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2:1,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2023.3.26.
아이들이 성장해서 유치원에 가게 되면, 유치원복을 입고, 유치원 가방을 메고, 버스를 타고 유치원에 가서 생활하게 됩니다. 뭐 번거로울 수 있지만, 유치원에 가려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이제는 유치원에 갈 때 탔던 버스를 타면 안 됩니다. 유치원에 가서도 안 됩니다. 유치원 가방이나 원복을 입고 초등학교에 갈 수는 없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또 초등학교에서 요구하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입었던 옛 습관을 던져 버려야 합니다. 천국 백성으로서의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오지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레야만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할 수 있게 되고, 또 대적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1:27–28,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합당하게’라는 말은 ‘적합하게 하거나 합당한 방식’, 또는 ‘특별한 대우를 받을 만한 태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적합한, 합당한 생활방식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특별한 대우를 받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활하라’ 각주 2)를 보면, ‘또는 시민 노릇’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시민으로 살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국가나 정치 체제의 시민적 의무에 부합하게 살아가다’는 뜻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일장기를 걸어놔서는 안 됩니다. 대전의 모 목사라는 사람이 일장기를 거니까, 대전 시민들이 태극기 걸기 운동을 했습니다. 그 목사라는 사람이 지금의 여당인 국민의 힘 당원이라고 하니까, 여당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탈당을 권유해서 탈당을 시켜 버렸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누구든지 법과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시민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교회에서 출교시켜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할 수가 없게 되고, 또한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시민생활이 무엇입니까?
첫째,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습니다.
빌 2장이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좋을 일을 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다룹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시민 생활은 ‘무슨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빌립보서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립보서 2:3,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툼’(에리쎄이아)이란 ‘이기적인 야망이나 야심’을 뜻하는 말입니다. ‘도덕적인 억제가 없이 개인의 성공을 향해 치닫는 강한 욕구’를 뜻하는 말입니다. 교회에 좋은 일을 하면서 개인적 야망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끄럽습니까? 여러분이 시골교회 다니는 것이 실패한 것 같습니까? 그렇게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믿어야 합니다.
‘허영’(케노독시아)이란 ‘지나치게 자만하고 자기 확신에 차 있는 자만이나 허영’을 뜻하는 말입니다. 교회 일을 할 때, 지나치게 자기 확신에 차 있으면 안 됩니다. 권면을 하든, 사랑의 위로를 하든, 성령의 교제를 하든, 긍휼과 자비를 베풀 때에, 성도들은 그 모든 것이 자기 영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둘째,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 두 번째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남을 깔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오직 겸손한 사람입니다. 도시교회 성도들은 시골교회 성도들을 더 낫게 여겨야 합니다. 시골교회 성도들이 더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허용’의 반대말이 ‘겸손’입니다. ‘겸손’(타페이노프로쉬네)은 ‘특히 자신의 죄악성이나 생물성에 비추어서 자신을 적절하게 평가하거나 가늠하는 성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에 서로서로간에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낫게 여기다’(휘페렉소)는 ‘우월하다, 높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에게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 성도가 나보다 더 높은 사람, 더 나은 사람, 나보다 더 대단하고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뭐 이리 어렵습니까? 그냥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 앞에서 겸손하면 됩니다.
다른 성도들이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권면을 해야 되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됩니까? 더 문제가 많은 내가 권면한다는 것이 뭐 두렵다, 그런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은 나보다 훨씬, 백배 천만배 믿음이 더 좋지, 더 나은 사람이야, 더 훌륭하고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이런 믿음이 없다면, 권면이나 사랑이나 긍휼이나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전혀 믿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자만과 허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어울리는 시민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시민생활은 다른 성도들을 자신보다 더 가치있고 높은 사람으로 인정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더 높게 여기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 자기 일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까지 돌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시민노릇은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먼저 성도들은 자기 일을 돌봐야 합니다. 성도들은 자기 일을 돌보는 그만큼 또한 다른 성도들을 돌봐야 합니다.
빌립보서 2: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돌보다’(스코페오)라는 단어는 ‘돌보다, 주목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관심사나 기대를 무언가로 바꾸고 그에 따라 반응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3:17에 다시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빌립보서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눈 여겨 보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을 눈 여겨보고 있다가 언제든지 돌봐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시민생활을 하는 성도들입니다. 왜 눈여겨봅니까? 감시하고, 비방거리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뭐 돌 볼 것은 없는가’하고, 도움이 필요시에 즉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축복 주신다는 것입니다. 천국시민 노릇 잘해서 축복이 넘쳐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