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중기 전통적으로 그이전부터 자식에게 상속은 골고루 장남 차남 여식 상관없이 똑같이 분재하였다고 전해옵니다
대구서씨 약봉조도 4아들 경우 경수 경빈 경주에게 골고루 분재하였으리라봅니다
첫째 아들은 설운동일대일거라생각되고 둘째는 송우리일대 셋째는 안동소호리에 고성이씨 할아버지 근처에 문헌에 나와있듯이 노비와 땅을 분재하였습니다
넷째는 파주일대
각파별로 분재를 하여주었고 불천위 제사는 돌아가면서 제사를 봉조하다가 종손 병순께서 1760년전후때쯤부터 사당으로 모시게되었습니다
그이전에는 만사공 전첨공 첨추공 도위공 각파에서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냈을거로 생각이됩니다
그게 조선시대 관습이였으니 대구서씨도 양반가이니
관습을 따라했을것입니다.
후손120명이 모여 3월18일에 약현에서 종손 병순이 충숙공 신주에 고유하고 사당에 봉행하셨습니다
약봉서성대감께서 돌아가신
1631년이후 각파에서 지내던 제사도 1760년이 되어서 장손집에서 사당으로 모셔 봉양을하였던것입니다
그이후 설운동으로 약봉 종손이 이사하면 신주도 모시고 와서 사당을 짓고 6.25를 거치면서도 현재까지 유지되어온것입니다(만사공파가 장손집안이니 계속 제사 묘역관리를 현재까지 해왔던것입니다)
각파별로 분재된땅을 팔고 사고 한 경우도 있고 약현땅 또한 친척이 선교원에 팔아먹는 비참한일도 있었습니다
물론 약봉할아버지께서 분재하신이후 큰아들은 우의정 둘째는 전첨 셋째 첨추 넷째 도위 벼슬을 하였고 그이후 자손들이 번성해서 부유하리라생각합니다
**만사공 입회하에 셋째 경빈에게 안동땅 분재하였던 분재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