쳐다보기도 싫은
기울어져 가는
만하晩夏.
전선 위에서
제비들은
바람처럼
나에게 작별한다.
3
찾아든 고독 속에서
가까이 들리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다.
창을 부수는 듯
별들이 보였다.
칠월의
저무는 전원
시인이 죽고
괴로운 세월은
어데론지 떠났다.
비 나리면
떠난 친구의 목소리가
강물보다도
내 귀에
서늘하게 들리고
여름의 호흡이
쉴 새 없이
눈앞으로 지난다.
4
절름발이 내 어머니는
삭풍에 쓰러진
고목 옆에서 나를
불렀다.
얼마 지나
부서진 추억을 안고
염소처럼 나는
울었다.
마차가 넘어간
언덕에 앉아
지평에서 걸어오는
옛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생각이 타오르는
연기는
마을을 덮었다.
82)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거의 모두가 미래의 시간 속에 나타난다.
(T.S. 엘리엇)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육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靜寂과 초연硝煙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 流刑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을 회상하면서
회의懷疑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회멸悔蔑의 오늘을 살아간다.
…아 최후로 이 성자聖者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의 회화 속의 나녀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에게 판
철없는 시인
나의 눈 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다….
83) 낙하
미끄럼판에서
나는 고독한 아킬레스처럼
불안의 깃발 날리는
땅 위에 떨어졌다
머리 위의 별을 헤아리면서
그 후 이십 년
나는 운명의 공원 뒷담 밑으로
영속된 죄의 그림자를 따랐다.
아 영원히 반복되는
미끄럼판의 승강昇降
친근에의 증오와 또한
불행과 비참과 굴욕에의 반항도 잊고
연기 흐르는 쪽으로 달려가면
오욕의 지난날이 나를 더욱 괴롭힐 뿐.
멀리서 회색 사면斜面과
불안한 밤의 전쟁
인류의 상흔과 고뇌만이 늘고
아무도 인식하지 못할
망각의 이 지상에서
더욱 더욱 가라앉아 간다.
처음 미끄럼판에서
내려 달린 쾌감도
미지의 숲 속을
나의 청춘과 도주하던 시간도
나의 낙하하는
비극의 그늘에 있다.
84) 세 사람의 가족
나와 나의 청순한 아내
여름날 순백한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유행품으로 화려한
상가의 쇼윈도를 바라보며 걸었다.
전쟁이 머물고
평온한 지평에서
모두의 단편적인 기억이
비둘기의 날개처럼 솟아나는 틈을 타서
우리는 내성內省과 회한에의 여행을 떠났다
평범한 수획收獲의 가을
겨울은 백합처럼 향기를 풍기고 온다
죽은 사람들은 싸늘한 흙 속에 묻히고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
토르소의 그늘 밑에서
나의 불운한 편력인 일기책이 떨고
그 하나하나의 지면은
음울한 회상의 지대로 날아갔다.
아 창백한 세상과 생애에
종말이 오기 전에
나는 고독한 피로에서
빙화氷花처럼 잠든 지나간 세월 위해
시를 써 본다.
그러나 창밖
암담한 상가
고통과 구토가 동결된 밤의 쇼윈도
그 곁에는
절망과 기아의 행렬이 밤을 새우고
내일이 온다면
이 정막靜寞의 거리에 폭풍이 분다.
85) 센티멘털 저니
주말여행
엽서… 낙엽…
낡은 유행가의 설움에 맞추어
피폐한 소설을 읽던 소녀.
이태백의 달은
울고 떠나고
너는 벽화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숙녀.
카프리 섬의 원정園丁
파이프의 향기를 날려 보내라
이브는 내 마음에 살고
나는 그림자를 잡는다.
세월은 관념
독서는 위장
그저 죽기 싫은 예술가.
오늘이 가고 또 하루가 온들
도시에 분수는 시들고
어제와 지금의 사람은
천상天上 유사有事를 모른다.
술을 마시면 즐겁고
비가 내리면 서럽고
분별이여 구분이여.
수목은 외롭다
혼자 길을 가는 여자와 같이
정다운 것은 죽고
다리 아래 강은 흐른다.
지금 수목에서 떨어지는 엽서
긴 사연은
구름에 걸린 달 속에 묻히고
우리들은 혀행을 떠난다
주말여행
별말씀
그저 옛날로 가는 것이다.
86) 태평양에서
갈매기와 하나의 물체
‘고독’
연월年月도 없고 태양은 차갑다.
나는 아무 욕망도 갖지 않겠다.
더욱이 낭만과 정서는
저기 부서지는 거품 속에 있어라.
죽어간 자의 표정처럼
무겁고 침울한 파도 그것이 노할 때
나는 살아 있는 자라고 외칠 수 없었다.
그저 의지의 믿음만을 위하여
심유深幽한 바다 위를 흘러가는 것이다.
태평양에 안개가 끼고 비가 내릴 때
검은 날개에 검은 입술을 가진
갈매기들이 나의 가까운 시야에서 나를 조롱한다.
‘환상’
나는 남아 있는 것과
잃어버린 것과의 비례를 모른다.
옛날 불안을 이야기했었을 때
이 바다에선 포함砲艦이 가라앉고
수십만의 인간이 죽었다.
어둠침침한 조용한 바다에서 모든 것은 잠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의식하고 있는가?
단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서.
바람이 분다.
마음대로 불어라, 나는 덱에 매달려
기념紀念이라고 담배를 피운다.
무한한 고독. 저 연기는 어디로 가나.
밤이여. 무한한 하늘과 물 그 사이에
나를 잠들게 해라.
(태평양에서)
87) 불행한 신
오늘 나는 모든 욕망과
사물에 작별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친한 죽음과 가까워집니다.
과거는 무수한 내일에
잠이 들었습니다.
불행한 신
어디서나 나와 함께 사는
불행한 신
당신은 나와 단둘이서
얼굴을 비벼 대고 비밀을 다 터놓고
오해나
인간의 체험이나
고절孤節된 의식 意識에
후회치 않을 것입니다.
또다시 우리는 결속되었습니다.
황제의 신하처럼 우리는 죽음을 약속합니다.
지금 저 광장의 전주 電柱처럼 우리는 존재됩니다.
쉴 새 없이 내 귀에 울려오는 것은
불행한 신 당신이 부르시는
폭풍입니다.
그러나 허망한 천지 사이를
내가 있고 엄연히 주검이 가로놓이고
불행한 당신이 있으므로
나는 최후의 안정을 즐깁니다.
88) 벽
그것은 분명히 어제의 것이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헤어질 때에
그것은 너무도 무정하였다.
하루 종일 나는 그것과 만난다
피하면 피할수록
더욱 접근하는 것
그것은 너무도 불길 不吉을 상징하고 있다
옛날 그 위에 명화가 그려졌다 하여
즐거워하던 예술가들은
모조리 죽었다.
지금 거기엔 파리와
아무도 읽지 않고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격문과 정치 포스터가 붙어 있을 뿐
나와는 아무 인연이 없다.
그것은 감서도 이성도 잃은
멸망의 그림자
그것은 문명과 진화를 장해하는
사탄의 사도使徒
나는 그것이 보기 싫다.
그것이 밤낮으로
나를 가로막기 때문에
나는 한 점의 피도 없이
말라 버리고
여왕이 부르시는 노래와
나의 이름도 듣지 못한다.
89) 어린 딸에게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 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의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貨車 위 별을 헤아리며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哀訴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금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디 있는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90) 한 줄기 눈물도 없어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용사가 누워 있었다.
구름 속에 장미가 피고
비둘기는 야전병원 지붕에서 울었다.
존엄한 죽음을 기다리는
용사는 대열을 지어
전선으로 나가는 뜨거운 구두 소리를 듣는다.
아 창문을 닫으시오
고지 탈환전
제트기 박격포 수류탄
“어머니” 마지막 그가 부를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옛날은 화려한 그림책
한 장 한 장마다 그리운 이야기
만세 소리도 없이 떠나
흰 붕대에 감겨
그는 남모르는 토지에서 죽는다.
한 줄기 눈물도 없어
인간이라는 이름으로서
그는 피와 청춘을
자유를 위해 바쳤다.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엔
비금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91) 구름
어린 생각이 부서진 하늘에
어머니 구름 작은 구름들이
사나운 바람을 벗어난다.
밤비는
구름의 층계를 뛰어내려
우리에게 봄을 알려 주고
모든 것이 생명을 찾았을 때
달빛은 구름 사이로
지상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새벽 문을 여니
안개보다 따스한 호흡으로
나를 안아 주던 구름이여
시간은 흘러가
네 모습은 또다시 하늘에
어느 곳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전형
서로 손잡고 모이면
크게 한 몸이 되어
산다는 괴로움으로 흘러가는 구름
그러나자유 속에서
아름다운 석양 옆에서
헤매는 것이
얼마나 좋으니.
[출처] 박인환의 시(3) 완 (서울시인협회) |작성자 풀과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