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연기연의 원의와 창조적 해석의 가능성
1. 도올의 불연기연 해석과 수운의 원의
도올 선생은 최근의 <동경대전> 주해에서 불연기연(不然其然)을 해석하면서, 불연기연은 그렇게 복잡한 논의가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불연이 기연”이라는 뜻이다 라고 했습니다. 서양의 근원적인 수직적 사고는 불연의 사기성, 즉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수직적 권위를 부여하면서 많은 우상과 거짓 신앙을 양산했다는 것입니다. 즉 불연기연을 서학의 신관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읽고 있는데요, 저는 이 해석이 아주 명쾌해서 시원함이 있고, 수운의 원의를 정확하게 읽으려고 하는 학문적 성실성이 느껴져서 좋다고 봅니다. 다만 약간 아쉬운 점이 있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수운 선생의 일차적 의도는 "한울님을 멀리 구하지 말고 네 몸에서 구하라"는 메시지라고 읽힙니다. 다시 말해서 한울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각자위심에 빠져 있던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한울님이 실재하신다. 내유신령과 외유기화로 네 몸에 작용하고 계신다. 하지만 서학에서 이야기하듯이 저 멀리 초월적으로 계신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천주실의에서 논하듯이) 궁극적 기원을 찾는 방식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말씀하셨다고 봅니다.
반면, 도올 선생의 해석은 뒤에 절반만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학을 서구적 신관에 대한 안티테제로만 읽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보면 한울님도 없다고 보는 사람들에 대한 수운 선생의 안타까움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기연에만 사로잡힌 사람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간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연기연 첫 구절은 "천고의 만물이여, 각각 이룸이 있고 각각 형상이 있도다. 보는 바로 말하면 그렇고 그런 듯 하나 그부터 온 바를 헤아리면 멀고도 심히 멀도다"로 시작합니다. 한울님을 멀리 구하지 말고 드러난 형상 가운데서 보라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몸에서 발견하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동경대전, 「팔절」에서는 "네 몸에 화(化)해난 것을 헤아리라"고 했고, 「포덕문」 첫장에는 "저 옛적부터 봄과 가을이 갈아들고 사시가 성하고 쇠함이 옮기지도 아니하고 바뀌지도 아니하니 이 또한 한울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탄도유심급」 에서도 "가까운 데 있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정성에 있고 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은 듯 하나 그러하고 먼듯 하나 멀지 아니하니라."고 했던 겁니다.
결국 수운 선생의 불연기연은 일차적으로 "한울님이 실재하신다. 다만 한울님을 멀리 구하지 말고, 네 몸에서 구하라", 영과 기로 실재하시는 한울님,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지금도 숨을 불어넣어 주시고, 내 안에서 모든 것을 아는 우주적 지성으로 계신 그 분을 발견하고, 그 분을 존재의 중심으로 삼는 삶을 살아라는 메시지를 죽음을 예감한 그 순간까지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2. 인식론적인 이해
그런데 이 불연기연을 조금 확대해석하면 단순히 신관에 대한 언급에 그치지 않고, 인식론적 지평을 넓히라는 뜻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습니다.
수운 선생은 당시 세상 사람들의 세계 이해 방식에 두 가지 병폐가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하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 즉 형이상학 또는 종교적 세계, 신이라든지 그러한 세계만 중시여기고 일상의 차원을 무시하는 태도, 또 하나는 아예 그런 세계를 부정하면서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에만 빠져서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오늘날 유물론적 과학이 그런 것이지요. 수운 선생은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문제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둘을 같이 보아야 하고, 또 이 둘을 이원론적으로 보지 말고 통합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연과 기연, 유와 무, 정신과 물질, 종교와 과학이 둘이 아님을, 이 둘의 간극을 극복하고 이를 화해시키려고 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기연만 아는 사람은, 현상의 다름을 보고 서로 자기가 본 것이 옳다고 다투게 됩니다. 하지만 그 다름을, 근원에서 보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상적으로 다름도 알고 존중해야 하지만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그것이 근원에서는 같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원주의나 상대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다름도 알고 그것이 근원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알 때, 현상에서의 다양한 차별상들과 갈등을 화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불연 속에서 기연을 보아야 하지만, 반대로 기연 속에서 불연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구절은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의 ‘불연지대연’에서 영향을 일정 정도 받았다고 봅니다. 바로 ‘일심’을 논하는 자리인데요, 일심은 유와 무, 진과 속, 진여문과 생멸문을 화해해 낸다는 것을 논하면서 나옵니다.)
3. ‘포월의 논리’로의 해석의 가능성
김지하는 불연기연을 ‘아니다, 그렇다’의 논리로 해석하고 있는데요. 물론 이러한 해석은 수운의 원의와는 분명 거리가 있다고 봅니다. 김지하는 윤노빈의 신생철학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습니다. 윤노빈은 신생철학에서 서양의 논리가 ‘분리와 포섭’이라는 인간지배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윤노빈은 인간의 사고를 규정하는 것이 논리이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논리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형식논리는 물론이고, 변증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헤결의 변증법은 탁월한 논리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로 담아내지 못하는 세계의 동적 과정들을 담아내면서, 특히 인간의 사고의 발전법칙, 나아가 보편적 문화의 발전과정을 담고 있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윤노빈은 이 변증법이 “분단시키고 통치하라”는 고전적 지배방식을 “양분하고 종합하라”는 것으로 바꿔서, ‘이분법적 수직논리’, ‘포섭적 수직논리’를 낳았다고 비판합니다. 이는 윤노빈뿐만 아니라, 오늘날 로버트 영이나 엘렌 식수(Hélène Cixous)와 같은 포스트콜로니얼 이론가들도 변증법이 어떻게 식민주의 또는 인종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반면에 ‘아니다 그렇다’의 논리는 일종의 세포분열과 같은 생명의 진화원리입니다. 우리 인간도 정자 난자의 두 개의 세포가 분열하여 50조의 세포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안에는 진화의 모든 단계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뇌 구조에는 파충류의 뇌와 어류의 뇌를 그대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아니다 그렇다’의 논리는 마치 컴퓨터의 0과 1과도 같습니다. 이 0과 1의 무수한 조합이 오늘날 엄청난 정보를 처리하듯이, 생명의 논리와 컴퓨터의 정보처리 과정은 이전의 단계를 종합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포함하면서 분화되어 복잡화의 과정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이를 ‘포월(包越, envelopment)의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월은 포함하면서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물론 변증법도 정립과 반정립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종합 속에 반영하지만, 전체가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양되면서 종합됩니다. 반면 생명의 진화나 컴퓨터의 정보처리 과정은 앞의 단계를 그대로 끌어안고 그것을 초월해서 진화해 갑니다. 그런 점에서 ‘포월의 논리’는 변증법과는 분명 다른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불연기연을 변증법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로 해석할 수 있는가는 학문적으로 좀더 엄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김지하 시인이 ‘불연기연’을 ‘아니다 그렇다’의 논리로 해석한 것은 굉장히 기발한 해석이고, 매우 야심찬 해석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충분히 발전시켜 나갈 여지가 있는 창조적 해석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