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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선생 『한국혼(韓國魂)』의 폴란드 멸망 참상과 한국의 독립운동
2023년 8월 15일
신규식 선생 『한국혼(韓國魂)』에서 인용하여 번역함 :
아아, 우리 동포들이여! 우리는 지금 망국의 국민이 되어 모두 노예와 말이나 소처럼 치욕을 받고 있습니다. 식민통치의 외부 상황은 날로 각박하여 우리 자신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나라가 멸망하기 이전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찌 겁먹어 고개를 숙이고 꼼짝하지 못하나 마음속에서조차 꿈틀대는 것도 없다고 하겠습니까?
러시아는 폴란드의 귀족과 평민의 어린아이들을 붙잡아 멀리 시베리아로 보내 추운 동토에서 넘어지고 지쳐서 쓰러져 굶주리고 얼어 죽게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태운 죄수 열차가 떠나려 할 때 부모들이 함께 가기를 원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자 차량에 매달리고 철로 위에 드러누워 열차 출발을 막았습니다. 호송하는 코사크 병사들은 부모들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발길질하여 철로 밖으로 몰아냈습니다. 열차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출발하자 아들딸을 부르는 부모들의 통곡 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고 모두 피눈물을 쏟았습니다. 열차에 태워 가는 도중에 어린아이들에게 나눠준 음식은 거무레한 싸구려 빵조각뿐이었습니다. 아이들 가운데 병이 나면 곧바로 황량한 벌판에 던져버렸습니다. 철길을 따라 버려진 죽은 아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손에 빵조각을 들고 씹다가 죽은 아이, 숨이 끊어졌으나 눈을 감지 못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폴란드가 망한 뒤 일어난 가슴 아픈 이야기(痛言)입니다.
우리나라가 망하여 남겨진 백성들이 눈물 흘리며 우는 소리가 아직도 내 귓가에 생생합니다. 우리는 끝내 폴란드의 뒤를 이어 멸망하였습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폴란드 사람들을 슬퍼하였으나 지금은 우리 스스로 슬퍼할 겨를도 없습니다. 슬프고 슬프다! 아아, 동포여! 우리가 어찌 폴란드 멸망을 잇는 사람이 되어도 끝내 분발하지 않습니까? 우리 국민이 어찌 저 왜놈들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스스로 구제하지 않습니까? 삼신(三神)의 밝은 신명(神明)을 받고 태어난 우리 후손들은 어찌 국가가 소멸해가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며 적자생존(適者生存) 진화론의 어쩔 수 없는 도태라고 여깁니까? 아아! 우리 동포여! 잠깐 몇십 분의 시간을 내어 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痛言)를 들어보세요.
嗚呼! 吾同胞! 今玆旣亡國之民, 同受奴隷馬牛之辱. 形勢迫於外, 而飢寒切於身. 回思未亡國以前, 忍能沁沁俔俔, 無所動於中乎?
俄取波蘭貴族及平民之孩童, 流諸西伯利亞, 使顚頓於冰天雪地之中, 凍餒而死. 方其囚車就道, 各孩童之父母, 求偕行而不得, 乃攀轅臥轍, 以阻火車之行. 監送哥蕯克兵, 且鞭且蹴, 屛諸人於軌道之外. 開車徑行, 一時呼兒喚女之哭聲, 血淚俱迸. 途中給孩童食物, 僅粗黑之麵包. 孩童病者, 輒委諸荒野. 沿途死兒無數, 有掘麵包方齧, 氣絶而目猶未瞑者. 此波蘭亡國後之痛言也.
亡國遺黎, 泣聲猶在耳際, 而我竟爲波蘭之續矣. 我人曩尙爲波蘭人痛, 乃今自痛之不暇矣. 哀哉! 哀哉! 嗚呼! 同胞! 我人忍續爲波蘭之人, 終已不振乎? 我人忍受彼人之毒, 不復自救乎? 我神明之冑, 忍坐視其澌滅, 歸天演之淘汰乎? 嗚呼! 吾同胞! 其少俟數分時之光陰, 以聽我流涕而道之痛言. 涕有盡而言不可窮, 言有窮而心不可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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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뉴스를 보면 폴란드는 한국 방산무기를 많이 수입하고 한국은 큰돈을 빌려주며 무기를 공급한다고 합니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한국의 방산무기를 구매하려고 한답니다. 한국이 방산무기를 동유럽 국가들에 수출한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버는 무역에 그치지 않고 서유럽과 동유럽 또 동유럽과 러시아 셋의 복잡한 역사적 관계와 현재 상황을 잘 판단하고 우리의 역할과 지원 범위를 스스로 선택하여야 합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나 러시아의 동유럽 침략과 간섭이 여전하며 우크라이나가 표적이 되었고 우크라이나가 얼마나 버틸지 걱정입니다. 또 폴란드가 과연 자유를 위하여 우크라이나를 얼마나 지원해줄지 걱정입니다.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조차도 동유럽 국가들의 자유(liberty) 전쟁을 지원하면서도 러시아와의 확전을 꺼리고 또 동유럽 국가들과 러시아의 오랜 역사적 관계를 고려하여 상황을 관망하면서 소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19-20세기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유럽에서 멸망한 국가들 가운데 폴란드가 대표 사례였다면 동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중국이 폴란드의 뒤를 잇는 망국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서유럽 국가의 사람들이 폴란드의 멸망과 비극을 이야기한 서적들을 듣고 볼 때마다 서로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뒤에는 러시아가 동유럽 국가들에게 저질렀던 가해자 모델을 동아시아 한국과 중국 침략에 그대로 옮겨놓은 가해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가해자와 폴란드 피해자라는 입장이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가해자 한국과 중국 피해자 방식이 되었습니다. 일본이 서양을 배우겠다고 말하였는데 사실상 러시아의 동유럽 침략을 모방한 것이며 결국에는 러시아처럼 전체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이 일본에게 국권을 상실할 1910년 8월 29일부터 조선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고 한국 국민에게 돌아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국권은 지속하였고 독립운동은 자유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건국(Nation Building)운동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917년 『大同團結宣言』 : “隆熙皇帝가 三寶(이천만 국민, 삼천리 영토, 사천년 주권)를 抛棄한 八月二十九日(1910년 8월 29일)은 卽 吾人同志가 三寶를 繼承한 八月二十九日이니, 其間에 瞬間도 停息이 無함이라. 吾人同志난 完全한 相續者니, 彼 帝權消滅의 時가 卽 民權發生의 時오, 舊韓最終의 一日은 卽 新韓最初의 一日이니, 何以故오?”)
광복절을 맞아 우리는 한국의 국권 지속과 독립운동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 사상과 민주공화국의 건국운동을 떠올려 보아야 합니다. 현재 한국의 정당에서는 자유에 기초한 경제성장이 먼저냐 민주적 경제분배가 먼저냐를 놓고 서로 경쟁합니다. 다만 자유라는 말을 정치인 마음대로 이용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동유럽 국가 폴란드의 자유 쟁취과정과 멸망과 비극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신규식 선생이 폴란드 참상을 인용하여 강조하였던 뜻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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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다른 나라와 함께 폴란드를 3번이나 분할하여 점령하고 정치를 간섭하고 개혁을 저지하였습니다. 일본이 제국주의 의도를 갖고 조선을 억압하고 병탐하거나 중국 땅을 빼앗고 침략전쟁을 일으켰던 프로그램은 러시아의 폴란드 침략과 아주 흡사합니다. 가해자 러시아는 폴란드 사람들의 자유 사상과 애국심을 억압하였고, 가해자 일본은 폴란드의 전쟁 패배의 참혹함을 강조하면서 군국주의로 나가서 결국에는 동아시아에 큰 재앙을 끼쳤고 아직도 반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해자 폴란드 사람들은 자유를 얻으려고 부단히 러시아와 싸웠고 나중에는 나라를 되찾았고, 피해자 조선 및 중국은 자유와 개혁을 위하여 국가의 독립이 시급하였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둘은 폴란드 역사를 보고 느끼는 생각이 서로 달랐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은 일본인 시부에 다모츠(澁江保, 1857-1930)가 번역하여 편집한 『波蘭衰亡戦史』(博文館, 1895年7月16日 출판) 책이 잘 보여줍니다.
폴란드 멸망에 관한 일본인들의 이해와 논의는 조선 말기와 청나라 말기에 끼친 역사적 의의가 상당히 컸습니다. 신규식 선생이 인용한 폴란드 이야기의 원래 출처는 번역가이며 소설가였던 시부에 다모츠(澁江保)가 지은 『波蘭衰亡戦史』(博文館, 1895年7月16日 출판)에 있다고 추측합니다. 그는 일본 동경 박문관(博文館) 출판사에서 젊은 집필자들(25살에서 40살까지)을 모아 1894년부터 1896년까지 만국전사(萬國戰史) 24종 시리즈를 출판하였는데 그가 자신의 명의 10종과 다른 사람의 명의를 차용한 8종 모두 18종을 편찬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 독자들은 청일전쟁(1894-1895) 상태에 있었기에 유럽의 독일과 프랑스 전쟁(1870-1871) 등 유럽의 전쟁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시부에 다모츠는 「소인(小引)」(3쪽)에서 “Fletcher의 History of Poland(波蘭史)와 무명씨의 History of Poland(波蘭史)를 주로 사용하고 Kohlrausch의 History of Germany(獨逸史), Carlyle의 History of Friedrich Ⅱ of Prussia, called Frederick the Great, Kelley의 History of Russia(露國史)을 참고하였다.”고 밝혔습니다.
시부에 다모츠가 번역하였다는 Fletcher의 『폴란드 역사』 서지를 찾아보면 James Fletcher(1811-1832, Trinty College, Cambridge)가 1831년에 런던에서, 1832년에는 뉴욕에서 출판한 The History of Poland : From the Earliest Period to the Present Time이며 뒤에 1842년까지 몇 번이나 더 출판되었습니다.
Fletcher의 서적은 13개 장절(chapter)과 최근 사건의 구술(narrative) 및 부록(appendix)로 구성되었습니다. Fletcher는 폴란드가 주변국들과 잦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3차 국토 분할(partition)까지 겪으면서 개혁(reform)을 시도하였으나 러시아의 강한 반대와 간섭으로 좌절되고 많은 애국지사와 개혁가들이 죽거나 추방되고 결국에는 러시아에 병합되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13장 끝에 폴란드의 전망(Prospect of Poland)에서 “폴란드 국민의 애국심(patriotic feeling)은 희망이 좌절될수록 커졌으나 다시 짓밟혔다. 19세기에는 인간성을 믿기 때문에(the credit of humanity) 각가지 폭력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위대한 폴란드 국민(proud Poles)’은 승리로 나갈 것이며 진정한 자유(true liberty)도 강력해질 것이다. 폴란드의 넓은 평원에서 님프 요정(mountain nymph)을 잊기를 바랍니다.”라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는 유럽 현대사(modern history)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자유(liberty)이며 폴란드 역사에서 자유를 얻는 쟁취과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주고 앞으로 성공을 비는 것이 출판 의도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부에 다모츠는 Fletcher의 서적을 기준으로 6편(編)으로 편성하고 편마다 4장(章)으로 나누어 모두 24장으로 편집하였습니다. 그는 「소인(小引)」에서 “러시아 여황 예카테리나 2세가 피터 대제의 유훈을 받들어 폴란드를 병탐하여 멸망시킨 과정을 기술하고 또 원세개(袁世凱)가 러시아 공사의 잔꾀에 속아 국가를 멸망시키려는 것도 거울삼는다. 그래서 폴란드 건국 초기부터 쇠망까지 역사를 약술하고 특히 제2편에서 쇠망을 불러온 전쟁사를 서술한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편집 취지는 러시아가 어떻게 폴란드를 침략하고 영토를 분할하고 내정 간섭하고 개혁을 반대하였는지와 폴란드가 전쟁에서 패배할 때마다 받았던 쇠망의 고통에 초점을 두었기에 “쇠망 전쟁사”라고 이름을 달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전쟁의 승패를 진화론의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고 보고 전쟁의 승리를 합리화하였습니다.
또 「서언(緖言)」에서는 폴란드 멸망의 3개 원인을 들었습니다. 첫째는 국왕을 의회가 공선(公選)하는 것이고, 둘째는 외국의 간섭이고, 셋째는 인민의 정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원인은 그가 분석한 견해입니다. 「소인」과 「서언」에서 밝힌 출판 의도는 Fletcher의 의도와는 아주 다르며 당시 일본이 중앙집권화와 입헌군주제를 추구하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다시 말해 Fletcher가 유럽 현대사에서 자유의 쟁취과정을 강조한 취지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한국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시부에 다모츠가 분석한 세 가지 견해를 요약하여 폴란드가 스스로 멸망하였다는 자망(自亡)이라고 보았는데 결국 시부에 다모츠의 분석에 오염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화론의 약육강식에 따라 약한 국가가 스스로 멸망하였다고 여기는 것이 폴란드 자망론이며 조선의 자망입니다. 조선 자망론은 일본의 침략을 수긍하는 것이기에 틀린 생각입니다. 조선은 성리학 때문에 멸망하였다고 보려는 일본의 식민사관은 조선 자망의 원죄를 조선 성리학에 뒤집어씌우는 것이며 성리학의 연구가 부족하였던 당시 한국 지식인들이 쉽게 반박하지 못하고 인정하기도 하였답니다.
시부에 다모츠(靜岡縣 거주기간 1885년 12월-1890년 3월)는 전도풍태랑(前島豊太郞, 1835-1900)을 비롯하여 중강조민(中江兆民, 1847-1901)의 명치정부 반대와 자유민권 운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전도풍태랑은 시즈오카현(靜岡縣)에서 1881년 『동해만종신보(東海晩鐘時報)』를 창간하여 명치 정부를 비판하고 자유민권 사상을 보급하였는데 시부에 다모츠가 주필을 맡았습니다. 그렇지만 시부에 다모츠는 동경에서 박문관(博文館)에 근무하는 동안(1890-1901)에는 자유민권보다는 중앙집권 강화에 더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시부에 다모츠는 명치시기의 입헌군주국가 입장에서 자유의 쟁취보다도 패전의 참혹한 결과인 망국을 부각하고 러시아 야욕을 경계하려고 중앙집권적인 국가적 단결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Fletcher의 정치적 가치관을 왜곡하고 변용한 것이며 이러한 취지가 그대로 일본을 비롯하여 조선과 청나라에 전파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현재 평가하면 일본인의 전쟁사 관점은 부국강병을 지향하고 군국주의로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봅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갑오농민전쟁(1894)을 치루면서 청일 양국의 침략과 내정 간섭을 겪었고 국가 위기라고 인식하였기에 만국전사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폴란드 멸망에 주목하였습니다.
어용선(魚瑢善, 1898년 11월 中樞院 議官 취임, 뒤에는 친일인사)이 만국전사 가운데 제10편 『波蘭衰亡戦史』를 일본에서 번역한 뒤 귀국하고 자비를 들여 1899년 답인사(搭印社)에서 『파란국말년전사(波蘭國末年戰史)』를 출판하였습니다.(103쪽, 玄采, 「波蘭國末年戰史跋」) 어용선은 『파란국말년전사』 서문에서 “波蘭國은 波蘭人이 自亡함이오 露、普、墺三國이 亡케함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외세에 의지하지 말고 자강(自强)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용선이 폴란드가 스스로 자망(自亡)한 것이고 외국의 침략이 아니라고 보았던 생각은 큰 잘못입니다.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의 1900년 3월 6일자 신문 광고에 신간 서적 『파란전사(波蘭戰史)』가 국한문(國漢文) 교역(交譯)이며 책값이 비싸지 않고 판매처 3곳을 알렸고 이듬해 1901년에는 『미국독립사(美國獨立史)』, 『파란말년전사(波蘭末年戰史)』, 『법국혁신전사(法國革新戰史)』 3종 국한문 번역 서적을 광고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유길준 전서(俞吉濬 全書)』(일조각, 1971) 제3책에 『파란국쇠망사(波蘭國衰亡史)』 필사본이 있는데 제6편 제3장까지만 필사하였다. 유길준이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고 어용선의 번역본을 당시 한글 문법에 맞게 교정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 시부에 다모츠(澁江保)와 만국전사(萬國戰史)와 『波蘭衰亡戦史』에 관한 일본 중국 한국의 연구를 보면 일본 연구자들은 일본 서적이 청나라에서 한역(漢譯)되어 영향을 주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시부에 다모츠가 참고한 Fletcher의 1931년 저서에는 주목하지 못하였습니다. 최근 중국의 연구자들은 일찍이 위원(魏源, 1794-1857)의 『海國圖志』(1844)에서 폴란드 분할을 소개한 것부터 강유위와 양계초의 저술을 들어 마치 청나라 말기의 폴란드 멸망에 관한 이해가 독자적이며 일본과 병행하였다고 암시하는데 강양 두 사람의 저술 내용과 목차를 보면 한역하기 이전에 영어 서적을 읽은 것이 아니고 일본어 서적을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나라에서는 일본유학생들이 만국전사 가운데 14종을 번역 출판하였고 『波蘭衰亡戦史』는 1901년부터 1904년까지 3종 번역 서적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런데 출판 이전에 벌써 소개되었는데 양무파 양계초가 1896년 8월 29일 『時務報』에 『파란멸망기(波蘭滅亡記)』를 실었고 강유위는 1898년 6월 29일에 『파란분멸기(波蘭分滅記)』 7권을 올려 광서황제가 칭찬하고 상금 2천 냥을 주었습니다. 1901년에는 상해 구지서원(求志書院) 봄 시험에서 “러시아가 폴란드를 병합한 전말을 논하시오(論俄並波蘭始末考)” 문제를 출제하였고 심지어 신학당(新學堂)의 입학시험에도 출제되었는데 1902년에는 당시 북경대학(京師大學堂) 입학시험에서 “폴란드와 튀르키예 양국의 존망을 논하시오”를 출제하였다고 합니다. 1904년에는 왕소농(汪笑儂, 1858-1918)이 이 번역 서적을 개편하여 경극(京劇) 『과종난인(瓜種蘭因)』 극본을 『아휘속화보(安徽俗話報)』에 게재하고 다시 상해 춘선희원(春仙戲園)에서 공연하여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청나라에서 번역 출판한 까닭은 청일전쟁 패배 이후에 청나라가 폴란드 꼴이 되었다는 위기감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최근 2011년에 한국의 어용선과 중국의 설공협(薛公俠)의 번역서를 비교하여 일본 번역본의 변용된 모습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아직도 동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하여 큰 재앙을 끼쳤던 과거 역사를 반성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이 일본에 민주정치를 심어주어 겉모습은 민주국가처럼 되었는데 아직도 스스로 유럽의 자유 사상과 민주정치를 제대로 배워서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이 오히려 민주정치를 일본 정치인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아니면 일본 국민 스스로 일본 정치인들을 바꾸던가요. 다시 말해 한국 정부와 시민단체가 줄곧 일본의 각종 전쟁범죄를 제기하고 일본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은 일본이 전체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실질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시민단체들도 전체주의에서 비롯된 전쟁범죄를 반성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여야 합니다. 일본의 전쟁범죄는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에 끼친 피해와 재앙만이 아니고 일본 국민의 피해와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본의 전쟁범죄는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함께 반성하고 제거하여야 할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 과제입니다.
신규식 선생은 폴란드 멸망의 비극적 참상 곧 가슴 아픈 이야기(痛言)를 소개하면서 한국 국민의 독립의식이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신규식 선생이 한국 국민의 독립의식을 각성하려는 뜻은 일부 사람들이 조선 자망론에 빠져 헤쳐나오지 못하는 것을 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는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였던 1910년 8월 29일 국치일과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 건립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벌써 100년을 넘겼으니 직접 보고 겪었던(所見) 사람들은 없고 이야기를 들은(所聞) 사람들만 남아 국치일과 건립일을 알고 기억하는 것(所傳聞)입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과 1919년 임시정부 건립을 보았던 사람들도 많지 않습니다. 국치일과 임시정부 건립 당시를 겪었던 사람들의 고통과 울분 그리고 독립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현재 사람들은 글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공감합니다. 또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을 겪은 사람들은 아직도 생존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아직 생존하시는 분들께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또 들은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광복절을 맞는 우리 젊은 세대가 당시의 조선 자망론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을 일으킨 역사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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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 폴란드 역사 :
1. James Fletcher(1811-1832) The History of Poland : From the Earliest Period to the Present Time
2. 일본인 시부에 다모츠(澁江保, 1857-1930) 『波蘭衰亡戦史』(博文館, 1895年7月16日 출판)
3. 한국인 魚溶善譯,『파란국말년전사(波蘭國末年戰史)』,澁江保著,搭印社,光武3年(1899)
* 신규식 선생이 『한국혼』에서 인용한 폴란드 비극의 참상 이야기는 신규식 선생이 어용선의 번역서를 보았다는 것이 확실하고 양계초의 글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James Fletcher의 서적뿐만 아니라 시부에 다모츠와 어용선 둘의 서적에는 없는 글입니다. 신규식과 양계초 모두 어디에서 인용하였는지 출처를 더 연구해보아야 합니다.
梁啓超,『波蘭滅亡記』(1896),『時務報』
「波蘭滅亡記」(丙申),『飲冰室文集類編』(下),歷史,第355-357︰
吾聞之,波蘭之再亡於俄也,俄人窮治倡義之黨,凡跡涉疑似稍預其謀者,皆解往西比利亞及靠喀蘇山,勒令充兵。遷波人三萬至靠喀蘇,開墾荒蕪,無許隨帶眷屬,其人皆權爵紳富,及為士者,檻車纍纍,相屬於道,如驅羊犬。田產沒於異族,妻子夷為奴丐。一千八百三十年三月,俄王諭波人,自七歲以上(一千八百三十五年三月,俄王諭波人自七歲以上),凡窮困及無父母者,徙置邊地,初則夜拘幼孩,繼則白晝劫奪。其年五月十七日有長車一隊,內置孩提無數,將解往西伯利亞,展輪之際,其父母號哭攀援,願與偕行,軍士怒,毆傷踣地,或入車下,甘為輪蹄蹂死,血肉狼藉,闐衢溢軌。孩童途中,僅食粗饅,有病即棄置於路,既斃,其饅尚在其側。乃至禁士民言語用波土音,令悉從俄人方言。書院、學塾,咸習俄文,時有士子及少年,潛聚偉埒那,用波土音問答,為邏者所執,遂科重罪。鳴呼!國之不競,而受人縛軛,其荼毒之苦,豈可言哉!豈可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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