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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협(麒麟峽)으로 들어가는 백영숙(白永叔)에게 증정한 서문
영숙은 장수 집안의 자손이다. 그 조상 중에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목숨 바친 이가 있어서 이제까지도 사대부들이 그를 슬프게 여긴다.
영숙은 전서(篆書)와 예서(隷書)를 잘 쓰고 전장(典章)과 제도(制度)도 익숙히 잘 알며, 젊은 나이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하였다. 비록 시운(時運)을 타지 못해서 작록(爵祿)을 누리지는 못하였으나,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을 그 뜻만은 조상의 공적을 계승함직하여 사대부들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아! 이런 영숙이 무엇 때문에 온 식구를 거느리고 예맥(穢貊)의 땅으로 가는 것인가?
영숙이 일찍이 나를 위해서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집터를 살펴 준 적이 있었는데, 그곳은 산이 깊고 길이 험해서 하루 종일 걸어가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할 정도였다. 갈대숲 속에 둘이 서로 말을 세우고 채찍을 들어 저 높은 언덕을 구분하며,
“저기는 울을 쳐 뽕나무를 심을 만하고, 갈대에 불을 질러 밭을 일구면 일 년에 조〔粟〕 천 석은 거둘 수 있겠다.”
하면서 시험 삼아 부시를 쳐서 바람 따라 불을 놓으니 꿩이 깍깍 울며 놀라서 날아가고, 노루 새끼가 바로 앞에서 달아났다. 팔뚝을 부르걷고 쫓아가다가 시내에 가로막혀 돌아와서는 나를 쳐다보고 웃으며,
“인생이 백 년도 못 되는데, 어찌 답답하게 나무와 돌 사이에 거처하면서 조 농사나 짓고 꿩ㆍ토끼나 사냥한단 말인가?”
했었다.
이제 영숙이 기린협에 살겠다며 송아지를 등에 지고 들어가 그걸 키워 밭을 갈 작정이고, 된장도 없어 아가위나 담가서 장을 만들어 먹겠다고 한다. 그 험색하고 궁벽함이 연암협에 비길 때 어찌 똑같이 여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 자신은 지금 갈림길에서 방황하면서 거취를 선뜻 정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니, 하물며 영숙의 떠남을 말릴 수 있겠는가. 나는 오히려 그의 뜻을 장하게 여길망정 그의 궁함을 슬피 여기지 않는 바이다.
그 사람의 떠남이 이처럼 슬피 여길 만한데도 도리어 슬피 여기지 않았으니, 선뜻 떠나지 못한 자에게는 더욱 슬피 여길 만한 사정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음절이 호방하고 웅장하여 마치 고점리(高漸離)의 축(筑) 치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주-D001] 기린협(麒麟峽)으로 …… 서문 : 강원도 인제군(麟蹄郡) 기린면(麒麟面)의 산골짜기로 이주하고자 떠나는 벗 백동수(白東修 : 1743~1816)를 위해 지은 증서(贈序)이다. 백동수는 자(字)가 영숙(永叔)이고, 호는 인재(靭齋), 야뇌(野餒) 등이다. 그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백시구(白時耈 : 1649~1722)의 서자(庶子)인 백상화(白尙華)의 손자였다. 따라서 신분상 서얼에 속하여, 일찍 무과에 급제해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 오랜 낙백(落魄) 시절을 거쳐, 1789년(정조 13) 장용영 초관(壯勇營哨官)이 되어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후 비인 현감(庇仁縣監)과 박천 군수(博川郡守) 등을 지냈다. 백동수는 이덕무의 처남이기도 하다. 《硏經齋全集 本集 卷1 書白永叔事》 박제가도 기린협으로 이주하는 백동수를 위해 장문의 송서(送序)를 지어 주었다. 《貞蕤閣文集 卷1 送白永叔基麟峽序》
[주-D002] 그 조상 …… 여긴다 : 백동수의 증조 백시구가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연루되어 옥사한 사실을 말한다. 소론이 집권하자 백시구는 평안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기로소(耆老所)에 은(銀)을 대여해 준 일로 문초를 받으면서 노론 대신 김창집(金昌集)의 죄를 실토하라는 것을 거부했다가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으며 사후에 가산을 몰수당했다. 영조(英祖) 즉위 후 호조 판서에 추증되고 가산을 환수받았으며, 1782년(정조 6) 충장(忠壯)이란 시호가 내렸다. 《夢梧集 卷6 平安道兵馬節度使贈戶曹判書諡忠壯白公神道碑銘》
[주-D003] 예맥(穢貊)의 땅 : 강원도를 가리킨다.
[주-D004] 영숙이 …… 있었는데 : 연암은 1771년(영조 47) 과거를 폐한 뒤 백동수와 함께 개성(開城)을 유람하다가 그 근처인 황해도 금천군의 연암협을 답사한 뒤 장차 그곳에 은거할 뜻을 굳혔다고 한다. 《過庭錄 卷1》
[주-D005] 나무와 …… 거처하면서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순(舜)이 깊은 산속에 살 적에, 나무와 돌 사이에 거처하면서 사슴이나 멧돼지와 상종하였으니, 깊은 산속의 야인(野人)과 다를 바가 없었다.〔舜之居深山中 與木石居 與鹿豕遊 其所以異於深山之野人者幾希〕”고 하였다.
[주-D006] 그 사람의 떠남 : 원문은 ‘其人□行’으로 1자가 빠져 있으나, 이본들에는 ‘其人之行’으로 되어 있다.
[주-D007] 고점리(高漸離)의 …… 소리 : 전국 시대 말기 진(秦) 나라에 의해 위(衛) 나라가 멸망당하자 위 나라 출신의 자객인 형가(荊軻)가 연(燕) 나라로 망명을 갔다가 축(筑) 연주를 잘하는 고점리를 만나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형가가 연 나라 태자의 간청을 받고 진 나라 왕을 죽이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되자 역수(易水)를 건너기 전에 전송객을 향해 고점리의 축 반주에 맞추어 강개한 곡조로 노래를 불렀더니, 사람들이 그에 감동하여 모두 두 눈을 부릅떴으며 머리카락이 곤두서 관(冠)을 찌를 듯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족형(族兄) 도위공(都尉公)의 환갑에 축수(祝壽)하는 서문
지금 임금 9년 을사년(1785) 10월 21일 아침에 임금께서 전교하시기를,
“금성도위(錦城都尉)는 곧 선왕(先王 영조 )의 의빈(儀賓)으로서 선왕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았으므로 나 또한 마음을 다해 공경하고 예우해 왔다. 오늘은 바로 그의 환갑이니, 호조는 의복과 음식을 실어 보내고, 사관(史官)은 문안하고 오라.”
하셨다. 이에 공이 마중을 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천신(賤臣)이 전하의 각별한 은혜에 감격하여 무어라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낮이 채 못 되어, 임금께서 사알(司謁)을 보내시어 비단과 초모(貂帽)를 더 내리시고, 그 밖에 산해진미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내리셨다. 날이 저물어 갈 때 사알이 또다시 와서 임금의 편지와 임금이 지은 칠언시(七言詩) 한 수를 선사했다. 그 칭찬하고 위로하는 은전이 여러 대를 두고도 한 번 얻기 어려운데, 공은 하루 동안에 아침부터 저물 때까지 무릇 세 번이나 이런 예우를 입었다. 친척과 손님들이 다투어 분주히 달려와서 공에게 하례하니, 공이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일일이 임금의 은혜를 뇌었고, 밤새 감히 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날이 새자마자 전문(箋文)을 받들고 간소하게 풍악을 잡히고 궐내에 들어가 사은하고 돌아왔다. 이에 온 장안이 공의 환갑을 영화로이 여기고 그가 받은 예우를 경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 옛날에 일컬은 세 가지 달존(達尊)이 마침내 공의 한 몸에 갖추어졌다 하겠으니 어찌 훌륭하다 아니 하랴.
지원(趾源)은 사대부들이 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일찍이 들은 바 있다.
“대궐에 드나든 지 오십 년에 조정의 의론이라곤 입에 올린 적이 없고, 조정 벼슬아치 집에는 발 들인 적이 없으며, 열네 살부터 부귀의 몸이 되었으나 풍류나 미색을 좋아한다거나 옷치레나 말〔馬〕 치장을 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소. 평소에 방 하나에서 기거하면서 자기 앉을 자리 외에는 다른 자리를 만들지 않고 ‘방이란 제 무릎을 들일 만하면 족하다.’ 하였지요. 등 뒤에는 민병풍이 하나, 눈앞에는 묵은 벼루 하나, 창 아래는 책 두어 질, 베개맡엔 술 반 병으로, 그 속에서 나날을 보내니 고요하고 한적하기가 규방과 같습디다.”
“이거야 무엇이 족히 어질다 하겠는가. 공의 조카가 판서로서 10여 년 동안이나 번갈아 이조와 병조의 우두머리로 있었으되 공은 한 번도 사사로운 일로 청탁한 일이 없었으며, 집안이 엄숙하기가 조정과 같으니 판서 역시도 공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몸가짐이 담박하고 검약하여 끝내 세상에 비난받는 일이 없었소. 이는 실로 공의 가법이 엄하였기 때문이오.”
“공이 명거(命車 임금이 하사한 수레 )를 타지 않는 데에는 까닭이 있었구려! 지위는 높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재상의 직분이 아니고, 녹봉은 후하되 소찬(素餐)한다는 책망이 없으니, 그 마음에 ‘나는 한낱 부마이다. 어찌 재상과 나란히 말을 달려 국민들을 현혹하게 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행차에 벽제(辟除)도 않고, 길을 걸어도 한복판으로 가는 일이 없어서,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모르게 하였다오.”
“이거야 무엇이 족히 칭찬할 만하겠는가. 선왕께서 늙마에 오래도록 병석에 계실 적에 공이 날마다 달려가 측근의 신하들과 함께 병환을 보살핀 것이 어떠하였는가? 지체가 비슷하고 같은 반열(班列)이니 가까이하기도 멀리하기도 똑같이 어려운 데다가, 눈길 한번 돌리는 사이에 이해가 갈리고 웃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은혜나 원수를 감추는 법인데, 공은 무릎을 마주하고 앉은 자리에서도 소원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고, 곁눈질로 눈치를 살펴야 하는 마당에서도 초연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그 슬기가 족히 제 몸을 지킬 만하고 화나 복을 둘 다 잊어버리지 않고서야 이럴 수 있었겠는가.”
“세상엔 또한 공을 업신여기는 자도 있었다네. 종놈들 중에 젠체하고 크게 침을 내뱉는 놈은 내쫓고, 눈을 치뜨고 활갯짓하는 놈도 쫓아내고, 눈가가 짓무르고 눈곱이 끼어 있는 놈, 쭈삣거리며 히죽히죽 웃는 놈, 콧물이 수염까지 질질 흘러내리는 놈만 남겨 두어 옷이며 밥을 주었으므로, 시정배들이 연약한 자를 서로 욕하거나 놀려 댈 때면 으레 아무 궁방(宮房)의 종놈 같다고 일컫는다지.”
“세상엔 공을 원망하는 이도 있다네. 공이 일찍이 세 번이나 왕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나갔는데, 비록 몸이 이역만리 머나먼 곳에 있으면서도 새벽이고 밤이고 조심조심하여 마치 임금님 앞에 있는 듯 조마거리니, 여러 역관(譯官)들이 서로 원망하기를 ‘젠장, 공께선 왜 당신 몸 좀 편안케 쉬지 않으신담? 그래야 우리도 좀 쉬련만. 우리네가 공을 모시고 고생스러운 사신 길을 나선 지도 여러 번일세만, 사신 일만 끝나면 우리들이 공의 집 대문에 얼씬도 못 하게 거절하실 건 또 뭐람? 사신 일 마치고 돌아오실 때에도 실 한오라기도 몸에 지니고 오질 않으시니, 누가 감히 밀수품을 숨겨 가지고 와서 돈벌이를 하겠는가.’ 했다지.”
대개 이런 일들은 진실로 세상없이 훌륭하여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기지만, 공에게는 집안의 내림으로 몸에 밴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우리 선조 문정공(文貞公)이 목릉(穆陵 선조(宣祖) )의 부마가 되었는데, 검약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복을 아끼고, 예(禮)를 돈독히 함으로써 자손들이 번창하게 하고, 어리숙하게 행동하는 것으로써 몸을 온전히 하는 방도로 삼고, 권력을 멀리하는 것으로써 집안을 보전하는 법으로 삼았다. 공의 풍류와 문장이 비록 그러한 선조에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신분이 고귀해져서도 선비의 바탕을 잃지 않고 살림이 부유해져서도 본분을 잊지 아니하며, 뜻은 높이 가지되 겸손하고 억제할 줄 알며 기세를 낮추고 남을 이기려는 마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점에서는 선조에 능히 미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예전에 공을 칭송한 사람들은 당연히 세 조정으로부터 받은 예우에 대해 언급하는 데에 그쳤지만, 공이 스스로 처신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보자면, 공은 그저 굶지 않고 추위로 떨지 않는 한 늙은 유자(儒者)일 뿐이다.
아! 세상 사람들이 유자를 비웃고 선비를 천하게 여긴 지도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공은 마음속으로, ‘남들이 나를 유자라 하면 어찌 감히 당키나 하겠는가. 나는 뜻을 고상하게 가지려고 애써도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도 그런 티를 안색에 나타내거나 말에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은총 속에 살면서도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많은 기대와 아름다운 명성 속에서도 그 지조를 변치 않으며, 비록 자질구레한 일에 신중하고 결백한 것이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바일지라도 공은 착실하게 지키면서 60년을 하루같이 지내 왔다. 이는 대개 공의 지조와 행동이 단정하여 저절로 법도에 가까워진 것이요, 곰곰이 생각하고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 저절로 옛 법도에 합치된 것일 뿐이니,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하리라.” 한 것이 아마도 공을 두고 한 말일진저.
이상은 지원이 공을 두남두어 하는 말이 아니라 국민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되읊은 것이니 이로써 공의 회갑에 축수하는 말로 삼는 바이다.
의론이 사실을 제대로 서술하지 않은 게 없으며 자자구구 저울로 무게를 단 듯이 꼭 들어맞게 썼다. 그래도 모공(某公 박명원 )의 풍모에 관해 미처 듣지 못한 사람이면 역시 이 글의 잘됨을 깊이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주-D001] 족형(族兄) 도위공(都尉公) : 연암의 삼종형인 박명원(朴明源 : 1725~1790)을 가리킨다. 그는 14세에 영조의 셋째 딸인 화평옹주(和平翁主)와 결혼하여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졌고 1766년, 1780년, 1784년 세 차례나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을 다녀왔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그를 따라 중국을 여행한 기록이다. 《연암집》 권3에 실린 그의 묘지명에 생애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주-D002] 의빈(儀賓) : 임금의 사위인 부마도위(駙馬都尉)를 가리킨다.
[주-D003] 사알(司謁) : 액정서(掖庭署)에 속한 관직으로 왕명(王命)의 전달을 담당한다.
[주-D004] 칠언시(七言詩) : 《홍재전서(弘齋全書)》 권5에 ‘금성도위의 회갑에 음식물과 옷감을 보내고, 인하여 시 한 수를 받들어 보이다.〔錦城都尉周甲送食物衣資仍以一詩奉眎〕’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주-D005] 전문(箋文) :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표(表)라 하고, 그와 구별하여 황후나 황태자, 왕이나 왕후에게 올리는 글을 전(箋 : 또는 牋)이라 한다. 주로 감사를 표하거나 위로하는 목적으로 지으며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를 취하였다.
[주-D006] 세 가지 달존(達尊) : 달존은 세상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존중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벼슬, 나이, 덕망을 가리킨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천하에 누구나 존중하는 세 가지가 있으니, 벼슬과 나이와 덕망이다. 조정에서는 벼슬만 한 것이 없고, 향당에서는 나이만 한 것이 없고, 세상과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는 덕망만 한 것이 없다.〔天下有達尊三 爵一 齒一 德一 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莫如德〕”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07] 자기 …… 않고 : 청탁차 찾아오는 손님들을 물리치기 위한 방편으로 그런 것이다. 자신의 좌석만 남기고 내객을 맞을 좌석은 두지 않는 것을 측석(側席)이라 한다.
[주-D008] 공의 조카 : 박명원의 맏형 박흥원(朴興源)의 아들인 박종덕(朴宗德 : 1724~1779)을 가리킨다. 박종덕은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번갈아 맡기 십수 년이요, 이조 판서를 무릇 열여덟 차례나 지냈으나 한결같이 인선(人選)에 공평했다고 한다. 《歸恩堂集 卷10 吏曹判書朴公諡狀》
[주-D009] 비난받는 : 원문은 ‘訿讁’인데, 《연상각집》, 《운산만첩당집》 등의 이본에는 ‘疵讁’으로 되어 있다.
[주-D010] 소찬(素餐) : 시위소찬(尸位素餐)에서 온 말로, 아무 공적도 없이 봉록을 받음을 이른다.
[주-D011] 지체가 …… 있었으니 : 영조가 위독하자 세손(世孫)인 정조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는 세력과 이를 극력 저지하려는 세력 간에 치열한 암투가 벌어진 상황에서 박명원이 전자의 편에 확고히 섰던 사실을 가리킨다.
[주-D012] 문정공(文貞公) : 박미(朴瀰 : 1592~1645)를 가리킨다. 박미는 선조(宣祖)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결혼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다.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에게 수학하고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 등과 교유하면서 문학에 치력하여 장유와 더불어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손꼽혔다. 문집으로 《분서집(汾西集)》 16권이 전하고 있다.
[주-D013] 세 …… 예우 : 박명원은 실제로는 영조와 정조의 양조(兩朝)에서 각별한 예우를 받았지만,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莊獻世子)에게서도 남다른 지우(知遇)를 받았으므로 이와 같이 표현한 듯하다. 《연암집》 권3에 실린 그의 묘지명에 의하면 그가 임종할 때에도 “내가 세 조정의 은혜를 받았는데도 티끌만큼도 보답한 것이 없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주-D014] 뜻을 고상하게 가지려고 : 《맹자》 진심 상에서 제(齊) 나라 왕자 점(墊)이 “선비란 무슨 일을 하는가?”라고 묻자 맹자가 “뜻을 고상하게 가진다.〔尙志〕”라고 답했다. 그리고 뜻을 고상하게 가진다는 것은 곧 인의(仁義)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D015] 비록 …… 하리라 : 《논어》 학이(學而)에서 자하(子夏)가,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붕우와 사귀되 말에 신의가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하리라.〔賢賢 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하였다.
홍범우익서(洪範羽翼序)
내가 나이 스무 살 때 마을 서당에서 《상서(尙書 《서경(書經)》 )》를 배웠는데 홍범(洪範)이 너무도 읽기 어려워서 선생께 물었더니, 선생은 말했다.
“이는 읽기 어려운 글이 아니다. 읽기 어려운 까닭은 속된 선비들이 어지럽게 만든 때문이다. 무릇 오행(五行)이란 하늘이 부여한 것이요 땅이 소장한 것으로,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 살아 나가는 것이다. 우 임금이 순서를 정한 홍범구주와 무왕과 기자(箕子)가 문답한 내용을 보면 오행이 하는 일은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의 도구에 지나지 아니하며 오행이 하는 작용은 중화위육(中和位育)의 공효에서 벗어나지 않을 따름이다.
한 나라 유자(儒者)들이 휴구(休咎 길흉(吉凶) )를 독실히 믿어 바로 어떤 일은 반드시 그 일에 상응하는 어떤 징조가 나타난다고 하면서 모든 일을 오행에다 나누어 배열하고 미루어 부연하여 그 허황되고 망녕됨을 즐겼다. 그리하여 이것이 잘못 흘러 음양과 복서(卜筮)의 학술이 되었고, 이것이 둔갑하여서는 성력(星曆 천문역법 )과 참위(讖緯 미래 예언 )의 서적이 되어 마침내 세 성인의 본지와 크게 서로 어긋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설(說)에 이르러서는 그 어긋남이 너무도 극에 달했다.
만물이 흙에서 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어찌 유독 쇠만이 이를 모체로 삼는다 하겠는가. 쇠란 딱딱한 물질이니 불을 만나 녹아내리는 것은 쇠의 본성이 아니다. 저 넘실거리는 강과 바다, 황하(黃河)와 한수(漢水)를 보라. 이것이 다 쇠에서 불어났단 말인가?
돌에서 젖이 나오고 쇠에서도 즙이 배어난다. 만물에 진액(津液)이 없으면 말라 버리거늘 어찌 유독 나무에 있어서만 물이 배었겠는가?
만물이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렇다고 땅이 더 두터워지지도 않고, 건곤(乾坤 하늘과 땅 )이 짝을 이루어 만물을 화육하거늘 어찌 한 아궁이의 불붙은 땔나무가 대지를 살지게 할 수 있다 하겠는가.
쇠와 돌이 서로 부딪치거나 기름과 물이 서로 끓을 때는 모두 불을 일으킬 수 있고, 벼락이 치면 불타고 황충(蝗蟲)을 묻어 두면 불꽃이 일어나니, 불이 오로지 나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상생한다는 것은 서로 자식이 되고 어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힘입어서 산다는 것이다.
예전에 하우씨(夏禹氏),는 오행을 잘 활용하였다. 하우씨가 산을 따라 나무를 베어 낸 것은 굽게 할 수도 있고 곧게 할 수도 있는 나무의 쓰임을 터득한 것이요, 토목공사를 크게 벌인 것은 곡식을 심고 거두는 농사의 방법을 터득한 것이요, 금, 은, 동 세 가지를 공물로 받은 것은 모양을 마음대로 변형할 수 있는 쇠의 성질을 터득한 것이요, 산을 태우고 늪을 태운 것은 위로 타오르는 불의 덕을 터득한 것이요, 하류를 터서 물을 끌어들인 것은 적시고 내려가는 물의 공을 터득한 것이니 백성과 만물이 살 수 있도록 서로 도움을 받은 것이 이렇듯 막대하다.
어느 것이고 물질이 아닌 것이 없지만, 유독 나무, 불, 흙, 쇠, 물만을 오행이라고 말한 것은 이 다섯 가지로 만물을 포괄하면서 그것들의 덕행을 칭송한 것이다. 그런데 후세에 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성(城)을 침수시키는 수공(水攻)에 이를 남용하였고, 불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화공(火攻) 작전에 이를 남용하였으며, 쇠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뇌물을 주는 데에 이를 남용하였으며, 나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궁실을 짓는 데에 이를 남용하였으며, 흙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논밭을 만드는 데에 이를 남용하였다. 이로부터 세상에서는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학설이 단절된 것이다.”
나는 물었다.
“우리 동방은 기자가 와서 다스린 나라이며 홍범은 그에게서 나왔으니 마땅히 가가호호 깨우치고 외우게 하였을 터인데, 아득한 수천 년 동안 홍범의 학설로 세상에 이름난 이가 없었던 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선생이 대답하였다.
“허허, 참 슬프도다! 이는 네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대저 ‘황극(皇極)을 세운다’는 것은 당연히 이르러야 할 곳에 반드시 이르며 이치에 맞기를 기약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후세의 학자들은 그렇지 못하여, 명백하고 알기 쉬운 인륜과 정사는 도외시한 채 어렴풋하고 고원한 도상(圖像)에만 치중하여 논설하고 쟁변하였으며, 견강부회하여 먼저 스스로 오행의 순서를 어지럽혀 놨으니, 이 때문에 그 학설이 정교할수록 더욱 빗나가는 것이다.
이제 내가 오행의 쓰임에 대해 먼저 말해 볼 터이니, 이를 통해 구주(九疇)의 이치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용’이 있은 후에라야 ‘후생’할 수 있고, ‘후생’한 후에라야 ‘정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물을 적기(適期)에 모으고 빼곤 하여 가문 해를 맞아 수차로써 관개(灌漑)하고 수문으로 조운(漕運)을 조절한다면 물을 이루 다 쓸 수 없을 터이다. 그런데 지금 너에게 물이 있어도 쓸 줄을 모르니 이는 물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불은 사시(四時)에 따라 화후(火候)가 다르고 강약의 정도에 따라 그 효과가 다르니, 질그릇, 쇠그릇, 쟁기, 괭이를 만드는 데에 각기 적절하게 맞추게 되면 불을 이루 다 쓸 수 없을 터이다. 그런데 지금 너에게 불이 있어도 쓸 줄을 모르니 이는 불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00리 되는 고을이 360군데이나 고산준령이 10에 7, 8을 차지하니 명색만 100리라 하지 실제 평야는 30리를 넘지 못한다. 때문에 백성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저 우뚝하니 높고 큰 산들을 사방으로 측량해 보면 몇 배나 더 많은 면적을 얻을 수 있으며, 그 속에서 금, 은, 동, 철이 왕왕 나오니, 만일 채광(採鑛)의 방법과 제련의 기술만 있다면 이 나라의 부가 천하에서 으뜸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궁실, 관곽(棺槨), 수레, 쟁기는 그 재료가 각기 다르니, 우형(虞衡)이 재생한 나뭇가지를 때맞추어 잘 가꾼다면 나라 안에서 쓰는 분량은 충분할 것이다.
아! 오토(五土)는 거름 주는 법이 다르고 오곡은 파종하는 법이 다르거늘 영농의 지혜를 어리석은 백성들에게만 맡겨서 토지를 이용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백성들이 어찌 굶주리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부유하게 살아야 착하게 행동한다.〔旣富方穀〕’ 하였으니, 먼저 일상생활의 일부터 잘 밝히고 나면 부유하고 착하게 되니 구주의 이치가 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읽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화림(花林 안의(安義)의 옛 지명 )의 수령이 되자 제일 먼저 현(縣)의 문헌을 찾아보았다. 속수(涑水) 우공(禹公)이 홍범에 조예가 깊어 《홍범우익(洪範羽翼)》 42편과 《홍범연의(洪範衍義)》 8권을 지었다 하므로, 급히 가져다 읽어 보니 정연하게 구분하고 조리 있게 분류하였다. 이 책들은 크게 말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반드시 가져다 보아야 할 내용이요, 작게 말하면 경서 공부하는 서생이 과거 답안 작성 연습 때 반드시 참고로 삼아야 할 내용이니, 이 책이 그다지 읽기 어렵지 않다는 것이 새삼 믿어진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 오랫동안 백성들을 교화하여 백성들에게 중도(中道)를 세우셨으며, 숨은 이를 찾아내고 묻힌 이를 드러내어 등용하고 계시니 나는 언제고 이 책이 빛을 볼 날이 있을 줄 안다. 우선 이 서문을 써놓음으로써 임금의 사신이 내려와 수집해 가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공의 휘는 여무(汝楙)요, 자는 모(某)이니, 단양인(丹陽人)이다. 인조(仁祖) 갑술년(1634, 인조 12)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하동 현감(河東縣監)에 이르렀다. 일찍이 황극의 본지를 부연하여 조정에 상소하였던 바 임금이 특별히 비답을 내리시어 ‘격언이자 지당한 언론이다.’라고 칭찬했다 한다.
관중(管仲)과 상앙(商鞅)의 학설이다. 문장도 진기하고 명석하다.
[주-D001] 홍범(洪範) :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한 편(篇)이다. 홍범은 대법(大法), 즉 천지간에 가장 큰 법이라는 뜻이다. 무왕이 은 나라를 멸망시킨 후 기자(箕子)를 주(周) 나라의 도읍으로 데리고 가서 하늘의 도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기자가 답한 것이 이 홍범이라고 한다. 《서경》 홍범에는 우(禹)가 상제에게서 받았다는 ‘아홉 가지 큰 규범〔洪範九疇〕’이 제시되어 있는데, 첫째는 오행(五行)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다섯 가지 물질을 가리킨다. 둘째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일, 즉 오사(五事)이고, 셋째는 여덟 가지 정사, 즉 팔정(八政)이고, 넷째는 다섯 가지 기율, 즉 오기(五紀)이고, 다섯째는 임금의 법도, 즉 황극(皇極)이고, 여섯째는 세 가지 덕, 즉 삼덕(三德)이고, 일곱째는 점을 쳐서 의심나는 일을 밝혀내는 일, 즉 계의(稽疑)이고, 여덟째는 하늘이 내리는 여러 징조, 즉 서징(庶徵)이고, 아홉째는 다섯 가지 복과 여섯 가지 곤액, 즉 오복육극(五福六極)이다.
[주-D002]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 :
정덕은 백성의 덕을 바로잡는 것이요, 이용은 백성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이며, 후생은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우가 순 임금에게 아뢰기를, “덕으로써만 선정을 베풀 수 있으며 정치의 근본은 백성을 양육하는 데에 있습니다. 물, 불, 쇠, 나무, 흙, 곡식을 잘 가꾸시고 정덕, 이용, 후생을 조화롭게 이루도록 하소서.〔德惟善政 政在養民 水火金木土穀 惟修 正德利用厚生 惟和〕” 하였다.
[주-D003] 중화위육(中和位育) : 《중용장구》 제 1 장에 “중(中)이란 천하의 위대한 근본이요 화(和)란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리이다. 중과 화를 완전히 실현하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잡게 되고 만물이 제대로 성장한다.〔中也者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화위육’이란 조화로운 삶을 통하여 모든 일이 제대로 되어 간다는 뜻이다.
[주-D004] 한 나라 …… 하면서 : 맹자의 천인합일론(天人合一論)을 계승 발전시킨 한 나라 동중서(董仲舒)의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을 가리킨다. 즉 하늘의 뜻과 인간의 행위가 서로 감응하여 인간의 행위에 따라 하늘이 재앙이나 상서를 내린다는 것이다.
[주-D005] 세 성인 : 우 임금, 무왕, 기자를 가리킨다.
[주-D006]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설(說) : 오행이 상호 생성해 준다는 학설로서, 동중서에 의해 주창되었다. 나무는 불을 낳고〔木生火〕, 불은 흙을 낳고〔火生土〕, 흙은 쇠를 낳고〔土生金〕, 쇠는 물을 낳고〔金生水〕, 물은 나무를 낳는다〔水生木〕는 내용이다. 따라서 나무는 불의 어미〔母〕가 되고 불은 나무의 자식〔子〕이 된다고 하여 오행을 자모(子母) 관계로 간주하였다. 《春秋繁露 卷11 五行之義》
[주-D007] 돌에서 …… 배어난다 : 지하수에 녹아 있던 석회분이 고드름처럼 결정(結晶)을 이룬 종유석(鐘乳石)과, 쇠 부스러기를 물에 오래 담궈 산화(酸化)시켜 우려낸 철장(鐵漿)을 예로 든 것이다.
[주-D008] 하우씨(夏禹氏) : 《연상각집》, 《운산만첩당집》, 《백척오동각집》 등의 이본에는 ‘夏后氏’로 되어 있다. 하 나라 왕조를 세운 우 임금을 가리킨다. 《사기》 권2 하본기(夏本紀) 첫머리에 “하우(夏禹)는 이름을 문명(文命)이라 한다” 하였다.
[주-D009] 하우씨가 …… 것이니 : ‘산을 따라 나무를 베어냄〔隨山刊木〕’, ‘토목공사를 크게 벌임〔荒度土功〕’, ‘금, 은, 동 세 가지를 공물로 받음〔惟金三品〕’, ‘산을 태우고 늪을 태움〔烈山焚澤〕’, ‘하류를 터서 물을 끌어들임〔疏下導水〕’은 《서경》 익직(益稷), 우공(禹貢) 등에 기록된 하우씨의 공적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열산분택’은 하우씨가 아니라 익(益)의 공적이다. 《孟子 滕文公上》 ‘굽게 할 수도 있고 곧게 할 수도 있음〔曲直〕’, ‘곡식을 심고 거둠〔稼穡〕’, ‘모양을 마음대로 변형함〔從革〕’, ‘위로 타오름〔炎上〕’, ‘적시고 내려감〔潤下〕’은 홍범(洪範)에서 오행(五行)의 성질을 규정한 것이다.
[주-D010] 황극(皇極)을 세운다 : 원문은 ‘建極’이다. 《서경》 홍범에 홍범구주의 다섯째로 ‘황극’을 들면서, ‘임금이 만민의 준칙이 되는 인륜 질서를 세우는 것〔皇建其有極〕’이라 하였다.
[주-D011] 어렴풋하고 고원한 도상(圖像) : 한 나라 유자들은 《주역》 계사전 상에 “황하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오니, 성인이 이를 본받았다.〔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는 구절에 근거해서, 우가 낙수에서 거북이 등에 지고 나온 글에 의거하여 홍범구주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송(宋) 나라 때 주자학파는 이 같은 주장을 더욱 발전시켜 낙서(洛書)의 도형과 숫자로써 홍범구주의 의미를 확대해석하고자 하였다. 채침(蔡沈)의 《서집전(書集傳)》에 수록된 하도낙서도(河圖洛書圖), 구주본낙서수도(九疇本洛書數圖) 등의 여러 도상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도상을 통해 《서경》 홍범의 의미를 천착한 것은 미신적인 술수학(術數學)에 떨어진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주-D012] 먼저 …… 놨으니 : 원문은 ‘先自汨陳’인데, ‘골진(汨陳)’은 《서경》 홍범에서 우의 부친인 곤(鯀)이 홍수를 막다가 “오행의 순서를 어지럽혀 놓았다.〔汨陳其五行〕”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13] 사시(四時)에 …… 다르고 : 고대에는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얻었는데 계절에 따라 ‘부시로 사용하는 나무〔木燧〕’를 바꾸어 불씨를 얻었다. 그러므로 《논어》 양화(陽貨)에서 “부시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바꾼다.〔鑽燧改火〕”고 하였고, 《주례》 하관(夏官)에서 불을 사용하는 정령(政令)을 맡은 사관(司爟)은 “사시에 따라 나라의 불을 바꾼다.〔四時變國火〕”고 하였다. 봄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여름에는 대추나무와 살구나무, 계하(季夏)에는 뽕나무와 산뽕나무, 가을에는 떡갈나무와 졸참나무, 겨울에는 홰나무와 박달나무를 부시로 하여 불씨를 얻었다고 한다. 이처럼 계절에 따라 부시나무의 재료가 달라짐에 따라 화후 즉 불의 세기와 연소하는 시간도 달라진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주-D014] 우형(虞衡) :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을 관장하는 관리를 말한다.
[주-D015] 재생한 나뭇가지 : 원문은 ‘條肄’인데, 《시경》 주남(周南) 여분(汝墳)에 “재생한 나뭇가지를 벤다.〔伐其條肄〕”고 하였다. 베고 난 뒤에 다시 생겨난 햇가지를 ‘이(肄)’라 한다.
[주-D016] 오토(五土) : 산림(山林), 천택(川澤), 구릉(丘陵), 하천지(河川地), 저습지(低濕地)를 가리킨다.
[주-D017] 부유하게 …… 행동한다 : 《서경》 홍범 황극조(皇極條)의, “재능이 있고 실천력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면 나라가 창성해질 것이다. 벼슬아치는 부유하게 살아야 착하게 행동하는 법이니, 만약 봉록이 풍족하지 않아 이들이 집에서 잘 지내게 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죄를 짓고 말 것이다.〔人之有能有爲 使羞其行 而邦其昌 凡厥正人 旣富方穀 汝弗能使有好于而家 時人斯其辜〕” 한 데서 나온 말이나, 연암은 이를 벼슬아치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일반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로 해석하였다.
[주-D018] 속수(涑水) : 우여무(禹汝楙 : 1591~1657)의 호가 속천(涑川)이므로, 속수(涑水)는 ‘속천’의 잘못이거나 그의 일호(一號)일 것이다. 우여무는 속서거사(涑西居士)라고 자호하기도 하였다. 《涑川先生文集 卷3 古亭記》
[주-D019] 《홍범연의(洪範衍義)》 8권 : 8권은 8편의 잘못이다.
[주-D020] 백성들에게 중도(中道)를 세우셨으며 : 원문은 ‘建中于民’인데,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나오는 말이다.
[주-D021] 우선 …… 놓음으로써 : 《홍범우익》에는 우여무가 1650년(효종 1)에 쓴 자서(自序)와 함께 연암이 쓴 서문이 있는데, 이는 1795년(정조 19) 음력 2월에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涑川先生文集 卷6 年譜》
[주-D022] 공의 …… 한다 : 우여무의 자는 대백(大伯)이고, 호는 속천(涑川)이다. 조정에 올린 상소란 1650년(효종 1)에 《서경》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에서 취한 12조목의 상소를 올린 사실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때 《홍범우익》과 《홍범연의》, 《기범(箕範)》을 진상하여 왕이 열람했다고 한다. 《涑川先生文集 卷6 年譜》
[주-D023] 관중(管仲)과 상앙(商鞅)의 학설 : 관중과 상앙은 춘추전국 시대의 법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각각 《관자(管子)》와 《상군서(商君書)》를 통해 부국강병을 위한 실리주의를 역설하였다. 연암은 유가에서 비판하는 이들의 학설에도 취할 점이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過庭錄 卷4》
해인사(海印寺)에서 창수(唱酬)한 시의 서문
경상도 관찰사 겸 순찰사 이공 태영(李公泰永) 사앙(士昻 이태영의 자(字) )이 관하를 순시하다가 가야산(伽倻山)으로 접어들어 해인사(海印寺)에 묵게 되었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이채(李采) 계량(季良), 거창 현령(居昌縣令) 김유(金鍒) 맹강(孟剛) 및 지원(趾源)이 마중하기 위하여 절 아래 모이니 모두가 이공의 한동네 친구였다.
차례로 나아가 뵈자 공은 각각 소관 고을 농사의 풍흉과 백성의 질고를 묻고 나서 일어나 관복을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어 촛불을 돋우고 술을 내오라 하여 예의절차를 무시하고 반가이 지난날을 이야기하였다. 공은 그 큰 깃발들 아래 경상도 일흔두 고을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에 있음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고, 자리를 같이한 이들 역시 자신이 대령(大嶺 조령(鳥嶺) ) 너머 천 리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마치 예전에 나막신을 신고 평계(平溪)와 반지(盤池) 사이에서 서로 오가며 놀듯이 하였으니 몹시도 성대한 일이었다.
다음 날 공이 운을 정해 율시 두 수씩을 각기 짓게 하고 지원에게 이에 대한 서문을 지으라 명하므로, 지원은 공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예전에 조남명(曺南冥)이 지리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은(報恩)에 있는 성대곡(成大谷)을 방문하였다. 이때 그 고을 원이던 성동주(成東洲)가 자리를 함께하였는데 남명과는 초면이었다. 남명이 그를 놀리며
“형은 내구관(耐久官)이시군요.”
하였다. 이에 동주는 대곡을 가리키며 웃으면서 사과하기를
“바로 이 늙은이가 붙들어서 그렇게 되었지요. 비록 그렇긴 하나 금년 팔월 보름에는 해인사에서 달이 뜨기를 기다릴 테니 형은 오실 수 있겠소?”
하였다. 남명은 그러마고 하였다. 기약한 날이 되자 남명은 소를 타고 약속한 대로 가다가 중도에 큰비를 만나 간신히 앞개울을 건너 절 문에 들어서니 동주는 벌써 누각에 올라 막 도롱이를 벗고 있었다.
아아! 남명은 처사였고 동주는 이때 이미 관직을 떠난 처지였으나 밤새도록 이야기한 것이 민생 문제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절의 중들은 지금까지도 이 일을 서로 전해 산중의 고사(故事)가 되었다.
지원이 해마다 감사의 행차를 맞아 이 절에 들었는데, 하마 세 번이나 감사가 바뀌었으니 나 역시 내구관이라 이를 만하다. 달이 뜨기를 기다려 만나자는 약조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모진 바람, 심한 비를 감히 피하지 아니하였으며, 매번 절 문을 들어서면 기약 않고도 모인 수령이 늘 일고여덟은 되었다. 절간은 여관처럼 즐비하고 승려는 기생처럼 많으며 모임자리에서 시를 지으라 재촉하기를 마치 도박에 돈을 걸라고 독촉하듯 하고, 차일과 다담상은 구름 같고 퉁소소리와 북소리 요란하니, 비록 단풍과 국화가 어울려 비치고 산수가 절경을 자랑하나 민생 문제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매양 누각에 오를 적마다 시름없이 옛날 어진 이의 비 맞은 도롱이를 아스라하게 상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울러 이를 기록하여 산사의 장고(掌故)에 대비하는 바이다.
을묘년(1795, 정조 19) 9월 20일 안의 현감(安義縣監) 박지원 중미(仲美 연암의 자(字) )가 서문을 쓰다.
조남명의 이름은 식(植)이요 성대곡의 이름은 운(運)이며 성동주의 이름은 제원(悌元)인데 모두징사(徵士) 이다. 보은은 고을 이름이다.
선비의 출사(出仕)나 은거(隱居)는 그 뜻이 한가지이다. 은거한다 하여 민생 문제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승려일 따름이요, 출사한다 하여 산수 자연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노예일 따름이다. 남명과 동주가 선탑(禪榻)에 앉아 백성을 걱정한 것과, 감사와 수령이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시를 지은 것이 그 일은 정반대이지만 그 뜻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다르지 않았다.
옛 친구가 된다 해서 허물없이 대하지도 않았고 상관이라 해서 아첨하지도 않았다. 풍(風) 같기도 하고 송(頌) 같기도 하여 글 뜻이 매우 진지하고 간절하다 하겠다.
[주-D001] 평계(平溪)와 반지(盤池) : 평계(平溪)는 평동(平洞), 거평동(居平洞)이라고도 하였다. 서대문 밖 반송방(盤松坊)에 속한 동네로, 지금의 종로구 평동 일대이다. 예전에 평동과 냉정동(冷井洞: 지금의 냉천동) 사이에 지금은 복개된 계천(溪川)이 흘렀으므로 평계라 한 듯하다. 반지(盤池)는 반송지(盤松池) 또는 서지(西池)라고도 하며, 서대문 밖 반송방에 있던 큰 연못으로 명승지의 하나였다. 지금의 서대문구 천연동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주-D002] 내구관(耐久官) : 벼슬을 무던히도 오래 하는 관리를 비꼬아 말한 것이다.
[주-D003] 징사(徵士) : 임금이 벼슬을 주며 불렀는데도 응하지 않은 은사를 말한다.
[주-D004] 풍(風) …… 하여 : 풍과 송은 《시경》의 세 가지 시가(詩歌) 유형 중의 하나이다. 풍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풍간(諷諫) 즉 넌지시 충고하는 노래라는 뜻이 있고, 송은 덕을 칭송하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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