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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리 말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요나단 고우포스 부인께서 마땅히 머리말을 쓰셔야 할 것이지만 작년 5월 31일 오전 3시,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인도해 주시던 대로 사용하시던 그 붓을 이제는 놓으시게 됐습니다. 내 아버지께서는 근 50년간을 중국 땅에서 내 어머니와 함께 선교 활동을 같이 하면서 참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내 어머니께서도 역시 무병하시던 중에 고통없이 사시다가 별안간 세상을 떠나시어 영광의 나라로 옮기어졌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은 소망으로 빛났으며 확신에 찬 그녀는 “나의 임금님께서 지금 부르시고 나는 갈 준비가 다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그 두 분은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록한 문헌들은 여전히 우리 마음을 향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친히 쓰신 책 “오직 나의 신으로”(By my Spirit)가 최근에 존더반 출판사에서 재판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대의 부흥에 관해서는 그 메시지가 가장 요긴(要緊) 할 것으로 그들이 확신하게 된 까닭입니다. 이 소책자는 “오직 나의 신으로”의 자매편(姉妹篇)이라 함이 좋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한국의 부흥상(復興相)을 친히 보고 들은 대로 증언해 준 실화들입니다. 나는 솔직히 고백해야겠습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중에 그 메시지는 내 심령을 감찰(鑑察)하였고 또한 불태웠습니다. “하나님이신 성령을 우리가 정말 믿고 있는가?”고 내 아버지께서 물었듯이 우리가 이 세대에 마땅히 자문(自問)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전에 없던 큰 변동들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위기를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부끄럽게도 기도의 능력을 등한히 여기고 있습니다. 마땅히 모셔야할 보좌에 하나님의 성령을 모셔야 할 터인데 인간들의 힘과 군사력(軍事力)을 의뢰하는 형편으로 타락해가는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한국 땅을 휩쓸던 그 큰 부흥의 불길에 관해 증언해 주고 있는 이 소책자가 잘 보급되게 해 주사 현대적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일깨워 주시옵소서. 내 육신의 아버지께서 자주 인조(引照)하시던 그 성구와 같이 승리와 영원한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도, 인간의 능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만군의 주 여호와의 신으로만 되는’ 준엄한 사실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마리아 고우포스 모이난
Mary Goforth Moynan
격려의 말씀
요나단 고우포스(Jonathan Goforth)가 기록한 이 소책자 “When the Spirit's Fire Swept Korea”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크게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25년 전 일입니다만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한국에서 일어났던 부흥에 관한 그 이야기가 내 심령에 강력한 인상을 주었던 까닭입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두 가지 사실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첫째로 내 눈에 띈 것은 성령께서 능력을 나타내사 죄를 책망하시며 사람들을 변화시키실 때에 강력한 변화들이 일어났다는 점이었습니다. 둘째로 내가 크게 감탄한 것은 그 부흥으로 인해서 감동을 받은 한국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통해서 희생과 헌신(獻身)의 정신을 발휘했으며 그 결과로써 수많은 교회들이 짧은 기간동안에 신설(新設) 됐다는 점입니다. 초기시대의 한국 교회는 오순절 이후의 예루살렘 교회와 방불했음이 틀림없다고 나는 느꼈습니다.
나는 오래전에 이 책을 읽은 일이 있었고 이 근년 한국 선교사로 6, 7년간 사역하게 됐습니다. 한국에 머물러 있으면 있을수록 내 확신이 날로 더 심각하게 된 것은 초기시대의 부흥이 조속한 시일 내에 불가불 재현(再現) 되어져야 한다는 긴박감(緊迫感) 때문이었습니다.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그 자취를 감추게 되면 그 허전한 공백상태를 채워보려고 인간의 힘이 스며들어오게 되는 것이며 그 과정은 매우 미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러한 일이 시작하게 되면 점점 더 기울어지기 마련입니다. 이 부정(不正)한 바꿔치기는 위험한 것이며 그것이 나타나는 표적을 주의해 보면 여러 방면에서 발현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인간적인 재능, 교육, 프로그램에 점점 중점을 두게 되는 일, 통계 숫자의 증진과 재정상의 번영에 점점 치중하는 일, 건물의 크기와 회중의 인원수에 중점을 두는 일 등등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도들은 교회 안에서까지도 지위와 명예를 추구하게 됩니다. 심각하고도 압도적(壓倒的)인 죄책감(罪責感)은 별로 찾아볼 수가 없게 되니 교회 신도들의 생활 속에서 죄는 점점 숨겨지고 말게 됩니다.
드디어 그 교회는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교회라기보다는 인간적인 기관으로 전락(轉落)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공표준을 신적(神的)이며 영적인 면에 두지 않고, 인간적이며 육적인 면에 두게 되는 고로 라오디게아 교회가 스스로 만족했듯이 스스로 성공한 줄로 알게 되기가 쉽습니다(계 3:14-22). 라오디게아 교회는 사실상 주님을 문밖에 세워놓고도 스스로 만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내가 한국교회를 인간적 기관으로 떨어졌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들 중 괄목(刮目)할만한 증거들을 한국에서 많이 보아온 까닭입니다. 그러나 내가 공공연하게 표명하는 바는 인간화(人間化)하는 미묘한 과정이 지금 역사하고 있다는 그 사실입니다. 이것이 역전(逆轉)되어서 뒤집혀지지 않는 한 라오디게아교회의 전철(前轍)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한국 교회를 다시금 휩쓸어 주실 수가 있다는 가망성(可望性)을 보여주는 이 소책자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출판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사 이 땅에 다시 부흥을 주시도록 독자마다 마음을 합하여 도고(禱告)의 사람이 되기를 이 책자는 호소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숨겨진 죄들이 자백되어져야만 합니다. 인간적인 자랑과 스스로 자고(自高)하는 교만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여지없이 박살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팔이 다시금 역사해 주심을 우리는 기어이 보아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를 고백하고 스스로 낮아지며 마음을 같이하는 도고(禱告)가 있는 곳에서만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영적인 앙양(昻揚)과 확장(擴脹)에서 오는 결실은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대가라도 지불하십시다!
성령의 불이시여, 한국 땅을 다시금 휩쓸어 주옵소서. 아멘
1976년 12월
데일 엠. 요컴
Dale M. Yocum
옮긴이의 말
지금부터 7년 전, 주후 1907년은 놀라운 부흥의 해였습니다. 거룩한 불이 그때에 조국 땅을 활활 불태우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본문 17면)
이것은 평양 장대현(章臺峴)교회 장로 길선주(吉善宙) 씨의 자복이었습니다. 숨겨진 죄가 있는 동안에는 전능하신 하나님도 방해를 받으셨으나 죄가 고백되어지자, 즉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시면서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바울이 전도하던 중, 에베소에 일어난 부흥은 하나의 전형적인 것입니다. 그 성구를 헬라어 표현으로 보면 계속을 나타내는 시제로 된 것이 눈에 띄어집니다. “믿은 사람들이 계속 많이 와서 계속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계속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계속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 즉 은 오만(미화 9,300불)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계속 흥왕하여 계속 세력을 얻으니라.”(행 19:18-20)
먼저 신자들이 회개할 때에 미신자들이 회개하는 것이 에베소에 나타난 부흥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이 평양을 중심으로 1년간 30,000명의 회심자를 얻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는 오만 명에 달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1910년까지 4년간 그 불은 계속해서 꺼질 줄을 몰랐으며 멀리 만주까지 타올라 갔습니다.
본서는 한국 기독교의 빛나는 초대 역사(歷史)와 그 선교사(宣敎史)를 연구하는데 적지 않은 사료(史料)를 제공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기독교란 아름다운 울타리는 점점 확대되는 중에 있으나 영적인 생명과 빛 또한 뜨거운 사랑은 점점 감퇴되는 중에 있는 우리 기독교계에 이 책자는 일대 반성을 촉구하며, 경각심(警覺心)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희망적인 격려를 줄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귀한 머리말을 쓴 모이난(Moynan)여사가 저자의 따님 된 것을 기뻐합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성결복음의 씨를 이 땅위에 심는 중에 이 책을 번역하도록 원본을 빌려주며, 기도로 격려해 주신 요컴(Dale M. Yocum)박사 내외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립니다. 영광나라에 먼저 가신 길선주 목사님의 자제가 되며 또한 저자 고우포스(Goforth)박사를 친숙히 알고 계신 길진경 목사님께서 귀한 조언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원고 정리를 위해서 수고해 주신 여러분들께 또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70년 전에 이 땅을 휩쓸던 성령님이시여, 다시금 내 조국 땅을 태워 주옵소서.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심판을 시작하사 마음을 깨끗케 해주시는 참된 부흥을 불일 듯 일으켜 주옵소서. 활활 뻗어 나가는 거룩한 불이 칠천만 동포를 태워주사, 어둠에서 광명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옵소서!」아멘.
연희 언덕에서
김 용 련
한국 땅을 활활 불태웠던 기독교 부흥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이 부흥에 관해서 글을 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을 위해서 지금까지 일했다는 것이 너무도 적은 나로서는 한국 교인들이 이룩한 일들과 희생적인 생활들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수그러질 정도입니다. 중국 신도들에게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아서 울곤 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이 책을 읽는 그대가 “구속 받은 자”됨을 알고 또한 한국에서 일어난 복음의 큰 승리에 관한 이야기를 경청하게 된다면 참으로 부끄러워 겸비해 질 것입니다.
1907년은 큰 부흥의 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있는 중요한 선교 본부 여덟 곳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중국으로 돌아오자 봉천(奉天)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그 사실들을 말했더니 모두가 깊은 감동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페이 태 호를 찾아가서 한국을 주님께서 축복해 주신 양상(樣相)에 관해 그곳 선교사들에게 말해주었더니, 중국 땅에도 그와 같은 축복이 임할 때까지 기도를 계속하겠노라고 눈물을 흘리며 서약하는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또 다른 보양지(保養地)인 치긍산을 방문하도록 초청받아 거기서도 한국에 관해 말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밤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야기를 마쳤을 때 나는 아차 내가 너무 오랫동안 말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즉시 축도를 함으로써 폐회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회중은 부동자세(不動姿勢)로 굳어진 채 한 사람도 움직이지를 않았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장내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러한 침묵이 6~7분간쯤 계속되더니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폭발되어 울음바다를 이루어 놓고 말았습니다.
지은 죄들은 자복되었으며 악한 분노, 분쟁한 일 등등에 대해서는 용서를 빌게 되었습니다. 폐회가 된 것은 늦은 밤이었으나 모든 사람들이 한가지로 느낀 것은 정결케 하시는 성령님이 우리들 중에서 불같이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후 나흘 동안을 수양회와 기도회로 가졌습니다. 그것은 내가 선교사들 사회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가장 놀라운 은혜의 때였습니다. 중국 교회가 부흥되기까지 날마다 오후 네 시에 우리들은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해 가을에 하나님의 능력이 백성들 중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됐는데, 1908년 초 이후에 만주와 기타 등지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증진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신도들이 더 큰 은혜를 구하도록 용기를 돋우어 준 것은 무엇인가?
한국에서의 부흥은 1903년에 처음으로 임하게 된 것입니다. 동해안 원산(元山)에 있는 하디 (Dr. Hardie) 박사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열리도록 되어 있는 조그만 수양회에서 기도에 관한 설교를 미리 준비하도록 의뢰를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비롯하여 또 다른 성경 구절들에 의해서 교재를 준비하던 중, 하디 박사는 성령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기도에 관해 설교할 때에 모든 선교사들은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국 신도들이 수양회로 모였는데 현저(顯著)한 감동이 거기서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하디박사가 한국 전역에 있는 선교 본부 10군데를 심방하면서 기도에 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1904년에는 한국사람 10,000명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이와 같이 시작된 부흥은 1906년까지 계속적인 영적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1907년 6월 평양에 있는 스월른(Swallen)목사는 내게 보다 큰일들이 한국에서 생기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습니다. 1906년 중간 무렵까지 우리들이 이미 경험했던 이상의 축복을 한국 땅에서는 더 이상 기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한국 땅에서 우리들이 수고한 결과를 중국 일본 등지에서 생긴 결과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수확고가 엄청나게 우월한 것을 보고 이미 우리가 받은 것 이상의 복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던 것입니다. 그러나 1906년 9월, 우리들은 서울서 눈을 뜨게 됐는데 뉴-욕에서 온 죤스톤 박사(Dr. Howard Agnew Johnston)가 인도(印度) 카시아(Kassia Hills)지방에서 일어난 부흥에 관해서 말해주면서 1905~1906년 두해 동안에 8,200명이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겸비한 마음으로 평양에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 약 20여 명이 평양에 주둔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별대우(差別待遇)하는 분이 아니므로 평양에서보다 카시아 지방에 더 큰 축복을 부어 주시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보다 큰 축복이 임할 때까지 정오시간을 기도회 시간으로 가지자고 우리들은 결의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 동안 기도회를 가졌는데 가진 후에 어느 형제가 이 기도회를 중지하자고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한 달 동안 기도해 왔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많은 시간만 허비했습니다. 우리들이 옳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상으로 돌아가서 우리들의 선교사업을 계속하며 각각 집에서 편리한 시간에 기도를 올리도록 합시다.” 이 제안은 그럴 듯 하게 들렸지만 인도 카시아 지방에 허락하신 일을 평양에도 주실 것을 믿으면서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기도회를 계속 가질 것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기도 시간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기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기도회 시간을 정오에서 하오 4시로 변경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녁 식사 때까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를 계속 했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일에만 중점을 두고, 간혹 격려될 만한 것을 어떤 사람이 말하고자 한다면 여러 사람들이 기도를 계속하는 중에 흡수되어졌습니다. 그들은 4개월 동안이나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장로교 선교사라는 교파 관념을 초월하는 결과가 따라 왔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란 생각뿐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교회 연합이었습니다. 그러한 연합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중에 생겨지는 일이며, 또한 오래 지속할 수 있으며, 그러한 연합이라야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법입니다.
그 무렵에 스월른 목사님은 불레이어(Blair)목사님과 함께 시찰구역내(視察區域內)에 있는 시골 교회 한 곳을 방문했습니다. 의례적(依例的)인 방법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죄를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월른 목사님은 그러한 기현상(奇現象)은 일찍이 본 일이 없노라고 말하면서 그 청중을 휩쓸고 있는 강렬한 감정을 억제해 보려고 찬송가 한 곡을 지정했습니다. 목사님은 여러 차례 그러한 노력을 시도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모임을 어떠한 다른 분이 임하사 주장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깨닫게 되자, 스월른 목사님은 사회권(司會權)을 그 분에게로 양도(讓渡)하고 가능한 한 자기는 뒤로 멀리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두 분 선교사는 기쁜 마음으로 평양에 돌아가서 주님께서 그 시골 교회를 심방해 주셨던 양상을 보고했습니다. 다같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평양에 은혜를 부어주실 날이 눈앞에 임박한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1907년 정월 첫 주간이 돌아왔습니다. 북한 전역에서 약 700명의 열렬한 기독교인들이 평양에 회집하여 특별한 연차 수양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주간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은혜를 내려주실 것으로 누구나 다 큰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별로 의미도 없는 한 주간이 지나가고 마지막 날 정월 8일이 주일날이었는데 그 주일날 낮 예배에도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주일날 밤 예배는 장대현(章臺峴)장로교회에 약 1,500명 신도가 운집(雲集)했습니다. 천장은 놋으로 덮인 듯, 기도가 상달되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각각 흩어져 소속된 자기 교회로 돌아갈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부어주시도록 그처럼 간절히 올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어찌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때에 그 교회의 유력한 장로, 길선주 (吉善宙)씨가 일어서서 자기 죄를 자백할 때 회중은 모두 크게 놀랐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약 1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 내 아내는 무능하기 때문이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잘 돌보아 드릴 테니 염려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중 미화 100불상당의 금액을 사취(詐取)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여 온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그 미망인에게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도 무겁게 짓누르던 방해의 장벽은 별안간 무너져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해 주셨음이 알려졌습니다. 죄책감(罪責感)이 청중을 휩쓸게 되었습니다. 그 주일밤 예배는 7시에 시작됐는데 다음날 새벽 2시까지도 끝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수다한 교인들이 일어선 채로 울면서 자기 죄를 자백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 일 후 날마다 연이어 신도들이 모여들었으며, 정결케 하시는 영이 언제나 그 성전에 계시다는 일이 분명해졌습니다. 인간들이 무어라고 악평하더라도 이 자백들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 지배되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귀의 소행이냐, 그렇지 않으면 성령께서 역사해 주심이냐, 양단간에 하나임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빛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유력한 길선주 장로의 죄를 자백시킨 것이 마귀의 소행이었다고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숨겨진 죄가 있는 동안에는 전능하신 하나님도 방해를 받으셨지만 죄가 자백되어지자 즉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해에 한국에서 고백되어진 일들이 약간의 예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귀결(歸結)되었습니다.
이 부흥이 “실효적(實效的)”이었던가?
몇 가지의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의사는 자기 집 요리사가 가장 정직한 사람이라고 자랑을 하곤 했습니다(동양에서는 요리사가 시장 가는 책임도 지게 된다). 그러나 그 요리사가 죄책감을 받아 다음과 같이 자백했습니다. “지금까지 항상 나는 우리 주인을 속였습니다. 내 집, 내 토지도 주인을 속임으로 장만한 것입니다.” 그는 가산을 정리하여 자기 주인에게 보상했습니다.
어떤 교사는 선교회를 위해서 약간의 대지를 구입하도록 위탁을 받았습니다. 그 대지를 마련해 놓은 후 대금이 500불이라고 했을 때 너무 비싸다는 반대 의사를 표시하면서도 선교사는 청구액대로 500불을 지불했습니다. 이 부흥 기간 중에 그 선생은 그 대지를 80불 밖에는 지불하지 않았다고 자백하면서 소유물들을 다 정리하여 속였던 나머지 부분 420불을 보상해 주었습니다.
종군기자 맥켄지(Mackenzie) 씨(氏)에게 고용인 소년이 있었는데 4불 미만의 금전으로 주인을 속였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죄책감을 받게 되자 18마일이나 되는 길을 걸어와서 어떤 선교사를 찾아가 그 돈을 맡기며 맥켄지 씨에게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4불을 받아들은 그가 한국적 기독교에 대해서 신임했었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평북 의주에 부인과 한 아들을 가진 남자가 있었는데 그 식구들을 두고 다른 도시에 가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다른 여자를 취하여 두 딸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심령이 부흥을 받을 때에 둘째 부인과 그 딸의 부양비를 주기로 합의하고 의주에 돌아가 본부인과 다시 화합하게 되었습니다. 이혼이 성행하는 어떠한 기독교국에도 한국에 있었던 이와 같은 부흥이 일어나게 된다면 경이적인 사회변동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거의 온전한 성도라고 존경을 받던 남자 집사 한 사람은 부흥이 진행됨에 따라서 퍽 불안해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선기금 얼마를 절취했다고 자백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크게 놀랐지만 그가 이제는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더욱 괴로워하면서 겸비해지더니 제 7계명을 범했노라고 자백했습니다.
어떤 부인 한 사람은 며칠동안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는 듯 보였는데 어느 날 공예배 좌석에서 자기는 음행죄를 범했노라고 자백했습니다. 사회하던 선교사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의 남편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알았으며, 그 남편이 그녀를 죽여버리게 되면 그가 국법에 의해서 처벌될 것을 알았던 까닭입니다. 그 남편은 눈물을 흘리면서 죄를 범한 부인 옆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더니 그녀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그 예수님께서 오늘 이 여인에게도 동일한 말로 말씀하실 때 영광을 크게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특이한 사건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들은 초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조롱할 목적으로 왔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강도단 두목이 빈둥거리는 태도로 호기심을 갖고 집회에 나왔다가 죄책감을 받아 회심했으며 곧장 치안관에게 달려가서 자수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놀란 그 관리는 대답하기를 “너를 고발하는 자가 없고 네가 네 자신을 고발하는구나. 한국의 법률로서는 네 사건을 처리할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를 돌려보냈습니다.
그 부흥 당시에 일본인 관리 한 사람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구(西歐)의 불가지론(不可知論) 사상을 흡수했던 사람인고로 영적인 일들을 경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다한 한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언어가 잘 소통되지 않는 몇몇 일본 사람들에게까지도 이상스러울 정도로 계속해서 변화가 더욱더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사실에 너무도 당황하여 실태를 조사해 보려고 그 집회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그의 불신앙적 태도는 사라지고 그도 또한 주 예수를 모시는 결과가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속히 역사해 주실 때
스월른(Swallen)목사님이 말하기를 “5~6개월 동안 기도했던 일은 보람있는 일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니 우리 선교사들이 반년(半年)동안 해온 일보다 더 큰 일을 반일(半日) 동안에 완성해 주셨습니다. 두 달이 채 못 되었는데 2,000명 이상의 죄인들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첫째 위치에 모시게 되면 언제든지 그런 결과가 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컫는 교회들이 일반적으로 교회 활동에 바쁘게 지나다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심을 기도함으로써 기다려야 할 신앙을 상실하게 됩니다.
1903年에 시작된 부흥은 일취월장(日就月將)으로 부흥을 계속하더니 평양을 중심으로 발원(發源)하여 대대적으로 흘러 나가게 되었습니다.
1907년 중간 무렵까지 30,000명 회심자들이 평양을 중심으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평양 시내에 4, 5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장대현교회는 빽빽하게 앉으면 2,000명 을 수용할 정도였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의자가 없고 신도들은 마루위에 펴놓은 돗자리에 앉게 됩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 2,000명이 회집하게 되면 입추(立錐)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신도수가 3,000명으로 격증되었으니 더 이상 수용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부인 신도들이 먼저 예배를 마친 후 남자 신도들이 제 2부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취하게 됐습니다. 그 부흥의 불길은 1910년까지 계속해서 타올랐습니다. 그해 10월 달에는 일주간 동안에 4,000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기타 수천 명이 신앙 결심서를 보내왔습니다.
평양에서 남하하면 개성(開城)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은 고려시대의 도읍지로서, 1907년 부흥의 때에는 500명이 증가되었으며 1910년에 있었던 한 달 동안의 특별 성회에서는 2,500명이 회집됐습니다.
우리가 1907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는 교회마다 만원이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말하기를 6주간 전도 여행에서 500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700명을 학습 교인으로 세웠으며 시찰 구역 내의 5교회가 일년이 지난 후에는 12교회로 증가됐다는 것입니다. 1910년 서울에서 결심서를 제출한 사람이 13,000명이었으며 그 해 10월, 서울 시내 감리교회에서는 3,000명이 세례를 받고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서해안 쪽으로 제물포(濟物浦:인천)란 항구가 있는데 1908년 그곳감리교 선교회에는 800명 신도가 있는 하나의 교회를 갖고 있었습니다. 인천 대안에는 인구 17,000명을 헤아리는 하나의 섬이 있습니다. 본래 그 섬에는 세례교인이 4,247명이 있었는데, 1907년에는 전체인구의 반 이상이 교회에 나오게 됐으며, 그 섬 전체가 주님의 소유가 되기를 교우들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스(Adams)선교사의 말에 의하면 남부지방 주요도시인 대구(大邱)에서는 10일 동안 기도회를 갖도록 교우들이 제안했었는데, 제 7일에 성령께서 홍수처럼 임하사 그들을 부흥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교회 자리는 비좁아지고 그 지역 일대의 교회들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일어나게 됐다는 것입니다. 1905년에는 회심자 1,976명, 1906년에는 3,867명, 1907년에는 6,144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담스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에는 내가 일찍이 가보지 못한 지방에 까지도 교회들이 섰으며 전도자들이 아직 방문도 못해본 교회들이 생기게 됐습니다. 어떤 교회는 선교사나 전도자 없이도 형체를 이루게 됐습니다. 大邱시에서 복음을 들은 어떤 사람은 성경 한 권을 구해가지고 고향 마을로 돌아가서 이웃 사람들에게 그것을 계속 읽어주는 동안에 50명의 신도를 얻게 됐습니다. 신약 성서를 보다가 그들은 추리(推理)한 끝에 물로 씻는 세례를 받아야 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추론(推論)을 실지로 적용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상의한 끝에 각각 집으로 돌아가서 목욕한 후에 다시 모여서 교회를 형성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일을 기뻐하셨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1907년 내가 방문한 또 하나의 지방은 평양 북부 철도 연선에 있는 선천(宣川)입니다. 선교사가 배치된 지 겨우 8년 밖에 안 되는 아직 어린 기독교 도시인만큼 신도가 많을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그곳을 찾아갔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무려 15,348명이나 되는 신도가 선천읍 일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신도란 말은 교회에 출석하여 헌금을 바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곳은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가 바로 완공을 본 때였습니다.
1년 전에는 800명 수용의 교회였는데 신도수는 87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증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7년 1년 동안에 중앙교회는 시골 교회 다섯을 세웠으며, 그 교회 건물이 완공될 때에는 1,445명의 신도로 증가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중앙교회로부터 전도를 받은 거리거리에는 불신 가정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 국가들에서는 “교회 가까이 살면 은혜에서는 점점 멀어진다.”는 격언이 있을 형편이므로 교회 근방에 불신 가정이 없는 한국 교회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오직 나는 그 이유를 다음 사실로서 입증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 신도들은 성령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며, 성령의 도움으로 그처럼 능력있게 모범생활을 하고 있는 고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죄와 의와 심판으로 책망을 받게 되는 까닭이라고 하겠습니다.
1916년에 한국 동해안으로부터 온 선교사 푸-트(Foote)목사는 다음과 같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최근에 그 곳 선교부 지역에서 주일을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 주일밤 예배를 증축한 제일교회에서 드렸는데 2,500명의 회중으로 초만원을 이루었으며 시내의 다른 교회에서는 500명이 회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의 총인구가 3,000명이므로 시민 전체가 그 날 밤 예배에 참석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기독교 혜택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나라들에서는 집회 자유의 특권을 별로 고맙게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언젠가 주님께서 공정하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선교 본부로부터 외촌(外村)으로 선교사업이 확장되는 상황을 알고 싶어서 나는 블레이아(Blair) 목사님께 담당군(郡)가운데에 하나의 약도를 요청했습니다. 기차 시간이 임박한지라 바빴습니다. 그는 용천군(龍川郡)의 약도를 그려주었습니다. 그곳은 압록강하류 서해바다에 면한 곳입니다. 그 약도의 복판에 350명 교회를 표시하고, 거기서 북방 1마일 미만의 지점에 250명 교회를, 동북방 5마일 지점에 400명 교회를, 동방 2마일 미만 지점에는 750명 교회를 표시하는 등 용천군내에는 자립교회가 14곳이나 있었습니다. 내 옆에 서있던 휘트모어(Whittemore)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용천군은 제가 일하고 있는 북쪽 지방에 미치지를 못합니다. 거기는 5,000명 이상의 신도가 있으며 그들은 35자립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교인들입니다.” 400명 회집하던 지역에 다음 해에 3,000명으로 격증된 곳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1884년에 선교사업이 시작된 이래 밤․낮이나 매 45분마다 한사람씩 교회에 입교하게 된 셈이니 그 지방 전체가 기독교화된 것입니다.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숫자가 많다고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추종했으나 바로 그들이 주님을 실망시킨 일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또 그것은 중요한 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떠한 표준을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사도행전 첫 부분으로 올라가서 생각해 봅시다. 사도행전 표준을 문자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국 교회에 그 표준을 적용시키는 일에는 기쁘게 찬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국 교회가 어떤 양상으로 오순절 표준에 들어맞는가를 살펴보십시다.
제 1세기 초대 교회는 성령님을 크게 존귀히 여기며 만사를 제쳐 놓고 성령강림을 위한 준비기도를 10일간이나 계속했던 것입니다.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수개월 동안을 날마다 1시간 내지 5~6시간을 선교사들은 성령충만을 목적하고 준비기도를 올렸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땅 카시아(Kassia)사람들에게 폭주되는 양상을 죤스톤 박사(Dr. Howard Agnew Johnston)로부터 선교사들이 듣고 있을 때에 평북 강계(江界)로부터 온 성경 행상인(行商人) 한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고향에 돌아가서 강계교회 250명 신도들에게 말해준 것은 주 예수께서 이루신 사업을 성령께서 홀로 실효있게 해주시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른 은사들과 같이 성령을 선물로 받도록 약속되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1906~7 양년에 걸쳐 가을에서 겨울동안 저녁 5시가 아닌 새벽 5시에 신도들이 교회에 모여 새벽기도회를 가짐으로써 하나님을 공경하며 성령의 은사를 감득(感得)했습니다. 6개월간 그들은 하나님 곧 성령님을 높이 공경했더니 성령께서 홍수처럼 임하셨으며 그 일이 있은 후 신도수는 계속하여 배가(倍加)되었습니다. 거짓됨이 없이 우리 모두가 솔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우리가 정말로 믿고 있는 것인가?
구주의 공로를 전달하는데 불타는 열심을 내는 것이 오순절 날의 교회 특색이라고 한다면 한국 교회가 바로 그러합니다. 기독교인의 불타는 열심은 불신자들에게 괴로움을 줄 정도가 되어 그들이 감당할 수가 없다고 불평하였다는 것입니다. 신도들은 언제나 주 예수에 관해서 강력히 말하곤 했습니다. 그것을 하나의 핍박과 같이 생각하여 기독교인들이 없는 곳으로 옮겨가서 평안히 살아봐야겠다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평양에 있는 선교사들은 그들이 운영하는 고등학교(숭실학교)에서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재학생 318명을 가진 그 학교에서 1907년 2월 개학하는 월요일 아침 담당 선교사 두 사람은 교장실에서 일찍부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개학 초부터 주장해 주시기를 그들은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알기에는 성령께서 주장해 주시지 않으면 그 학교는 한국땅에 위협을 주는 교양있는 불량배(不良輩)를 양성하는 기관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국가에 사는 우리들은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성령님이 주장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점에서 부족합니다. 어떤 학교에서는 지나친 불신앙이 교육되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교양있는 불량배들이 생길 것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국고금을 횡령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 중 어떤 자들은 언제든지 무죄방면 되어지곤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교양있는 인사(人士)들입니다. 우리나라 대학 졸업생들 중 다수의 사람들은 눈앞에 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을 성령께서 주장하시도록 위임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기 때문에 죄가 우리들을 찾아오게 된 사실을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겠습니다. 평양고등학교(숭실학교)에서는 개학할 월요일 아침 9시가 되기 전에 성령께서 그 남학생들을 죄책감으로 강타(强打)하게 되었는데 위층이나 아래층에서 죄를 애통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조금 후에는 교장실이 애통하는 남학생들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그날 학교는 개학할 수가 없었으며 그 이튿날도 그러했고 금요일 역시 열려질 수가 없었습니다. 금요일 저녁까지 장로교 남학생들은 전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었는데, 반면 감리교 남학생들은 무엇인가에 구애를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금요일 밤에 진상(眞狀)이 다 폭로되었습니다. 감리교회에서 약 12명의 학생들이 그들의 목사님을 찾아가서 목사님과의 약정(約定)한 일을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목사님이 그 부흥이 감리교에서 시작되질 않았다는 이유로 해서 시기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자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그런 부흥회를 반대케 하였으며 또 공중 앞에서 고백하는 일은 마귀로부터 기인한 것이라 하여 항거하도록 약정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금요일 밤에 이르러 학생들은 마음의 약정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그러한 약정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청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선교사들의 발 앞에 엎디어서 자백하기를 부흥이 장로교회에서 시작됐다는 이유로 해서 마귀가 그 마음속에 시기심을 가득히 채웠다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나에게 한 말인데 그 주간에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주는 고백들을 그 학생들로부터 듣는 일은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지옥 뚜껑을 열어 놓은 것 같았으며 상상해 볼 수도 없는 온갖 죄들이 적나라(赤裸裸)하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주간 월요일 날까지는 그 학생들이 하나님과 선생님들과 학우들 간에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그 학교는 성령께서 주장해 주시는 가운데 개학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무렵 감리교 선교회에 소속된 약 100명의 전도사들과 성서 행상 (行商)인들이 1개월 동안 공부하기 위해 평양에 모였습니다. 연합기도회를 드리던 중 그 선교사들은 그 중요한 모임을 성령께서 주장하시도록 일임해 버렸습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영으로서만 되는 것을 그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하나님께서는 바로 첫 집회에서 그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그들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비뚤어진 일들이 바로 잡혔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주장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효과있는 교육을 받았으며 한달이 거의 끝날 무렵에는 용감한 개척자들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수일을 지난 후에 시골에 있는 장로교회 부인 신도들 550명이 선발되어 12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려고 평양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비용을 자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그 집회에 참석하려고 5일 동안 걸어서 왔던 것입니다. 한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5일 동안 걸어왔습니다. 선교사들과 평양에서 부흥을 받은 지도자들은 영적 능력에 관한 어떤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인간의 탓이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알기로는 성령께서는 언제든지 인간을 도구로 쓰시기를 기다리신다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사람이란 도구를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첫날밤 그들은 성령께서 주장해 주시기를 간구했던 것이며 또한 성령께서는 약속이행을 잘 하시는 분이심으로 성령이 임하자, 죄와 의와 심판으로 책망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부간(姑婦間)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었다.
그 부인 신도 중 많은 사람들이 첫날밤에 장애물들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배위량 목사 부인 (Mrs. Baird)의 표현에 의하면 다른 부인 신도들은 발에 가시가 박힌 모양으로 혹은 고름을 짜지 못한 종기를 신고(辛苦)하듯 며칠동안을 고통당하더니 마침내 하나님께 굴복하면서 승리를 거두게 됐다는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신 성령께서 그 당시에 이들을 교도해 주신 것입니다. 이들은 각각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변화된 사실이 숨겨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성령 충만한 부인들이었습니다.
남편들이 이 사실을 알았으며, 자녀들이 그 사실을 보았으며, 며느리들도 또한 오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양에서는 시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호랑이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어머니 까닭에 며느리들이 자살하는 경우도 종종 보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옛날의 시어머니가 아닙니다. 그 성경공부에 참석했던 며느리들도 또한 변화가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이방인들도 변화된 사실을 주목하여 보게 되었으며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 부인들은 각각 자기 가정으로 돌아가자마자 곧 75명의 신학생들이 3개월간의 연구를 목적으로 평양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년 3개월씩 5년 과정을 마치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평양신학은 200명 학생을 가진 세계 최대의 신학교였습니다. 교과를 배정할 때 교수들은 청년학생들의 심령이 학기말까지는 성령으로 충만되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자신들은 저녁마다 기도회를 갖고 성경을 읽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그 얼마 전에 놀라운 일을 그들 중에서 행하셨으므로 그 교수들은 성령님께 몹시 욕된 말을 한 잘못을 깨닫게 됐습니다.
즉 “이번 학기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학기말에 가서는 성령님께 서 오사 학생들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었던 그 일입니다. 교수들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여 개학하는 첫날밤에 젊은 학생들을 하나님의 손길에 맡겨버리게 됐습니다. 그 신앙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모든 진리 가운데로 홀로 인도해 주실 수 있는 그 분이 전례없는 방법으로 그 학기를 교도해 주셨습니다. 50,000명 회심자가 교회에 가입되어진 그 해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국땅에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 교회가 초대교회 모양으로 약속하신 성령을 간구하는 점과 성령님께 순종하는 점에 있어서 주님을 존귀하게 했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내 나라인 캐나다 교회들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문제를 놓고 한국교회를 검토해 보십시다.
사도행전에 있는 초대교회의 현저한 특색은 기도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는 기도에 의뢰하는 바가 상당히 컸습니다. 먼저 말한 바 있는 감리교 학생들이 숭실학교에서 성령을 거역하고 있던 그 주간, 장로교 학생들은 기도의 중책을 몹시 느꼈던 고로 거의 용모가 변해질 정도가 되었으며 승리가 올 때까지 금식과 기도를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소학교(초등학교)에서는 기도의 영이 너무 강력하였던 탓으로 한동안 그 학교의 문이 닫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린이들이 책을 읽고 있을 때 그 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선교사들보다 기도하는 점에서 훨씬 앞서 있다는 것을 선교사들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밤 시간의 절반쯤을 기도에 바치는 일은 보통 있는 일이었으며 새벽미명 일찍이 일어나서 기도드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실행하는 일입니다.
스월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가 어느 시골 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 있는데 그는 내일 새벽 5시에 모든 사람이 기도회에 모이자고 광고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5시 정각에 예배당에 나가보니 단지 3사람만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나오지 못한 줄 생각하고 스월른 목사님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얼마동안 기도하고 난 그에게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스월른 목사에게 말하기를 그가 너무 늦게 기도하러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기도회는 이미 끝났던 것이며 또한 새벽기도 회원 중에는 험한 산마루를 넘어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국 신도들은 가정 제단을 갖고 있습니다.
가족 기도회의 필요성을 열렬하게 믿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가족 기도회를 갖지 못한 사람은 신자 될 특권을 빼앗길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캐나다에서는 세상일에 너무 바빠서 식사기도도 제대로 못하는 기독교 가정들이 있습니다. 푸-드(Mr. Foote)목사가 말하기를 일찍이 그가 한국땅을 여행하던 중 노상에서 만난 사람들이 “저 골짜기 마을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방문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마을에 신자들이 있는 줄은 몰랐노라고 대답하면서 그곳을 찾아 방문했더니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또는 학습 교인으로 등록을 받기 위해서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족 기도회를 가지느냐고 물었더니 하루에 두 번씩 가진다고 했는데, 그 마을에는 24가정이 살고 있었는데 한 가정도 빠짐없이 제단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도에 열심들이었다.
만주(滿洲)에 있는 선교사 한 사람이 2사람의 전도자를 평양에 보내어 그 부흥에 관한 전모(全貌)를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그 두 전도자가 돌아왔을 때 평양에 있는 선교사들이 가두전도처(街頭傳道處)(Street Chapel)들을 개설(開設)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두 전도자의 대답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독교인들마다 전도처이므로 선교사들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역자들은 복음전파를 위해서 기독교인이 없는 지역에서 한 여름을 지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행상인들은 가는 곳곳마다 언제든지 그리스도에 관한 놀라운 일들을 말해 주곤 했습니다. 우리들이 동해안에서 열렸던 부흥회 때에 구원받은 한 모자(帽子)상인은 한 해 동안에 조그만 기독교 지역사회를 열두 곳 쯤 설립했습니다. 그 지역 사회들 중에 하나에서는 회심자가 17명이나 있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방학 한달 동안 복음을 듣지 못한 지역에 가서 살며 100명의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학생은 날마다 적어도 여섯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했으며 9개월이 될 때에는 무려 3.000명에게 전도했던 것입니다.
어느 해인가 남 감리교회에서는 너무나 재정난이 심하여 개성에 학교들을 세울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150명의 청년들은 교육열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전 문교부 장관이었던 윤치호(尹致昊)씨는 그 청년들을 가르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그의 지도를 받던 소년들은 약한 대를 재료로 기둥을 세우고 볏짚으로 초가지붕을 덮은 곳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새벽 기도회를 통해서 자기 교회 신자들을 부흥시켰습니다. 그 당시에 길목사가 기록한 서간문을 보면 8~9세의 꼬마들까지 도 학교를 끝마치고 나서는 거리에 나아가 행인들의 옷소매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는 것입니다. 길목사가 말하기를 “최근 3~4일 동안에 400여명의 사람들이 나아와서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어른들 마음에 그처럼 감동을 준 것은 어린이들의 간절한 애원까닭입니다.
한국의 궁벽한 도서(島嶼)지방에까지 복음을 전파한 후에 그들은 멀리 국외(國外)까지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수년전 서울에서 장로교 총회가 열렸는데 중국 산동성(山東省)으로 선교사를 파송키로 결의했습니다. 자원하는 자들을 보내기로 했더니 회중이 다 일어서서 자원했으며 그 중에 4명이 선출되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을 몹시 부러워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들이 값없이 선물로 받은 은혜가 한국에서는 높이 평가되어졌으며 또한 값없이 주게 되었으니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은 억제(抑制)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1917년 늦게 길 선주 목사는 동해안에서 사경회를 가졌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놀라워서 심령들이 녹아지며 죄를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많이 바치지 못하여서 울고 있는 한국교인들
초대교회의 또 다른 하나의 특색은 헌금을 풍성히 바치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한국 신도들 또한 그러합니다. 어떤 선교사가 한 장소에서 내게 말하기를 신도들이 지금은 헌금을 너무도 많이 바치는 까닭에 헌금에 관한 말을 구태여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혜택을 받은 우리 캐나다에서 교우들에게 그런 말을 진실로 할 수 있는 목사님을 만났으면 하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그 해에 내가 있던 선교본부에 남녀 성직자와 교사들, 전도사들 도합 139명의 생활비를 신도들이 지급하고 있었는데 유독 그 해만은 성직자를 57명이나 더 증가시켰습니다. 그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너무 비좁아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세우도록 모여 계획하였습니다. 참석했던 자들이 자기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바쳤는데 남자들은 시계, 여자들은 장식품들을 벗어서 바쳤으며 어떤 이들은 토지 문서를 바쳤습니다. 그들은 있는 것을 더 바칠 수가 없는 안타까움에 울었습니다.” 그 결과로서 그들은 빚을 지지 않고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매우 빈곤한 선교 본부에 있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곳 지도자들의 말은 예배 처소가 개인 주택인고로 불편하였든 차에 30불이 소요되는 대지를 발견했습니다. “참 잘됐군요! 가서 사도록 하십시오.”
“그렇지만 선교사님! 우리는 극빈자들입니다. 선교사님께서 우리들의 사정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대지를 구입할 돈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교회 대지를 여러분 자신이 사셔야 축복을 받습니다.”라고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빈곤을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던 중 부인반에서 말하기를 “남자분들에게 계획이 없다면 우리들이 대지를 구입해 보겠습니다.”라고 하며 부인들은 장식품을 다 팔아 보았으나 10불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치 않고 계속 힘썼습니다. 어떤 부인은 한 개의 놋주전자를 팔았고 어떤 이는 놋주발을 또 다른 이는 몇 뭉치의 놋수저를 팔아서 바쳤습니다. 한국의 식기들은 놋으로 되어있습니다. 식기를 판 것이 20불 합해서 30불이 되어 교회 대지를 장만케 되었습니다. 받는 일보다 주는 일이 복되다고 말씀하신 그대로 그 부인들은 하나의 큰 뜻을 품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이 살고 있는 그 이웃의 많은 여성들에게 구원의 팔을 펴보려는 불타는 마음으로 매달 6불을 모금하여 여 전도사 한 분을 파송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새 교회의 헌당식에 그 선교사가 참석하였는데 그 교회에 50불의 부채가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 교회회원 한 사람이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목사님, 다음 주일날 50불을 제가 바쳐서 그 빚을 갚겠습니다.”라고 하자 그 극빈자의 형편을 잘 알고 있는 선교사는 “혼자서 그처럼 염려하실 것은 없습니다. 우리 다 같이 협력하면 멀지 않아서 갚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날 이 가난한 교우는 50불을 바쳤습니다. 그 선교사는 놀라면서 “어디서 돈을 구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선교사님! 이것은 아주 깨끗한 돈입니다.” 몇 주간을 지난 후에 그 선교사가 이 지방을 순회하다가 그 집에 들렀습니다. 남편이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들에 나아가서 밭을 갈고 있는 중이라고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들에 나간 선교사는 쟁기를 끄는 아들과 쟁기를 조종하는 늙은 아버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그 노새는 어떻게 했소?”라고 묻자 이 농부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50불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을 제가 차마 볼 수 없어서 내 노새를 팔아서 청산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초대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사랑하였던 것과 같이 한국 교회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부흥하던 그 때에는 성경을 인쇄하기가 바쁠 정도였습니다. 평양에서 1년 동안에 6,000권 이상이 매진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배웠는데 일자무식(一字無識)의 부인들까지도 배웠습니다. 예수를 믿는 행상인(行商人)들은 언제든지 성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여관에 들려 성경을 펴서 읽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듣고 감화를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고국에서 기차를 타고 성경을 읽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때 어떤 사람이 강렬한 호기심을 갖고 나를 주목하고 있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나중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내게로 오더니 “댁에서는 뭐하는 사람입니까? 플리머드 형제 교회(Plymouth Brother)회원이나 천주교회 신부는 예외가 되겠으나 기차를 타고 성경책을 읽는 사람은 내가 일찍이 본 일이 없는데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다시 물을 때에 “나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책 중에서 가장 귀한 책을 기차 안에서 읽는 일이 왜 그처럼 이상하게 생각되어질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들이 기선이나 기차 안에서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화투를 치는 것을 봐왔는데 그것은 사실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한국에서는 어른들이 연소한 자들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는 교훈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비평을 일단 마친 후에는 연소자들로서 혹시 할말이 있으면 그 연소자들이 연장자들을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국가들에서는 그러한 일이 잘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연소자들이 비판권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계에 서는 인간을 비판할 최고령자(最高齡者)는 성경에 있다고 시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든지 먼저 성경을 비판자로 모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감히 비평하려고 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한 성서관이 옳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한 성서관을 가지면 가질수록 유익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국적 정신으로 겸비하게 성경말씀을 대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모모 신학교들에서는 태워버려야 할 서책들이 에베소에서 바울이 전도할 때 마술사들이 태워버렸던 것보다 더 많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세계적 부흥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목사, 전도사, 장로들이 일본인들로부터 부당하게 옥에 갇히게 되면 무익한 불평을 함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성경 공부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옥중에서 성경을 7번이나 읽고 “내 주님께서 그처럼 놀라우신 것을 일찍이 상상조차 못했다.”고 간증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일본관원들이 성경을 빼앗을까 염려하여 로마서를 옥중에서 암송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옥된 후에는 요한복음을 암송하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들 중에는 무서운 핍박이 일어나게 된다면 현재보다도 성경말씀의 참된 가치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푸-트(Foote)목사가 어떤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집집마다 예상외로 기독교 가정이 많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날 거기에서 25명의 신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받기를 원하는 첫 번째 사람에게 어떤 성구를 암송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예!”하고 그는 대답하며 약 100절을 단숨에 암송하므로 정지를 명하고 만일 저마다 성경, 암송을 하게 된다면 그날의 문답을 마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염려를 하면서 두 번째 사람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 지원자 25명이 한결같이 100절 이상의 성구를 암송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처럼 강력하고 유능한 이유 중 하나는 성경 연구열에 기인한다고 하겠습니다. 일년간에 1,400번의 성서 연구회가 있었고 9만명의 학생들이 등록했으며 그 비용은 각자 개인 부담이었습니다. 어느 선교회본부에는 성경 연구생이 1,800명이나 있었습니다. 어떤 곳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온 고로 숙박 장소를 신자 가정 외에 미신자 가정에서까지 요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성경 연구생들을 받아드린 가정마다 구원이 임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일과 성경 공부하는 일에는 연령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평양에 있을 때에는 비가 내리는 주일날이었습니다. 평양에 있는 신도들이 소위 맑은 날 교인(비가 내릴 때에는 참석하지 않는 교인)들이나 아닌가 알아보려고 예배시간 전에 성경 연구반 5~6군데를 방문해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몇몇 반은 입추(立錐)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초만원이었습니다.
주를 위한 고난을 기쁨으로 참는 한국교회
초대교회는 주의 이름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기하는 마귀는 일본인들을 격동시켜 한국 교회를 핍박한 것입니다. 선천(宣川)의 기독교인들이 조선총독으로 있었던 데라우찌(寺內)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했다는 고소는 천만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불합리한 일이 어디에 있으련만, 기독교 지도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서는 그러한 구실을 조작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경찰서에서 기독교인을 고문하는 방법은 몹시 잔인무도 했으며 일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말을 하도록 무섭게 고문했습니다.
두 손을 뒤로한 채 두 엄지손가락을 묶어서 대들보에 매달기도 했으며(역자 주: 이것을 학(鶴)춤 추이는 고문이라고 했음) 불에 달군 쇠젓갈로 지지면서 고문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문을 당하는 중에 7번이나 기절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련 중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성실하였으며 재판이 열렸지만 무죄로 판결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출생한 마을에 가서 구주 예수를 고백하자 그의 문중(門中)에서는 그를 집과 가정으로부터 추방해 버렸습니다. 그는 법률에 호소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여전히 부드러웠습니다. 그는 모욕을 받고 부당한 손해를 받았으나 온유한 마음으로 잘 참아 가면서 그리스도를 전파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온 문중이 회개하게 되었으며 그의 소유권도 복귀(復歸)되었습니다.
어떤 시골 사람이 이 도시에 머물러 있는 동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가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자 그 말을 듣고 있던 그의 문중은 분개했으며 격분한 친척들은 그를 습격하여 거의 사경에 이르도록 구타했습니다. 그가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에는 실낱같은 숨결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여러 주간 치료를 받은 후에 그 환자는 집에 돌아갈 수 있었으나 언젠가는 출혈을 하고 세상을 뜨게 될 것이라고 의사는 말해주었습니다. 퇴원하면서 그는 많은 기독교 서적을 사가지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3년 동안 고향지방을 순회하면서 그 서적들을 나눠주며 구주 예수에 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드디어 피를 쏟는 날이 왔으며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올라갔습니다. 그를 살해하려고 구타하였던 그의 고향 바로 그 지방에 11개의 교회가 서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성령께서는 제 1세기에 팔레스틴에서 그러했듯이 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님을 한국땅에서 영화롭게 했습니다. 동양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하여 온 것을 모방하여 안일한 중에 신앙생활을 해온 우리들은 깨어서 하나님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들 중에 실현되어 지는 것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어지지 않는다는 증거를 그들은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겸손으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순복시켰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그들을 통해서 흘러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관해서 그와 같은 충만함을 갖고 우리들을 찾아오시려고 대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았다는 이름만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며 그처럼 큰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분을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당하는 일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초판 1977년 1월 1일
재판 1977년 3월 2일
삼판 1977년 7월 19일
사판 1992년 8월 15일
오판 2005년 8월 15일
1907년 한국을 휩쓴 성령의 불길
저 자 : 요나단 고우포스
역 자 : 김용련 목사
발행자 : 반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