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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9 강 - 機緣品- 3
達이 聞偈悔謝曰,
而今而後로 當謙恭一切하리이다
弟子- 誦法華經호되 未解經義하야 心常有疑하오니
和尙은 智慧廣大하시니 願略說經中義理하소서
師曰,
法達이 法則甚達이나 汝心은 不達이로다
經本無疑어늘 汝心이 自疑니
汝念此經을 以何爲宗고
達이 曰,
學人의 根性이 暗鈍하야 從來로
但依文誦經이어니 豈知宗趣리이까
師曰,
吾不識文字하니 汝試取經하야 誦之一徧하라
吾當爲汝解說하리라 法達이 卽高聲念經하야
至譬喩品이어늘
師- 曰,
止하라 此經은 元來以因緣出世로 爲宗이니
縱說多種譬喩라도 亦無越於此니라 何者因緣고
經에 云諸佛世尊이 唯以一大事因緣으로
出現於世라하시니 一大事者는 佛之知見也라
世人이 外迷着相하고 內迷著空이어니와
若能於相離相하고 於空離空하면 卽是內外不迷니
若悟此法하야 一念心開하면 是爲開佛知見이니라
***
達(달)이 聞偈悔謝曰(문게회사왈)→
법달이라는 스님이 게송을 듣고 참회를 하고,
뉘우치고 사죄를 해서 가로대,
而今而後(이금이후)로→ 지금부터 이후로는
當謙恭一切(당겸공일체)하리이다→
마땅히 일체사람들에게 겸손하고 공경하겠습니다.
큰 스님뿐만 아니고 일체사람들에게 제가 겸손하고
공경하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弟子(제자)가
誦法華經(송법화경)호되→ 법화경을 외웠으되
未解經義(미해경의)하야→
경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心常有疑(심상유의)하오니→
마음이 항상 의심이 있다는겁니다. 마음에요.
和尙(화상)은
智慧(지혜)가
廣大(광대)하시니→ 지혜가 넓고 크시니,
願略說經中義理(원략설경중의리)하소서→
원컨대 경 가운데 있는 義理를,
경의 속뜻을 간략하게나마 좀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렇게 육조스님에게 부탁을 하지요. 그러니까
師曰(사왈)→ 육조스님이 말씀하시기를,
法達(법달)이
法則甚達(법즉심달)이나→
법달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졌는데,
법은 깊이 통달했으나
汝心(여심)은
不達(부달)이로다→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했다.
“法達”이라고 하는 말만 가지고는
법을 잘 통달했다는 것이 되니까요.
대개 佛名은, 스님들의 불명이나
거사 분들의 불명이나 또 보살들의 불명이나
모두가 이 법달의 이름처럼, 불교에 있어서의
자기의 이상을 대개 이렇게 불명으로 만듭니다.
여기서 법달이라고 해서 앞으로
“법을 통달하고 싶다.”는 뜻으로...
또 스승이 이름을 줄 때는 앞으로
“법을 통달해라.”
라고 하는, 또 그것을 이상으로 삼고
“수행하라.” 라고 하는
그런 뜻에서 법달이라고 해도 돼요.
그래서 법달이라고 하는 말은 아주 거의
완벽한 이름이라고요.
예를 들어서
“무비”
하면 시방세계역무비 아녜요?
天上天下無如佛(천상천하무여불).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十方世界亦無比(시방세계역무비)
더 이상 더 덮을 수 없는 이름입니다.
보현이니 문수니, 마찬가지지요.
전부 보현보살이고 문수보살을 딴 것이지요.
그렇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니까 앞으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고, 또 그러한
보살의 삶을 내 이상으로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 담겨있거든요.
불명은 대개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주
큰 이름을 가져도 상관없어요. 그것이
불자들의 이상이니까요. 그래서
법달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을 해석하면 법은 깊이 통달했다
이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캄캄해요.
汝心(여심)은
不達(부달)이로다→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했다.
마음이 캄캄할 때 캄캄하더라도,
이름이라도 좋은 것을 가져야지요.
經本無疑(경본무의)어늘→
경은 본래 의심할 것이 없거늘
汝心이 自疑(자의)니→
너의 마음이 저절로 스스로
그렇게 의심하는 것이니,
汝念此經(여념차경)을→ 그대가 외우는 이 경을
以何爲宗(이하위종)고→
무엇으로서 으뜸을 삼느냐?
根本宗旨(근본종지).
이 宗자가 참 중요하지요. 우리
“종교”할 때도 이 字를 쓰는데요.
으뜸.
根本趣旨(근본취지). 바로 이야기하면
宗旨.
근본취지를 “宗旨(종지)”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이 법화경은 무엇으로 종지를 삼느냐?
그렇게 물어요. 육조스님은 나중에는 경도
많이 보시고 글도 통달하셨지만, 초기에는
글도 몰랐고 경도 본적이 없으니까
“네가 한번 읽어봐라.”
여기도 지금 “법화경 한번 읽어봐라.”
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達(달)이 曰(왈),
學人(학인)의
根性(근성)이
暗鈍(암둔)하야→ 내 근기가 암둔해서,
從來(종래)로
但依文誦經(단의문송경)이어니→
다만 글을 의지해서 경을 외웠을 뿐이거니
豈知宗趣(기지종취)리이까→
어찌 종취를 알겠습니까?
종지나 종취나 근본 되는 취지라는
그런 뜻입니다.
근본 되는 취지를 어찌 알겠습니까?
師曰(사왈)→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吾不識文字(오불식문자)하니→ 나는 문자를 모르니
汝試取經(여시취경)하야→
그대는 시험 삼아 경을 가지고
誦之一徧(송지일편)하라→
어디 한번 일편 외워봐라.
나는 글을 모르니까 네가 읽으면 말을 듣고
내가 거기에 대해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
하겠다 이것이지요.
吾當爲汝解說(오당위여해설)하리라→
내가 마땅히 그대를 위해서 해설해 주겠다.
法達(법달)이
卽高聲念經(즉고성염경)하야→
고성으로 경을 외워나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처음부터 여시아문 해가지고
서품에서부터 줄줄 외워서
비유품까지 이르렀어요.
서품 · 방편품. 그다음 비유품이지요?
상당이 많이 읽은 겁니다.
至譬喩品(지비유품)이어늘→ 비유품까지 이르거늘,
師 曰, 止(사 왈, 지)하라→ 그 쯤 해라.
此經(차경)은
元來以因緣出世(원래이인연출세)로
爲宗(위종)을 삼는다.→
이 경은 이 인연출세로서 근본을 삼는다.
딱. 그러니까 아는 거에요.
一大事人緣(일대사인연)이라고 하는 것이
방편품에 나오거든요.
두 번째품에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취지를
밝히는 것이 방편품 이라고요.
법화경은 방편품 하고 여래수량품
하고 그 두 품을 아주 중요한 품으로
옛날부터 그렇게 칩니다.
인연출세로서, 인연이 있어서,
이러이러한 인연으로 출세했다는
것으로서 으뜸을 삼는다.
縱說多種譬喩(종설다종비유)라도→
비록 여러 가지. 다종다양한 비유를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亦無越於此(역무월어차)라→
또한 이것을 넘어서지 않는다 이겁니다.
여기에서 인연출세 라는 그 취지에서
넘어가지 않는다.
何者因緣(하자인연)고→
무엇이 그런 인연이냐?
經(경)에 云(운)→ 경에 말하기를
諸佛世尊(제불세존)이
唯以一大事因緣(유이일대사인연)으로
出現於世(출현어세)라
이것이 유명한 말이거든요.
諸佛世尊이 오직 일대사인연.
큰일. 하나의 큰일 인연으로서 세상에 出現했다.
하나의 큰일이다. 그것을 인연으로 해서...
“큰일을 인연으로 해서”
이렇게 해석해도 좋아요.
그러면 이해하기는 더 쉽습니다.
하나의 큰일을 인연으로서...
그것 때문에...
인연이라는 것은 때문이라고 해도 좋고요.
하나의 큰일 때문에 부처님은 세상에 出現했다.
※
一大事者(일대사자)는→
그 一大事 라고 하는 것은 뭐냐?
佛之知見也(불지지견야)라→
부처님의 知見. = 부처님의 지혜라는 뜻입니다. =
부처님의 所見(소견). = 부처님의 智慧(지혜).
그 가장 큰일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다 이것이지요. 그리고 부처님은
그것 하나 때문에, 이 세상에 出現했다.
世人(세인)이
外迷着相(외미착상)하고→
밖으로 미혹해가지고서
상. 외상. 밖에 나타나 보이는 그런 어떤
현상에만 집착을 하고,
內迷著空(내미착공)이어니→
안으로는 미혹해서 空에 집착한다.
밖으로 미혹한 것은 상에 집착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그것을 기준으로 삼지요.
대개 중생들의 삶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일단은 판단하니까요.
그것이 미혹이라는 것이지요.
또 내미착공이예요.
안으로 미혹한 점은 무엇인가 하니,
안으로 살펴보면 아무것도 없거든요.
눈에 보이는 현상뿐이고 그 외에는 없으니까
空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래 空에 또 집착을 한다.
若能於相離相(약능어상이상)하고→
만약에 능히 相에서 相을 떠나고,
於空離空(어공이공)하면→
空에서 空을 떠나면,
卽是內外不迷(즉시내외불미)니→
안과 밖으로 미혹하지 아니하다.
이것이 할 수없이
中道(중도)라는 말을 또 써야 되는데요.
이 짧은 말이라도
상당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그런
대목이 여기에 있습니다.
相에서 相을 떠나고
空에서 空을 떠난다.
이것이 불교의 제대로 된
眼目(안목)내지 제대로 된
所見은 그런 눈앞의 상을 상으로 보면서,
또 상을 떠난 입장으로 봐야 되고,
또 안으로는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것도 없는데서 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떠나서 볼 줄 알아야 된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떠난다.”
고 하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있다.”
는 말이지요.
그래
眞空妙有(진공묘유)가 됩니다.
참으로 空한데는 아주 미묘하게
그것이 있는 겁니다.
空하다고 空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가득 있다 이것이지요.
또 相이라고 해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相은 또 어떻게 보면 허망한 것이지요.
그래 離相입니다. 於相離相입니다.
相에서 相을 떠나보고,
空에서 空을 떠나 보고. 그래서
“相에서 空을 보고
空에서 有로 본다.”
이렇게 이해하면 더 쉽지요.
“있는데서 없는 것으로 보고,
없는데서 있는 것으로 본다.”
그렇게 표현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중도적인 안목이라고 그럽니다.
中道眼目(중도안목)! 없다고 해서
그냥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없는 데서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데서도 없는 것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그것이 좋은 안목이지요.
그것이 불교가
願(원)하는 가장 바람직한 눈이지요.
가장 바람직한 안목입니다.
없는데서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서 없는 것으로 볼 줄 아는 것.
※
그것이 여기는
於相에 離相하고,
於空에 離空.
공에서 공을 떠나고,
상에서 상을 떠나라는 말이,
없는데서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서 없는 것으로 보고...
우리의 과학적인 상식으로도,
과학의 大家(대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텅 빈
空間(공간).
肉眼(육안)으로 안 보인다고 해서
이 공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지요.
별별 원소가 이 공간에 가득 있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거기서 뽑아낼 수가 있고...
또 “있다.”
고 하는 것들도 뭐가 됐든 지간에,
건물이 됐든지, 아주 단단한 돌덩이가
됐다하더라도, 그것을 보다 더 다른
차원으로 보면 그것이 텅 비어 있거든요.
예를 들어서 돌이라 하더라도
돌과 돌의 그 입자 사이에 공간이라는 것은,
얼마나 넓은지 모릅니다. 다른 안목으로
보면 어마어마하게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것을 또 있다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모든 존재라고 하는 것이 전부 그렇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중에
허망해서, 깨어져서 가루로 변하고
가루가 공중에 흩어져 없어져서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는 것도 본래 없기 때문에,
거짓 인연으로 잠깐 그렇게 모양을
갖추어서 잠깐 있기 때문에 그래서
깨어져서 없어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 컵도 깨어져서 가루로 분해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이것이
그렇게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없으니까
없어질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근본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깨어져서
없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보기는
본래 없는 것이 아니면 깨어져서 없어질
수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잘 쓰는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없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맞는 말입니다. 세속적인 논리로서는
우스운 소리 같지만, 그 표현이라야
불교에서 본, 어떤 깨달음의 안목에서
본 현실. 실상의 설명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외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육조스님은 특히 중도를 아주 어떤
조사스님들 보다도 많이 드러내는
그런 말을 많이 하십니다.
中道(중도)! 중도라고 하는 것은
相에서 相을 떠나고
空에서 空을 떠난다.
相에서 相아닌 것으로
空을 보고.
空에서 有를 본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중도적인 안목입니다.
내용이 그래서
雙遮雙照(쌍차쌍조).
遮照同時(차조동시)
해서,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존재하고,
또 긍정 속에 부정이 있고
부정 속에 긍정이 있다.
그것은 우리 생활로 들어와도 똑 같아요.
생활에 들어와서도 모든 것을
그런 안목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될 수가 있습니다.
卽是內外不迷(즉시내외불미)니→
안과 밖으로 미혹하지 않는다.
若悟此法(약오차법)하야→
만약에 이 중도의 도리를 깨달아서
一念心開(일념심개)하면→ 일념심이 열리면,
是爲開佛知見(시위개불지견)이니라→
이것이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 된다.
부처님의 지견을. 부처님의 지혜를
여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知見! 부처님의 지혜라는 것은
중도적인 안목을 갖추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렇게 해석이 되어있습니다.
중도적인 안목을 갖추는 것이다.
中道頌(중도송)만 추려놓은
영명연수 선사의 글이 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우리 신행생활에
있어서 중도적인 생활지침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내용 이예요. 하나하나
다 열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의 예로서,
羅列幻化供具(나열환화공구).
부처님 앞에 꽃도 올리고, 초도 올리고,
향도 올리고, 그 외에 음식물도 올리고,
온갖 공양구를 올린다.
그 문제를 중도적인 안목에서,
이 佛知見(불지견)의 안목에서 어떻게
우리가 봐야 되느냐?
다른 것. 육바라밀도 전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 하나만 가지고
우리가 보면, 이 중도의 생활화라고나 할까요?
생활화가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羅列한다.” 펼쳐놓는다. 무엇을?
幻化供具라. 供具라는 것은 공양구거든요.
부처님한테 올리는 일체
供養具(공양구)를 전부 공구라고 합니다.
그것이 돈이 됐든 쌀이 됐든 초가 됐든
향이 됐든 꽃이 됐든 음식이 됐든 과일이 됐든,
그것을 供具라고 하는데, 그것을 불교적인
하나의 안목에서, 어떤 안목에서 보면
환화공구예요. 허망한 겁니다.
幻化라는 것은 환상. 거짓된 것.
환영과 같은 그런 공양구입니다.
예를 들어서
꽃을 올렸다면 꽃을 부처님이 봅니까?
음식을 올렸다면 음식을 부처님이 먹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금방 변해버릴 물건이고요.
따뜻한 밥을 올렸다하더라도 금방 식고요.
좀 더 놔두면 쉬어버리고요.
버리게 되고 못 먹게 되고요. 이런 공양구.
우리가 올리는 공양구가 다 그런 것입니다.
공양구 자체도 그렇고요. 꽃을 올려도 금방
시들어버리고, 공양구 자체도 그렇고 또
올린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이 먹나요? 보나요?
전혀 그런 것 하고 상관없거든요.
그런 공양구를 우리가 올리는 것입니다.
幻化供具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 그렇다고
“그런 것 부처님한테 올릴 필요가 없겠네”
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치우친 생각이라는 것이지요. '환화공구인데,
허망한 공양구인데 그것 뭐하려고 올리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치우친 생각이다.
그것은 중도적인 생각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환화공구와 같은 줄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열심히 올려야 돼요. 많이 올려야 됩니다.
나열해야 된다 이겁니다. 부처님한테
그냥 올릴 수 있는데 까지 올리는 그것이
중도적인 안목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부처님이 잡술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을 안 하지만서도 또 올려야하는
이치가 분명히 있습니다.
올려야하는 이치가 있다고요.
그것이 중도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영명연수 선사는 중도게송을
쭉~ 소개를 하면서 우리가 부처님 앞에
공양구를 올리는 문제...
다른 것 많아요.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불사하는 것. 절을 짓고 탑을 쌓는
그런 문제까지 저런 식으로 짤막짤막하게
다 이야기해 놨어요.
공양구를 올리는 문제에 있어서도
“공양구는 환화공양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려야 된다.”
부처님이 자시는 것도 아니고 공양구도
금방 버려야할 그런 공양구로 돌아가지만
그것도 열심히 올리는 것이, 말하자면
당연히 그렇게 올려야할 이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중도적인 안목이라는
것입니다.
“그 뭐 먹지도 않고 변해버릴 것. 뭐 하려고 올리나?”
하는 것은 치우친 소견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有에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有에 떨어져 있다.”
그 어떤 현실에, 현실에만 떨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모든 것이 “空하다.”고만 생각해버리면
그것은 또 공에 치우친 것이고요. 열심히
올려야 된다고만 생각하는 그것은
유에 떨어진 것이고,
공하다고만 생각하면 공에 떨어진 것인데,
그래 공하다고만 하는 것도 아니고,
올려야 된다고만 하는 것도 아닌
그런 두 가지. 긍정과 부정을 함께 수용하고
있는 것. 이것을
中道正見이라고 그래요. 중도정견!
불교안목인
佛知見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이 바로
중도정견을 위해서지요.
부처님의 지혜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래요. 제가
羅列幻化供具.
이것을 이야기하면서 선방에서 흔히 있는
중도적인 안목에서 부처님한테 공양구 올리는
실 예를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늘 있는 일이예요.
그전에 오대산에서 우리가 보면, 산중
선방생활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
제일 진미가 뭔가 하니 찹쌀부꾸미 라고,
찹쌀가루를 기름에다가 튀겨먹는 거예요.
요즘 길거리에 가면 500워짜리 눌러서
파는 빵 같은 것, 그 보다도 맛은 좀 못하지요.
그래도 내용은 그것이 좋지요. 그것을
최고로 치거든요. 그런데 늘 먹을 수는 없고
잘 먹어야 삭발 목욕일 날 한 달에 두 번 정도,
한 사람한테 두 개 정도나 돌아가면
잘 돌아가는데, 어쨌든...
그것을 구우면 냄새가 진동해서 도저히 못 참거든요.
그런데 그거 아무도 손 안 댄다고요. 한 접시가 될
정도까지 참고 구워가지고는 얼른 부처님한테 가서
올리는데요. 올려서 큰절 세 번하는데 절 한 배하는
시간보다 더 빨리 하는 겁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절 한 번하는 것보다 더 빨리 세 배를 하는 겁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번개같이 해요. 죽비 다 쳐가면서 해요. 여럿이
안 가요. 부전만 보낸다고요. 여럿이 가면 시간
걸리니까요.(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렇게 형식적으로 올립니다.
그렇게 형식적으로 올려서 형식적으로 절하고,
미친 사람 같이 절하고 내려와서 얼른 식기 전에
먹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짓 왜하느냐고 할 수가 있는데... '
그런 짓을 왜하느냐?'
'거 안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느냐?'
라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치우친 소견입니다. 그렇게라도
올리고 절하고 해서 내려먹는 그것이...
그런 이치가 분명히 있는 겁니다.
그 幻化와 같은 供具인데도 羅列해야 됩니다.
나열하는 도리가 있다고요. 분명히...
그것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소견입니다.
허망하다고 하는데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부처님이 자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아니에요. 그것도 아니라고요. 꼭 부처님이
자신다고 올리는 것도 아니라고요. 안 자시는
줄 알면서 올리고 또 올리되 안 자시는 줄 잘
알고... 그래서 식기 전에 얼른 내려다 먹고...
그것이 중도적인 소견입니다.
중도적인 소견!
생활에다 우리 중도를 풀자면 그래요.
성철스님이 평생을 중도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생활과 연관 시켜서 하신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래 제가 조금 건방스런 소리로, “성철스님은
중도를 모른다.” 이렇게 간혹 뒷방에서 말을
한다고요. 왜냐?
생활과 연관 시켜서 이야기안하고, 항상 경전과
특히 이 육조단경을 많이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늘 멍멍 한 겁니다. 도대체 ‘이것이 뭔 소린가?’...
당신은 아시겠지만...
생활과 연관을 안 시켜서 이야기하니까...
그런데 옛날스님은
羅列幻化供具라고 저렇게 해놨다고요.
또 무슨
大作夢中佛事(대작몽중불사) 그래놨어요.
꿈 가운데 불사를 크게 일으키라. 해놨어요.
불사라는 것이 夢中佛事예요. 꿈속에서
하는 불사예요. 꿈속에서 하는 그것이 무슨
佛事냐? 하지만,
그런 불사를 大作해라. 크게 진행시켜야 된다.
그러면서
夢中佛事인줄 알아라. 꿈속의 불사인 줄 알고
크게 일으켜야 된다. 그래야 그것이 치우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옛날스님인
영명스님은 아주 잘 해놨습니다.
그리고 또 관세음보살을 가지고
흔히 이야기할 때도,
無相(무상).
鑒無身而具相(감무신이구상)이라.
無身을 알면서 相을 갖춘다. 그리 됐어요.
관세음보살 같은 이는 누구보다도
空 도리를 잘 아시면서, 가장 비싼
영락구슬을 걸고, 가장 비싼 옷을 입고,
가장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이겁니다.
육신이 허망하다는 것을 제일 잘 아시는
분이 어째서 그렇게 꾸미고 있느냐?
허망한 줄을 알수록 멋을 낼 줄 알아야
되고, 멋을 내면서 허망한 줄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중도적인 소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도 보면 그 구절 속에 보면
鑒無身而具相이라.
無身을 잘 알면서 相을 갖춘다.
모양새를 잘 갖춘다.
그것의 대표가 관세음보살이다 이것이지요.
자기가 그렇게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고 해서
그 아름다운 모습에 집착해서
그저 그 아름다운 모습만 계속 지키려고
하거나 그런 적은 없다 이겁니다.
공한 줄을 뻔히 안다. 무상한 줄을 알고,
몸이 본래 없는 도리까지도 잘 안다.
그런 이야기도 있고 그래요.
羅列幻化供具라고 하는 것들도,
우리 현실과 연관 시켜서
중도를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그것이 말하자면 相에서 相을 떠나고
空에서 空을 떠난다는 것이
바로 나열환화공구라고요.
相에서 相을 떠난다.
鑒無身而具相이라.
無身.
몸이 없는 도리를 잘 알지만,
그러면서 뭐라고요?
相을 잘 꾸민다 이겁니다.
관세음보살같이 相을 잘 꾸민다.
그것은 空에서 空을 떠난 것이지요.
또 相에서 相을 떠난다고 하는 것을
바꾸어 말하자면, 그렇게 잘 꾸미지만
몸이 공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겁니다.
관자재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도 일체고액 아닙니까?
五蘊(오온)이 皆空(개공)한 것을
照見(조견)해가지고
一切(일체)문제를 해결한다.
그것이 관자재보살의 수행이라고요.
수행법이라고요.
그것이
於相離相(어상이상)입니다.
상당히 불교의 깊은 도리.
불교의 핵심은 중도에 있다.
그래 성철스님은 아함부 경전에서부터
화엄경 반야부 무슨 경, 법화경할 것 없이
전부 중도로서 일관을 해서
100일 법문을 하셨고,
평생을 중도 이야기를 하셨지요.
그것이 그 스님의 안목으로 볼 때,
불교의 이치는 중도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시면서 이 육조단경을 자주 말씀하셨어요.
육조단경만
또 강의를 한번 하신 적이 있습니다.
100일 법문 말고 두 번째 겨울철에는
첫 철이 여름철이고, 그 다음에는
첫 철이 겨울철이고,
그 다음 두 번째 겨울철에는
육조단경을 가지고 하셨고,
첫 겨울철에는 100일 법문을 하셨고 그랬지요.
그래가지고 시종일관 중도를 말씀하셨어요.
두 번째 겨울철. 육조단경 강의를 할 때는
제가 마침 거기서, 해인사선방에서 지낼 때가
되어서 육조단경을 들은 적이 있고 그래요.
아무튼 시종일관 중도 이야기이고,
於相離相. 於空離空. ←
이런 것이
中道理를 잘 드러낸 구절입니다.
그래서
內外不迷(즉시내외불미)라.→
있는 데도 없는 데도 미혹하지 않는다.
치우치지 않는다.
若悟此法(약오차법)하야→
만약에 이리한 도리,
이 중도의 도리를 깨달을 것 같으면,
一念心開(일념심개)해서→
일념심이 열릴 것 같으면,
是爲開佛知見(시위개불지견)이니라→
佛知見을 연 것이다.
불지견을 여는 문제에 대해서
쭉 이야기를 해나가고, 그래서
법화경에 대한 도리를 아주 깊이 설명합니다.
이 중도에 대해서 불교수행을 다방면으로,
또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면에
중도적인 안목으로, 저는 무장 이라는 말을
쓰는데, 중도 안목으로 무장이 되어있으면,
어지간히 불교적인 안목이 갖추어 졌다고
할 수가 있고, 그리되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거예요. 치우치는 것을 病(병)이라고 합니다.
있다는데도 치우치지 않고,
없다는데도 치우치지 않고,
그거 어떻게 들으면 무슨 자기 주장도 없고
아무런 사상도 없고 그런 것 같지만,
그것이 사상 이예요.
그것이 불교사상입니다. 치우치지 않는 것.
그래서 결국은 다 수용하는 거예요.
有도 수용하고 無도 수용하고요.
그리고 부처님한테 올린다고 하는 것도 수용하고,
허망하다고 하는 내용도 수용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몸을 함부로 생각하는 것은,
허무주의자라고나 할까요?
'허망하다.' 라고만 생각하는
허무주의자의 병에 걸려있다면, 또
“이 몸뿐이다.”
눈에 보이는 것.
“이 몸뿐이지 그 이상 뭐 있느냐?”
라고 이렇게 하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현실주의자. 아주 추한 현실주의자가 되고 마는
그런 것이지요. 그런 현실주의자도 허무주의자도
아닌 모든 입장을 다 포용하고 수용하는 입장.
그것이 결국은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요.
부처님은 왕궁에서 향락생활도 했고,
고행도 했지요. 그래 결국은 향락생활도
인간의 바람직한 삶은 아니고, 고행도
인간의 바람직한 삶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중도를 깨달았노라.”
그것이 중도선언. 첫 법문이 5비구를 모아놓고
그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아직 고행하고 있는데,
고행도 그것이 바람직한 길은 아니야.
나는 향락의 생활도 고행생활도 다 해봤다.
그래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 중도적인 길을
깨달았는데, 그 무엇도 치우치면 병이다.”
사실은 그 오해 풀어주려고 간 겁니다.
5비구를 처음 만난 것이 그 사람들은
아직도 내가 고행을 버렸다고 해서
나를 배신자라고 오해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 오해 풀어주는 것이,
6년간 동거 동락 하면서 같이 살아온
같은 수행자들의 오해를 풀어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한 문제예요. 그래서
깨닫고 나서 그 사람들을 찾아간 것이지요.
그것이 제일로 급한 문제 아니겠어요?
그 사람들에게 오해 풀어주는 것이 뭔가 하면
결국은,
“고행도 아니고,
또 향락의 생활도 아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수용하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아니하는 그 길이 있다.”
고 하는 바로 그 가르침이지요.
그래서 맨 처음 설했다고 하는 것이
[初轉法輪經(초전법륜경)]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나는 중도를 깨달았노라.”
부처님은 깨닫고 나서
中道大宣言(중도대선언)이라!
는 표현을 합니다. 중도선언이라고 하는...
부처님은 평생을 중도를 펴면서.
중도사상을 펴면서 사셨다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이 육조단경에도
저 뒤에 나오는 36對(대)라고 해서 전부
상대적인 이야기를 쭉 많이 합니다.
결국은 뭔가 하니 중도를...
유도 무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그런
그 중도적인 견해를 거기서 드러내려고
하는 그런 내용이지요.
육조단경이
거기에 상당히 많이 역점을 두고 있어서,
앞으로 그런 것이 좀 많이 나올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