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건축
가람과 건축
절, 즉 불교사원에 있는 모든 구조물을 불교건축이라 할 수 있다.다시 말하면 건축공간인 사원의 대지에서부터 하나하나의 건조물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건축적인 것을 통틀어 '불교건축'이라고 한다.
불교사원은 초기에는 스님들이 거주하는 승원만 있었으나 불탑이 크게 성행하자 탑과 승원이 동시에 갖추어진 종합적인 사원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는 금당, 불전, 강당, 포살당, 후원, 요사채 등 스님들이 거주하면서 수행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건물이 세워졌다. 따라서 불교건축이라 하면 이러한 모든 구조물의 기본 배치에서부터 건물부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건축적인 것을 일컫는다.
‘가람’이란 부처님이 태어나신 인도에서 오랜 전부터 ‘절’의 의미로 쓰여 왔던 말이다. ‘가람’은 사스크리트어 ‘상가람마’를 소리나는 대로 한역한 ‘승가람마’를 줄인 것이다. ‘승가’는 ‘대중’을 의미하며, ‘람마’는 ‘원’이란 뜻인데 이를 줄여 ‘가람’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가람은 승가들이 한군데 모여 불도를 닦는 사찰을 의미하며 승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최초의 사찰은 부처님께서 생전에 기거하시던 기원정사나 죽림정사였다고 볼 수 있으며 부처님이 입적하신 뒤에는 불탑을 중심으로 가람을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커다랗고 둥근 탑과 탑 주변을 두른 담장, 그리고 사방의 탑문 등이 웅장한 규모와 성스러운 장식으로 세워졌다. 사방의 탑문에는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나 생전의 행적을 일러주는 여러 가지 조각그림이 등장하고 담장 안의 탑 둘레에는 계단과 탑돌이 길을 마련하여 ‘우요삼잡’이라는 탑을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관습이 생겨났다.
그리고 탑은 계속 사찰의 중심 건물로 세워지면서 하나 둘씩 부속건물을 갖게 되어 이른바 가람을 형성하게 되었고, 탑과 가람의 형태도 지역과 나라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중국에서는 가람이 궁궐건축과 대등한 형국을 이룰 정도로 불교가 상당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를테면 궁궐에서만 허용되는 단청, 둥근 기둥의 사용 등이 가람에서도 그대로 허용되었으며 남북시대 이후로는 궁궐의 건물배치와 다를 다 없는 정연한 가람배치 형식이 정해졌다. 이는 불교를 받아들였던 중국의 제왕들이
부처님을 가르침의 왕이신 법왕으로 받들어서 궁궐의 조영제도와 똑같은 법식을 사찰건축에서도 채택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 건축물들은 인도식이 아닌 중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따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가람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됨에 따라 중국식의 건축양식과 가람배치 방식을 따르게 되었다. 삼국시대 가람조영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선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불교가 공인되고 그로부터 3년 후인 375년에 이불란사와 초문사가 세워졌다.
뒤이어 평양에도 아홉 군데에 사찰이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의 가람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지만 않지만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팔각탑을 중심으로 동.서.북면의 세 곳에 법당이 배치된 일탑삼당식의 가람배치를 이루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고구려의 가람배치와는 달리 남북 일직선상에 앞쪽으로부터 중문.탑.금당(법당).강당의 순으로 일탑일당식의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익산 미륵사지의 경우는 나란히 세 곳에 각각 탑과 법당을 배치한 삼탑삼당식의 대규모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고, 황룡사지도 일탑삼당식의 가람배치로 발전된 것으로 보아 비록 고구려의 가람배치와 차이는 있으나 삼당가람이 계속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가람배치는 일탑일당식을 유지하였는데 이때부터는 탑보다는 법당의 규모가 훨씬 커지게 되었다. 그 이유로는 불자들의 인식이 탑뿐만 아니라 불상을 중시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탑이 법당 앞에서 짝을 이루어 양쪽에 세워지는 이른바 쌍탑가람이 생겨나게 되었는데,이것은 중국의 궁궐건축이나 사찰건축에서 대칭적으로 건물을 배치하는 관습이 전래된 것이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로는 모든 사찰이 질서정연한 가람배치법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화엄사의 경우에는 법당(각황전)의 위쪽에 사사자삼층 석탑이 세워지고 각황전, 대웅전 등이 증축됨에 따라 두 법당 앞에 탑이 하나씩 세워져 가람의 확장과 자연적인 지세의 형편에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연적인 지형지세를 존중하는 우리 민족의 심성과 땅의 기운을 증시하는 풍수지리사상에 의하여 탑이 가람배치의 질서를 벗어나 산봉우리나 강 언덕에 세워지기도 하였다.
절 안의 건물들도 가람배치의 기본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자연스럼 배치방식을 따르게 되었다.
고려시대부터는 도교, 민간신앙 등이 불교에 혼합되어 절 안에 북두칠성의 칠성신을 모시는 칠성각, 염라대왕을 비롯하여 저승의 시왕 등을 모시는 명부전, 우리나라 전통의 산신령을 모시는 산신각 등도 세워져 더욱 자유로워지고 포용화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또한 별도의 법당과 부속건물들이 배치와 관계없이 적절한 장소에 세워지고 탑도 절을 벗어난 곳에 세워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성주사, 운주사 등지에서는 여러 탑이 세워지는 다탑가람이 조성된 적도 있으며 이와는 정반대로 송광사와 같은 명찰에서는 탑을 조성하지 않기도 하였다.
따라서 가람 배치면에 있어서도 우리 민족 특유의 자연친화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한국식의 민족종교로 토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 가람의 분위기는 비록 활발하지는 못하였지만 조선시대의 가람에서도 그래도 계승되었다.
평지가람.산지가람
가람의 배치와 구조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의 사찰은 평지가람과 산지가람의 두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평지가람은 평지에 세워진 사찰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대로부터 중요한 사찰들은 왕도나 고을 한복판의 평지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평지가람 중에는 대규모의 사찰들이 많았는데 경주의 황룡사터, 익산의 미륵사 터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평지가람은 궁궐건축의 중문.정전.회랑 등의 구조와 유사하게 사찰의 건물이 배치되어 궁궐만큼이나 질서있고 당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산지가람은 산중에 터를 잡은 사찰이다. 산지가람에서는 기본적인 가람의 질서를 존중하되 산세의 기운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 안에 부속건물들을 조성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여러 단의 축대를 쌓아 높낮이가 서로 다르게 터를 다지고
적절히 건물을 배치하게 되는데 때로는 진입로가 꺾이거나 휘어지고 사찰의 전경도 똑바로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면에 절 입구로부터 일주문.천왕문.문루 등을 거칠 때마다 절 안의 광경이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특징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 사찰의 대부분은 이러한 산지가람을 이루고 있으며 건물의 규모와 공간의 배치에서는 산세와의 조화를 중시하였다. 그 중에서도 부석사.화엄사.영암사 등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지가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산지가람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전통건축과 주변 환경을 잘 간직해온 문화유산이며 고귀하게 보전되어야 할 성보라고 할 수 있다.
사찰 건축
불교 건축물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불전(법당)이다. 법당은 흔히 금당으로도 불리는데, 황금빛의 불상을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불전은 축대, 층계, 주춧돌, 기둥, 마루, 창호, 처마, 천장, 지붕 등 모든 부분의 조성에 각별한 공을 들여 부처님이 살고 계시는 최상의 전당으로 세워지게 된다. 따라서 사찰 내에서 가장 공을 들여 짓는 건물이 바로 법당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법당의 사방으로 부속건물을 질서 있고 조화롭게 배치함으로써 법당의 품격을 더욱 높이게 된다. 또한 대규모의 불전을 세우거나 불전의 장엄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2층, 3층 또는 5층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의 불전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화엄사의 각황전은 2층 건물로 세워졌으며 금산사 미륵전은 3층, 법주사 팔상전은 5층 건물로 세워졌다.
이러한 다층건물의 불전은 단층건물의 불전보다 규모가 크고 설계도 아주 복잡하다. 그뿐만 아니라 기술상으로 현대건축보다 훨씬 어려운 고도의 건축기법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예전에는 현대와 같은 발달된 건축장비와 자재 운반기술이 없었으므로 모든 건축공정이 수공과 지혜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기초공사
불천의 건축공정에서는 우선 불전과 부속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터를 잡아 터닦기를 한 마음 터가 무너지지 않도록 축대 쌓기를 하게 된다. 이때 축대는 막돌 쌓기, 바른돌 쌓기, 허튼층 쌓기, 바른층 쌓기 등의 축조법으로 석축이 이루어지는데 축조법의 선택에 따라 석축의 구성미가 다양하게 드러나게 된다.
석축 쌓기와 터다지기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건물을 짓게 되는데 고전적인 방식에서는 질서정연한 석조시간을 조성하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는 석조기단을 석축기단으로 대체하거나 기단을 생략하고 바로 낮은 토단 위에 기초공사를 하고 주춧돌을 놓기도 하였다. 주춧돌도 고려시대까지는 방향 또는 원형의 주춧돌을 사용하였는데 특히 조선시대 후기 이후로는 ‘덤벙주초’라고 하는 자연석 주출돌을 대강 다듬어 쓰는 방식이 유행하였다.
기둥과 지붕
기둥은 대체로 둥근 기둥을 썼으며 통일신라신대 이후에는 기둥의 중간부가 두툼해지는 이른바 배흘림기둥이 선보이기도 하였다. 현재 통일신리시대의 기둥이 남아 있는 건물은 없으나 당시의 승탑에서 배흘림기둥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으로 증명이 된다.
배흘림기둥은 기둥이 탄탄해 보이는 시각적 효과가 있다. 기둥을 세운 다음에는 기둥과 기둥을 위쪽 부분에서 꿰뚫고 연결하는
창방이 결구되고 각 기둥 위에는 커다란 주두가 놓이며 그 위로 지붕을 떠받는 부재들이 놓이게 된다.
지붕은 여러 부재들이 대규모로 결합된 구성물이므로 상당한 중량과 부피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붕을 구성하는 각 부재들은 역학적으로 치밀하게 짜맞추어져 지붕의 모양을 이루게 되고 동시에 육중한 지붕의 무게가 공평하고 안전하게 기둥으로 전달되도록 되어 있다.
공포
주두 위에서 지붕을 최초로 안전하게 떠받치는 부재들의 뭉치를 공포라고 하는데, 여러 개의 첨차와 소로로 구성된다. 첨차는 처마 밑에서 지붕의 무게를 받아내는 여러 겹의 받침부채이며, 소로는 이 받침부채들 사이에서 서로의 틈을 괴어주는 작고 납작하며 네모난 부재들이다.
고려시대까지는 이 공포들이 주로 기둥 위에만 설치되는 주심포식 건물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등은 대표적인 주심포식 건물이다.
그 후 고려시대 말기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도 공포가 설치되는 다포식 건물이 등장하여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다포식 건물의 공포 구조는 기둥 위의 주심포는 물론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간포가 설치되므로 기둥 끝을 관통하는 창방 위로 공포를 줄지어 얹어 놓을 평방이 설치된다. 즉 주심포식 건물과 다포식 건물은 공포의 숫자는 물론 평방의 유무로 쉽게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대들보, 도리, 서까래
공포의 구조를 이루는 첨차는 지붕 대부분의 무게를 지탱하는 대들도와 도리를 받게 되고 대들보는 지붕 전체를 가로로 받치게 된다. 도리는 여러 군데에서 서까래를 가로로 받쳐주는 긴 부재이다. 그 중 지붕 내부의 맨 위쪽 한가운데를 받는 것을 종도리, 중간 부분을 받는 것을 중도리, 기둥 안쪽을 받치는 것을 내목도리, 기둥 위에서 서까래를 받는 것을 주심도리, 기둥 바깥 쪽에서 받는 것을 외목도리라고 한다. 그런데 주심포식 건물에서는 내목도리가 없고 다포식 건물에는 내목도리가 있다. 서까래는 지붕꼴을 이루는 뼈대로서 통나무를 세로로 벌여 구성되며, 통상 지붕 위에서 처마 끝까지는 두 개의 통나무가 엇걸기로 연결되어 한 골의 서까래를 이루게 된다. 또한 처만 끝을 길게 내어 햇볕이나 빗물을 차단하고 아울러 처마의 맵시를 더하기 위해서는 한 토막씩의 빗물을 차단하고 덧대는 덧서까래가 설치되기도 한다. 처마의 네귀에서는 서까래가 부챗살처럼 퍼지면서 살짝 위로 들려 지붕모양이 곡선미를 나타내면서 더욱 우아하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기와
서까래 위에는 진흙과 짚을 버무려 덮고 기와를 얹어 지붕을 마무리하게 되는데 이때 덮이는 대부분의 기와는 두 종류이다. 그 중 지붕 바닥에 놓여 기왓골을 이루는 넓적기와를 ‘암키와’라 하고, 암키와와 암키와의 사이를 덮는 길쭉기와를 ‘수키와’라 한다.
그리고 지붕의 가장 자리인 처마 끝을 마감하는 기와를 ‘막새기와’라 하는데 여기에도 ‘암막새’와 ‘수막새’기와가 사용된다.
특히 막새기와에는 연꽃무늬, 당초무늬 등 여러 가지 장식무늬가 새겨지며 여기에 새겨진 무늬에 의하여 기와의 제작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바닥과 창호
건물 내부의 바닥에는 전돌 또는 마루를 깔게 된다. 대체로 전돌은 북방건축, 마루는 남방건축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원래 중앙에 설치되고 좌우에는 살창만 있었는데 조선시대 이후로는 건물 앞면에 온통 창호를 달아 건물 내부가 밝아졌다. 또한 창호는 띠살, 빗살, 꽃살 등으로 장식하고 이 창문들은 좌우로 접히고 위로 들려 건물 내부가 훤히 개방되도록 문달기 방식이 발식이 발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앞쪽 전체에 창호문이 달리게 되면서 이곳의 가운데 칸은 부처님을 위한 상징적인 출입통로가 되고 신도들은 좌우 벽체의 앞쪽에 개설된 출입문을 이용하게 되었다. 문은 뒷벽에도 설치된다. 뒷벽 중앙에는 출입문이 설치되고 양 옆면에는 창호를 내는데
예로부터 건물에는 사방에 사문팔창을 내던 조영법식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시대가 흐를수록 뒷벽의 창과 문의 사용 예는 줄어들어 오늘날에는 그 자취만 남아 있다.
불단, 불전, 단청
불전 내부의 중간부에는 약간 뒤쪽으로 불단이 설치된다. 불단 위에는 불상을 안치하고 불상 뒤에는 후불탱화를 걸게 된다. 이때 불단에 안치된 주존불상의 명호에 따라 불전의 명칭이 정해진다. 즉 석가모니불이 주존이면 대웅전, 대웅보전 등으로 불리어지고, 주존불이 비로자나불이면 대적광전, 대광명전, 보광전, 적광전 등으로 정해진다. 비로자나불이 ‘무한광명의 청정여래’란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불전의 명칭에 ‘광’자가 쓰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주존이 아미타불일 경우는 극락전, 아미타전, 관세음보살일 경우는 관음점, 원통전 등으로 불리고 미륵불일 경우는 미륵전, 천불일 경우는 천불전 등으로 불리게 된다.
이 밖에도 팔상전, 지장전, 시왕전, 명부전, 칠성각, 산신각 등도 건물 내부에 모셔진 주인공에 따라 명칭이 정해진다. 마지막으로 불전 내외부의 벽체와 천정에는 화려한 단청과 벽화 장식이 베풀어짐으로써 건물이 완공된다.
부속건물
사찰의 건물은 불전이 주건물이 되며 때로는 한 사찰에서도 불전이 여러 곳에 세워지기도 하여 불전 중에서도 주불전이 따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불전과 불전의 부속건물로는 창건주의 영정이나 초상을 모신 조사당, 교리를 강학하는 강당, 절 안마당으로 들어서는 곳에 세워져 강당으로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법고, 목어, 운판 등을 걸어 두기고 하는 문루, 범종을 걸어 두는 종루, 각종 불경을 보관해두는 경루, 불경을 새긴 목판을 보관하는 장경고, 스님의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는 요사채 등이 세워진다.
사찰 전각
1. 산문
(1) 일주문(一柱門)
절에 들어가서는 첫 머리에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문으로 이 문 위에 ○○산(山)○○사(寺)라는 산명과 사명을 밝히고 있으며, 기둥을 일렬로 세운 문이다. 이 일(一)이라는 개념은 불교의 진리를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며, 진(眞)과 속(俗)이 하나이며, 만법이 일심(一心)의 소현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문이다. 이 문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이는 세속의 부(富)와 명예(名譽)와 권력을 위해 밖으로 달리는 마음을 거두고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단에 귀의하여 마음을 밝히려는 참된 한 마음(一心)을 가져야 하므로 일주문이라 하며 빈.부 귀천에 관계없이 삼보앞에 평등하므로 '일주문'이라 한다.
그래서 이 문을 경계로 하여 밖의 세계를 속계로 보고 안의 세계를 참다운 마음의 세계인 진계라고 한다. 그러므로 일주문에서는 정중한 마음으로 합장하고 반배로써 삼보께 귀의하는 예를 올려야 한다.
(2) 천왕문(天王門)
번뇌로 어지러진 마음을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하나로 다진 뒤에 계속 걷다보면, 금강력사(인왕)나 사천왕 같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을 모신 건물이 나타나게 된다.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문으로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마(邪魔)를 방어하는 임무를 가진 호법천왕이다. 금강력사상이 자리잡고 있는 문은 금강문(金剛門)이고 사천왕상이 모셔진 문은 천왕문(天王門)이다. 보통 사찰로 들어서서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을 만나게 되나 금강문이 없는 경우에는 바로 천왕문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천왕문의 대문에다 금강력사의 모습을 그려 놓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천왕문 안에 조각상을 세우기도 한다. 천왕문은 사천왕과 금강력사의 힘으로 절을 외호하고 나쁜 귀신 등을 내쫓아 사찰을 청정한 도량으로 만들려는 데 있다. 그리고 방문자의 마음을 다시한번 더 엄숙하게 하려는 뜻도 담겨 있다. 이곳에는 수미산 중턱의 동,서, 남, 북에서 불국정토의 외곽을 지키는 네 명의 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신음하는 마귀를 발로 밟고 커다란 칼을 손에 든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온몸을 오싹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천왕은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지만, 착한 이에게는 상을 내린다고 한다.
(3) 불이문(不二門) 또는 해탈문(解脫門 )
불이문 또한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선과 악, 진과 속이 둘이 아니며, 나아가서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문으로 이 문을 통과하며 불법의 깊은 진리를 깨달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서 수미산 정상에 오르면 제석천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도리천 위에 불이(不二)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不二門)이 서 있다. 이 불이문을 통과하여 불이의 진리로써 모든 번뇌를 벗어 버리면 부처가 되고 해탈을이룬다고 하여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불이(不二)란 둘이 아님을 뜻한다. 즉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 선과 불선(不善) 등 모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닌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불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불국정토인 것이다.
2. 전각
명칭 | 다른명칭 | 본존불상 | 좌우협시존상 | 탱화도 |
적멸보궁 | 사리탑전 | 진신사리 | . | . |
대웅전 | 대웅보전 큰법당 | 석가모니불 | 가섭,아난 문수,보현 아미타불,약사여래 제화갈라보살,미륵보살 | 영산회상도 |
대적광전 | 비로전 대광명전 | 비로자나불 | 노사나불,석가모니불 문수보살,보현보살 | 화엄탱화 |
극락전 | 무량수전 미타전 | 아미타불 |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지장보살 | 극락회상도 |
약사전 | 유리전 | 약사여래 | 약왕보살 | 약사유리광도 |
용화전 | 미륵전 | 미륵불 (미륵보살) | 일광보살,월광보살 | 미륵탱화 |
영산전 | 팔상전 | 석가모니불 |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 | 영산회상도 |
응진전 | 나한전 | 석가모니불 | 가섭,아난, 16나한, 500나한 | 16나한도 |
원통전 | 관음전 보타전 | 괌세음보살 천수천안관세음보살 | 남순동자,해상용왕 | 관음탱화 |
명부전 | 지장전 시왕전 | 지장보살 | 도명존자,무독귀왕 시왕 | 지장탱화 |
대장전 | 장경각 |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 대장경 (책자,경책,경판) | . |
독성전 | 천태각 | 나반존자 | . | 독성탱화 |
산신각 | 산령각 | 산신 | . | 산신탱화 |
칠성각 | . | 칠성여래 | . | 칠성탱화 |
삼성각 | . | 독성,산신,칠성 | . | 각 탱화 |
(1) 대웅전(大雄殿)
법주사 대웅보전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컬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즉 석가모니부처님은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큰 힘이 있어 마군의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부처님이 되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손 모양(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 쪽으로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으로 마군을 항복받았던 모습을 나타낸다. 협시보살로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왼쪽에 모셔진 분이 문수보살로 부처님의 지혜(智慧)를 상징하는데 여의주나 칼, 청련화(靑蓮花)를 들거나 청사자를 탄 모습으로 표현된다. 또 보현보살은 오른쪽에서 부처님을 모시며 부처님의 행원을 상징한다. 흔히 연꽃을 들고 코끼리를 탄 모습으로 나타낸다. 대웅전은 법화천태종의 금당이었으나 조선후기에는 법화계통의 전통이 남아 있는 사원에서 주불전으로 사용했다. 불국사 대웅전, 통도사 대웅전, 쌍계사, 관룡사 대웅전 등 많은 걸작들이 남아 있다.
(2) 영산전(靈山殿)과 팔상전(捌相殿)
통도사 영산전
영산전은 영산회상을 재현해 놓은 곳으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시던 광경을 묘사한다. 석가모니부처님과 10대제자, 16나한 또는 5백나한을 모시기도 하고,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나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단계로 구분하여 묘사한 팔상도를 봉안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팔상전이라 부르는데 팔상탱화를 봉안하고 존상을 모실 경우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함께 왼쪽에 미륵보살, 오른쪽에 제화갈라보살을 모신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미래에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부처님이 되실 분이고 제화갈라보살은 아득한 과거 석가모니부처님이 수행자이던 시절 장래에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신 분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부처님과 더불어 이 두 협시보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상징하고 있다. 법주사, 쌍계사, 운흥사, 선암사, 범어사, 보경사 등의 팔상전이 알려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
(3) 대적광전(大寂光殿)
해인사 대적광전
대적광전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 줄여서 대광전(大光殿)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곳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부처님이 두루 비치는 빛, 즉 광명이나 적광의 성질을 갖고 있어 이렇게 이름지어진 것이다. 또한 화엄종 사찰의 주불전일 경우 이 이름을 붙이지만, 주불전이 아닐 경우에는 비로전(毘盧殿)이라 한다. 대적광전은 삼신불(三身佛) 사상에 따라 중앙에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고 왼쪽에 보신(報身) 노사나부처님, 오른쪽에 화신(化身)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법당으로, 사찰에 따라 법신 노사나부처님, 보신 아미타부처님, 화신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비로자나부처님의 수인은 오른손으로 세운 왼손의 검지를 감싸쥔 지권인(智券印)으로 이것은 이(理)와 지(智), 중생(衆生)과 부처(佛), 어리석음(迷)와 깨달음(悟)이 본래 하나라는 의미를 상징한다.
(4) 극락전(極樂殿)
무량사 극락전
극락전 혹은 극락보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중생들의 왕생 극락을 인도하시는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하는 법당으로 미타삼부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찰에 따라서는 무량수전(無量壽殿), 수광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수명장수의 성격을 갖고 있는 무량수불을 모시지만 아미타불의 한 속성이기 때문에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경우는 정토신앙 계통의 종파나 화엄종 등 사찰의 주불전이 될 때이다. 주불전이 아닌 경우에는 미타전 또는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 한다. 아미타부처님은 법장비구로 수행하던 시절에 48대원을 세워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 없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건설하셨다고 한다. 그때 세웠던 서원에 따라 누구나 일념으로 ‘아미타불’이란 명호만 부르면 극락왕생 시켜 준다고 한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많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부처님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는데 이를 다른 말로 미타정인(彌陀定印)이라 하며 중생의 근기에 따라 아홉가지 다른 수인을 취한다. 아미타부처님의 협시보살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혹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모셔진다. 대표적인 극락전은 천은사와 무위사에 있는 극락전이고 무량수전으로는 부석사가 유명하다.
(5) 약사전(藥師殿)
법주사 약사전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인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대개 왼손에 약병이나 약합, 약단지(무가주)를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삼계인을 짓고 있다. 좌우 협시보살로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모신다. 우리나라에는 이 전각이 상당히 많은 편으로 전등사 약사전, 통도사 약사전, 송광사 약사전, 관룡사 약사전, 고운사 약사전 등이 남아 있다.
(6) 미륵전(彌勒殿)
통도사 용화전
미륵전은 미래에 출현할 미륵부처님이나 미륵보살을 주불로 모신 불전이다. 또한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하여 용화세계를 이룩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미륵전 혹은 용화전(龍華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떠한 두려움도 없애 준다는 의미로 오른손끝을 위로 향하게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게 하는 시무외인과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의미로 왼손끝은 아래로 하여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는 여원인을 하고 있다. 협시보살로서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 혹은 묘향보살과 법륜보살을 모신다.
(7) 천불전(千佛殿)
대흥사 천불전
부처님이란 진리를 깨달은 이를 의미함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에서 과거, 현재, 미래에 각각 천불씩 존재한다는 의미로 천불전이라 이름한다. 천불전에는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미륵불(彌勒佛)을 위시하여 누지불까지 현겁천불을 모시며, 과거 장엄겁천불, 현재 현겁천불, 미래 성수겁천불의 삼천불을 모신 사찰도 있다. 천불전은 해남 대흥사 천불전이 유명하다.
(8) 원통전(圓通寶殿)
법주사 원통보전
중생구제를 위한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전각이다. 대비전(大悲殿), 보타전(菩陀殿)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주불전일 때는 원통전이라 부르며, 부속 전각일 때는 관음전(觀音殿)이라 부른다. 남순동자와 행상용왕을 협시로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나 수월관음도 혹은 아미타불화를 봉안한다. 송광사 관음전, 통도사 원통전, 법주사 원통전, 선암사 원통전, 범어사 관음전 등이 대표적이다.
(9) 지장전(地藏殿)
법주사 명부전
지장전은 중생구제의 큰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전각이다. 그러나 지장보살이 지옥중생의 구세주이기 때문에 협시인 도명존자 및 무독귀왕 이외에도 염라대왕을 위시한 지옥의 시왕상(十王像)을 봉안하고 있어 명부전(冥府殿)이라 더 많이 불린다.
지옥시왕(地獄十王)은 인도 고대신화에 나오는 사후세계의 지배자인 야마왕이 불교에 들어와 지옥을 다스리는 염마왕이 되었다. 그것이 중국의 도교 영향을 받아 10가지 지옥과 그곳의 왕을 설하는 시왕사상으로 발전하면서 오히려 시왕 중에 한 분으로 변모하였다. 시왕의 각 명호는 진광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태왕, 평등대왕, 도시대왕, 전륜대왕 등이다.
(10) 응진전(應眞殿)
해인사 응전전
응진전은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신 곳으로 응진이란 ‘존경받을 만하다’, ‘공양받을 만하다’라는 의미이다. 또한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하여 석가모니불의 직제자 가운데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16나한이나 경전결집에 참여했던 500나한을 모시기도 한다. 16나한의 각 명호는 빈도라발라사, 가낙가벌차, 가낙가발리타사, 소빈타, 낙거라, 발타라, 가리가, 벌사라불다라, 술박가, 반탁가, 라호다, 나가서가, 인게타, 벌나바사, 아시다, 주다반탁가 등이다. 나한은 부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이므로 초자연적인 신통력과 더불어 독특한 표정과 자유스러운 자세를 갖고 있다. 또한 나한은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들을 제도하라는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분들이라 민간신앙에는 무수한 설화들이 등장하며 서민들의 기복신앙으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 500나한을 모신 곳으로 유명한 곳은 금산사 나한전, 옥천사 나한전, 기림사 오백나한전, 송광사 나한전 등이다.
(11) 조사전(祖師殿)
동화사 조사전
조사전은 역대 조사나 그 종파의 조사스님, 사찰의 창건주, 역대 주지스님 등 해당사찰과 관련하여 후세에 존경받는 스님들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조당, 조사당, 국사전(國師殿) 등으로도 부른다. 특히 통도사의 영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영정을 보존하고 있으며, 송광사 국사전과 해인사 조사전, 신륵사 조사당 등이 대표적이고 불영사의 의상전에는 의상조사의 영정과 더불어 원효대사, 종봉대선사, 청허대선사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다.
(12) 삼성각(三星閣)
금산사 삼성각
삼성각은 칠성(七星)과 독성(獨星) 및 산신(山神) 세분을 한 곳에 모셔놓은 곳으로, 나누어 모셨을 때는 칠성각(七星閣), 독성각(獨星閣), 산신각(山神閣)이라 이름한다.
(13) 칠성각(七星閣)
신륵사 칠성각
‘칠성’이란 북두칠성을 일컫는 것으로, 사찰에 칠성을 모시게 된 것은 중국의 도교사상이 불교와 융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칠성을 부처님들로 화한 경우가 보통인데, 치성광여래를 주존으로 모시고 있다. 손에 금륜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에 협시로 배치된다. 특히 조선시대 가장 성행한 전각으로 운문사, 옥천사, 선암사 칠성각 등 수많은 예가 남아 있다.
(14) 독성각(獨成閣)
나반존자라는 분이 모셔져 있으나 정확히 어떤 분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아서 16나한의 한 분인 빈도라발라사가 아닌가 여겨진다. 빈도라발라사는 코삼비국 재상의 아들로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하여 구족계를 받았다고 한다.
(15) 산신각(山神閣)
칠성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고유하게 발달한 토속신인 산신과 호랑이를 모신 곳으로 사찰이 산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일종의 외호신중으로 산신령을 모시게 된 것으로 풀이된다. 민간신앙에서는 산에 사는 영물로 호랑이를 산군으로 모시기 때문에 산신은 언제나 호랑이를 거느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16) 장경각(藏經閣)
장경각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경(佛經)이나 목판(木板)을 봉안한 전각으로 사찰에 따라 대장전(大藏殿) 혹은 판전(板殿), 법보전(法寶殿) 등으로 불리운다. 대표적인 곳으로 합천 해인사의 장경각과 예천 용문사 대장전, 선암사 장경각, 용주사 경각 등 많은 예가 있다. 특히 용문사 대장전에는 경을 넣어 돌리면서 열람하거나 예배하는 윤장대라는 것이 있어 더욱 유명하다.
(17) 강당(講堂)
강당은 불교의 교설을 강의하는 곳으로 조선시대의 선종에서는 법당이라 불렸다. 신라 때까지는 모든 절에 강당이 반드시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법당 앞에 있는 만세루 등의 누각(樓閣)이 강당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며, 모든 설법은 원칙적으로 이 곳에서 행해졌다. 그래서 설법전(說法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18) 포살당(布薩堂)
스님들은 보름마다 모여 참회하는 포살법회를 갖는데, 이 때 모이는 곳을 포살당이라 하며, 이 때 계를 설하기도 함으로 설계당(說戒堂)이라 부르기도 한다.
(19) 선방(禪房)
스님들이 참선하시는 방으로, 선종에서는 가장 중요한 전각이라 하여 선불당(選佛堂)이라고 한다.
(20) 승방(僧房) = 요사채
스님들이 거주하시는 방으로 석가모니불 생존 당시부터 필수적인 건물이다. 삼국시대나 신라시대에는 금당(金堂)의 동서(東西)로 배치되어 동서승당이라 했으며, 조선시대부터 '요사채'라 불리고 있다.
(21) 범종각(梵鍾閣)
종을 매달아 놓은 곳으로 종루(鍾樓)라 부르기도 하며, 북을 매단 곳을 고루(鼓樓) 또는 고각(鼓樓)이라 하지만, 대개 절의 사물(四物)이 함께 안치되어 있어 통칭하여 범종각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