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겠구나!
내가 끌려갈 당시 나는 만 17세였으므로 징용徵用 대상에 해당되지 않았었다. 면 노무계원이 징용영장徵用令狀을 가지고 와서 아무 날에 면사무소로 나오라고 했다. 그래서 정해 준 날에 면사무소로 나갔더니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면사무소는 좁아 사람이 다 들어갈 수 없어 바로 옆에 있는 광덕소학교 교실로 옮겼다. 역시 교실에 들어가 보니 윗마을 아랫마을에서 모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40여명이 모였었다. 교실 앞 뒤 문에는 일본 순사 두 명이 문을 꽉 닫고 지키고 서 있었다. 이 때 중절모자를 쓰고 당고바지를 입은 장정 다섯 명이 들어왔다. 면사무소에서 학교로 자리를 옮길 때는 회의를 한다더니 처음부터 이름을 부르더라고요. 내가 나이가 적어 맨 나중에 부르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면사무소 노무계원이 명단을 확인하며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일본으로 돈벌이 가는 거다”라고 말합디다. 나는 다시 목적이 “징용이냐? 보국대냐?”라고 물으니까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느냐? 일본 가서 돈이나 벌어다 아버지 어머니 호강시키면 그만이지”라고 말하며 협박적으로 나오더라고요. 회의장 아닌 회의장이 어수선하다가 결국은 “징용이다”로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이 때 내가 ‘나는 미성년이라서 해당되지 않으니 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군 노무계원이 나오더니 일본말로 “너 이놈 바보 같은 놈아!” 하면서 발로 차고 귀뺨머리을 후려치더라구요. 아마 이 같은 험악한 광경은 교실에 모여 든 다른 사람들에게도 위협적이었을 겁니다. 또 다시 군 노무계가 하는 말이 “네가 징용에 가지 않으려면 네 아버지가 대신 가고 너는 감옥으로 가라.” 하기에 “내가 무슨 죄를 졌기에 감옥監獄에 가느냐. 못 간다.”고 버텼죠. 교실에 소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도 같이 있었지만 다들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는 일이었지요. 내가 징용에 따르지 아니하면 부모한테 어떤 봉변逢變이 있을지 몰라 하는 수 없이 징용에 따랐던 것입니다.
우키시마호가 항해를 시작하여 하루가 지났을 때 갑판 위를 돌아다니는 해군병사 두 명한테서 이상한 일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오후 세 네 시 무렵이었습니다. 갑판 위 한 귀퉁이에서 한국인 여성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해군 병사 두 명이 “어린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겠구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내가 해군들의 뒤를 좇아가며 “무슨 말인가?” 고 물으니까 해군 병사들은 “아무 말도 아니다.”며 다른 곳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때 내게 매우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다른 사람들한테 말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맨 아래쪽 선실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쾅!〜 하는 폭발소리가 들리면서 몸이 1미터 정도 위로 튀어 올랐다가 내려 떨어졌다. 주위를 살펴보니 배 밑창에서는 벌써 바닷물이 시퍼렇게 솟아들고 있었다. 선실 안은 순간적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밖으로 빠져 나가려는 사람들이 서로 엉켜 나무사다리가 부러졌다. 겨우 밖으로 빠져 나와 보니 이미 배가 가운데부터 구부러지며 부러져 반 이상이나 가라앉았었다. 어쩔 수 없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속에서 헤엄치며 물위로 솟구치려 해도 사람이 많아 솟구치지 못할 정도였다. 솟구치려하면 발목이 잡히고 손이 잡혔다. 그래서 잠수하여 멀리 가다가 떠내려 오는 판자를 잡고 헤엄쳐 나왔다.
필자가 정기영씨를 만난 것은 주말에 회원들과 함께 대전역 광장에서 우키시마호 사건 관련 자료를 전시해 놓고 홍보하던 때였다. 바로 일주일 전에 대전KBS1-TV에 영동군 박재하씨와 출연하여 홍보계획을 말했는데 그 방송을 보셨단다. 공주시 유구읍에 사시는 조귀성씨도 이 날 처음으로 만났다.
「어떻게 아시고 오셨습니까?」
「텔레비젼보고 알았는데 전재진씨입니까? 거처가 천안이라면서요?」
「예! 저는 천안에서 왔는데요. 어르신도 천안에서 오셨습니까?」
「천안에서 오미나토에 같이 갔던 친구들이 많아요. 광덕면에요.」
「몇 분이나 되시는지요? 오늘 행사가 끝나는 대로 천안으로 가니까 이번 주말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어디서 뵙는 것이 좋을까요?」
「사시는 데가 천안 어디셔?」
「집은 쌍용동 광명아파트고요. 봉명동에 순천향대학병원 아시죠. 거기가 제 직장입니다. 어디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찾아 뵈야지요.」
「광덕면에 오시면 약국 옆에 조그마한 다방이 있으니 거기서 만납시다. 다들 연락해서 나오도록 할테니 만납시다.」
「공주시에서 오신 분이 저 분입니다.」
천안의 정기영씨와 공주에서 온 조귀성씨가 이날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일본으로 강제징용强制徵用되어 노역에 시달리다가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으로 사선을 넘어 귀국한 뒤 처음 있는 일이다.그 날 대전역 광장에서 두 노인들과 함께 늦게까지 홍보전단도 돌리고 지나가는 시민들한테 설명하는 활동을 마치고 같이 천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광덕면에서 아홉 분의 생존자를 찾아뵈었다.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가 천안에서 출범하게 된 동기도 천안시에는 물론 천안과 가까운 아산, 서산, 공주에 생존자가 많이 거주했기 때문이었다. 정기영 노인은 기억력이 좋아 당시 상황을 논리적으로 잘 풀어나갔다. 또 친구인 이철우씨와 한자리에 앉으면 자꾸만 새로운 기억들이 되살아나곤 했다. 필자는 천안시내 가까이 사시는 정기영씨를 자주 만났다. 그는 때때로 억울하게 흘려보낸 청춘시절을 생각하며 통한痛恨의 눈물을 흘리면서 한없이 말을 이어갔다.
(왼쪽)우키시마호 출항지인 시모키타반도 오미나토에서 온 현지 연구조사자들과 함께 수집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영상으로 보고 있다.(오른쪽부터 박현서 교수, 사사키 유키치, 사이토 사쿠지, 정기영, 이철우, 한종술변호사, 전재진)
(오른쪽)홍콩 시민단체 초청으로 홍콩 공민관에서 기자회견하는 정기영씨.
(정기영 노인의 다음 진술과 증언은 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의 <우키시마호시모키타친구들회>의 소식지에 실렸다)
「1994년 당시 나는 17세 미성년으로서 일본의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로 강제연행되었습니다. 내가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연행된 것처럼 내 친구들도 모두 강제와 협박으로 끌려갔습니다. 나는 마을 친구들과 함께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항만에 있는 일본통운주식회사에 배속되어 군수물자 하역작업을 하였는데 식품, 석탄, 무기들을 배에서 내리기도 하고 또 싣기도 하는 일이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과 노동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아침식사 때 바닷물을 끓여 국이라고 먹으라 하여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적도 있습니다. 어린 나이로 다른 나라 전쟁에 휘말려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하던 때였으나 고향의 부모형제들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라도 참아 내겠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드디어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고 우리는 꿈속에서 그리던 고향으로 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던 것입니다. 참으로 감개무량함을 가슴에 안고 우키시마호를 탔는데 그 우키시마호는 부산으로 향하지 아니하고 도중에 폭파침몰당하여 수 천 명의 젊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아직도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남아있어 그 날의 아픔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키시마호폭침사건에 대해 한국에는 많은 생존자가 있어 그 날의 참상을 거짓 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일 양국 민간단체나 개인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사를 바로세우는 일이므로 개인적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우키시마호폭침사건 피해 당사자입니다만 피해자 개인에게 배상하는 문제가 우선이 아니라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어 그 같은 불행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는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폭파당하여 침몰하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죽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수많은 동포들의 젊은 생명들이 죽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비치고 있습니다. 나는 70세가 넘도록 살았습니다만 그 때 죽은 동포들의 억울함을 50여년이 지나도록 풀어주지 못한 것이 내 가슴속에 죄가 되어 남아있습니다.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을 단순한 침몰사건으로만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내 인생의 역정歷程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강제연행, 강제노동》이라든가《한국인 승선경위, 안전보장 없었던 출항, 침몰원인, 사후처리의 부당성》등의 전반적인 문제가 규명되고 해결되어야 진정한 마무리인 것입니다. 현재 국내에는 많은 생존자가 있을 것이나 모두들 고령에다가 건강마저 좋지 않습니다. 저희 생존자들이 세상을 떠나면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져 역사는 거짓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한․일 양국 정부는 조속한 시일 안으로 적극적인 협의를 통하여 실질적으로 해결하기를 촉구합니다.」
정기영 노인은 기관지 천식으로 몸이 불편했으나 사건 홍보에 적극 나섰다. 일본 정부에 책임과 배상을 촉구했고 일본, 홍콩 시민단체와도 여러 차례 교류활동도 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친구인 이철우씨와 평양토론회(2003. 9)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