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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문단 31집 <작고문인 특집>
이성교(李姓敎 Lee Seong-Gyo1932.11.29~2021.12.7)시인
1. 약력
•강원도 삼척 출생,시인·교육자.•1954년 강릉상업고등학교와 1958년 국학대학 졸업, 1964년 중앙대학교대학원 문학박사.•1968~1998. 성신여자대학교 교수[학장, 대학원장, 도서관장]역임 •1956년 『현대문학』에 「윤회」,「혼사(婚事)」,「노을」 추천 등단 •국문인협회 이사,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2001~.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회장 •저서 시집『산음가(山吟歌)』(문학사, 1965), 『겨울바다』(문원사,1971),『보리 필 무렵』(창원사,1974), 『눈 온 날 저녁』(지인사,1979),『남행(南行)길』(청문사,1986), 『소망의 나무』(융성출판사1986),『하늘 가는 길』(종로서적,1989), 『대관령을 넘으며』(맥밀란,1984) 『강원도 바람』(문학세계사1992) 『동해안』(형설출판사1996). 『이성교 시전집』(형설출판사1997) 『운두령을 넘으며』(태학사2001) 『끝없는 해안선 그 파도를 따라』(마음,2011)등이 있다.
•수상:1966.2.제11회 현대문학상 수상, 1979.10.제14회 월탄문학상 수상,1997.3. 제15회 한국기독교문학상 수상, 1998.2.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2. 작품
大關嶺을 넘으며 외4편
작년 봄 우리 님이 산을 넘을 제
아흔 아홉 굽이마다 눈물이 서렸나니,
얼켰던 머리카락 눈빛에 새로워라.
소복하고 오실 님의 머나먼 구름밭.
정왕산에 비만 내려 산천만 푸르렇다.
해발 八白米. 돌아가면 千里, 올라가면 萬里.
봄바다 멀리 산앵두 핀다.
내려다보면 어찌도 푸른 짐승이
높디 높은 하늘처럼 둥둥 떠서 놀까.
갈매골의 喪家는 비에 그치지 않고
바위 바위마다 피가 맺혀 통곡을 한다.
솔바람에 젊은 가슴도 애타거니,
굽이굽이 몇 千里를 산새는 울고 갔나.
이 山을 다스리느라고
바다는 얼마나 발버둥쳤을까.
어떤 입술은 피에 젖고
어떤 입술은 불에 그을려
아흔 아흡 굽이마다 새로운 철이 간다.
아아 뺨이 달아 올라라.
능경산의 보드라운 싸리밭.
횡계벌의 물은 맑아, 우리 님 오실 날이나
눈이나 쏟아지지.
에헤야 데이야, 바다로 흐르는 楸木.
봄은 오고, 여름은 가고,
가을은 오고, 겨울은 가고…….
풋풋한 감자 내음만
초막골을 풍긴다.
고로쇠, 들미, 박달, 가래, 물버들, 참나무…….
이렇게 한 祖上이 살다 가면 얼마나 세월이 바뀔까.
未堂님 도포자락도
나의 그늘이 되어
가슴만 가슴만 불타 오른다.
鐘은 울어라.
이 山이 다하는 날까지 鐘이여 울어라,
점텃골의 피뿌린 자국만 높고
祈雨祭의 뿌린 밥도 비에 젖는다.
藥泉 三浦岩에 흐르는 물, 그 물을 먹고
우리는 자랐거니, 벚꽃, 매자꽃, 함박꽃, 진달래꽃, 동백꽃 -- 아혼 아홉 굽이마다 핀다.
仙子嶺을 따라서 국수당에 오르면
피에 젖은 옷조각. 마르지 않는 눈물.
귀신나무 소나무만 애처러이 자랐거니,
목이 말라도 목이 말라도 이 山을 부르면
눈 앞엔 시원히 海圖가 열린다.
밤비ㆍ1
아아 내 가슴에
떨어진 流星아.
밤비는
너의 울음이었다.
땅이 움직여도,
山에 돌이 떨어져도
네가 온통
이 세상에
많은 것 같구나.
내 가슴에 묻혀 있는
너의 무덤에
해마다 무슨 꽃으로
피어 주련.
술을 먹어도,
술을 먹어도,
취하지 않는 밤.
밤비는 한 잔 술에 운다.
아빠가 태워 준
창경원의 비행기.
이 밤에도 찬비 맞고
빙빙 돌겠지.
이제 와
머리에 뒷짐 인
옛날을 말하지 않으련다.
멀리 흰나비 한 마리
훨훨 江을
건너고 있는데,
이리도 내 가슴에
천둥이 치랴.
海岸線ㆍ1
날마다
抒情을 앓는
모래강아지.
코에선 오징어 바람이 분다.
眞珠벌에서 보면
南向은 竹邊 - 浦項
北向은 墨湖 - 注文津
날 갠 날은
장날이 서고
날 흐린 날은
눈만 일그러진다.
사둔집 양미리
푸석푸석 익을 때,
地圖엔
금 하나 없다.
고기 창자를
늘늘이 이어놓은들
저렇게 계절이 바뀔까.
생일날에만 오는
그리운 水路夫人.
바늘구멍 같아라.
해안선은
날마다 소금물에 절어
허이연 웃음이 핀다.
갈령재
오동나무
꽃핀 마을은
죄다 잔치에 바쁜 마을.
돌을 모아 산봉우리를 만들고
그 속으로 잎을 피어가게 함은
앞길을 더 창창하게 하자 함인가.
우리 어머니가
나를 이 산에서 낳고
이 산으로 가게 할 산공을 드린 후
모진 놈의 창자 속은 황닥불이 붙는다.
죽더라도
嶺南길은
떠나지 말아야지.
깜바구나 따먹고 아리랑이나 부르지.
밤마다
지렁이는 섧게 우는데
나뭇가지에 붙은 하얀 침은
어느 누구의 눈물인고.
차돌마다
指紋이 툭 툭 튀어나와
영없는 놈의 팔자를 고치게 한다.
산은
한 해
한번씩 운다.
징소리가 울리면
떡을 훌훌 뿌리고,
아직 못다 푼 산돌메기를 달랜다.
가을 운동회
둥둥 북소리에
만국기가 오르면
온 마을엔 인화(人花)가 핀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연신 터지는
출발 신호에
땅이 흔들린다.
차일 친 골목엔
자잘한 웃음이 퍼지고
아이들은 쏟아지는 과일에
떡타령도 잊었다.
하루 종일 빈 집엔
석류가 입을 딱 벌리고
그 옆엔 황소가
누런 하품을 토하고 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온갖 산들이
모두 다 고개를 늘이면
바람은 어느 새 골목으로 왔다가
오색(五色) 테이프를 몰고 갔다.
3. 작품해설
김형필*
月川 李姓敎論
Ⅰ. 서론
李姓敎시인(호 月川 1932.11.29- )1)은 『현대문학』에 「輪廻」(1956.9) 「혼사」(1956.12) 「노을」(1957. 2)로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데뷔했다. 강원도 삼척군 遠德面 月川里 237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부 이덕필, 모 김옥련) 국학대학, 중앙대학교 국문과대학원(1964년 석사, 1984년 박사)을 졸업했다(국학대학은 정인보가 세웠던 것이다). 장학금 제도가 신통하지 않던 때에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이 대학은 여러 장학금제도를 두며 지원을 많이 했다. 또 강사진에 있어서도, 양주동 같은 석학이 나가는 등 교수진도 좋았다. 하지만 정인보의 납북으로 운영이 어려워져 결국 고려대학교에 흡수되었다.
이성교시인에 대한 평이나 연구는 많은 편은 아니다. 박호영의 해설, 박유미의 연구, 조남익, 최규창, 한영옥의 시해설, 한홍자의 박사학위논문에 부분적으로 실린 경우 등이 거의 전부로 보인다. 그는 첫시집 『山吟歌』를 문단데뷔 10년만에 간행하였는데 이 시집이 1966년에 제11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때는 문학상이 몇 되지 않아서 화제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1961년에는 『현대문학』과 『문학예술』 출신 시인들로 구성된 「60년대 사화집」 동인에 가담하여 의욕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그리고 1974년 「가을 운동회」가 국정교과서 중학국어 1-2에 실렸는데, 향후 10년간 실렸다. 1974년(42세)이라면 한창 시를 쓸 때였는데 젊은 나이로 국정교과서의 한 필자가 된 것이다. 네번째 시집 『눈 온 날 저녁』으로 제14회(1979년) 월탄문학상을 수상했고, 이후 제15회(1997년) 한국기독교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그동안의 시집을 모아 『이성교 詩全集』(형설출판사, 1997.11.10)을 간행하였고, 봉직해오던 성신여자대학교를 1998년 2월에 정년퇴직했다. 시전집을 낸 후 또 한 권의 시집인 『雲頭嶺을 넘으며』(태학사, 2000.1.20)를 냈으니 시집으로 친다면 모두 8권이 된다. 종교적 믿음 관계만 있는 시집은 『하늘 가는 길』(종로서적, 1989.3.20) 『소망의 나무』(융성출판, 1986.11.20) 『영혼은 잠들지 않고』(황금찬, 유안진의 3인 신앙시집, 영산출판사, 1982.10.1)인데 제4시집인 『눈 온 날 저녁』에서도 기독교 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성교 시인이 시집 후기에서 “하나님을 영접한 이후에는 문제가 달라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성교시인은 강릉상업고등학교를 입학하던 해인 1951년부터 강릉중앙감리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 해는 장질부사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인데(향년 37세), 강릉중앙감리교회는 바로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였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문학으로 메꾸려는 듯 그는 문학에 열중하여 고등학교 2학년 당시 대학입학 수험지인 『수험생』 문예현상모집에 시 「남매」가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한평생을 시를 써온 것이다.
이성교 시인은 이제 70세의 나이가 되었다. 마침 3월6일(2001년) 한국기독교문인회의 회장으로 뽑혔다. 더 일할거리가 생겼으니 시창작도 왕성할 것이다. 그렇건만 지금까지 그의 시세계는 단지 일방적으로 전통시로만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본고는 지금까지 그의 모든 작품을 통해 그의 시세계를 살피는 작업을 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첫째 그의 시는 어디까지 왔는가. 둘째 주제와 시어는 어떤 변화를 가져 왔는가. 셋째 그의 시는 문학사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 등 많은 것을 그의 시에 물음을 던져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고는 그의 시 전집과 전집 후 발간된 한권의 시집, 그리고 3권의 기독교 시집을 살펴볼 것 이다.
Ⅱ. 시의 특질
이성교 시인이 데뷔할 무렵은 6.25의 잔해를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는 때였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이 존재와 서정을 추구했다. “이러한 방황과 애상을 삶의 어려움과 시대적 고뇌를 극복하고 정신적 위안과 구원을 얻으려 한 데서 전후시의 중요한 골격을 형성”2)한다고 하였는데 당대의 한 흐름은 동심과 순수지향, 그리고 휴머니즘으로 팽창되었다. 따라서 이성교시인은 서정적 시에다가 동심과 시대상, 순수지향을 가미하는 것으로 출발한 것이다.
첫 번째 『산음가』에는 서정주, 이동주, 박재삼, 성춘복 네 사람의 축하하는 글이 실려 있다. 서문을 맡은 서정주는 “그의 강원도적인 골격과 풍류와 서정을 담을 여러 시편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민족의 애송을 받을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으며 발문을 쓴 세 사람 중에서 박재삼은 “아직도 동정을 상하지 않은 소년티의 순정과 물같이 담담한 심성. ……마치 그가 태어난 강원도 산골과 같은 구석지고 서러운 정한의 세계를 독특하게 펴 보인 有數한 시인”이라고 평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김재홍이 지적한 ‘동심’과 박재삼이 지적한 ‘동정’과는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1. 동심구상과 어머니
서정시는 “그 자체로 이미 분열과 파괴가 개입되기 이전의 세계, 다시 말해 원시의 세계, 신화의 세계, 유년의 세계를 지향해 가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시를 읽고 쓰는 순간만은 원시적 일치의 세계, 신화적 일치의 세계를 살기 마련이고, 어린아이의 순수한 천진성을 구현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3)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홍사용의 시에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퇴보적인 비유로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점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했든 여기서는 순수한 천진성을 생각하면서 감성적인 면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때론 밤을 밝히시며
세상얘기 많으시던 어머니.
― 「어머니 얼굴」에서
이 시구도 물론 과거사에 의존하고 있다. 37살에 세상과 하직한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성교 시인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에 이런 일을 당하고 말았으니 어머니가 두고두고 생각나는 것이다.
가슴에 그늘이 질 때마다
얼굴은 어디고 떠올라,
흰 머리카락은 유서처럼 남는다.
― 「어머니의 얼굴」에서
「어머니의 얼굴․1」의 끝행인데 ‘유서’가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유서를 어떤 느낌으로만 그친다면 가치가 없다. 평생 거기에 실린 내용을 가슴에 담고 일해 나가야 한다. 37살에도 흰 머리카락이 생겼는지 모르나 머리카락과 유서가 한데 어울려 초보적인 비유로 바뀌였는데 이 유서의 비유야 말로 그가 지켜나갈 생의 지침서라 하겠다. 그래서 어머니가 나가시던 교회를 나가게 되었으며 시구에도 ‘十字架’(어머니의 얼굴․1)가 등장하게 된다. 유서는 그에게 있어서 모티브이며, 시 곳곳에 직접 유서라는 어휘는 보이지 않지만 상징적 체계로 볼 수 있다.
워낙 아버지를 많이 닮아
키가 작고 땅딸막했다.
워낙 어머니를 많이 닮아
말이 없고 눈물이 흔했다.
아득한 물나라
안개비 나라.
날마다 濟州道 생각에
눈은 늘 바다에 가 있었다.
二月 초하루
잔나비를 닮아
눈이 깊었고
늘 쏘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늘 뽕나무 밑에서
종기발을 앓았다.
그럴 때마다 개구리가 앞에 와
위로해 주었고,
성황당 소나무가 할머니처럼
빙긋이 웃어 주었다.
― 「幼年記」 전문
이 시는 제7시집 『東海岸』에 실린 것이다. 이 시는 유년시절의 자화상을 대하는 듯하다. 쏘다니기를 좋아했으나 그의 곁에는 개구리와 소나무뿐이다.(제5시집 「自畵像」에도 첫머리가 이렇게 시작된다./공연히 구름처럼/ 떠다니고 싶었다.) 시가 제삼자를 생각하지 않고 바로 눈앞의 나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서정적 시는 독자가 자기만이라 해도 하등의 지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교시인은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대상과 나눈 이야기를 다시 독자를 향한 이야기로 되돌리는 것은 그의 주된 기법”4)이다. “이 대목을 통하여 우리는 시인의 품성과 시의 철학을 한꺼번에 깨달을 수 있다. 시인이 빙긋이 웃으며 바라다보는 이 세계, 또한 그러한 시인에게 빙긋이 회답하는 이 세계, 이렇게 하여 세계와의 일체감을 회복하는 감동이 서린”5)면을 접할 수 있다.
제1시집의 「어머니 얼굴․1」과 제7시집의 「유년기」를 함께 놓고 보아도 시간의 거리가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시어에 나타나는 자연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이 잘 갖추어진 시라 하겠다. 자연속에서 제일 가까운 모습은 부모님일 것이다. ‘나와 부모님’을 드러내고 그 드러낸 모습이 어떻게 변해 가는가 하는 것이 독자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시에서 보듯 ‘늘’ 같은 것이다. 부모님이 계시던 곳이 바로 ‘내’가 있는 곳이었다. 그것이 나타난 곳이 바로 고향의식이다. 제1시집에서 「대관령을 넘으며」 사색을 시작했고 제8시집에서 「雲頭嶺을 넘으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큰 고개를 넘어야만 고향이 다가선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서울에서 공부를 했으며 쭉 서울에서 생활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교 시인 하면 강원도가 생각나는 것은 그곳이 어머니의 죽음과 문학수업의 산실이라는 점이다. 사춘기 시절은 감수성이 남다른 때이며, 심리적 충동이 작용할 때로 볼 수 있다. 초기 시 「혼사」(추천시)에서부터 강원도 사투리가 나오는데 이러한 것은 그의 고향의식과 관계가 있다.
복사꽃이
빨개지면
누가 꼭 왔다 간 것만 같아.
어머니는
웃다가
울다가.
달이 지는 것도
팔자라 하였지
홍도색 시악씨야.
말 못하던
그때 일이
눈물 솟듯
푹푹 쏟아지고.
무질래나 있으면
그거나 지근지근
씹어나 보지.
― 「혼사」 전문
시 한편이 동양화를 보는 것 같다. 어머니가 중심에 있고 복사꽃과 달이 그 배경에 있다. 화자가 참여한 것은 마지막 3행이다. ‘혼사’는 강원도나 무슨 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이 강원도 마을이라는 것은 ‘무질래’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수식어도 필요 없고 어느 행이 빠져도 싱거워질 것이다. “시를 쓰려는 이는 먼저 주변의 사물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거기에 삐딱한 눈길을 보냄으로써, 상식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동시에 자기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관념적 선입감을 쫓아내도록 노력해야 한다.”6)는 설도 있지만 이 시는 ‘삐딱한 눈길’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쓴 시라고 하겠다. ‘삐딱한 눈길’이 아니어도 실패하거나 진부한 인상을 받지 않는다. 그것을 시인 자신이 고향이라는 배경을 지니고 자신을 순화시킨 탓이라고 할 것이다. 서정주가 지적했듯이 ‘강원도 골격과 풍류와 서정’이 배경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 전체를 볼 때 꽃이나 달은 평범한 대상이다. 그런데 완성된 시는 어째서 평범하지 않고 여운을 남기는지 모르겠다. 5연의 이 시는 모두 움직이는 것으로 짜여있다. 1연은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빨개지면’, ‘왔다 간’만 보면 역시 움직이는 어취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동작이 시끌벅적하지 않고 잔잔한 움직임이 전체를 이룬다. 「혼사」의 처음 또는 뒤 끝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홍도색’은 ‘紅桃色’으로 조어이다. 그리고 ‘무질래’는 찔레꽃의 깨끗한 순을 말한다. 몇 개의 어취가 이 시를 참신하게 이끌어 간다. ‘달이 지는 것도/팔자’라는 속언도 시악시와 어울려 전통적인 가락으로 마무리했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는 웃음과 울음을 보인다. 이것은 모두 기쁜 일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 「서시」를 놓고 많은 분석이 돼 왔는데 그 시에는 우주관, 인생관, 운명관, 도덕관 등이 함축적으로 투영되었다고 말한다. 「혼사」에도 이러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결혼일에는 먼저 인생관이 따라야 하고 도덕관, 운명관, 우주관이 스며든다. 그런 것들이 함축되어 있는데 미미한 동작처럼 보이기는 하나 분명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 동심․어머니의 운명 같은 것이 바탕이 되어 고향과 함께 시적 분위기를 고양시킨다.
2. 토속적인 언어와 고향의식
시를 써 나갈 때 이런 어휘를 꼭 써야겠다는 생각이 있든 없든 간에 이성교시인의 시는 시어들이 제자리에 잘 들어 선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그러한 점은 토속적인 어휘나 고향의식을 담은 어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토속어와 고향의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갈령재, 갈매골, 대관령, 江陵, 墨湖港口, 博月里, 울릉도, 基谷里, 臨院, 酒飮峙里, 三陟. 旌善, 浮石里, 南陽村, 才山, 태봉골, 울진, 강원도, 가부랑골, 삼산골, 東海岸 富邱里, 新南, 葛南, 水下里, 汀羅津, 飛火津, 湖山, 竹西樓, 운두령, 南大川, 竹邊港, 束草 大浦港, 幻仙窟, 理川, 魯谷 등을 보게 되는데, 시의 본문에 나오는 지명까지 잡는다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다음은 강원도의 토속어 사용을 보기로 한다.
① 깡생이(용이 되려고 오르다 못한 구렁이), ② 양미리(까나리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③ 지킴이(몰래 그 집의 운을 지켜주는 구렁이), ④ 백구리(강원도 냇물에서 사는 고기 이름), ⑤ 보지기(제주 해녀), ⑥ 우내(안개), ⑦ 사머리(머리가 긴 남자 거지), ⑧ 인업(전설의 말로 복을 주는 사람과 같이 생긴 짐승), ⑨ 다랭이(고등어과에 속하는 생선), ⑩ 방탱이(함지박), ⑪ 느삼(강가에 나는 풀 이름), ⑫ 장광(냇물이 지나간 뒤 돌덩이만 남아 있는 곳), ⑬ 코꼬리(옛날 강원도 산중 두메에서 광솔불을 켜던 곳), ⑭ 마세(말로 빚은 말썽의 삼척 사투리), ⑮ 고지(박) 등은 ‘각주’를 해둔 것을 중심으로 뽑은 것이다.7)
이 토속어는 민속적인 것을 바탕으로 시에 삽입된 것이다. 여기에 소개되지 않은 말, 예를 들어 산돌메기는 중국설화에 등장하는 남자를 말하고(손돌메기도 마찬가지), 물쾡이는 물을 막는 괭이, 소할애비는 말라리아병, 할무재는 경북과 강원도가 만나는 재, 느름내는 강릉의 마을, 걱감재는 홍천에 있는 재를 가리킨다.
토속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시인으로 白石(시집 『사슴』)을 꼽는다. 그때는 식민지 시대였으므로 토속어 또는 방언시집을 낼만 하였다. 1930년대 발행된 김영랑, 서정주 시집에도 다소 보인다.
또 朴木月의 『경상도 가랑잎』에도 몇 편 들어 있기도 하다. 박목월의 경우는 1960년대에 낸 시집이므로 마을사람을 중심으로 한 시들이다.
또 김광협의 『제주도시집』은 제주방언으로 엮어졌다. 제주도 방언이 사라져가기 때문에 한번 모아보았던 것이다. 이성교시인도 토속어와 고향 이름을 시에 사용하고 있다. 전통적인 측면에서 볼 때 토속어를 사용하는 것은 표준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처질 수 있다. 그것을 알만한 시인이 굳이 토속어를 사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토속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과 그 배경에 한 한다. 둘째 시어로서 사용하면 더 효과적이다. ‘무질래나 있으면/그거나 지근지근’이라는 시구가 있을 때 ‘찔레꽃 순이나 있으면 그거나 지근지근’이라는 말과는 다소 틀리다. 무질래는 찔레꽃 순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깨끗한 순이라고 했다. 그러니 무질래라고 그냥 쓰는 편이 시의 문맥상 옳은 말이다. 셋째 토속어라고는 하지만 그 어휘들이 지금도 살아 있는 우리말이다. 토속어 중에는 아직도 그냥 그대로 쓰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뜻 외에 더 있겠으니 조어도 그 한 예라 하겠다. 이성교시인은 이와 같이 토속적인 어휘를 쓴다 해도 써야 할 한계를 세워놓고 시작에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성교시인은 「고향 사투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혀 끝에 불거지는
고향 사투리.
차츰 意識의 門을 열 때마다
이상한 향기가 난다
― 「고향 사투리」에서
‘이상한 향기가 난다’는 것은 법은 의미의 사이비진술(Pseudostatement)과 같은 말을 뜻한다. 모든 시는 사이비진술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성교시인은 향기가 나는 사투리, 또는 토속어를 쓸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시인이 만드는 조어도 토속어와 함께 특색을 띤다.
둥둥 북소리에
만국기가 오르면
온 마을엔 人花가 핀다.
― 「가을 운동회」에서
‘人花’는 조어로 사용된 것이다. 앞서 ‘홍도색’도 조어였지만 어렵지 많은 조어인데 반하여 ‘人花’는 즘 어려운 편에 든다. 이것은 울긋불긋하게 사람이 잔뜩 몰려있는 것을 말한다. 의미가 더해지는 조어는 쓸 만한 것이다.
仙子嶺을 따라서 국수당에 오르면
피에 젖은 옷조각. 마르지 않은 눈물
귀신나무 소나무만 애처러이 자랐거니,
― 「大關嶺을 넘으며」에서
‘仙子嶺’은 지명이고 ‘국수당’(국사단이 표준말)은 사투리인 동시에 마을에서 오랫동안 사용한 말이다. 이성교시인을 강원도시인이라고 쉽게 부르는 것은 고향의식을 지니고 시를 써왔기 때문이다. 사실 고향의 의미는 떠나온 사람들에게 진실되고 절실하게 부여 된다. 고향에 태어나 줄곧 고향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은 고향의 아름다움이라든가 정겨움이 그들에게 ‘施與(zugeschickt)’되어 있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고마움이 없다. 고향을 ‘향하는’ 마음은 고향을 떠나서 본격화된다. 그의 시가 고향의 관심으로 일관했음은 또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고향을 살필 수 있었음도 그가 고향을 떠나서 도회지의 각박함에 부대끼며 살아왔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8)
이처럼 그에게는 시정신이 틀에 박혀 있었다. 고향의식보다 더 진한 애정이라 할 수 있다. “고향의식과 향토의식을 변별하고자 하는 것은 고향의식이란 떠나온 고향에 대한 상실의 감정을 지니고 있을 때 갖게 되는 것인데 비해, 향토의식이란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고향과 분리되지 않는 의식으로 구분하고 싶기 때문”9)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조어, 토속적인 것과 고향, 자연과 동심적인 어머니, 이 모두는 시인들 자기 기교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개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양이 다른 것이다. 이성교시인의 초기 시(제3시집까지)는 시의 영역을 잘 지키고 있는데 이것을 일차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차적인 본향(motherland)으로 옮겨간 것이라 할 수 있다.
Ⅲ. 감각체계와 기독교시
이성교시인은 제4시집 『눈 온 날 저녁』부터 “모든 것이 제대로 술술 풀렸다”고 제4시집의 후기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성교시인이 일차적인 감각체계에서 위로 상승한 다른 언어를 획득하였음을 뜻하는 것이 된다. 이성교의 시가 얻은 언어를 말하기 이전에 기독교시란 무엇이고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1. 기독교와 현대시
한국의 현대 기독교 시인이라면 윤동주, 박목월, 김현승, 박두진 그리고 이성교, 박이도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홍자의 「한국기독교시연구」라는 논문에서는 모윤숙, 박두진, 박목월, 김현승, 윤동주 외에 이성교 시인을 기독교시인으로 꼽았다. 이성교 시인의 경우 ‘긍정적 세계관’ 아래 (1)영적 세계의 자각, (2)진실된 실상의 언어, (3)천상지향성, 세 분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10)
기독교시인이 등장하게 된 것은 낭만주의 이후부터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의 작품이 쓰여질 때는 기독교시인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문학에 대칭되는 문학 중 기독교문학이 유럽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주제와 명제가 서로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우리나라는 신문학이 발생하면서 기독교시를 쓰는 시인이 나오게 된다. 우리나라는 유럽과 같은 신본주의가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시와 일반시, 두 가지를 병행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독교시, 기독교시인이라면 어떤 점이 갖추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정확한 답을 내기가 어렵다. 한때 유럽에서는 그 답이 객관성을 띤 것은 아닐지라도 소원(Wunsch)이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11) 기독교시라면 ① 형식에는 원칙이 없으나 소재와 주제가 일반시와 구별된다. ② 기교에 있어서 아이러니 등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③ 정통적(orthodox)인 교리와는 거리감이 생길 수 있다. 이 거리감은 신학과의 거리감을 뜻한다. ④ 자연(1차원적이 아닌) 속에서 서식하며 미래를 심어주어야 한다. ⑤ 결론적으로 기독교시는 긍정적이다. 기독교 시인은 ㉠ 믿음을 중요시하는데 그 믿음은 예수와의 믿음이다. ㉡ 기독교시인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다. ㉢ 기독교시인은 한정된 세계에 속하는 사람인데, 기독교 사상과 체험에 만족한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모델이 있다 해도 그 모델을 벗어나야 한다. ㉣ 기독교시인은 기독교가 원초적이며 문학의 영역에서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 또는 문명비판 등 그 줄거리를 찾아야 한다. ㉤ 기독교와 과학은 그 사이가 먼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이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처럼 ‘기독교의 현대적인 변호론’12) 착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현대에 와서 진전된 기독교시는 어떤 것을 주제로 하였는가 알기 위해 다음을 살피기로 하자.
기독교시는 신과 인간의 관계, 원죄의식, 영혼과 육체의 갈등, 선과 악의 대립, 인간의 타락과 구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 정의의 실현과 인간가치의 옹호 등 여러 가지 종교적관심이 주제화될 수 있고, 그 표현의 방법이나 수준도 각 시인과 시대마다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13)
이 인용구를 보면 ‘종교적 관심’이 주제로 되어 있는데 이 논문을 쓴 권영진의 결론을 볼 것 같으면 “1) 성서적 소재를 단순하게 인용하여 관념적 서술에 그친 것 2) 확고한 기독교 교리에 입각하여 신앙고백을 위주로 한 것 3) 나아가 시적체험과 시적정서가 융합되어 바람직하게 시로 형상화된 것”14)으로 나누고 있는데 윤동주, 김현승, 박두진, 구상 네 분의 시를 보건데 시문학사상으로 큰 의의가 있다고 평한다.(작품을 예시하는 것이 좋겠지만 생략함) 여기서 ㉢㉣㉤에 해당하는 기독교시가 있는가, 없는가를 더 파헤쳐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⑦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위의 네 명이 시적체험과 시적정서가 융합된 좋은 시를 썼다는 평은 세밀히 받아들여야 할 문제로 볼 수 있다.
김형필15)이 제시한 기독교시의 바람직한 방향도 읽어볼 만한 것이다. 그것은 먼저 잔치정신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가정과 신앙의 교리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소금시학에 대한 것을 들 수 있다. 소금시학이란 평범하게 말해서 기독교시를 썼을 때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모티브를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믿음의 시, 순수 참여시, 인의 시를 들 수 있다. 순수 참여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김현승의 이론을 들어본다.
참여문학에 대하여 우리 문단이나 우리 사회에서는 오해와 착각이 많다. 문단과 사회의 일부에서는 너무 위험시하는 듯 하고, 또 다른 일부에서는 이 문학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참여문학은 어디까지나 한 성질의 문학일 뿐이고, 그것은 예술적인 테두리 안에서 창조되어야 하고, 되는 것이지, 사회적 폭발력을 갖는 것도 아니고, 가져질 수도 없다.
인간이 영위하는 문학을 크게 두 가지 성질로, 워즈워드의 이른바 ‘자연의 유로流露’의 문학과, 마슈․아놀드의 이른바 ‘생명의 비평’의 문학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생의 자연한 상태를 비판하고 새로운 삶의 이념을 모색하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전자는 감성에 치우치고, 후자는 필연적으로 지성에 기우는 문학이게 된다. 대개 삶의 기본원리가 확립된, 안정된 시대에 있어선 전자의 문학적 경향으로 흐르게 되지만, 현대와 같이 합리주의가 정신적으로 파탄에 이르고 새로운 강력한 삶의 기본원리가 확립되어 있지 못한 시대에 있어서는, 후자의 문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16)
그러므로 무엇을 어떻게 라는 질문은 시인이 지녀야할 문제이다. 오늘날 복잡해진 현대에서는 제재와 의미가 많을 것이다. 그러니만큼 시의 폭을 넓히는 작업 또한 기독교시․시인의 입장과 견주어 볼 일이다.
2. 기독교시의 수용과 전망
1) ‘십자가’의 의미
이성교 시인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고교 1학년때로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의 일이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유년시절부터 교회에 나가신 분이므로 곁에서 믿음생활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그를 영혼의 세계로 이끌어갔고 신앙의 기초를 마련해 준 것은 어머니로 그에게 있어 어머니는 인간적 사랑의 차원을 넘어 구원을 향한 인도자였다. 또한 영혼의 세계를 깨달게 하여 정신적 개안을 가져다 준 힘이었다.”17)
기독교시집이 아닌 제1시집에서 「갈매골」이라는 시를 보면 ‘여름을/알리는/十字架’라는 구절이 있는데 ‘十字架’ 대신 다른 어휘를 넣어도 될텐데 십자가를 넣은 것이다. 같은 시집에 「어머니 얼굴․1」이 있는데 거기에도 ‘문창살에 진/十字架’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의 십자가도 다른 말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몰두해 있던 그로서는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써야만 했던 것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 괴로운 시련, 생, 노고, 조난, 피해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뒤 십자가의 빛이 낙원의 나무18)라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성교시인은 이 많은 상징을 향하여 구원의지로 나아간다.
감사 감사 오직 감사
눈물만 흐릅니다.
웬 일인지 웬 은혜인지
날 구원해 주시고
당신 홀로 십자가 지셨으니
무한 감사하옵니다.
― 「감사의 기도」에서
감사, 구원해 주시고 홀로 십자가를 메고 가는 모습을 차마보기 어려운 것을 보니 가슴이 메어진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믿음을 얻게 되었으며 감사와 기도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도 십자가와 나는 하나가 아니고 떨어져서 보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쯤 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죽었던 나무들이 되살아나고 있다.
― 「소망의 나무」에서
성령의 새 바람으로
새 천지가 열렸다.
― 「순복음의 꽃」에서
이러한 시가 탄생하기에는 현실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성교 시인의 현실의식과 남들이 말하는 현실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한 단계 앞선 현실인식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다 현실을 밟고 산다. 그렇지만 의식에 이르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김현승 시인이 밝혔듯이 그는 항상 전자만이 주된 시의 재료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전자의 것만을 노래한다고 후자의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아픈 상처도
어디로 다 흘러갔다.
이제는 때가 되면
모두 꽃피는 것을
― 「三陟 點景」에서
역사를 알면서도 이렇다 할 논문이나 월평을 쓴 일이 없다. 그것은 이성교 시인의 고집 일 수 있다. 좋은 시를 쓰려면 좋은 체험을 해야 하고 좋은 말을 써야 한다.19) 이성교 시인은 문학을 예술언어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이므로 정서를 호소하고 언어를 잘 부려야 한다고 말한다. 나쁜 언어를 시에 삽입할 수도 있는데 그는 잘 가꾸어진 정겨운 언어를 굳이 고집한다. 이성교 시인은 시작을 할 때 함축미를 빠뜨리지 않는다. 이 말은 역사가 관계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는 ‘풋풋한 향기’만을 고르고 있다는 뜻이다. 이 풋풋한 향기가 짙어지면 낱말과 낱말이 어울려 감각체를 벗어난 시구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2) 시어의 확장과 내세
감각체계란 유년 청년시절의 언어를 가리킨 것이다. 대개 일반인은 그때 배운 언어를 사용한다. 시인도 그러하다. 훌륭한 시인은 그때 배운 언어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예서 어느 정도
천국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봄바람에
천리를 달려온 사람들
다시 하얀 마음으로
큰 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 「잘 믿는 사람들」에서
화자는 완전히 천국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그 입구에 들어서 있다.
내가 상술上述한 첫째와 넷째의 작품들에 치중하게 되는 것도 결국은 그것이 선천적인 것이든 노력에서 온 것이든지 간에 보다 그러한 언어에 적합한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 언어를 사용하는 데 두 가지 태도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가진 언어 안에서 시를 선택하는 것과 시를 위하여 언어를 확장하는 것인데, 후자는 적극성을 띠우는 대신 실패하기 쉽고, 전자는 비진취적이면서도 작품으로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20)
인용문에서처럼 언어의 확장을 피하고자 할 때 진실한 마음으로 믿는 것뿐이다. 위의 시에서 ‘어느 정도/천국’이 아니라 확실히 ‘천국’이어야 한다. 마음 중에도 ‘하얀 마음’은 신자의 마음을 뜻하고 ‘다시’가 주는 의미는 ‘거듭’을 뜻한다. 그런데 천리를 달려왔으므로 마음을 여미는 뜻도 포함돼 있다. 다음은 이성교 시인이 앞에서보다 천국을 경험한 시를 보게 했다.
아무도 없는 데서
天國이 열렸습니다.
말씀의 꽃이 피었습니다.
황무지에서
마음을 비우면
새 流土 되지요.
눈을 둔 곳에
새 하늘이 내려와
소망이 넘치지요.
사실 화장터로
가는 길인데도
꽹과리가 울렸습니다.
죽음에서
生命이 열리는 신호지요.
참으로 지나간 날이
아쉽습니다.
나무 그늘에서 잠자던 날……
빈 밭은
온전히 天國이 었습니다.
― 「빈 밭에서」전문
이 시는 깜박 잠이 들었을 때의 정경을 시로 읊은 것이다. 이 시중에서 ‘사실 화장터로/가는 길인데도/꽹과리가 울렸습니다//죽음에서/生命이 얼리는 신호지요’라고 한 부분은 두 가지의 뜻이 담겨져 있다. 화장터로 가는 길은 현재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죽음에서 생명이 열리는 것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같은 언어라는 감각체계와 확장된 언어에 쓸 수 있는 것이다. 확장된 언어라는 것은 자신의 사고나 행동이 감각체계를 벗어났음을 뜻하는 것이다. 꽹과리와 신호를 빌어다가 확장된 연어를 사용하였음은 청각을 이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청각적이라고 해도 모두 쉬운 것만은 아니다. 특히 선시, 초현실주의 시 같은 것은 쉽지가 않다. 조향의 「바다의 층계」는 “수화기//여인의 허벅지/낙지의 까아만 그림자/‥‥‥/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같은 시구가 나오는데 ‘층계를 헤아린다’와 같은 것은 얼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청각적인 요소가 쉽게 느껴질 것이다. 쉽고 감동을 주기 좋은 시라고 해도 감각체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어려운 것이다. 김수영 또한 김현승과 비슷한 확장된 언어를 사용했다.
내가 써온 시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어뿐이다. 혹은 시적어와 속어의 중간쯤 되는 말들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어느 서구 시인이 시어는 15세까지 배운 말이 시어가 될 것이라고 한 말이 있는데, 나는 시어는 어머니한테서 배운 말과 신문에서 배운 時事語의 범위안에 제한되고 있다.21)
김수영은 이처럼 자기세계를 넓힐 수 있었다. 김현승은 기독교를 영접하고. 예수와 동행하고, 마침내 확장된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 어떤 시는 땅에서 활동하고 어떤 시는 하늘을 지향하는 시로 나타난 것이다. 이성교시인에게서도 확장된 언어가 나타나고 있다.
살에 피가 나도록
길이 빤질빤질 닳아 있다
그 길 뒤에 소나기 내리기도 하고
번개가 치기도 하고
어디선가 꽃내음이 풍기기도 한다.
하늘 가는 길
눈에는 길이 뚜렷이
펄쳐져 있다.
비집고 올라가는
산 위에는
무지개 피고
노래소리 들린다.
기왕 바람으로
왔을 바에는
가벼운 몸으로
껑충 뛰어 넘을 수는 없을까.
눈 돌린 곳마다
이상한 향기가 퍼지고
배에는 生水가 솟는다.
봄내 앓던 病도
어디로 가고
몸은 구름 위에
떠있다.
― 「하늘로 가는 길」전문
꽃내음, 무지개, 바람, 생수, 봄, 구름 같은 자연물을 이용한 것인데 기독교시에서 이런 것은 자연스럽다. 이런 것을 이용하였다 하여 자연파라고 나누는 것은 잘못 된 일이다. 생태학적인 면에서 상함을 받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모습이다. 시 언어에는 눈앞에 뚜렷하게 펼쳐진 하늘 가는 길을 보았을 때 그 즐거움을 감출 수 없다. 부정적 요소가 섞이지 않았는데, 특히 끝 행에 이것을 잘 표현하였다. ‘병도/어디로 가고/몸은 구름 위에/떠있다!’로 간결하게 끝맺는다.
병이 없어졌으니 몸이 가벼울 수밖에 없다. 이 말을 시어로 다듬어 간결하게 시원한 시어로 구성한 것이다. 이것이 뛰어난 언어 기술자이다. 아이러니같은 것을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시적 구성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의 시구 ‘구름 위에/떠있다’는 것은 언어의 확장에 해당된다.
김현승은 시어를 가지고 무척 애를 쓴 흔적이 있다. 김현승 시에서 같은 제목의 시가 있는데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였는가를 살펴 볼 겸 긴 글을 그냥 싣기로 한다.
<63년 復活節에>- 크리스찬 신문
四月은 寶證의 달,
땅에 떨어져 썩은 밀알 하나이
지금은 그늘이 되어 햇빛이 되어
成長의 바람이 되어 영혼의 詩와 새벽의 合唱이 되어
이같이 뚜렷이 이같이 울렁차게
가득히 가득히 넘치나이다.
奇蹟을 원하는 地上에도
寶證을 외치는 時間에도.
<75년 遺稿 復活節에> 월간문학 3월호
당신은 지금 유대인의 수의를 벗고
모든 땅의 훈훈한 생명이 되셨습니다.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이웃과 친척들이 기도와 노래들이
지금 이것을 믿습니다!
믿음은 증거입니다.
증거할 수 없는 곳에
믿음을 증거합니다!!
해마다 四月의 훈훈한 땅들은
밀알 하나이 썩어
다시 사는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파릇한 새 생명의 눈으로……
63년의 <復活節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장의 바람, 영흔의 시, 새벽의 합창으로 변형되었음을 언급한 것에서 그치고 있는데 반하여 75년의 유고 <復活節에>는 그리스도가 생명 자체임을 믿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63년의 것은 신자의 입장에서 마지못해 쓴 것이라면, 비록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여도, 75년의 것은 믿음만이 부활 기적의 증거이며 증거함이라고 감탄부호를 사용하여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고독과 회의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던 60년대의 다형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확신의 신앙인으로 돌아오게 하였는가?22)
언어를 세련시키고 매만질 줄 아는 이성교 시인에게도 김현승의 시와 같은 작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끝이 없는 것이고 현대는 더욱 복잡해지므로 기독교시가 세계조직화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십자가를 따르다가 뒤에 오면 한층 더 높은 천국을 눈앞에 보게 된다. 그것은 이성교 시인의 내세일 수 있다.
Ⅳ. 결론
시전집(시집 7개 묶음), 『雲頭嶺을 넘으며』 그리고 『하늘 가는 길』, 『소망의 나무』, 『영혼은 잠들지 않고』 3권의 시집을 이성교 시인의 시 분석을 위해 사용했다. 3권의 시집에 실린 시는 시전집에 실린 것도 많다. 『雲頭崙을 넘으며』는 2000년 1월에 나왔으니 그럴 수 없었다.
이성교 시인은 제4시집 후기에 하나님을 영접하는 글을 쓰고 있는데 실은 첫 번째 시집부터 은은한 배경으로 기독교의 세계관이 스며 있었다. 그리고 매 시집마다 기독교적인 시가 담겨 있었다. 이처럼 그는 오래 전부터 기독교 시인이었다. 그리고 함축적인 언어와 가락, 행 가르기 등을 이용하여 일반적인 시, 기독교적인 시 두 가지를 써 온 시인이다. 기독교시는 소재와 주제만 가지고도 가를 수는 있다. 더 깊이 들어가면 파스칼이 했던 것처럼 종교(기독교)와 과학까지도 한데 어울려야 한다. 또한 감각체계에서 확장된 언어로 뻗어나가야 한다. 이성교 시인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러한 시도를 여러 곳에서 하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이성교의 시는 기독교문학사에서는 물론이고 일반적인 시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확보한다. 1956년 시작된 이성교의 시는 70살을 맞으면서 더욱 공고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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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외국어대학교 사범대학 한국어교육과 교수.
1) 세계문예대사전 下(성문각) p.1630. 이성교 시인의 출생일은 양력은 11월 29일이고 음력은 2월1일이라고 본인이 설명했다. 이 사전에 의하면 그의 시는 전통적, 향토적 생활의식이 깔려 있다고 하였다.
2) 김재홍, 시와 진실(이우출판사, 1984), p.40.
3) 이은봉, 시와 생태적 상상력(소명출판, 2000), pp. 165-185.
4) 한영옥, “진정한 삶을 돋우어 준 힘의 詩” 이성교 詩전집,(형설출판사, 1997), p.501
5) p.502.
6) 마광수, 시학(철학과 현실사, 1997), p. 25.
7) 조남익, “이성교의 시와 향토의식”, 운두령을 넘으며(태학사, 2001), p. 166
8) 박호영, “토속적 세계와 신앙의 변주” 현대시, 1991.6.
9) 박유미, “이성교 시 연구” 21세기와 한국어문학, 돈암어문학회 돈암어문학 제11집
10) 한홍자, “한국기독교시연구”,(성신여대 박사논문. 1999), pp.178-184 참조.
11) 쿠르트 흐호프, 한숭홍역, 기독교문학이란 무었인가 Was ist christliche Literatur? (두란노서원, 1986), p.11.
12) Ibid, p.15.
13) 권영진외 3인, "기독교와 현대시" 기독교와 한국문학(대한기독교서회, 1990), p.139.
14) Ibid, p.189.
15) 김형필, “한국현대시에 미친 기독교의 영향”(외대 한국어문학연구 제11집, 2000), p.8-16 참조.
16) 김현승, 전집 2. 산문(시인사, 1985), p.140.
17) 한흥자, Op.cit., p.177.
18) J. E. Cirlot, A Dictionary of symbols, p.65.
19) 이성교, “나의 신앙 나의 시”, 영혼은 잠들지 않고(명산출판사, 1982), p. 107 참조.
20) 金顯承 全集 2. 散文(시인사, 1985), pp. 292-293. 인용문에서 첫째와 넷째는 자신의 시를 분류한, ① 불행이나 인고(忍苦)나 우울의 진실을 소재로 한 것(「눈물」, 「푸라타나스」, 「가로수」), ②사회정의를 소재로 한 것(「슬은 아버지」, 「호소」, 「갈구자」), ③ 이것은 일정한 사상이라면 사상일 수 있는데 인생의 고독을 소재로 한 것(「내 마음은 마른 나무가지」, 「건강체」, 「독신자」 등), ④ 사물의 본질 자체를 소재로 한 것(「보석」, 「슬픔」 등) 중에서 ①과 ④를 뜻함.(같은 책, p.291)
21) 김수영 편, 김수영 전집圖 산문(민음사, 1981), p. 287.
22) 이인복, 한국문학과 기독교사상(우신사, 1987), pp.191-192.
4. 교우기
김승환
시인 이성교李姓敎와 인사동 한식집 여자만汝自灣
‘온유溫柔’라는 말은 부르기 좋고 듣기도 좋다.
사람도 이와 같은 이가 있으니 시인 이성교가 그러하다. 그의 인품과 시세계가 온유 그 자체다.
1953년. 당시 인기 높던 월간 「수험생」 문예란에 강릉상고 2년생이던 그의 시 <남매>가 당선되어 한 해 전에 당선된 강릉사범의 신봉승과 함께 관동 문학청년계의 스타가 되었다. 알다시피 「수험생」은 「학원」(54' 제1회 학원 문학상 발표)이 나오기 전의 전국 유일의 고교생의 등용문이었던 학습지다.
「수험생」은 이성교에 있어 문단 등용의 동아줄이었으니 같이 당선한 이성환李星煥(1936~1966)의 소개로 미당未堂 서정주를 만나게 된다. 삼척 태생의 국학대 신입생이던 그는 서라벌예술학교 1년생 이성환의 권유로 이 학교에서 미당의 강의를 도강盜講하고 미당을 소개 받고 나중에 공덕동 미당 댁을 방문하게 된다.
요즈음 우리 외교가에서는 ‘관시關係’라는 중국어가 일상용어가 되다시피 했지만 ‘사람과의 관계’(人脈)는 그쪽 땅이나 여기나 매우 중요하다. 온유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됨됨이와 뛰어난 시적 자질은 미당의 품에서 사랑 받고 키워진 한 떨기 국화였다. 2002년 10월에 발족한 <미당시맥회未堂詩脈會>의 초대 회장에 이성교가 뽑힌 것도 이런 것에 기인한다.
1956년 미당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윤회輪廻>가 실린다.
네 손마디를/곰곰이 헤어보면/마구 꽃잎이/싱싱이 살아 오른다.//손바닥을/돌에 갈 듯이/서러운 얼굴로/먼 산 바라던 곳은/이제는 환한 별이 드나보다.//<윤회(輪禍)>
(이하 생략)
이후 <혼사>, <노을>이 추천되어 1957년에 시인이라는 계관桂冠을 쓴다. 요새는 시인이 흔해 제 대접을 못 받지만 그때만 해도 추천작가는 장원급제만큼이나 어려웠다. 문단 인구 2백 여명에 시인이라야 1백 명 안팎이었던 시절 얘기다.
명동이 아직 폐허의 잿더미에 있을 56년 무렵, 이성교는 시인 이성환에 이끌려 당시 문학청년들의 보금자리 격인 명동으로 진출, 다방 ‘갈채’에서 소설문학계의 수장이던 김동리를 비롯한 기성 문인과의 교류가 싹텄다. ‘갈채’는 ‘문예살롱’이 문을 닫자 한국문협의 사랑방 격이어서 박화성, 최정희, 손소희, 서정주, 황순원,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김윤성, 이종환, 조연현 제씨가 여기서 원고를 청탁 받고 건네 주기도 했다.
자유문협 사람들은 그 아지트를 ‘동방살롱’으로 삼았으니, 모윤숙, 백철, 이헌구, 김광섭, 이무영, 김송, 노천명, 정비석, 김용호, 이봉래, 박인환 제씨가 출입했다.
또한 명동은 문학 지망생들의 집결지였으니, 여기서 마시고 여기서 취하고 여기서 그 열기를 발산하기도 했다.
서울대의 송영택, 이일, 유종호, 이어령, 천상병, 황명걸이 모이고 동국대의 황명, 신기선, 최재복, 이창대, 남구봉, 임수종, 이현우, 송혁, 강민, 조한길, 황갑주, 신경림, 낭승만, 최휘림, 연세대의 박희연, 유창경, 정공채, 중앙대의 박성룡, 권용태, 최진우, 성균관대의 정인영, 최남백, 김여정, 강계순, 성춘복, 배기열 서라벌예대의 김종후, 이열, 심우성, 박용숙, 이시철, 강성모, 함동선, 김승환, 김춘배, 김종원, 이추림, 박정희와 고려대의 임종국, 박희진, 인태성, 현재훈, 이종석, 이문희, 그리고 이경남, 구자운, 백시걸, 민영, 박은국, 김관식, 박봉우, 송기동, 송병수, 신봉승, 구혜영, 이화여대의 정연희, 김혜숙, 김선영, 최희숙 등과 사귀고 친구가 되었다.
이 젊은이들이 자주 찾던 술집으로는 ‘은성’, ‘할머니집’, ‘몽파르나스’, ‘쌍과부집’, ‘송도’, ‘송림’, 등이 꼽을만 하고, 다방으로는 ‘음악회관’, ‘돌체’ ‘엠프렌스’, ‘청산’, ‘창’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56년부터 58년에 걸쳐 거리는 서서히 전쟁 전의 모습을 찾기 시작하고 청년들은 저마다의 직장을 찾아 발길을 옮겨 명동의 낭만을 시들게 했다.
김관식은 경기상업 교사로, 천상병은 부산 시청으로, 이현우는 남대문 양아치의 정신적 오야붕으로, 그밖에는 잡지사로, 출판사로, 학교로 뿔뿔이 떠나갔다.
1958년, 텅 빈 명동에서 이성교가 택한 것은 군입대였다. 매사에 반듯한 이성교로서는 애당초부터 병역기피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논산훈련소에서 이성교는 소설가 이문희를 다시 만나고 그의 천재적(?) 대중가요 가창 실력 덕분에 군대생활에서 숨쉴 틈을 얻을 수 있었고 이어서 훈련소 본부 정훈참모부에서 발행하는 「진중신문」이라는 훈련소 소식신문에 동대 국문과의 조익연과 함께 입사하면서 책도 읽을 여가가 생겼다.
그는 1960년, 이성교는 성신여고에서 첫 월급을 타자마자 미아리에 사글세로 사는 이문희 집에 쌀 가마니를 들여 놓아 주었다. 이후 그는 중앙대 대학원을 나와 성신여대에서 내리 30년을 봉직 했다.
지금도 성신여대 도서관에는 시집 4천의 컬렉션으로 빛나는 월천문고月川文庫가 자랑인데 월천은 이성교의 아호다. 이 문고는 특히 초판본이 많기로도 유명한데, 지금도 아쉬운 것은 관철동에서 박재삼과의 술자리에서 1932년 재판본인 파인 김동환의 ≪국경의 밤≫을 잠시 보고 준다는 고은의 말을 믿고 건네준 바보짓(?)이다.
도서 수집에는 삼치三痴를 경계하고 있으니, 곧 빌려 달라는 것과, 빌려 주는 것, 그리고 돌려 주는 세 가지를 못난 짓으로 치는데, 이 철칙을 잊고 말아 <월천 문고>에 파인의 <국경의 밤>이 결본이 되고 말았다.
그는 <육십연대사화집六十年代詞華集>의 동인이기도 하다. 동인 중 이경남, 박희진, 이희철, 박재삼, 신기선, 박성룡, 인태성 등과 잘 어울렸는데, 특히 중앙일보에 재직하던 인태성과는 날 새는 줄을 모르고 술잔을 놓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주사를 모르는 얌전한 술꾼이었다.
1964년, 그는 사랑하는 둘째 딸을 다섯 살 나이에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는 큰 충격에 빠진다. 그 절절한 슬픔을 「현대문학」에 <밤비>라는 시로 발표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그런 아픔 속에 있던 그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당시 서대문에 있던 순복음 중앙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신앙생활의 역사를 보면, 그는 모태신앙으로 방황하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1951), 어머니가 유행하던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난 다음, 강릉에서 교회에서 들리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스스로 강릉 중앙감리교회를 찾아 들어 간 것이 신앙 생활의 첫걸음이었다.
이후, 서울에서 사는 동안은 그의 신앙생활은 그야말로 ‘나일론’이었다. 그의 신앙생활은 순복음교회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1984년에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지금은 원로 장로다. 1960년에 결혼한 부인 김갑순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둔 가장으로 지금껏 연로한 장모를 모시고 산다.
<가을 운동회>라는 이성교의 시가 문교부 국정교과서(중학 국어 2ㅡ1)에 10년(70년대)이나 실렸다.
둥둥 북소리에/만국기가 오르면/온 마을엔 인화人花가 핀다//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연신 터지는/출발 신호에/땅이 흔들린다//차일 친 골목엔/
자잘한 웃음이 퍼지고/아이들은 쏟아지는 과일에/떡 타령을 잊었다//(이하 생략)
금년 팔순 나이에 시력詩歷 54년을 기념하는 시집이 그의 시우詩友 성춘복의 솜씨로 엮어져 나왔으니 <끝없는 해안선 그 파도를 따라>(2011/마음)다.
성춘복과의 인연은 그의 첫 시집 ≪산음가山吟歌≫(1965/문학사 대표 최응표)를 펴 낼 때부터 맺었으니, 어언 반세기가 가깝다.
제2시집 ≪겨울 바다≫(1971/한국시인협회), 제3시집 ≪보리 필 무렵≫(1974/창원사), 제4시집 ≪눈 오는날 저녁≫(1979/창원사), 제5시집 ≪남행길≫(1986/청문사), 제6시집 ≪강원도 바람≫(1992/문학세계사), 제7시집 ≪동해안>(1996/형설출판사), 제8시집 ≪운두령을 넘으며≫(2001/태학사), 제9시집 ≪싸리꽃 영가≫(2008/창조문예사), 그리고 열 번째 시집이 이번에 나온 ≪끝없는 해안선 그 파도를 따라≫인데 사실은 시선집 ≪대관령을 넘으며≫(1984/맥밀란), 신앙시집 ≪하늘 가는 길≫(1989/종로서적), 시전집 ≪이성교 시전집≫(1997/형설출판사)를 합치면 열 세 권이나 되는 다작 시인이다.
김소월이 평안도를, 박목월이 경상도를, 서정주가 전라도를 각각 노래했다면 이성교는 강원도를 노래했다
ㅡ 윤병로(문학평론가)
이성교 시인은 비정한 문화의 세기의 진정한 예언자, 작품에 대한 충실하고 개방적인 중재자, 그리고 존귀하고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임에 틀림 없다.
ㅡ 엄창섭(관동대 명예교수)
(전략) 해변의 정기精氣로 살은/삼척 사람들/모두 다 버스 속에서/온갖 시름을 보따리 속에 묻어둔 채/지긋이 눈을 감고 바다를 그리고 있다.//
― 「三陟 사람들」에서
그는 옛 친구를 만나면, 영화감독 출신 이미례 씨가 운영하는 인사동의 남도음식점 <여자만>(02/723ㅡ1238)에 가서 바다 냄새 물씬한 고등어 김치찌개를 시킨다. 그리고는 꼭 이런 말을 잊지 않는다.
“먹어 봐, 고등어에서 내 고향 삼척 바다 냄새가 나.”
「문학시대」 여름호, 2011년
5. 나의 문학세계
이성교
내가 추구하는 詩精神
나는 아무래도 詩를 ‘생각하는 쪽’ 보다 ‘노래하는 쪽’에 더 比重을 두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 意味에서 나는 철저한 傳統主義者다. 나는 國文學徒로서 이때까지 그런 作品을 많이 보아왔고 또 가르쳐온 입장에서 더욱 그러하다. 더욱 이렇게 된 언저리에는 내 成長과도 관련이 있다. 나는 江原道 농촌에서 태어났고 또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이 生活을 빼고 나면 나의 아름다움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고향을 떠나서 서울에서 산 지 오래되었다. 한 40여 년을 살고 있는 터이지만, 내 정신은 이곳과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 내 詩의 背景과 素材는 강원도적이다. 몸은 비록 고향과 떨어져 살고 있지만 눈은, 마음은 언제나 강원도 생활에 집착되어 있다. 이런 意味에서도 나는 새로운, 思潮에 逆行하는 과거 생활엔 침착한 傳統主義者다. 내 詩가 처음 活字化된 것은 1956년 『現代文學』 誌 9月號에 發表된 「輪廻」였다. 이 作品은 未堂 徐廷柱 선생의 추천으로 된 것이었다. 이 作品 題目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이 무렵 되도록 傳統的인 情緖를추구하고자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무렵은 한참 추천해 주신 徐廷柱선생의 詩世界에 흠빡 빠져 있을 때였다. 한번은 徐廷柱 선생댁에 갔더니 선생님은 나에게 “자네는 강원도의 세계가 좋아, 그걸 꾸준히 갖고 나가면 소설가 이태준 못지않게 이름날 것일세”하셨다. 나는 은근히 그 칭찬이 좋고 또 한가닥 자부심도 생겨서 마음이 흡족했다.
또 한번은 「새벽에 우는 소」라는 시를 보여 드렸더니 역시 칭찬하시면서 “진짜 자네 집 소가 새벽에 청승맞게 울던가. 바로 그런 엉뚱한 세계를 노래하게나”하셨다. 나는 그 이후부터 한 번도 이 정신을 놓쳐본 일이 없었다.
시단 데뷔 후 10년만에 첫 詩集 『山吟歌』를 내었다. 말하자면 이 무렵의 내 詩精神이 반영된 총결산의 詩集이었다. 詩集이 나오고 난 다음에 많이 詩集評에서 기대한 그대로 강원도 사람들의 소박한 생활과 특유의 土俗美를 잘 노래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두 번째 詩集 『겨울바다』부터 조금씩 변화가 왔다고 할까? 사실 나는 이 무렵에 강원도 산골 사람들의 생활이 식상해졌다. 한 10여년 노래하고 나니, 밑천이 바닥이 날 정도였다. 더욱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내 시와 경향을 달리하는 몇 사람들이 <서정주 아류>라고 물아붙인 점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나는 종전의 그 배경에다 하나 더 보태어, 바닷가 사람들의 생활도 노래해 보려고 했다. 여기에 얻어진 시집이 두 번째 시집인『겨울바다』였다. 굳이 이 무렵의 詩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종전의 主情的인 세계에다 知的인 것을 조금 가미하려고 한 점이다. 그래서 종전의 단조로운 시의 분위기에 조금 이야기같은 것을 더 넣으려고 한 점이 다르다고 할까? 그것도 서사적인 시세계 추구가 아닌 이상, 어느 한계에 부딪쳐 또 갈등을 일으켰다. 말하자면 이 무렵의 詩世界는 큰 特性없이 그저 쓰는 것에 보람을 느낀 만네리즘에 빠졌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은 表現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詩의 분위기(江原道的인)를 바꾸지 않고 그 속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종전의 詩世界에서 얼마 발전하지 못하고 앉은뱅이 걸음을 한 것이 바로 제3詩集 「보리 필 무렵」과 제4詩集 『눈 온 날 저녁』이었다.
詩壇 데뷔 30年만에 낸 제5詩集 『南行길』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한 가지 이색적인 것이 있다면 기독교적인 색채가 심심치 않게 깔려 있었다고 할까?
여기까지 오는 데는 나는 처음 마음먹은 대로 詩는 노래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잊지 않았다. 따라서 시어의 세련미, 선명한 이미지 부각, 표현에 있어서 조화된 가락 등은 한 번도 늦추어본 적이 없다.
이제 나는 처음 마음 먹었던 그 精神대로 방황하지 않고 江原道 生活이라는 무대를 대전제로 하여 산골이든 어촌이든 가리지 않고, 폭 넓게 傳統精神을 노래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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