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① 등암화상에게 주다
부처님이 일대장교를 설하시어 오계와 십선의 법으로써 인천에 나게 하고 고ㆍ집ㆍ멸ㆍ도의 사제법으로써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하며 무명ㆍ행등 십이 인연법으로써 연각과 벽지불과를 증득하게 하고 사홍서원과 육바라밀법으로써 보살도를 행하며 권교의 보살은 아승지겁을 지나면서 사홍서원과 육바라밀을 행하되 십신ㆍ십주ㆍ십행ㆍ십회향의 과위를 지나도 오히려 묘도를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직도 유위법(有爲法)을 보고 희유하다는 생각을 내며 무상법(無相法)을 들으면 망연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부처를 구하려는 지견은 마음에서 항상 끊어지지 않으나 번뇌와 습기의 뿌리와 꼭지가 없어지지 않으므로 부처님의 경계하고 가르침에 의하여 항상 눌러 항복 받나니 비유하자면 환주(幻呪)를 잘하는 사람이 주술의 힘으로써 맹수와 독사를 제지하여 그 독으로 하여금 사람을 다치거나 물지 못하게 하되 사람을 해치는 독을 제거하지 못하듯이 또한 저 불법 가운데 의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아서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속에 걸려 있는 듯하나니 이럴 때에 진선지식을 찾아서 묘한 도를 깨달아 얻으면 곧바로 십지(十地) 자리에 오르게 되며 선지식을 찾지 않고 깨닫지 못하면 마침내 타락할 뿐이다.
보조국사가 이르되
“무릇 참학자(參學者)는 처음에 먼저 바른 인연을 심어야 하나니, 오계와 십선과 십이인연과 육도등법(六度等法)은 모두가 바른 인연이 아니니 자기의 마음이 이 부처인 줄 믿어서 일념무생(一念無生)에 삼아승지겁이 공하나니 이렇게 믿는 것이 바른 인연이니라.” 함이 이것이니라.
성인이 가신지 오래되어서 사우(師友)와 연원(淵源)이 이미 끊어져서 무릇 참선하는 수행자들이 대개가 미한 데 막히고 껍질에 걸려서 권반(權半)의 말에 길들여진 이들이 계행과 선행으로는 사제ㆍ십이인연 등 법도 오히려 닦아 나아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바른 인연을 개발하여 나아가겠는가.
그러면 절반이란 무엇인가. 도의 극치에 이르지 못하고 중도에서 그침을 말한다. 권(權)이란 무엇인가. 형수가 물에 빠져 위급함에 손을 잡아 건짐을 말한다. 그 권이니 반이니 하는 것으로는 상(常)ㆍ실(實)ㆍ원(圓)이 되지 못함이라 마침내 슬기로운 이가 기다릴 것이 못 됨을 뒤에 알 지로다.
수선사가 이르기를 “대도를 구하려는 이에게 일승의 묘한 뜻을 설하였고 작은 수행을 구하는 이에게는 육행과 방편문과 육도 등의 법을 설하였다.” 하였는데 이도 또한 방편을 면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그 나머지 오계ㆍ십선ㆍ사제ㆍ십이인연 등이랴. 부처님이 방편의 힘으로 염불하는 법을 설하여 중생들을 인도하시니 그 뜻이 매우 묘하것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마음을 잘못 써서 효력이 없으니 어쩌랴.
「미타경」에 정토의 장엄을 크게 설하시고 왕생하는 법을 설하시기를 “하루 이틀 내지 이레동안 한마음으로 어지럽지 않으면 이 사람은 왕생한다.” 하였고, 「십육관경」에 불상을 관하여 성취하는 법이 있는데 “마음을 한 곳에 매어서 그 관하는 것을 역력히 하여 오랜 시간을 또렷이 하면 삼매에 들어 무량수를 성취한다.” 하였다.
경 가운데 세 무리들의 왕생하는 것이 모두 보리심을 발하였기 때문이니 보리심이란 무엇인가. 곧 중생들이 날마다 쓰는 신령스럽게 느끼는 성품이다. 만약 능히 이 신령스럽게 느끼는 성품을 개발하거나 혹은 능히 관상삼매(觀象三昧)를 성취하거나 혹은 능히 일심불란(一心不亂)을 성취하면은 저 왕생하는데 무엇이 어려우랴.
그래서 규봉선사가 이르기를 “염불하여 정토에 나기를 구하더라도 또한 십육관선과 염불삼매와 반주삼매(般舟三昧)를 닦아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한결같이 산란스러운 마음으로 명호를 외어서 문득 능히 생사를 해탈하여 정토에 나려는 것과
다른 것이다.
신ㆍ구역의 경과 논에 모두 이르기를 “십지 이상의 보살도 보신불의 정토를 조금밖에 못 본다.” 하였으니 아미타의 정토가 어찌 보신불의 정토가 아니겠는가. 십지 보살도 오히려 전부 봄을 허락하지 않거늘 어찌 번뇌에 얽힌 범부가 산란한 마음으로 한갓 명호만을 외운다고 능히 생사에 해탈하겠는가. 만약 산란한 마음으로도 명호만을 외우고 생사를 해탈한다면 어찌 괴롭게 일심불란과 십육삼매를 닦겠는가. 이미 부처님 말씀에 어긋나니 어찌 능히 성공하리요.
옛적에 “자기의 힘으로 하는 것은 나무를 심어서 배를 만드는 것에 비유하고 남의 힘은 배를 빌려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에 비유함이니 더디고 빠르고 어렵고 쉬운 것은 공 드림에 차이가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또한 권하여 교화하는 방편이라 잘못됨에 변명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우니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고 뒷날 중생들을 크게 그르침이니 이것은 부득불 변명해야 하나니라.
본래 뿌리 없는 나무이니 어찌 종자를 심을 수 있으며 본래 밑 없는 배라 만들 필요가 없다. 대천세계를 뒤덮고 천상 인간을 널리 제도함에 그 도와 작용이 일찍이 조금도 모자라지 않건만은 다만 어지러움이 안정되지 않았고 혼미한 꿈을 깨지 못하였을 뿐이다.
또한 「인명론」에 같은 비유와 다른 비유가 있으니 “불성이 허공과 같다.” 함은 같은 비유요 “군사와 숲과 같다.” 함은 다른 비유요 같은 비유가 아니다. 만일 같은 비유에 부친다면 “자기 집의 돈과 재산으로서 굶주리고 빈곤한 사람을 구제한다.” 함은 자기의 힘이요,
“남의 집안의 재물로 두루 베풀어 준다.” 함은 남의 힘이다. 이러한 비유는 부처님 교리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경에 이르기를 “옷 속에 밝은 구슬이 있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며 걸식한다.” 함이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