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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것은 숙주가 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생산한 바이러스가 읽는 의식에 기생체로 밀려들어온다. 의식 내부에서, 바이러스의 영토화가 발생하고, 새로운 기호의 배치가 생산된다. 쓴다는 것은 의식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변이다.”
“문학의 언어는 예민한 조건에서 활성화되는 바이러스와 같다. 온도와 습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문학의 언어는 활동을 멈추고 무기물의 상태로 돌아간다. 문학의 문은 쉽게 닫힌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아.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발산한다. 글의 형태로, 그림의 형태로, 음악의 형태로, 혹은 그 어떤 형태이든간에 말이다. 완전한 인간의 형태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수많은 각자의 이야기들이 바이러스처럼 둥둥 떠다닌다. 그리고 그 바이러스는 사람들에게 침투해 사랑에 빠지게도 하고, 극도로 미워하게도 하고, 사람을 죽이게도 하고, 죽기 전까지 함께할 친구를 만들기도 한다. 또, 이야기를 쓰고, 읽고, 듣고, 보는 과정은 사랑을 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하지만 슬프게도 급박하게 변화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이 삶에서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으로 외면하면서 살거나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에는 다문화 가정의 가족간의 관계에서 이러한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내가 ‘사랑(love)’이라고 말할 때, 난 그 말을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켰다. “하지만 아이(愛)라고 말하면,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빠는 고개를 저었다. “여긴 미국이야.” (중략) 엄마가 중국어로 말을 걸면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서 엄마는 영어를 더 많이 쓰려고 애썼다. 하지만 발음도 문법도 엉망이라 짜증스럽기만 했다. 나는 엄마의 영어를 교정해 주려고 했다. 결국 엄마는 내가 곁에 있으면 아예 말을 안 하게 됐다. 엄마는 나한테 알려 줄 게 있으면 몸짓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 본 미국 엄마들처럼 나를 끌어안으려고도 했다. 내가 보기에는 과장되고 뜬금없고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웠다. 내가 짜증내는 걸 알고 나서 엄마는 몸짓도 그만두었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표현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을 이해하는 태도와 사랑하는 방식을 비유적으로 볼 수 있는 수단이다. 본인의 틀에 맞는 것만을 옳다고 여기고, 상대방에게 그 방식대로 하게 만드는, 마치 주물틀에 쇳물을 녹여넣는 듯한 행위. 사람을 대할 때 이는 얼마나 폭력적인 행위인지 인지하지 못한다. 사람은 금속의 원석과 같다. 어떻게 제련하는지에 따라 수많은 베리에이션을 가질 수 있다. 물론, 그 사람이 온전하게 자신의 형태로 존중받을 때, 즉 스스로 제련할 기회가 있을 때 비로소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띌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을 쌓으면서, 스스로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가고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방을 자신의 틀에 욱여넣을 때, 여러 틀을 거치면 어떠한 흉물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과정에는 사람의 마음를 부수고, 고열로 녹여내고, 망치로 때리고, 식히고, 깎아내는 과정이 반드시 수반된다. 스스로에게도 행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것을 상대방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사회, 이 얼마나 잔인한가. 이 시대는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조상보다 시대를 더 닮는다.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 행해지는 폭력과 억압, 이는 비단 가족 간의 사랑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가며 연애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드러난다. 이번에는 질문 하나를 던지며 최은영의 <그 여름>을 살펴보자. 사랑은 보편적인 감정인가? ‘보편적인’의 사전적 의미는 ‘두루 널리 미치는. 또는 그런 것’ 그리고 ‘모든 것에 공통되거나 들어맞는. 또는 그런 것’이다. 유의어는 ‘일반적이다’가 있다. 그렇다면 이경과 수이의 사랑은 일반적인가? 특별(한국에서는 특이라고 더 표현되겠지만) 한 건 아닌가? 그렇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다루는 것은 바로 ‘보편적 사랑’이다. 동성 간의 사랑, 유색인종 간의 사랑,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사랑,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람들 간의 사랑 등 어떤 유형의 사랑이든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 (‘정상적인’이라는 수식어도 있지만, 그건 너무 차별적인 시선이다.)인 사랑과 비교했을 때 전혀 다르지 않다고. 그런 사람들도 누군가 만났을 때 설레고, 관계가 시작됐을 땐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아끼며, 때때로 싸우고 질투하기도 한다고. 마찬가지로 가슴 아픈 이별도 겪기도 한다고. 사랑이라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거라고.
그 여름은 어떤 관계의 시작과 소멸을 다룬 작품이다. 너무 아련하고 아름답지만 그래서 눈물이 나는 그런 계절. “손가락 하나 잡지 않고도, 조금도 스치지 않고도 수이 옆에 다가가면 몸이 반응”했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어지럽고 속이 울렁”였던 관계가 “우린 서로 너무 다른 사람이 되었어.”라고 말하는 관계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이경과 수이의 서툰 사랑의 방식. 이경과 수이 모두 어리고 약해서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는 다르다. 수이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고,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의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반면 이경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끊임없이 생각했고, 어떤 선택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그걸 몰랐던 두 사람은 서서히 멀어진다. 사랑이란 건 서로 다른 부분을,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행위라는 것을 두 사람은 몰랐다. 그리고 그건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어디서 배우는 것도 아니라 알아서 터득해야 한다는 것도. 비록 관계는 이별로 끝나긴 했지만 그때 그 여름이, 수이와 함께 했던 시간이 이경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이경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여름은 매년 다시 찾아온다는 사실도 말이다.
거기에 더해 이경과 수이의 관계에서는 격차가 느껴진다. 수이는 축구부 활동을 하다가 부상을 당한다. 운동을 그만두고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한다. 반면 이경은 대학에 진학하고 같은 성향의 친구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계(은지라는 새로운 관계)에 눈을 뜨게 된다. 수이의 세계가, 잘 표현하진 않지만 온통 이경으로 가득 차있는 반면 이경은 점차 수이의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나간다. 비록 그 격차를 경제적인 걸로 단정할 순 없겠지만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다. 살아온 세계가 완전히 달랐고 또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 격차가 줄어들지 않을 거라는 걸 서로 알지 않았을까.
위 이야기는 남녀 사이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프로세스를 거쳐 이루어진다. 그저 두 사람의 노력, 설렘, 상처, 그리고 성장의 과정을 다룬 이야기이다. 성소수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한 나라에서 자국어를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비슷한 연령대의 연인과 만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같은 나이의 기혼자와 비혼주의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인서울과 지방대, 그 어느 쪽도 자신의 삶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상’의 범주는, 사회가 주입한 관념과 숫자와 통계, (실제로는 합리적이지 못한) 합리성이라는 몇 가지 명목에 의해 계층화되고 프레임화된다. 우와 열을 가리고 무한경쟁과 비교 속에 던져놓고, 반대 진영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심는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을 인식하는 관념은 대개 이렇다.
사랑의 형태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정상 이데올로기’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굉장히 회의적이다. 아래는 앤드류 포터의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일부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나의 중요한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 생각에,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시킬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하다고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보면 헤더는 물리학과 종신 교수인 로버트가 낸 방정식을 유일하게 푼 학생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방정식의 답을 맞힌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노력을 했고, 답을 써낸 학생이다. 물론 그것은 오답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사건을 계기로 로버트와 헤더의 사이는 가까워진다. 로버트는 끝까지 시험에 자리했던 헤더에게 A학점을 주는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굳이 자신의 집에서 대접한다. 이후 헤더와 로버트는 일주일에 꼭 한 번 만남을 가졌다. 장소는 여전히 로버트의 낡은 아파트였고 그들의 만남은 불륜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건전한 종류의 것들이었다. 그들은 물리학에 대해, 영화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 아내에 대해, 그리고 지나간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급기야 빛이 물질에 닿을 때 생겨나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 둘은 서로를 마주 보게 된다. 어쩌면 이제 로버트에게도 그리고 헤더에게도 일주일에 한 번 꼭 차를 마셔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둘은 정반대의 인물이다. 남과 여, 교수와 학생, 늙거나 젊음, 돌싱과 싱글, 하지만 구구절절 말로 다 하지 않아도 우리는 삶이 남긴 상처의 흔적은 대게 비슷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헤더와 로버트가 그렇듯.
이 교수와 대학생의 로맨스는 위에서 말한 ‘보편적인’ 인식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한가. 결국 헤더와 로버트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고, 그들의 삶이 남긴 상처의 흔적이 무엇인지, 어떠한지에 대해서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그들의 관계에 대해 평가할 뿐이다. 그러한 것이 저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평가하는 본인의 삶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에 대해 논리적이고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고 본다. 아니, 어쩌면 명쾌한 답은 없다. 굳이 할 말이 있다면 남의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거나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서 보기 안 좋다는 정도일 것이다. 결국 자의적 기준에 맞춰 평가하고 있는 본인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도 만들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가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문학은 줄거리를 파악하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재미로 읽는 문학 말고도, 어렵고 정교한 문학 작품들을 ‘굳이’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세계를 조금 더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문학은 세계를 보는 하나의 방식이다. 상대방의 세계를 본다는 것은 사랑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 전반에 걸쳐 이는 굉장히 중요하다.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사랑을 하는 것은 폭력과 억압, 혐오로 이어지기 쉽다. 그리고 그를 자각하지조차 못한다. 어린아이는 잠자리의 날개를 뜯으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개미를 발로 밟고 성냥으로 태우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무지는 공포를 낳고, 공포는 불안을 낳는다.
김연수의 <첫사랑>에는 나비와 반딧불이 이야기가 나온다. 소유와 쟁취를 위해 거친 폭력으로 아름다움과 소중함, 정의로움을 까부순 자리에는 찌꺼기같이 조잡한 더러움과 추악함만이 남았다. 노란 나비가 짓이겨진 자리에는 더러운 휴지 쪼가리 같은 것만이 남았고, 반딧불이 사그라진 유리병 속에는 끔찍한 벌레만이 남았고, 짝사랑이 끝나던 과거의 한 장면 속엔 수치심만이 남았고, 어머니의 말벗인 누나를 보잘것없는 술집 작부로 내몰았을 때에는 죄의식만이 남았다. 아름다움이 추악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과정에는 나비를 소유하고 싶고, 반딧불을 보고 싶고, 사랑을 쟁취하고 싶고, 술집 작부 위에 군림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파생되는 폭력이 개입해 있다. 그렇게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아름다웠던 자리에는 '구겨진 더러운 휴지 조각'과 '끔찍하게 생긴 곤충'과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망울'과 '겁에 질려 나를 바라보던 그 눈'만이 남아있다. 아름다움이란 그저 찰나에만 존재하는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모든 세계는 갑자기 붕괴되는 경향이 있듯이.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레 잊혀져 갈 과거에게 뜬금없이 펜을 들어 반성과 참회의 편지를 쓰는 이유는, '내'가 사회의 폭력으로 인해 '죄인'으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사회의 부당한 폭력으로 인해 처참히 부서져 버리자, 그때서야 '나'의 폭력으로 산산이 부서져버린 과거의 아름다움이 생각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폭력으로 인해 무너진 '나' 또한 언젠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혀질 것임을 예감한다. '내'가 그동안 아름다웠던, 그러나 추악하게 변질되어 버렸던 과거를 잊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남겨야 한다는 초조한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 그러니, 그 편지는 다름 아니라 '나'의 폭력으로 부서진 아름다운 과거에 대해 용서를 비는 편지인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이의 사랑은 상대방에게 맨눈으로 해를 보게 하는 것과 같다. 같이 해를 보고 싶다면, 유리를 검게 그을린 다음에 보자고 권유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본인이 가진 유리를 검게 그을리는 것이 싫어 상대방에게 맨눈으로 해를 보라고 명령하는 것만큼 오만하고 잔인한 짓을 안 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이 다른 사람의 세계를 보려고도, 혹은 보고 나서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무작정 사랑을 전하려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맨눈으로 해를 보게 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절대로 미워하는 것과 알고 싶은 것을 동시에 행할 수 없다.’ 라는 문장 하나를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본인이 사랑하는 사람만큼에게는 적어도 그 세계를 보고 싶어 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라도 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마저도 어렵다면 기존의 관성이 익숙해져 앞으로도 폭력을 폭력인지 모른 척 행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무례하고 잔인하며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행위이다. 상실을 경험한 후에 우리는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하자.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비단 인간관계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본인의 삶의 의미를 찾는 데에도 있다. 우리는 자유롭지만 동시에 고립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을 포장하기 바쁘다. 요즈음은 중고등학생들, 아니 대학생들까지도 타인의 욕망에 갇힌 채 살아가는 것 같다. 정치인이나 가수도 아닌데, 다들 타인의 욕망을 안고 살아간다. 진로에 맞지도 않는 과를 써가며 대학교 간판에 광적으로 집착하고, 적성에 맞지도 않은 직무인데 월급을 많이 준다는 이유로 대기업에 가고 싶어 하고, 인스타그램에 좋은 물건을 사면 꼭 자랑을 하는, 이른바 ‘관종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점차 자신을 잃어간다. 호모 사피엔스의 미덕은 스스로 진화의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아래는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일부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낀 장갑에 나는 모욕을 느꼈다.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기쁨에, 폐지가 지닌 비길 데 없는 감각적인 매력에 아무도 마음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바츨라프 광장의 에스컬레이터를 탄 사람들처럼, 책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올라고 스미노프 양조장의 가마솥만큼이나 거대한 가마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중략) 책 더미들이 여기서 몽땅 파괴되었다...(중략) 그 책들은 어느 누구의 눈이나 마음, 머리도 오염시키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중략) 떨어지는 책들이 내장을 드러내며 여기저기 펼쳐졌지만 책장을 들춰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중략) 실수로 그 곳에 버려진 책들과 사소한 기쁨도 끝이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처럼 늙은 압축공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도 끝이 나고 만 것이다!...(중략)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우리가 종이 더미에서 구해낸 장서들도 모두 끝장이었다..”
한탸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35년의 노력이, 그의 유일한 즐거움이, 그의 하나뿐인 소망이 사라졌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비극이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경이롭다. 차라리 자신의 작업장 지하실에 있던 생쥐가 인간적이라고 말하던 한탸. 그는 정작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하늘 너머엔 연민과 사랑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가 잊고 있었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 그래서 마지막을 맞을 때, 그때서야 이름도 모르던 집시여인의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책과 함께 일치되며 인간성을 회복하자 떠오르는 잊었던 사랑.
한탸의 삶을 위에서 말한 ‘보편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돈도 잘 못 벌고, 현대 기술을 이용하지 않고, 고집 센 일개 폐지 고물상 늙은이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길거리에서 폐지를 줍고 처리하는 사람을 우러러보는가? 아마도 대부분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평가한 당신은 저 사람만큼 본인의 신념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신형 압축기가 도입되기 전까지 한탸가 누렸던 그 행복감을 느낄만한 매개체를 적어도 하나는 갖고 살고 있는가? 라고 물으면, 아마도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학벌과 돈, 시간만을 중요시하며 연민과 사랑을 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할 때는 지금이 아닌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자신의 종족을 지키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투쟁하면서도 하늘을 보고 문학과 철학을 즐길 수 있는 자유를 꿈꾸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말하는 고독은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인간성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기계화, 도구화되지 않기 위해 그들로부터 고독을 지키려는 노력이 아닐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인간성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말의 노력이라도 하고 있는가.
우리가 한탸와 같은 사람을 외견으로 보고 얕잡아봐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것이다. 어떠한 사람에 대해 알아가려면 지극한 정성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시대는 속도를 강요했고, 그 결과 카카오톡으로 1초만에 고백과 이별을 고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에 대한 판단과 평가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몇 분만에 그 사람의 인식이 결정되고 만다.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방을 금방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태도는 시대와 수치주의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인간다움은 시간이 지나며 속도가 빨라질수록 점점 사라져만 간다.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에서도 사람을 보는 관점의 측면에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 아래는 책 내용의 일부이다.
“미호는 결혼하여 고향에 단독주택을 샀고, 그 집에서 친구들이 자주 모인다. 다음 날 근무라 귀찮게 여겨질 때도 있지만 편의점 이외의 세계와 만나는 유일한 접점이고 같은 나이의 '평범한 30대 여성'과 교류하는 귀중한 기회이기 때문에, 미호의 초대에는 되도록 응하고 있다. ”
"시라하 씨, 결혼만이 목적이라면 나랑 혼인신고를 하는 게 어때요? (...) 그렇게 간섭받는게 싫고, 무리에서 겉돌기 싫다면 제꺼덕 결혼하면 되잖아요? 사냥…… 그러니까 취직에 관해서는 모르지만, 결혼하면 우선 연애 경험이나 섹스 경험에 대해 간섭당할 위험은 없어지지 않을까요?"
주인공은 보편정서를 느끼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따라서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인물이다. 그리고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을 법한 해결책을 이용하려 하다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이렇게 살다가 문제가 생길 것 같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남이 시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고, 먼저 말을 잘 꺼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다양한 규칙이 이미 정해져 있는 편의점이라는 공간에서 일하고, 인간관계를 하는 것에 익숙해지며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니 에너지를 너무 소모하지 않기 위해 일찍 잠을 자고, 일찍 일어나며, 용모도 단정하게 관리한다.
어떤 이에게는 그냥 2-30대 때 잠시 해 보는 아르바이트 정도겠지만, 그녀에게는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주는 직업이던 것이다. 굳이 후쿠하라처럼 보편정서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아닐지라도, 어떤 이에게는 숨 쉬듯 쉬운 '평범하게 살기'가 어떤 이들에게는 무척 어렵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도, 사회의 무자비함에 부딪히면서 그 평범함과 멀어지기도 한다.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은 ‘관종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이 아닐까. 남들이 뭐라 하더라도, 자신이 꾸준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면, 남의 시선 때문에 그만둘 필요도, 내가 그들의 시선을 답습하여 내 직업이나 전문성을 필요 이상으로 평가절하할 필요 없다. 평범함이 정상적임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고, 애시당초 ‘정상적인’이라는 말의 기준을 누가 만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승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누구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고, 누구는 어린 나이부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무슨 상을 탔다는 이야기 등등.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은 타인이라는 것이다. 타인이 이룬 업적은 내 성공도 아니고, 내 실패도 아니다. 그냥 그 사람의 업적일 뿐이다. 나는 내가 해낸 일들,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또한 후쿠하라에게 편의점은 그녀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소속감을 느끼고, 자신의 쓸모를 느낄 수 있으며, 일하지 않는 시간에도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다. 실제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18년간이나 했다는 작가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고, 또 집필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면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는 일이 누군가에게 하찮은 일이 아닐 수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시사한다. 타인의 욕망은 본인의 욕망과 일치하기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그러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먼저 총대를 맨 사람인 것이다.
사람들은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이 자신의 기준인지 타인에 의해 스며든 기준인지 알 수 없는) 그 기준과 다르면 배척해버린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도 동일하다. 아마 다들 똑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 것을 아닐까. 20살이 되면 대학에 가거나 취직을 하고,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사귀고, 서른 살 즈음엔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한 후엔 아이를 낳고, 아이를 낳은 후엔 둘째를 낳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살 필요는 없으며, 개인의 생각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인데, 세상은 이 기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으로 치부해버린다. 진정 이상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사회를 살아가며 우리가 상대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려면 어렵고 정교한 문학 작품을 ‘읽고’. 오랜 시간 곱씹어보면서 주인공이 왜 저런 언행과 생활을 하는지, 주변 인물들은 왜 그런지,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 글을 ‘썼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이리하여 비로소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을 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민한 조건은 문학을 읽을 때 얻는 깨달음이고, 활성화되는 바이러스는 그 깨달음을 향유하게 한다. 깨달음을 얻고 그를 일상생활에 겹쳐서 보는 과정은 당신이 문학을 사랑하게 만들 것이라 자부한다. 그렇게 문학을 사랑하다가 보면 어느새 올바른 방식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를 반복하면 결국 문학을 통해 상처를 딛고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각자가 바이러스에 가진 항체와 면역체계도 다르다. 같은 장면을 보고서도 1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문체나 흐름이 어려워서보다, 물음표만을 남기는 이해할 수 없고 여러 번 곱씹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문학이란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를 남기는 일에 가깝다. 각자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고방식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가 벌어진 사람들이 여럿 모이면 특이한 조합이 된다. 같은 전공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도 다 다르지만, 각자 다른 전공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대개 더 특이한 조합의 색을 띄는 것이 그 중 하나이다. 그 모임이 특별한 이유는 본인의 면역체계에 맞지 않는 새로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그에 대한 면역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점에 있다. 즉, 사고를 다방면으로 할 수 있게 된다. 면역체계는 얼마나 넓게 사고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그 사람들이 모여 ‘읽은’ 글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쓰고’, 그 생각을 상대방이 다시 ‘읽는’ 것은 바이러스와 같아서 빠르게 퍼진다. 그로 인해 새로운 항체를 얻으며 새로운 면역체계를 구축한다. 그렇게 서로의 세계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서로의 생각을 ‘말하고’, ‘듣는’ 과정은 단지 문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과도 같다. 그 사람은 자신이고, 친구이고, 부모이고, 연인이고, 선생이고, 제자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매개체 역할을 하는 이로운 바이러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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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간은 자신의 조상보다 시대를 더 닮는다". ‘인간은 절대로 미워하는 것과 알고 싶은 것을 동시에 행할 수 없다.’ 라는 문장 하나를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본인이 사랑하는 사람만큼에게는 적어도 그 세계를 보고 싶어 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라도 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방을 금방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태도는 시대와 수치주의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인간다움은 시간이 지나며 속도가 빨라질수록 점점 사라져만 간다."깨달음을 얻고 그를 일상생활에 겹쳐서 보는 과정은 당신이 문학을 사랑하게 만들 것이라 자부한다. 그렇게 문학을 사랑하다가 보면 어느새 올바른 방식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를 반복하면 결국 문학을 통해 상처를 딛고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참 좋은 언어들을 모아 잘 읽었습니다.
소중함, 귀함, 가치, 그리고 나를 발견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나와 나 이외의 마음과 행동들을 읽고 전달하며 피드백하는 문학의 진정성있는 역할과 기여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