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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시아 상좌부 불교의 전파 (南傳) >
<이 부분은 ‘송위지’ 한국 외국어 대학교 경영학과 및 스리랑카 국립 케레니야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서울 보건대 교수의 글을 상당부분 인용하였고, 일부 내용을 추가하였습니다.>
1.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와 아쇼카 왕, 그리고 그 이후
붓다 입멸 이후 인도에서는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되풀이했다. 기원전 4세기 중엽에는 마가다 왕국이 가장 강력했고, 하란캬· 싸이슈나가· 난다의 뒤를 이어 나타난 마우리야 왕조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해 나갔다. 기원전 4세기경 페르시아를 멸하고 인도에 침입해 펀잡 지방을 점령했던 알렉산더가 죽자, 인도에서는 이민족의 침입과 정복에 자극받아 국민의 자주 의식이 높아져 있었다. 이때 찬드라굽타는 그리스 군대를 내몰고 펀잡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
마우리야 왕조의 시조 찬드라굽타 마우리야(B.C.324∼297)는 난다 왕조의 계보에 속했었으나, 그의 어머니 무라 데위의 이름에서 공작이라는 뜻을 지닌 마우리야(Mauriya)를 국호로 택했다. 찬드라굽타는 난다 왕국도 정복했으며, 기원전 322년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했다. 마우리야 왕조가 인도 대륙을 통일한 것은 아리안의 도래 이후 선주민이었던 드라비다인들과 아리안들의 갈등에서 아리안들의 완전한 승리와 외세에 대한 인도인의 독립을 뜻하고, 이를 계기로 아리안들이 완전히 인도 대륙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찬드라굽타의 손자이자 마우리아 왕조의 3대왕인 아쇼카 왕(B.C.273∼232, 한역으로 아육왕(阿育王)이라고도 하는데 a(부정접두어) + soka(근심, 슬픔)으로 분해되듯이 ‘근심이 없는[無憂]’이란 뜻이다.)은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아쇼카 왕은 남부 타밀 지역을 제외하고는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북쪽으로는 카시미르· 네팔, 동쪽으로는 칼링가까지 정복하는 등 마우리야 왕조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아쇼카 왕은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주변의 국가들을 병합하기 위한 전쟁을 했다. 기원전 261년 칼링가 국을 무력으로 정벌하면서 전쟁의 잔인함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는바,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로 이송되어 부모를 잃거나 자식과 헤어지고 부부가 이별하는 등의 비참한 상태를 보고 전쟁의 죄악을 통감했다. 그리하여 폭력에 의한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아니며 ‘법에 의한 승리(dhamma-vijaya)'야말로 진정한 승리임을 깨달고, 정복전쟁의 포기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아쇼카 왕은 이민족이나 다른 국가를 공격할만한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롭게 지낼 것을 자발적으로 선언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었다.
집권 초기에 자이나교 신자였던 왕은 불교에 귀의해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으며, 인도 역사상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최초의 왕이 되었다. 왕은 자신이 신앙하는 진리를 국민들이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 법칙을 발표해 암벽이나 석주에 새겨 놓았다. 자신이 깨달은 법을 선포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해 돌비석에 새기도록 했는데 이것이 암벽을 깎아 법칙을 새긴 ‘마애법칙(磨崖法則)’과 거대한 사암의 기둥을 깎아 거기에 법칙을 새긴 ‘석주법칙(石柱法則)’이다. 석주법칙에는 석주의 주두(柱頭)에 동물의 조각이 얹혀 있는데, 특히 사르나트의 석주애는 주두에 거대한 네 마리의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바로 밑에 법륜이 새겨져 있다.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조각으로 독립인도의 문장(紋章)이 되었다.
아소카왕이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법으로 생각한 것은 인간의 본질은 평등하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생명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며 관용과 인내를 발휘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등의 윤리적인 성실성과 자비의 이념이었다. 아소카왕은 이를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불변의 진리라고 굳게 믿고, 이를 자손만대에까지 전하고자 하여 법칙으로 새긴 것이다. 법칙의 내용은 깊은 사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살생 금지, 수렵 폐지와 같은 국민에 대한 도덕적 훈계들이었으며, 특히 법대관(法大官)을 설치해 종교적으로 평등정책을 펼쳐서 불교 뿐만 아니라 브라만교· 자이나교· 아지비카 등 다른 종교들도 동시에 보호하였다.
그는 밖으로 불교를 북으로는 히말라야의 산간지대와 중앙아시아의 일부 지역, 남쪽으로는 스리랑카, 동쪽으로는 미얀마, 그리고 서쪽으로는 멀리 그리스,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에까지 퍼지도록 정법을 포교할 전법사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불교가 인도를 벗어나 세계종교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또 안으로는 인도 전역에 8만 4천의 탑을 세워 부처님의 사리를 나누어 봉안하고 탑원과 승원에 많은 토지와 건물을 보시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로 승원이 안정되고 아비달마 교학이 꽃필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룸비니, 녹야원, 붓다가야, 쿠시나가라를 비롯한 많은 불적을 순례하고 그곳에 탑을 세웠으며 산치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탑도 세웠다. 왕이 많은 불탑을 세운 것은 당시 불교도들 사이에 불탑신앙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요구에 부응하여 왕은 불탑을 건립했을 것이다.
왕은 불교교단이 법의 실천자임을 깊이 인식하고 승가를 아낌없이 원조했다. 그러나 승가에 막대한 보시를 하다 보니 국가경제가 압박을 받게 되었고, 만년에는 태자나 대신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승가에 보시하는 것을 제지당하여, 결국에는 수중에는 아말라까 열매의 절반밖에 안 남았다고 한다.
아쇼카 왕의 불교와 관련한 중요한 치적으로는 불전의 제3차 결집과 전도사의 파견을 들 수 있다. 제3차 결집에 대하여는 이미 설명한 바 있으므로 이를 생략한다.
아쇼카 왕은 외국으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작업을 한 최초의 왕이었다.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은 남방 상좌부 불교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해당 지역의 전설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역사적 기록에 의한 것이든 남방 상좌부 불교가 성립되는 최초의 사건들은 이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과 관련이 있다. 전도사의 파견은 아홉 차례에 걸쳐 있었다. 여덟번째는 미얀마, 아홉번째는 스리랑카와 관련이 있다.
아소카왕은 불교에 귀의했지만 다른 종교도 평등하게 취급했다.
아쇼카왕 이후 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전파되어감에 따라 각 지방에는 자연히 불교 중심지가 출현하게 되었다. B. C 2세기 - A. D 3세기에 걸쳐 각지의 불교 중심지에는 승원이 건립되고 예불당이 완비되었으며 승가도 더욱 확장되었다. 스투파(불탑)가 각지에 세워지고 신자의 수도 증대되었으며, 이러한 배경 속에서 불교철학과 미술도 그 꽃을 활짝 피우기 시작했다.
동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에 있던 쿡쿠타아라마는 불교 수행의 중심지로서 많은 승려들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근처에서는 불교가 민간 신앙적인 요소를 수행하면서 민중 사이로 전파되어 갔음을 보여주는 거대한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 이 밖에도 오래된 승원 자리가 근처에서 발견되는 등 동인도에서는 불교가 폭 넓게 신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우리아 왕조는 아쇼카왕 사후 40여년을 지나 멸망하고, 이후 서기 1세기에 쿠샨 왕조가 성립될 때까지 인도에서는 여러 지방세력이 난립하여 패권을 다투고, 더욱이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내지 북아시아의 스키타이, 남인도의 드라비다, 그리고 그리이스인의 식민국가 세력까지 이 패권다툼에 참가하게 되어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처럼 복잡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착실히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정자를 세우고 스투파(불탑)를 조성했으며 승원 기구도 확립하여, 비구들은 경. 율. 론 3장을 편찬하고, 특히 아비다르마라는 복잡한 불교교리의 체계도 발전. 완성시켰다.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여러 가지 이질 문화들이 소용돌이치는 복잡한 문화변동 가운데서도 불교가 사회적으로 정착. 발전해 갈 수 있었던 것은 기원전 2세기 중엽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인도 국내외의 상공업 발달과 이에 따른 대자본가의 출현, 그리고 그들의 종교적 요청에 맞추어 불교교단이 자기 변신을 시도해 왔기 때문이다. 상인과 왕족들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으니 그것은 불교가 그들의 신봉과 보호를 받을 만큼의 내용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까닭이다.
<서인도>
B.C 3세기 - A.D 12세기까지 불교의 중심지로서 많은 스투파가 건립되었는데, 바르후트 불탑과 산치 대탑 등은 유명하다. 스투파는 불사리 탑 혹은 불제자의 사리탑으로서 재가 불자의 예배 대상인 동시에 공덕을 쌓는 장소이기도 하다. 스투파 숭배는 시대와 더불어 점차 일반화되어 갔으며 나중에는 비구들도 여기 관여하게 된다. 이 당시까지는 불상의 조성이 금지되었으므로 재가신도들에게는 예배대상이 없었던 터이라, 그들이 불탑을 통해 불타께 예배를 드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스투파의 봉헌자 명단을 보면 상공업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관리들도 있으나 농민은 전혀 없다. 여기서 당시의 불교가 주로 사회의 어떤 계층에 의해 지지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데칸 서부>
서인도 교단의 교세는 남하를 거듭하여 데칸 서부에 이르렀다. 이 지역은 서방세계와 무역으로 활기를 띠었으며 상공업이 번창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 B.C 1세기 - A.D 8세기 동안 데칸고원에는 온갖 석굴 사원이 조성되었다. 불교교단은 왕조의 변동에 관계없이 상인과 왕족의 비호를 받아가며 발전하였고, 재가신도 특히 상인들은 석굴 조성에 보시함으로써 사후에 생천(生天)할 것을 기원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수도승들에게 토지나 촌락을 보시하는 일이 일반화되어 인도 전역에 걸쳐 승가(교단)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교교단은 늦어도 1세기경부터는 장원제도의 바탕 위에서 경제적 기반을 다져가게 되었다.
<안드라 지역>
데칸 서부의 불교는 안드라로 뻗어갔다. 현존하는 불탑과 승원 유적들이 당시의 불교의 융성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안드라 지방에서는 대중부 계통의 부파가 번창하여 대승불교가 성립할 때까지 많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마투라>
마우리아 왕조 이후 여러 부파가 정착하는데, 특히 설일체유부의 중심이 되었으며, 마투라의 교단은 얼마 후 북서인도의 캐시미르와 간다라 지방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 카시쉬카왕과 불교 >
쿠샨시대에는 마투라부터 간다라지방에 설일체유부(간단히 유부(有部)라고도 한다)를 비롯한 부파불교의 여러 파가 서로 경쟁하고 있었으며, 대승불교도 점차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서기 2세기에는 카니쉬카왕이 출현하여 유부를 크게 비호하였으며, 파르쉬바 존자의 제의에 따라 캐시미르에 500명의 장로를 모아 결집을 행하였다고 하며, 이때에 불상조각이 출현되었음은 특기할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기원전부터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는 예배 대상으로서의 신상과 지나상이 조성되었으나, 불교도들은 민간신앙적인 조각은 만들었지만 교리와 전통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불상은 제작하지 못하고, 다만 불탑 숭배가 일반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1세기 말 - 2세기 초 무렵부터 간다라에서부터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하고, 비슷한 시기에 마투라에서도 불상이 조성되었다.
불상의 출현에 의해 불교의 신앙 형태는 커다란 진전을 보인다. 지금까지 재가신도의 신앙은 불탑과 민간신앙적인 조각에 대해 현세 구복적인 기원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불상이 출현하였던 것이다. 남방 상좌부 계통에서는 원칙적으로 불상이 추모적인 예배대상이며, 현세 구복적인 대상은 아니다. 대승불교에서는 힌두세계로부터 여러 보살, 명왕(明王) 등을 풍부하게 흡수하였는데, 제불 보살에 대한 숭배는 수행의 과정 속에 편입되는 동시에 현세구복의 대상이 되었다.
2. 스리랑카 상좌부 불교의 역사
아쇼카 왕이 아홉 번째로 전도사를 파견한 곳이 스리랑카이다.
스리랑카의 불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주로 전설에 기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접근하는 것이다. 전설에 기초하는 스리랑카의 불교는 그 섬의 주인으로서 싱할라(Sinhala, 사자의 후예라는 뜻)족들이 가지고 있는 불교 지향적인 생각이다. 이에 대한 내용이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나, <소사(小史)>나 <대사(大史)> 같은 역사서들에서 전하는 스리랑카의 개국설화에 잘 나타나 있다.
탐바파니(Tambapan.n.i, 銅常島라 번역되며 항상 보물이 있다는 뜻)라고 불리던 곳에 싱할라들이 나라를 세운 것은 기원전 543년이다. 이 기원전 543년은 남방 불교국가에서 주장하는 석가모니 붓다의 입멸 연대이다. 즉, 스리랑카의 조상이라고 여기고 있는 스리위자야가 일단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인도로부터 스리랑카 섬으로 건너감으로써 시작되는 스리랑카의 역사가 석가모니 붓다가 열반한 해와 일치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스리랑카인들에게 아주 강하게 각인되어 정신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정체성을 찾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불교와 관련된 또 다른 전설은 석가모니 붓다가 재세시 스리랑카를 세 번 방문했다는 것이다. 그 지역은 마히앙가나· 켈레니아· 스리파다라고 하지만, 석가모니 붓다의 일생을 볼 때 스리랑카를 방문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다음은 역사서에 입각한 정통 불교 교리 발달 및 불교 전래의 입장이다.
아쇼카 왕이 스리랑카에 파송한 전도사는 마힌다 장로이다. 그는 아쇼카 왕의 아들로서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스님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4명의 비구· 우바새와 함께 스리랑카의 최초의 수도이고 2600년 역사의 고도 아누라다푸라에서 약 13Km 떨어진 산정상의 조그만 석굴에서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후에 마힌다 장로를 받아들인 곳이라는 의미의 미힌탈레(Mihintale)라고 이름지어 졌다.
당시 축제기를 맞이해 그곳으로 사냥을 나왔던 스리랑카의 왕 데와남피야 티싸는 숲속에서 수행하는 이들을 보고는 사냥을 포기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게 되니, 이 날이 포손 포야(Poson Poya)인 양력 유월의 만월일, 즉 음력 5월 15일이다. 마힌다 장로 일행을 맞아들인 데와남피야 티싸는 아누라다푸라에 마하위하라(Maha?ihara, 大寺)를 지어 수행 장소로 제공하고 포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으며 동시에 많은 이들을 귀의시키니, 이것이 스리랑카 불교의 시작이다.
이듬해 마힌다 장로의 누이인 상가미타 비구니가 인도의 붓다가야에서 보리수 나무를 가지고 와서 아누라다푸라에 심으니 그 보리수 나무는 살아있는 붓다로서 지금까지도 스리랑카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마힌다 스님의 도래에서 비구 승단이 시작되었으며, 상가미타 비구니의 도래에서 비구니 승단이 시작되니 명실공히 제 모습을 갖춘 승단의 활동이 스리랑카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순조롭게 시작된 스리랑카 불교는 토착화에도 성공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1세기에 건립된 아바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ara, 無畏山寺)의 스님들이 왕이 자신들을 총애하는 것을 기회로 그 동안의 스리랑카 불교를 이끌어 왔던 대사파(大寺派)와 다른 방법의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정법이 아닌 비법적인 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하게 되었다.
이렇듯 별도의 부파가 발생하자 이런 상황을 염려했던 대사파의 스님들이 기원전 1세기에 구전되던 불전의 문자화를 통하여 교의의 왜곡을 방지하고자 스리랑카 중부에 있는 알루위하라(Aluviha?a, 새 절이라는 뜻)에서 종려나무 잎에 파알리 경·율·논 삼장을 문자로 새겼다. 이것이 현존 상좌부 불교의 소의 경전인 파알리 삼장의 완성이다. 이는 당시의 왕이었던 왓타가마니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승단의 의지와 일부 재가자들의 보시의 힘으로 이룩된 것이다.
이 시기에 인도로부터 넘어온 독자부(부파불교의 일파) 계통의 담마루치 장로는 무외산사에서 불법을 폈으며, 이들에 대해 대사파는 상좌부의 분별설부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스리랑카 불교의 정통 맥을 이어왔다. 서기 3세기 인도에서 건너온 또 다른 계파인 대승계통의 방광파의 스님들이 다시 무외산으로 들어와서 머물다가 일부가 그곳을 떠나 다른 파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기타림사파라고 한다. 기타림사파가 완성된 것은 4세기 초이며, 이로써 스리랑카의 불교는 대사파· 무외산사파· 기타림사파의 세 개의 파로 나뉘어 진다.
그 후 지속적으로 대사파와 무외산사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8세기 전반 인도로부터 대승 불교, 특히 밀교가 전래되기도 하였으나, 그 세력은 미약하였다.
굽타 왕조가 쇠퇴하면서 다시 세력을 구축한 드라비다인의 촐라 왕조는 지속적으로 스리랑카를 침입하였고, 이 침입으로 고도 아누라다푸라는 폐허가 되고, 수도를 폴론나루와로 옮겼다. 이때는 스리랑카 내부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해 불교의 발전 역시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이런 혼란 때문에 승단 역시 쇠퇴하였다.
하지만 남인도의 촐라인들을 격퇴한 위자야바후 1세(1059∼1113)는 11세기 말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스님을 초빙하여 스리랑카의 승단을 부흥시켰다. 12세기 중엽(1153∼1186)에 쁘락크라마바후 1세는 대사파· 무외산사파· 기타림사파의 타락한 스님들을 강제로 환속시키고, 대사파를 정통으로 삼았으며 승단이 대사파의 계율을 따르게 했다. 이로 인해 무외산사파와 기타림사파는 부정되고 그 세력을 잃었으며, 10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던 계파간의 갈등은 완전히 끝이 나고 현재의 정통 상좌부 불교로의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말하고 있는 상좌부 불교는 아쇼카 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에 의해 전해졌던 모습 그대로라고 하기에는 다소간의 무리가 있다. 중간에 무외산사파나 기타림사파 스님들에 의해 비법이 자행된 경우가 많으며, 그런 것들을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방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12세기 중엽(1153∼1186)에 쁘락크라마바후 1세에 의해 대사파 중심으로 정리된 스리랑카의 승단은 정통 상좌부 불교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노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3.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역사
스리랑카와 마찬가지로 미얀마에 불교가 전래된 것 역시 실증적인 면과 전설에 의지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9세기에 석가모니 붓다의 종족인 석가족의 아비라자가 석가족의 근거지였던 카필라바스투에서 미얀마로 건너와 미얀마 최초의 국가인 타가웅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 후 고타마 싯다르타가 득도하여 석가모니 붓다가 된 후 미얀마의 레가인, 슈세트, 프롬 등의 지역을 돌며 설법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석가모니 붓다가 재세시에 인도 이외의 나라를 방문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전설은 스리랑카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얀마인들에게도 석가모니 붓다의 후예라는 자긍심을 심어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불교가 전승되어 올 수 있는 것은 물론, 인도에서 굽타 왕조 이후 힌두교의 부흥으로 인하여 불교와 사원이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아주 긴 기간 동안 미얀마의 왕실이 인도에 있는 사원과 승단을 위하여 각종 물질적인 것들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는 버마족의 영웅 아노라타 왕(1044∼1077)이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우면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의 미얀마는 스리랑카와 유사하게 대승불교는 물론 밀교까지 들어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아노라타 왕은 통일을 이룬 후 불교 혁신 운동을 펼쳤다. 1057년 아노라타 왕은 몬의 수도 타톤을 공격하는 데 타톤을 공격한 이유 중 하나는 바른 승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타톤을 정복하여 몬의 왕이었던 마누하까지 포로로 삼았던 아노라타 왕은 몬의 고승이자 아라한과를 증득했던 싱의 협력을 받아 파알리어 삼장은 물론 주석서들을 파간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아라한 싱을 따르던 500여 스님들도 파간으로 받아들여 파알리어 삼장을 중심으로 불교를 연구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파간 왕조 시대에 뿌리를 내린 미얀마 상좌부 불교는 그 주변 특히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와 빈번한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힌두 중심의 촐라인들을 내몰고 불교를 부흥시켜 상좌부 불교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위자야바후 1세(1059∼1113)의 스리랑카와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때 미얀마에서는 파알리 삼장은 물론 흰 코끼리 1마리를 기증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스리랑카로부터 붓다의 전골사리(全骨舍利)를 받았다. 1180년 웃다라지와 스님은 직접 스리랑카로 가서 정통 상좌부를 수학하고 미얀마로 돌아왔으며, 그는 파간 북부 냐옹유에 스리랑카 양식의 사원을 건립하고 새로운 승단을 설립하였다.
1287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파간 왕조가 멸망한 후 약 2세기 가량 군웅할거 시대가 지속되었다. 이 군웅할거의 시대는 산 족이 중심이 되어 페구와 아바를 각기 수도로 하는 두 개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이때 페구를 수도로 하였던 라만야데사의 담마체띠 왕(1472∼1492)은 출가 경력을 지닌 왕으로 ‘붓다라자(Buddharaja, 불교왕)’라 불리웠다. 1475년 담마체띠 왕은 차트라두타와 라마두타 2인의 정부 각료와 목갈라하나, 마하시발리 등 22명의 장로로 구성된 대규모의 파견단을 스리랑카로 파견하였다.
이 당시의 파견단은 불치(佛齒)에 공양할 선물과 미얀마의 왕이 스리랑카의 장로들에게 올리는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 이들은 스리랑카의 켈레니야 강의 선상에서 스리랑카의 망갈라 장로를 전계사로 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며, 스리랑카에서 제공하는 불치의 모조품, 보리수 나무의 가지·잎·종자, 스리랑카 불교 정화의 역사를 기록한 서적, 스리랑카 장로들의 편지, 게송 등 많은 선물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특히 쁘락크라마바후 1세에 의해 대사파 중심으로 정리된 스리랑카의 승단의 율법을 가져왔다.
이들이 귀국하자 담마체띠 왕은 도성의 근교에 여법한 도량을 갖추고 미얀마 내의 많은 젊은이들을 득도시켰다. 이 도량의 이름을 ‘켈레니야 도량’이라 하였고, 그 수계작법을 라마냐데사 수계작법이라 하였는데 그 수계작법을 이용하였던 파를 ‘라마냐파(Raman?? Nika?a)’라 하였다. 라마냐파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한 종파로서 지금까지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의 스리랑카에도 라마냐파가 존속하고 있다.
4. 태국 상좌부 불교의 역사
그 기원이 뚜렷치는 않으나 타이의 불교역사는 수코타이 왕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대승 불교와 힌두교 등 여러 종류의 종교가 혼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수코타이 왕조는 미얀마의 아노라타 왕이 채택했던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여 상좌부 불교 중심의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지만, 상좌부 불교가 타이에서 뿌리내린 것은 14세기 후반 라마디파티 1세를 시조로 하여 기존의 수코타이 왕조를 병합한 아유타야 왕조 시절이라 할 수 있다.
미얀마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기까지 4백여 년을 유지했던 아유타야 왕조의 시리스리야반살마 왕은 1361년 스리랑카로 사신을 파견해 스리랑카 대사파의 가르침을 이어 받았다. 이때 스리랑카로부터 장로가 될만한 스님은 물론 파알리어 불전과 스리랑카 불교의 각종 의식 및 예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국교로 삼았다. 이것이 타이의 상좌부 불교의 진정한 효시라 할 수 있다.
특히 1750년 스리랑카에서 내부적으로는 왕권의 비불교화로 인한 승단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과, 외부적으로는 스리랑카의 일부를 지배했던 네덜란드와 가톨릭 세력에 의한 탄압으로 승단의 법맥이 끊기자 타이의 상좌부 불교 교단의 스님들이 스리랑카로 가서 스리랑카의 법맥을 부활시켰는데, 그 승단의 이름이 당시 타이의 국명이었던 씨얌파(Siyam Nika?a)이었으며 현재 스리랑카 최대의 승단이다.
5. 기타 지역에 대하여
쟈바지역은 13세말 인도에서 밀교가 전해 졌지만, 후에 이슬람권으로 바뀌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13세기말 태국의 침입을 받으면서 상좌부 불교가 전해져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베트남은 중국과의 오랜 교섭과 교류로 6-7세기경 대승불교가 전해졌는데, 특히 중국선종이 큰 영향력을 발휘해 선종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6. 남방 상좌부 불교의 기복 의식 - 피릿
최근 일부 논자들은 스리랑카를 위시한 남방 상좌부의 불교는 기복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기복(祈福)은 ‘복을 빔’ 또는 ‘복을 내려 주기를 기원하는 일’이며, 기복과 상대가 되는 말이라 할 수 있는 작복(作福)은 ‘스스로 복을 만든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남방 상좌부 불교에도 분명 기복적인 요소와 의식이 있다.
파알리 경전에도 기복적인 요소가 설해지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피릿(pirit) 의식이다. 피릿은 ‘보호’ ‘안전’ ‘수호’ ‘주문’ ‘부적’ ‘호주(護呪)’ ‘호경(護經)’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의식은 파알리 경전에서 유일하게 타력적인 방법을 통하여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석가모니 붓다가 인정한 의식으로, 붓다 역시 이 의식을 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붓다 생존시 인도의 리차비(Licchavi) 족이 살고 있던 베살리 지방에서 질병과 기근이 성하고 많은 사람들이 악령에 시달리고 있을 때, 붓다가 이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피릿 의식의 경전들을 암송하여 이 지역의 사람들을 재난으로부터 보호하였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미얀마나 스리랑카에 비하여 덜 성행하는 의식이지만, 스리랑카에서는 제사 대신으로 이 의식을 시행하기도 하고 각종 사업을 시작할 때나 먼 여행을 할 때에도 이 의식을 행하고 있다.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불교 전통은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에서 기원한다. 그만큼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스리랑카를 포함한 남방 상좌부 불교가 부처님 당시의 불교와 다르지 않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 또한 수많은 역사적 질곡을 거쳐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때로는 그들 국가나 불교의 내적인 문제 때문에, 때로는 이슬람이나 서구 제국의 침입같은 외적인 원인 때문에 그 원형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고, 그 원형의 복구를 위해서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남방 상좌부 불교 또한 변형과 왜곡 그리고 전통의 재건을 위한 노력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형화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남방 상좌부 불교가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을 기원해서 성립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강점이다. 한자문화권의 북방 대승 불교보다는 훨씬 부처님 시대의 원형에 가까운 불교를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처음 수용한 원형의 보존을 위해서 꾸준히 노력해왔다. 이러한 점에서 북방 대승 불교보다 훨씬 더 부처님 시대의 원형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은 인정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남방 상좌부 불교에 기복은 없고 작복만이 있다는 식의 현실을 도외시한 일부 연구자들의 일방적인 옹호론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동시에 단순히 대승 불교가 아니기 때문에 소승이라는 식으로 폄하했던 일방적인 단견도 수정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진정한 대승적 관점을 통해서만이 현대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불교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