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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2 강 - 定慧品- 3
師- 示衆云,
善知識아 本來正敎는 無有頓漸이언만
人性이 自有利鈍일새 迷人은 漸契하고
悟人은 頓修하야 自識本心하며 自見本性하야
卽無差別이니 所以로 立頓漸之假名이니라
善知識아 我此法門은
從上以來로 先立無念爲宗하고
無相爲體하고 無住爲本이니
無相者는 於相離相이요
無念者는 於念而無念이요
無住者는 人之本性이 於世間善惡好醜와
乃至寃之與親과 言語觸刺欺爭之時에
並將爲空하야 不思酬害하야 念念之中에
不思前境이니 若前念今念後念이
念念相續不斷하면 名爲繫縛이요
於諸法上에 念念不住하면 卽無縛也니
此是以無住爲本이니라
***
師(사) 示衆云(시중운)→
스님이 대중에게 보여 이르되
善知識아 本來正敎(본래정교)는→
본래 바른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無有頓漸(무유돈점)이언만→
돈과점이 없어, 한꺼번에 되거나
점점 된다고 하는 그런 말이 본래 없건만,
人性(인성)이
自有利鈍(자유이둔)일새→
사람의 성품이 저절로
영리한 사람, 둔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迷人(미인)은 漸契(돈계)하고→
미혹한 사람은 점점 세월이 가서 계합하고,
悟人(오인)은 頓修(돈수)하야→
제대로 깨달은 사람들은 돈수하야, 깨달으면
바로 한꺼번에 다 닦는다.
육조스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이야기는
頓悟頓修(돈오돈수)다 그래요.
그래서 돈오돈수가 이 전통파
禪(선)사상으로 그렇게 이야기되어지고 있습니다.
自識本心(자식본심)하며→ 스스로 본심을 알며,
自見本性(자견본성)하야→ 스스로 본성을 보아서
卽無差別(즉무차별)이니→ 곧 차별이 없음이니,
그러니까 아예 깨닫게 되면 한꺼번에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頓悟頓修.
한꺼번에 깨닫고 한꺼번에 닦는 것.
오랜 세월동안 수행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 마음속에 다 갖춰져 있는 것을 제대로만 봤다면,
사실은 그것이 맞는 것이지요.
所以(소이)로
立頓漸之假名(입돈점지가명)이니라→
그래서 돈과 점. 한꺼번에 된다.
점점 된다라고 하는 거짓 이름을 세우게 됐다.
사람의 人性(인성)에 차별이 있어서
그렇다 이것이지요.
법에는 차별이 없는데...
善知識아 我此法門(아차법문)은→ 나의 이 법문은
從上以來(종상이래)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先立無念爲宗(선립무념위종)하고→
먼저 무념위종을 세웠다. 無念으로써 으뜸을 삼는다.
無相爲體(무상위체)하고
無住爲本(무주위본)이니→
이 중요한 말 세 마디가
無念爲宗(무념위종).
無相爲體. 無住爲本. 이 세 마디인데
無念과 無相와 無住가 사실은 크게 다른 것은 없어요.
철저히 무념이 되면 相이 없게 되지요.
무상이 되고, 무상이 되면 無住. 어디에
머물거나 멈춰 서는 것이 없지요.
하나가 제대로 안 되면 다른 것도 다 안 되고,
하나가 제대로 되면 세 가지가 다 되고 그렇지요.
그러나
세분해서 설명을 하기로 하면,
무념으로 종을 삼고
무상으로써 본체를 삼으며
무주로써 근본을 삼으니,
無相者(무상자)는→ 무상이라는 것은 뭐냐?
於相離相(어상이상)이요→
相에 있어서 상을 떠난 것을 무상이라 한다.
중생은 相속에 살지요? 상으로 相속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부 상인데, 그러나
상속에 살지만 그 相에 매이지 않고,
相에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離相!=
상을 떠난 것이지요. 상을 떠났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이 相에 매이지 않는 것.
그것이 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것이 無相爲宗(무상위종)입니다.
無念者(무념자)는→ 무념이라는 것은 뭐냐?
於念에 而無念(어념이무념)이다→
모든 생각에 있어서 거기에 생각이 없는 것이다.
無住者(무주자)는→
無住라고 하는 것은, 머물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뭐냐?
人之本性(인지본성)이→ 사람의 본성이
於世間善惡好醜(어세간선악호추)와→
세간의 선. 악. 호추. 좋고 나쁜 것.
乃至寃之與親(내지원지여친)과→
원수. 그리고 친한이. 또
言語(언어)→ 언어로, 말로써
觸刺欺爭之時(촉자기쟁지시)에→
언어로 주고받고,
觸이라고 하는 것은 주고받는 거예요.
刺는 공격하는 것이지요. 말로 주고받고
공격하고
속이고 다투고 할 그러한 때에.
並將爲空(병장위공)하야→
아울러 공을 가져서, 공을 삼아서
不思酬害(불사수해)하야→
거기에 갚지 않는 것. 갚으려고 하지 않는.
갚으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것.
갚을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
念念之中(염념지중)에→ 생각생각 가운데
不思前境(불사전경)이니→
앞에 있었던 문제를 떠올리지 않는 것이니,
若前念今念後念(약전념금념후념)이→
앞의 생각. 지금생각. 또 뒤의 생각이
念念相續不斷(염념상속부단)하면→
생각생각 相續해서 끊어지지 아니하면,
名爲繫縛(명위계박)이요→ 거기에 속박이 되는 것이고,
於諸法上(어제법상)에
念念不住(염념부주)하면→
모든 법 위에서
생각이 거기에 멈추지 아니하고
머물지 아니하면, 그러면
卽無縛也(즉무박야)니→ 속박이 없는 것이다.
此是以無住爲本(차시이무주위본)이니라→
이거야말로 무주로서 근본을 삼는 것이다.
이것 좋은 말인데요.
사람이 살다보면 여기 보면,
다른 어떤 직접적인 것도 있지만,
善(선). 惡(악). 好(호). 醜(추)
세상에 좋다 나쁘다 아름답다 추하다.
그리고 원수다 친한이다. 밉다 곱다.
또 말로서 막 그냥 주고받고,
말로서 서로 속이고 찌르고 다투고 하는
그런 상황들이 사실 인간관계 아닙니까?
그 괴로움 이라고 하는 것.
고통이라고 하는 것.
아픔이라고 하는 것.
슬픔이라고 하는 것.
전부 사실은 물질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거의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것이거든요.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은
거의 인간관계에서 생기는데,
그것을 여기서 몇 가지를 들어 놨지요.
五位七十五法(오위칠십오법)이라고 하는
만상을, 세상만사를 분류 하는데
불교는 아주 세분을 잘해요.
五位七十五法(오위칠십오법).
五位百法(오위백법)
유식이나 구사 같은 데서는,
이 세상의 현상을 물질계와 우리 정신계.
이것을 100가지로 분류를 해요. 100가지로...
그래서 남을 속이는 문제.
또 속이고 속였는데 덮어 놓는 것.
들어내는 것. 아첨하는 것.
별별 마음의 어떤 작용들을
낱낱이 파내서 분류를 해 놨는데,
어쨌거나 많은 그런, 인간이
저질러 놓은 생각들.
身(신) · 口(구) · 意(의).
3업을 통해서 짓는 행동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가 고통을
받게되고 하는데요. 그것을 여기의
이야기로는 ‘모두 가져서 空을 삼아라.’
並將爲空(병장위공).
말로서 속이고 찌르고 다투고 할 때,
그것을 아울러서 공을 삼아라.
그것을 어찌해서 空을 삼을 수 있느냐?
당장에 모함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욕설을 하고, 사기를 치고 그러는데,
어떻게 그것을 空으로 여길 수 있느냐?
한 생각 좀 돌이켜 보면
空으로 생각할 수가 있어요. 사실은
모든 것이 一切皆空(일체개공)이거든요.
여기의
육조스님 법문은 그겁니다.
그런 모든 현상들. 인관관계에서 벌어지는
그런 불미스러운 것들. 불미스러운 것들 때문에
고통이 오니까, 그런 불미스러운 것들을
당장 눈앞에서 공으로 볼 줄 알아라. 이것이지요.
‘공으로 볼 줄 알아라.’
이것 참, 어려운 注文(주문)이지요.
아주 지극히 어려운 注文인데,
그것도 어떻게 생각해 보면, 바로 앞에서는
그냥 같이 화를 내고, 싸우고 그냥 야단을,
정말 큰일 날 일 같이 그렇게 우리가 화를 내고
덤벼들고, 시시비비를 하고 다투고 그렇게 되지요.
그랬다손 치더라도 어떻습니까?
그날 밤이 지나고, 그 이틀이 지나고
또 한 3일쯤 지나면 없어요. 사실은...
화를 내게 한일도 없고,
화를 냈던 내 자신의 그 화도 없고,
1년 2년 지나면 더 그래요. 아무 것도 없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울 정도고
우스운 일이지요.
내가 거기에 그렇게 끄달렸더라고 하는 사실이,
이미 사실은 부끄러울 정도지요.
그렇게 허망하게 없어져 버려요.
마치 뭐와 같은가 하니
앞마당에 빛이 들어오면 환한 빛이 있고,
해가 지거나 그림자가 생기면 그림자가 오고,
수많은 빛과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가는
그거하고 같아요. 인생의 삶의 마당에,
삶의 앞마당에도 온갖 영광과 오욕과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고 부끄럽고,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즐겁고 이런
온갖 빛과 그림자가, 우리 인생의 앞마당을
수없이. 수없이 하루에도 여러 수십 가지가
지나가는 겁니다. 그 지나가고 나면 뭡니까?
앞마당은 항상 텅텅 비어 있어요.
그거는 우리가 지금 인생을
몇 십 년 을 살아오면서,
인생을 길게 살았든 짧게 살았든
어떻게 살았든 간에, 남는 것은 뭡니까?
滿船空載月名器(만선공재월명기)입니 다.
손에는 그냥 빈주먹만 남는 것이지요.
아무 것도 없어요. 없는 것이 남는 것입니다.
그 없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우리는
딱 당면 했을 때는 그만 정신없이
그냥 넘어가는 것이지요.
경계를 따라서 정신을 잃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 모든 의식. 또 아침저녁 예불.
그저 자나 깨나 불교하면 반야심경이 의례히
따라다니는 이유를,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반야심경은 사실은 불교의 최고 경전입니다.
그 2~3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그런 짧은 경이면서도,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핵심이고,
우리 중생들의 모든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처방전이지요.
반야심경같이 좋은 처방전은 이 세상에 없어요.
불교는
離苦得樂(이고득락) 아닙니까?
중생의 고통을 떠나게 하고,
어떤 편안한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라고요. 그럼 거기에 아주 명쾌한
처방전이 있어야 되는데 그 처방전!
사람 따라서 팔만대장경을 다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전 한권도 제대로
못 보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 다양한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 했을 때,
어쨌든 제일 간단명료하면서도
비상한 처방전을 부처님이 내놔야 된다고요.
여유가 없잖아요.
사람이 사는데 여유가 없으니까,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럼 최상의 처방전을 내놔야 되는데
그건 뭔고 하니 반야심경이지요.
반야심경이상 가는 것이 없습니다.
이상 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침저녁 예불이나 뭘 하든지 무조건
반야심경이 따르게 돼있어요.
불교는
뭘 해도 반야심경 안 외우면,
행사가 안 되잖아요.
일단 반야심경부터 외워놓고 봅니다.
그럼 부처님의 이름으로 모였으면
무슨 이유로 모였든 간에, 깨달음이 목표예요.
깨달음이 목표라고요. 그럼 깨닫게 하고나서
우리가 뭔가, 생일잔치를 하던지,
초파일잔치를 하던지 하자이겁니다.
그럼 깨닫게 하는 데는 뭐냐? 반야심경이다.
이겁니다. 그래 반야심경 같은 법문이 없다고요.
여기도 보면 ‘空으로 삼아라.’ 했잖아요.
並將爲空(병장위공)하라.
모두 가져서 인간의 어떤
그 싸우고 지지고 볶고 하는
그런 가슴속에 아픔을 남기는 상처들을.
이것들을 가져서 ‘空으로 삼아라.’
照見五蘊皆空(조견오온개공)하면
度一切苦厄(도일체고액)한다.
그것이 반야심경의 아주 핵입니다.
모든 존재를 정신세계와 이 물질세계.
몸과 마음을 다 空한 것으로 비추어 본다면
일체 고통이, 일체문제 일체어려움이
다 해결 돼버린다.
一切苦厄. 모든 고통이 다 해결 돼버린다.
그것이 큰 줄기예요.
그런 대 전제를 딱 세워놓고,
그 다음엔 뭐 오온이 뭡니까?
色 · 受 · 想 · 行 · 識.
몸과 마음이거든요.
물질과 정신. 그렇다고요.
거기에서 벌어지는 것이지요.
색즉시공 공즉시색 · 수상행식 역부여시.
그래 그것도 또 밑에 부연하면,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전부 無다 空이다. 무다 공이다.
한결같이 그냥 무다 공이다 예요.
온통 그냥 무다 공이다. 라고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반야심경의 가르침인데요.
결국은 그것이 우리가 옳다 그르다,
분노와 어떤 기쁨과 환희. 이런 모든
것이 그대로 좀 있으면, 하루만 좀 있어줘도,
거 붙들고 늘어지지, 부처님이라도
그거 아마 어지간히 그거 붙들고 늘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하루 갑니까? 하루 안 갑니다.
하루 가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단 몇 분. 단 몇 분뿐이거든요.
그렇게 허망한 것인데, 그야말로 여름에
소나기구름 지나갈 때,
얼마나 빨리 지나갑니까?
마당에 그림자 보면요. 퍼뜩퍼뜩 지나가요.
금방금방 지나가잖아요. 빛이 됐든 그림자가 됐든,
기쁨이 됐든 슬픔이 됐든, 영광이 됐든 오욕이 됐든
그냥 지나가는 그런 그림자예요. 그러니
부처님이 그런 사실을 환히 꿰뚫어 보고,
또 육조스님 같은 이도 환히 꿰뚫어 보고서,
여기서 인간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말로,
또 찌르고 다투고 속이고 善. 惡. 好. 醜.
이런 모든 문제들. 여기는 열거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 말속에 다 포함됐다고 봐야지요.
인간이 겪고 있는 온갖 희로애락이...
온갖 희로애락이 이 속에 다 포함되었는데
그런 희로애락은,
결국은 얼마 아니 가서 공으로 돌아가니
처음부터 공으로 보자. 이거지요.
처음부터 공으로 보자.
반야심경의 주된 내용이고
여기 육조스님 말씀의 주된 가르침도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어디에 머물러 있을 데가 어디 있느냐?
이거예요. 사실은 머물러 있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머물러 있으리라고
생각을 하니까,
떠나는 것을.
변하는 것을
그렇게 못 떠나게,
못 변하게,
변하지 않도록
내 마음에 거슬리지 않도록
그렇게 악을. 악을 쓰는 것이지요.
여기 보면
此是以無住爲本(차시이무주위본)이니라.→
이것이 머물지 않는 것으로서 근본을 삼는다.
불교가 전부 이런 가르침으로 하면,
그러면 세상이 어지로워서 어떻게 되겠느냐?
전부 지 할대로 다 하고, 오늘부터 집에도
안 들어가고, 각자 알아서 지 하고 싶은 대로
다 그냥하고, 아무데도 머물 데도 없고,
믿을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고, 다 공이고 무인데...
그렇게 알고 사는 거예요.
그렇게 알고...
그렇게 알고 정확하게 출근하고
정확하게 퇴근하고,
절대 옆길 돌아보지 않고
집에 돌아가고, 그렇게 알고 하라는 거예요.
그것이 中道(중도)예요.
불교는 그것입니다.
지 멋대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알고
정확하게 도를 지켜서, 길을 지켜서 질서를
지켜서 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중도입니다.
마음대로 하는 것은 이미 치우친 것이지요.
空 에만 치우친 것이지요.
그래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랬잖아요.
물질이 곧 공이고, 공이 곧 물질이다.
그럼 물질과 공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라는 겁니다.
치우치지 않고 보라고요.
질서와 자유를 치우치지 말고 보라는 겁니다.
한껏 마음의 자유를 갖되 질서를 지키고,
질서를 지키면서 마음의 자유를 갖고,
속박되지 않고 자유를 갖는 것이,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불교의 이론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가르침이 위대한 것이고,
그래서 어쨌든 불교라는 이름 밑에서는
무조건, 깨달음을 우선으로 하니까,
깨달음의 가르침을 한편 읽고 보자 이겁니다.
반야심경이 참 좋은 경전입니다.
그 이상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육조스님 법문에도 가만히 살펴보면,
바로 이 대목에는 無念. 無相. 無住.
이것이 전부 반야심경의 정신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조금 빨리 해석을 했는데요.
그 대목을 좀 잘 살펴보면
제가 부연 설명한 그런 내용이 그대로
다 담겨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