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신 선친(한옹 신태범, 1912~2001)께서는 박사학위를 받으시기 전 대학 조교와 순천도립병원에서 외과 과장 대리로 근무하셨다. 의학박사 학위를 받기 1년전 선친은 서울에서 개업할 여건이 있었음에도 1942년 인천에서 외과의원을 개업하셨다. 시내 중심부의 일본인 무역상 건물을 매입하여 최신설비의 수술실과 20여 입원실을 갖춘 번듯한 외과의원이었다.
▶일제가 강제했던 창씨 개명도 거부하면서 광제호 함장을 역임하셨던 조부(신순성, 1878~1944)의 뜻에 따라 우리나라 환자들에게는 수술비도 후불로 배려하는 경우가 잦았다. 토지문서를 맡기고 입원했던 분들이 문서를 찾아가지 못하면 몇 년 후에는 되돌려 주기를 연례행사처럼 계속했다. 위급한 환자가 자정이 넘어서 원장님을 외치면 잠을 설치셨고 입원 환자들이 많아 며칠간의 휴가도 갖지 못하시면서 1980년까지 근 40여년간을 인천의 대표적인 의사로 통했고 딱(닥터)신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었다.
▶일제시대가 아니면 문필가나 외교관이 되고 싶으셨다는 선친의 독서의 양과 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광복 직후 입원했던 죽산 조봉암 선생과 고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상협 박사는 한옹의 지적인 폭과 깊이에 경탄했던 대표적 인사였다. 50년대부터 뉴욕타임스와 아사히(朝日) 신문 그리고 타임과 뉴스위크 같은 시사잡지는 물론 네셔널지오그래픽까지 구독하셔서 서재에는 신문과 잡지 그리고 서적들이 항상 가득차 있었다.
▶선친의 서재에는 따라서 50년대에는 주원기, 조석기, 문병하 같은 선구적인 인물들이, 60년대에는 지용택, 심재갑 같은 시대를 고뇌했던 분들, 80년대에는 조우성, 김윤식, 김보섭씨가 한옹 서재에서 대화를 나누고 지적 교류를 했던 대표적인 분들이었다.
▶신외과 자리에 신축된 붉은 벽돌 건물 3층에 자리잡은 다락극장의 백재이 대표(54)가 신외과와 신태범 박사 그리고 한옹을 알게되어 개관 10주년 기획으로 신외과를 주제로 한 연극을 구상하면서 지난해 필자에게 연락을 해왔다. 의술을 펼치며 문화 사랑방을 통해 지역사회의 뜻있는 분들과의 끊임없는 교류에 주목한 백 대표는 기본적으로 나눔을 전제로한 문화·예술의 산실이기도 했던 신외과의원과 한옹 사랑방(서재)을 연극을 통해 재연해 보겠다고 했다. 코로나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다락극단을 살리기 위한 후원회가 한옹 사랑방 관계 인사들에 의해 지난해 11월 발족되어 회원이 75명에 이른다. 극단 다락에서는 공연장 옆에 한옹 사랑방을 만들어 최근 개관했다. 신외과의 한옹 선생 서재가 있던 자리에 한옹 사랑방이 마련된 것이다. 지역사회 뜻있는 분들의 멋진 만남의 장소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