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예외가 없는 죽음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공평하다. 누구든 죽는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우리 시대에 권력을 가장 강력하게 휘두른 자들이다. 그들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아마도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불행하게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살아생전 독재자로 군림할 때 그들은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부하와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통치했다. 권위에 도전하면 무엇이든 쳐부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을 맞았을 때 그토록 충성을 다하던 부하들, 그들이 의지했던 모든 것(권력, 무기, 군사)이 소용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자각을 기르면 삶을 좀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자각의 이로움이다. 우리는 한순간의 즐거움보다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더 중요하다고 여길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망치로 부정적인 생각과 번뇌를 깨는 것과 같다.
자비로운 석가모니 부처님을 시작으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스승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스승의 이름과 훌륭한 업적을 떠올리면 마치 그들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열반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들의 흔적이란 약간의 사리, 한 줌의 재와 뼈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성지에 모셔져 있는 사리나 뼈로 만날 수 밖에 없다. 사리나 뼈를 보고 나면 쓸쓸한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고대 인도의 저명한 불교학자들 가운데 지금 살아 있는 분은 아무도 없다. 역사책에서나 그들을 만날 수 있다. 훌륭했던 그들도 기록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전례 없는 권력을 휘두른 제왕들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들 역시 최후의 운명에 굴복했다. 역사 속에서도 죽음은 긴박하고 보편적인 사실임을 절감하게 된다. 무상은 현실이다. 이 사실을 인식하면 우리는 더 나은 수행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할 것이다. 세상의 존경을 받던 지도자도, 악명 높은 폭군도 모두 죽었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 사실을 자신에게 대입해 보라. 우리에겐 가족, 친구, 친지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죽었고 우리는 그 슬픔을 받아들여야 했다. 머지않아 다른 이들도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백 년 후, 세상은 이곳에서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설법을 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때도 이 건물들이 그대로 있을지, 무너졌을지 모르겠으나 이 자리에 있는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살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은 무작위 추첨과 비슷하다. 태어난 순서나 나이를 고려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늙은 사람이 먼저 죽고 젊은 사람이 나중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변에 보면 자식이나 손자, 손녀가 먼저 떠나 부모나 심지어 조부모가 장례를 치르는 경우도 꽤 있다. 만일 우리에게 힘이 있다면 염라대왕이 젊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을 것이다. 젊어 죽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누가 먼저 죽고 누가 나중에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세상 이치다. 염라대왕을 법정에 세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권력도 죽음을 체포할 수가 없다. 아무리 부자라 해도 죽음을 매수할 수 없고, 아무리 교활한 사람도 죽음을 책략으로 속일 수 없다.
우리들 가운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한다. 건강하게 살고 오래 살기 위해 규칙적인 식사도 하고, 운동도 한다. 조금만 아파도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는다. 곤란과 장애를 피하기 위해 기도도 한다.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어느 날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죽음이 닥치면 그 누구도 도와줄 수가 없다. 우리가 아파서 부처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빌면 약사여래가 와서 고쳐 줄지도 모르지만 죽음이 닥칠 때는 부처님도, 보살님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 목숨이 다하면 우리는 떠나야 한다. 죽음이 확실히 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했을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건, 그 누구이건 상관없이 수명의 시계는 재깍재깍 가고 있다. 스물 네 시간이 지나면 하루가 간다. 삼십 일이 지나면 한 달이 간다. 열두 달이 지나면 일 년이 간다. 그리고 우리 생애는 끝날 것이다.
물론 그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수행을 보장할 수는 없다. 가르침에 따라 수련을 하고 다르마에 맞게 살기 위해 노력을 할 때나 수행을 보장할 수가 있다. 스무 살 무렵까지는 어리니까 수행을 안 해도 된다고 말한다. 3-40대에는 “수행을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5-60대가 되면 늙고 기운이 부쳐, 공부를 할 수 없다고 한탄을 하면서 세월을 보낸다. 이렇게 우리는 인생을 낭비한다. 이상 한 것은, 우리 몸은 늙고 병들어 가는데 번뇌는 여전히 생생하다. 번뇌는 결코 나이를 먹지 않는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성욕이 줄지는 모르겠으나 번뇌는 여전히 강력할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대부분 놀면서 보낸다. 나도 어릴 때 같이 놀아주던 친구가 주변에 많았다. 친구들 가운데는 내가 살던 왕궁의 청소부들도 여럿 있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초급 논리학에서 다루는 주제인 ‘서로 다른 색상’에 대한 질문을 했다. 나는 어리기도 했고 질문의 답을 몰랐다. 그때부터 약이 올라서 열심히 공부하기로 결심을 했다. 열대여섯 살 즈음에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의 단계』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그 무렵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를 침략하는 바람에 공부에만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스물네다섯 살부터는 수행에 전념하려고 애썼지만 중국과 협상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망명하고 난민이 된 것이 스물다섯 살 때였다. 이십대 후반부터 삼십대 초반까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망명한지 35년이 지났고 이제 육십 대가 되었다.
수행을 해 보겠다는 강한 의지는 있었으나 이렇게 내 인생은 흘러갔다.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제1대 달라이 라마였던 겐둔 둡(1391-1474)의 사연이다. 스님도 수행에 전념하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겐둔 둡 스님은 타시 룬포 사원을 건립하면서 동시에 제자들을 가르쳤다. 스님의 전기를 읽어보면 얼마나 바삐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말했다. “산중에 머물면서 좀 더 깊이 있게 수행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겐둔 스님은 침통하게 대답했다. “내가 캉첸 암자에 머물고 있을 때는 일이 많지 않았다. 계속 암자에 머물러 수행을 했다면, 지금쯤 큰 깨달음을 얻었을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사람들을 돕겠다는 소망을 실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수행의 기회를 포기했다. 나는 수행을 하는 마음으로 타시 룬포를 짓고 있다.” 이 말씀은 내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독송, 기도, 안거 같은 수행에 전념을 할 수는 없으나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도우려고 노력한다. 물론 약간의 수행을 하기는 하나 달라이 라마로서 맡은 직무를 하다 보면 수행에만 오로지 집중할 수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점은 우리가 세상만사를 즐기면서 편안하게 수행할 생각을 한다면 다르마를 성취하기란 정말로 어렵다는 것이다.
감포파(1079-1153)는 스승인 밀라레파 곁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모든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익혔다. 감포파가 떠날 때가 되자 밀라레파는 이렇게 말했다. “네게 줄 가르침이 아직 하나 더 있다마는 지금 알려 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자 감포파가 스승께 간절히 청했다. “부디, 제게 그 가르침을 주십시오. 스승님께서 갖고 계신 것이면 무엇이든지 제게 주십시오.” 그러나 밀라레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감포파도 제 갈 길로 떠나려고 했다. 그때 밀라레파가 감포파를 불러 세웠다. “잠깐 기다려라. 너는 내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과 같으니 내 마지막 가르침을 너에게 주겠다.” 그렇게 말하면서 밀라레파는 옷을 들어 올려 굳은살이 박인 엉덩이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밀라레파가 치열하게 명상을 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는 덧붙여 말했다. “네가 정말로 열심히 수행을 하면 부처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늘 다르마의 잠재력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리고 한 생에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가능한지는 네가 얼마나 열심히 수행을 하는가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