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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由品-1
六祖大師法寶壇經 -門人 法海 記-
一. 行由品
時에 大師- 至寶林하시니 韶州韋刺史名璩-
與官僚로 入山하야 請師出於大梵寺講堂하야
爲衆開緣說法이어늘 師-
升座次에 刺史官僚三十餘人과 儒宗學士三十餘人과
僧尼道俗一千餘人이 同時作例하고 願聞法要러라.
大師-
告衆曰, 善知識아 菩提自性이 本來淸淨하니
但用此心하면 直了成佛하리라
00000
時(시)에 大師(대사)가 至寶林(지보림)하시니→
韶州韋刺史(소주위자사)→
名璩(명거)→
與官僚(여관료)로 入山(입산)하야→
請師出於大梵寺講堂(청사출어대범사강당)하야→
爲衆開緣說法(위중개연설법)이어늘→
師-升座次(사-승좌차)에→
刺史官僚三十餘人(자사관료삼십여인)과
儒宗學士三十餘人(유종학사삼십여인)과→
불교 僧尼道俗一千餘人(승니도속일천여인)→
同時作例(동시작례)하고→願聞法要(원문법요)러라.→
大師- 告衆曰(대사- 고중왈)→
善知識(선지식)아→
菩提自性(보리자성)이本來淸淨(본래청정)하니
但用此心(단용차심)하면 直了成佛(직료성불)하리라
※
이것이 첫 법문 이예요.
菩提自性(보리자성)이
本來淸淨(본래청정)하니
但用此心(단용차심)하면
直了成佛(직료성불)하리라.
이것은 정식 격식을 갖추어서 하는 법문으로서는
첫 법문인데, 진짜 첫 법문은 나중에 소개 되지만
자기가 깨닫고 나서 오도송 비슷하게 말씀하시는
그 내용이 진짜 처음으로 하는 법문이고,
이것은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서 하는 법문으로서는
“첫 법문 이다.”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菩提自性이 本來淸淨하니
但用此心하면 直了成佛하리라.
아주 유명한 말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菩提自性(보리자성)→
깨달음의 자성. 말하자면 우리의 깨달음의 마음자체.
우리 마음의 깨달음은 어떤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인데, 수행을 통해서 얻기 이전에 우리는 마음자리에는
이미 깨달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요.
그것이 보리자성입니다.
누구는 性善說(성선설)을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은 性惡說(성악설)을 주장하고 그러는데,
우리 불교에는 보리자성. 性覺說(성각설)이라고 해야 할까요?
깨달음의 요소가 우리 마음에 본래 있다.
“성품 자체에 바탕으로써 깔려있다.”←이것이 보리자성입니다.
보리는 깨달음이라는 뜻이니까요. 또 道(도)라고도 번역하고
覺(각)이라고도 번역합니다. 보리자성! 참 좋은 말이잖아요.
우리 자성은 깨달음으로 이미 갖춰져 있다. 준비 되어있다 하는
것입니다.
本來淸淨(본래청정)→
그것이 본래청정 이예요. 본래 훌륭한 거예요. 아무 문제가
없다고요. 번뇌 망상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그대로 아주
훌륭하고 뛰어난, 본래부터 훌륭하게 뛰어난 그것이다.
우리의 한 마음이. 본래 마음이. 본래 심이...
但用此心(단용차심)→
그런데 그것을 다만 그 마음만 쓰면, 단용차심. 다만 이 마음.
보리자성이 본래 청정한 그 마음만 쓸 것 같으면
곧 바로 성불이다. 바로 성불이다.
아주 참, 법문이 간단하지요?
우리 마음이 본래 깨끗한 그 자리입니다.
그 깨끗한 그것만 제대로 쓸 줄 알면...
그래 여러 마음이 있어요. 캄캄한 마음도 있고
도둑놈 마음도 있고, 아귀 같은 마음도 있고
축생 같은 마음도 있고, 부처마음도 있고
보살마음도 있는데요.
보리자성!
그 중에서도 제일 알짜배기 깨달음의 자성자리!
깨달음의 마음자리! 그것을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데,
그것만 쓰라 이겁니다.
그것만 자꾸 개발하고 그것만 자꾸 펼치면,
다른 것은 저절로 쓰러지게 되어 있어요.
무슨 아귀마음. 축생마음. 아수라마음 이것이
다 있지만, 그것은 안 쓰면 없어지는 겁니다 안 쓰면...
안 쓰면 안 나타난다고요. 이것 참, 묘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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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師- 告衆曰, 善知識아
菩提自性이 本來淸淨하니
但用此心하면 直了成佛하리라.
善知識아 且聽慧能의 行由와 得法事意하라.
慧能의 嚴父는 本貫이 范陽인데 左降流于嶺南하야
作新州百姓이러니 此身이 不幸하야 父又早亡하시고
老母孤遺라 移來南海하야 艱辛貧乏일새 於市에 賣柴러니
時에 有一客이 買柴하야 使令送至客店에
客이 收去하고 慧能이 得錢하야 却出門外라가
見一客이 誦經이라 慧能이 一聞經語하고
心卽開悟하야 遂問, 客誦何經고
客曰,
金剛經이로라 復問, 從何所來하야 持此經典고
客云, 我從蘄州黃梅縣東禪寺來니
其寺는 是五祖忍大師-
在彼主化하사 門人이 一千餘有라 我到彼中하야
禮拜하고 聽受此經이니
大師- 常勸僧俗하시되 但持金剛經하면
卽自見性하야 直了成佛이라하시나니라하거늘
慧能이 聞說하고
宿昔에 有緣일새 乃蒙一客의 取銀十兩으로
與慧能하야 令充老母衣糧하고 敎便往黃梅하야
叅禮五祖하라하야 慧能이 安置母畢하고
卽便辭違하야 不經三十餘日에 便至黃梅하야
禮拜五祖한대,
祖問曰,
汝何方人이며 欲求何物고
慧能이 對曰
弟子는 是嶺南新州百姓이온데
遠來禮師는 惟求作佛이옵고 不求餘物이니이다
祖言, 汝是嶺南人이며 又是獦獠라 若爲堪作佛고
慧能曰,
人雖有南北이나 佛性은 本無南北이오니
獦獠身은 與和尙으로 不同이오나 佛性이야
有何差別이오리까
五祖更欲與語라가 且見徒衆이 總在左右하시고
乃令髓衆作務하라하시거늘
慧能曰,
啓和尙하옵나이다.
弟子-
自心에 常生智慧하야 不離自性하면
卽是福田이어니 未審호이다
和尙은 敎作何務시니잇가
祖云, 這獦獠의 根性이 大利로다
汝更勿語하고 着槽廠去하라
慧能이 退至後院하니 有一行者-
差慧能하야 破柴踏碓를 經八月餘러니
祖一日은 忽見慧能曰,
吾- 思汝之見이 可用이나 恐有惡人이
害汝할까하야 遂不與汝言이니 汝知之否아
慧能이 曰 弟子亦知師意하고 不敢行至堂前하야
令人不覺케하나이다.
000
大師(대사)- 告衆曰(고중왈),
善知識(선지식)아 菩提自性(보리자성)이
本來淸淨(본래청정)하니
但用此心(단용차심)하면 直了成佛(직요성불)하리라.
보리자성이 본래청정하니 단용차심하면
직요성불이다.
다만 이 마음, 이 마음만 쓰면
곧 바로 성불이다. 그렇게 법문을 턱 던지고,
善知識(선지식)아,
僧尼道俗(승니도속)1000명이라고...
이 모두를 선지식 이라고 불렀는데요.
육조스님께서는 그 나름대로의 충분한 생각이
있으셔서 한 말이지요.
且聽慧能(차청혜능)의 行由(행유)와
得法事意(득법사의)하라.→
또한 혜능. 내 자신 행유. 걸어온 길입니다.
살아온 어떤 緣由(연유). 그리고 법을 얻게 된 사실들.
내가 법을 얻게 된 사실들을 내가 왜 어째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또 어떻게 해서 5조 스님의 법을 이렇게
얻게 되었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밝히겠다.
처음 하신 법문이니까
자기의 살아온 길. 또 법을 얻게 된 것.
이걸 밝힘으로 해서 듣는 사람들이 믿음이 가지지요.
그래서 이런 것을 처음에는 이렇게 한번, 당신의 行蹟(행적)에
대해서 밝힐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이라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慧能(혜능)의 嚴父(엄부)는 本貫(본관)이 范陽(범양)인데
左降流于嶺南(좌강류우영남)하야→
좌강. 좌천이 돼서, 옛날에 범양 盧(노)씨로서 상당이 벼슬께나
하고 살았는데, 좌천이 돼가지고 영남으로 흘러들어 오게 됐다.
作新州百姓(작신주백성)이러니→
신주 땅에 와서 살게 되니 신주 백성이 되었었다. 이런 말입니다.
此身(차신)이 不幸(불행)하야 父又早亡(부우조망)하시고→
아버지는 또한 일찍이 돌아가시고,
老母孤遺(노모고유)라→ 늙으신 어머니만 외롭게 남아 계신다.
移來南海(이래남해)하야→ 그래서 남해 쪽으로 옮겨 와서
艱辛貧乏(간신빈핍)일새→
아주 고생고생 하면서 가난하게 그렇게 살았다. 얼마나 가난 했는가?
於市(어시)에 賣柴(매시)러니→
시장에 다가 땔 나무를 팔아가면서 살았는데, 그러다가
時(시)에→ 어느 날
有一客(유일객)이 買柴(매시)하야→ 한 객이 나무를 사게 됐지요.
자기는 나무를 팔았는데 한 객이 그 나무를 사게 됐습니다.
우리 어릴 때 이런 모습 시장가서 볼 수 있었어요. 나무를 한 짐
지고 와서 그 나무를 파는 지역이 있어요. 거기에 나가서 쭉 서
있으면, 사람들이 나무 사러 와요. 그러면 마음에 드는 나무 짐을
흥정하면 나무꾼은 그 사람을 따라 가는 거예요.
따라 가서 내려놓고 돌아오는 그런 상황인데,
마침 육조스님이 불우한 시절. 그렇게
살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 나그네가 내 나무를 사서,
使令送至客店(사령송지객점)이라→ 객점이라고 하면 旅館(여관)
이지요. 여관에 보내도록 그렇게 했다.客(객)이 收去(수거)하고→
그래서 이 객점 사람들이, 객점 인이 수거하고,
慧能(혜능)은 得錢(득전)이라→ 돈을 받아서
却出門外(각출문외)라→ 그 여관 집 문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見一客(견일객)이 誦經(송경)이라→ 보니 한 나그네가 經을 외우고
있었다.
한 나그네는 마침 스님이었던 것이지요. 그 스님이 아마
그 지역엔 절이 없었던지 그 여관에 묵으면서 아침에 아마 경을
읽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慧能(혜능)이 一聞經語(일문경어)하고→ 혜능이 한 번 경의 말을
듣고...
육조단경본이 몇 가지가 돼요.
어떤 本(본)에는, 聞經(문경). 경에 云(운).
應無所住(응무소주) 而生其心(이생기심).
이라고 하는 것을 듣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 그 말이 나와요.
뒤에는 물론 또 5조 스님이 금강경을 한 번 더 읽어줄 때,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금강경에 “응당히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이 말이 들어있는 본도 있어요. 바로 이 자리에 들어있는
본이 있고, 이 책은 좀 뒤에 들어있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금강경에 아주 유명한 말이지요.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내라. 또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사실은 머물러 있지 않은데,
우리의 습관은 어디에 또 머물러져요.
어디엔가 머물러서 마음을 자유롭게 쓰지를 못합니다.
머물러 버리면 자유롭지가 않아요. 머물지 아니하면
상당히 자유로운데, 머물다 보니까 자유롭지가 못하다.
그래서 그런 구절을 듣는 순간,
心卽開悟(심즉개오)라→마음이 곧 개오. 환히 깨달아 졌다.
이겁니다.
사실은 그것이 뭐 見性(견성)인지,成佛(성불)인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 이지요 .그러나 좋은 말 한 마디 듣고는,
그 순간 그냥 마음이 환히 밝아졌다.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신비한 경험을 하신지라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드디어 그 나그네에게 묻지요.
遂問(수문)→드디어 물었다.
客誦何經(객송하경)고→객이 외우는 경은 무슨 경입니까?
客曰(객왈)→ 객이 왈, 金剛經(금강경)이로라→ 금강경입니다.
復問(부왈)→ 또 다시 묻기를, 從何所來(종하소래)하야
持此經典(지차경전)고→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이러한 경전을,
이 소중한 경전을 가지고 계시게 됐습니까?
客云(객운)→객이 말하기를
我從蘄州黃梅縣東禪寺來(아종기주황매현동선사래)라→
나는 기주라고 하는 땅 황매현 동선사 라고 하는 절에서 왔다.
其寺(기사)는→그 절에는
是五祖忍大師(시오조인대사) 在彼主化(재피주화)라.→
오조홍인대사.
5조홍인대사께서 그러니까 달마가 1祖(조)가 되고,
혜가가 2조가 되고, 3조 승찬, 4조 도신, 5조는 홍인이 되는
것이지요.
6조 혜능. 이렇게 되는데
그것은 부처님 법을 이렇게 전해 받은 33명의
인물을 거론할 때, 가섭존자가一조가 되고,
아난존자가 二조가 되고, 그렇게 해서 6조 혜능 까지를
삽三祖師(삽삼조사), 또는 三十三祖師 이렇게합니다.
그럼 달마 스님은 인도에서 二十八조 인데.
이쪽 東土(동토)로 치면 初祖(초조)가 됩니다.
그래서 1조를 달마로 치지요.그렇게 해서
소위 5조니 6조니 하는 말이 성립되게 된 것입니다.
5조 홍인대사가 거기 동선사에 계시면서,主化라.
주화라고 하는 것은 敎化(교화)를 하고 계신다 이 말입니다.
法主(법주)로서 교화를 하고 계신다.
門人(문인)이 一千餘有(일천여유)라→5조 홍인대사의
문인들이1000여명이나 된다 이겁니다.
我到彼中(아도피중)하야→나도 거기에 있어서 禮拜(예배)하고
聽受此經(청수차경)이라.→이 경전을 배웠다 이겁니다.
이 경전을 청수. 들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그래서
그저 자나 깨나 이 경을 의지하고, 이 경을 읽고, 이 경의
도리를 생각하고 그러면서 사노라는 뜻이지요.
大師(대사)가 常勸僧俗(상권승속)하시되→
5조 대사께서 항상 승속, 누구를 막론하고,
그저 금강경을 권한다 이거지요.승속에게 권하시되,
但持金剛經(단지금강경)하면 卽自見性(즉자견성)하야
直了成佛(직요성불)이라→다만 금강경만 잘 가질 것
같으면 곧 스스로 견성을 해서 곧바로 성불해 마친다.
금강경 한 권만 잘 읽고 터득을 하며는, “바로 성불이다.”
이렇게 늘 5조 홍인대사께서 가르쳤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나그네. 이 객 스님도 그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서
지금 다니면서 경을 읽게 된다 이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금강경을,우리 조계종에서 所依經典(소의경전) 이라고
이렇게 정하고, 또 자나 깨나 “금강경” “금강경”하고...
이런 연유가 있기 때문에 금강경을 연구 하신 분들이 많고,
숱한 見性(견성)한 도인이 전부 금강경을 좋아 했고,
금강경에 대해서 그 나름대로 자기의 그 어떤 소견을 거기에다가
피력한 금강경 주해서가 수 천 種(종)이 될 정도지요.
그렇게 많습니다.
그래서
천도재 지낼 때도
당연히 금강경을 읽어야 천도가 되는 것으로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또 예수재 지낼 때도
금강경을 한권씩 태운다든지, 그런 의식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금강경이 이렇게...
물론 많은 경전. 다 좋은 경전이지요. 그러나 5조 스님께서
이렇게 금강경을 권 하셨고, 또 6조 스님께서 금강경가르침에
의해서 견성 하셨고, 그러다 보니까 금강경을 그렇게 존중하게
됐습니다. 사실 뜻도 좋고요.
慧能(혜능)이 聞說(문설)하고→혜능이, 설하심을 듣고는
宿昔(숙석)에 有緣(유연)일새→옛날에 과거생에, 숙석이라고
하는 것은 宿世(숙세). 宿자는 宿世에, 宿世라고 하는 것은
今生(금생)말고, 과거생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前生(전생)만을 말 하면, 바로 전생을 이야기를 하고
또 과거생 하며는 과거에 수많은 전생들을 한꺼번에
우리가 숙생. 또는 숙세. 또는 과거세. 과거생. 이런 표현을 하지요.
숙석에 옛날에 인연이 있었을새. 乃蒙一客(내몽일객)의
取銀十兩(취은십냥)으로與慧能(여혜능)하야→
그 나그네가 은 10냥을 혜능에게 주어서, 그 이야기가
여기는 생략이 되었지만, 충분한 이야기가 오고 갔겠지요.
“아, 내가 여기서 마음이 환해져서, 나도 꼭 그 스님한테 가서
이 금강경의 도리를 확실하게 전수 받고 싶다.”이러다 보니까
오고 간 이야기가...
그러나 내가 처지가 노모를 모시고 사는 어려운 처지라
갈 수는 없고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마침 이 스님이 그야말로 숙세에 인연이 있어 가지고,
당신이 가졌던 돈을 다 혜능에게 주면서 이 돈으로 그 노모를
모실 수 있도록, 양식에 충당 하도록 하고, 가서 이 법을 위해서
노모를 떠나는 것이 아쉽지만 그러더라도 불법을 위하고,
장래에 선법을 크게 전하는 큰일을 위해서 이객이, 나그네가
그렇게 권했던 모양입니다.
그런 것들이 宿昔에 有緣일새,
숙석에 인연이 있었을새 하는
그 말속에 다 포함이 되겠지요.
그래서 혜능에게 줘 가지고서
令充老母衣糧(영충노모의량)이라→노모의 옷과 양식.
앞으로 해입을 옷과 자실 양식 여기에 다 충당 하도록
하고, 그리고는 곧 敎便往黃梅(교편왕황매)하야→황매산에
갔다 이겁니다.
黃梅縣東禪寺(황매현동선사)니까요. 황매현은 또 황매산이
있어서 현 이름이 그렇게 되었던 것이지요.
叅禮五祖(참례오조)하는데,慧能(혜능)이 安置母畢(안치모필)하고
卽便辭違(즉편사위)하야 不經三十餘日(불경삼십여일)에
便至黃梅(편지황매)하야 禮拜五祖(예배오조)한대,→5조 스님한테
예배를 했어요. 예배를 하니까
祖問曰(조문왈),→5조 스님이 물어 가로되,
汝何方人(여하방인)이며 欲求何物(욕구하물)고→너는 어디서
왔느냐? 대개 절에 누가 와서, 사람이 찾아오면 당연히 묻는
첫 말이 그거지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부산 어디에서 왔습니다.”
아니면 다른 지방 “어디에서 왔습니다.” “어떻게 오셨어요?”
欲求何物(욕구하물)고→어떻게 오셨습니까? 이런 말이지요.
무슨 물건을 구하려고 왔느냐? 이것이 뭐 글이 그렇게 되어서
그렇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는 뜻입니다.
慧能(혜능)이 對曰(대왈)→혜능이 대답하기를, 弟子(제자)는
是嶺南新州百姓(시영남신주백성)이온데→제자는 영남 신주백성
입니다. 남쪽지방에 있는 영남 신주백성입니다.
遠來禮師(원래예사)는→멀리서 ???? 와서 스님께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은,
惟求作佛(유구작불)이옵고不求餘物(불구여물)
이니이다.→오직 부처를 구하려고 한다. 부처되는 것을
구하려고 한다. 성불하려고 하고, 다른 것은, 다른 물건을
구하려고, 다른 볼일은 없습니다. 오로지 내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여기 왔노라.
이 질문과 대답.
이것이 사찰에 처음 와서 “스님이 되고자 한다.”
“출가를 하고자 한다.”라고 했을 때, 正石(정석)에
가까운, 질문에 정석이고, 대답의 정석입니다.
이것이...
좀 저한 불자라면 僧俗(승속)을 막론하고 사실은
이 목적이라야 옳아요 옳기는...
各自(각자) 다른 볼일이 설사 있다 손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문제이고, 사실은 승속을 막론하고
부처님 슬하에 오고 불교에 온다는 것은,
惟求作佛(유구작불)이요 不求餘物(불구여물)입니다.
오직 부처가 되기 위해서 오는 것이고,
다른 볼일로 절에 온 것은 아니다.
딴 볼일로 불교에 오는 것은 아니다. 이겁니다.
이 말 속에는 사실은 각양각색의 많은 사연들이
다 이 속에 포함이 되어야 돼는 것이지요.
祖言(조언),→
조사가 말하되, 5조가 말하되,
汝是嶺南人(여시영남인)이며→그대는 영남사람이다.
옛날에 영남사람들을, 남쪽지방 사람들이니까요.
꾀죄죄하고 키도 작고 아마 그래서 시원찮게 보였는가 봐요.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 중심지역을 “한인” 이라고 하고,
邊方(변방) 사람들은을 전부 東夷(동이). 西戎(서융). 南蠻(남만).
이런 식으로 전부 오랑캐라고 하는 촌놈, 이런 표현을 썼었잖아요.
그러니까 이 영남 신주라고 하는 곳도 아마 그런 소리를 들을만한
지역인가 봐요.
그 영남사람이고, 아주 賤視(천시)받는 지역이었던가 봅니다.
又是獦獠(우시갈료)라→여기 갈료 라고 하는 것은 본래 짐승
이름인데 서남지방 사람들을 이렇게 부른답니다.
갈료. 오랑캐. 지금으로 치면 월남 쪽이나 되겠지요.
운남성. 그 쪽 지역을 아마 지칭할 겁니다.
그래서 갈료다. 오랑캐다. 이겁니다.
若爲堪作佛(약위감작불)고→어찌해서 감히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아주 무시하는 소리지요? “아 촌놈이 무슨 부처는 부처야?
니까짓 것이”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로 치면 사실은 영남 사람이 제일인데...
하하하하하
若爲堪作佛(약위감작불)고
慧能(혜능)이 曰(왈), 人雖有南北(인수유남북)이나→
혜능의 대답이 이래요.
사람은 비록 남쪽과 북쪽사람이 있지만,
佛性(불성)은 本無南北(본무남북)이오니
獦獠身(갈료신)은 與和尙(여화상)으로 不同(부동)이오나
佛性이야 有何差別(유하차별)이오리까.→사람에게 남북이 있지만,
불성이야, 우리 마음자리야 어떻게 남북이 있겠습니까?
※
갈료신.
내 오랑캐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화상하고, 큰스님하고 달라요.
큰스님이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다른데 그렇다고 마음자리.
佛性이야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이런 소리를 들으니까
5조 스님이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五祖更欲與語(오조경욕여어)라가→
5조 스님이 다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야기가 된다 이것이지요. 그러고 주변을 살펴보니까
且見徒衆(차견도중)이 總在左右(총재좌우)라.→
아 어떤 떠꺼머리총각이 하나 왔는데,
5조 스님을 뵙더니 오고가는 말이 영 심상치 않으니까,
대중들도 ‘와~ 무슨 소리가 오고 가는가’
하고 상당히 의아한 표정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겁니다.
그것을
5조 스님이 눈치 챘어요. ‘아 이놈하고 여기서 이야기해선
안 되겠다. 나중에 따로 만나서 이야기 해야되겠다.’
싶어서 총재좌우라. 모두들 좌우에 지켜보고 있으니까,
다음에 만날 생각을 하고,
乃令髓衆作務(내령수중작무)하라→대중 따라가서 일이나 해.
‘니까짓게 뭘 성불한다고 그 따위 소리나 하느냐?’
이렇게 무시해서 일이나 하라고...후원에 가서 일이나 할
일이지, 어디 감히 성불 같은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하니까
慧能曰(혜능왈),→
혜능이 말하기를 啓和尙(계화상)하옵나이다.→
영 그 소리 듣고는 못 참지요?
아무리 마음이 밝아졌다 하더라도...
啓자는 “여쭙다.”이런 뜻입니다.
“화상에게 제가 여쭙겠습니다.”
큰스님을 화상이라고 표현할 때가 있어요.
“화상에게 여쭙겠습니다.” 자기가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이 보통이 아닌데,
이런 소리 한 마디 듣고 가서 일이나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이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호락호락하게 내가 물러날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보여주고요.
뭐 5조 스님의 속뜻이야 어쨌든 간에...
弟子(제자)가 自心(자심)에 常生智慧(상생지혜)하야→
나는 내 마음속에 항상 지혜가 나고 있어요.
不離自性(불이자성)하면 卽是福田(즉시복전)이어니→
그 자성자리에서 지혜가 나는데, 그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면
그 자리가 곧 福田이지,
作務
(작무)라고 하는 것은, 일한다고 하는 결국은 복 짓는 일 아니냐?
대중을 위해서 농사짓고 밭 갈고 복 지으라는 뜻인데,
내 자신 속에 이미 복전이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未審(미심)호이다.→모르겠습니다.
和尙(화상)은敎作何務(교작하무)시니잇가→
무슨 일을 하란 말입니까?
진짜 좋은 일은 내 마음속에 지혜가 늘 나고,
그 지혜가 나고 있는 내 자성을 잘 지키고 있으면,
그 보다 더 좋은 福田이 없는데, 어디 가서 무슨 일 하란 말입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아주 대단한 표현이지요? 그러니까
祖云(조운),→조사가 말하되,
這獦獠(저갈료)의 根性(근성)이 大利(대리)로다.→
이 오랑캐. 이 촌놈의 근성이 크게 영리하다.
대리라. 너무 영리하고 날카롭다. 그리고는
汝更勿語(여갱물어)하고→너는 다시 더 이상 말하지 말고,
着槽廠去(착조창거)하라.→
조창은 마굿간을 조창 이라고도 하고, 여기서는 後園(후원)을
가리켜요. 그냥 밥 짓는 후원 정도가 아니고, 일 하는 후원을
말하는 것이지요. 방아 찧고 나무하고 하는 그런 데입니다.
마을로 치면 마굿간이나 다를바 없지요.
“조창에 가라, 후원에나 가라.” 그러니까 할 수 없이
慧能(혜능)이
退至後院(퇴지후원)하니→후원에 물러오니
有一行者(유일행자) 差慧能(차혜능)하야→
한 행자가 있어 가지고서, 혜능이 행자로 들어왔으니까
행자가 동기생 왔다고, 와서 혜능을 시켜서
破柴踏碓(파시답대)→
파시는 장작을 패는 것이고, 나무 해오는 일이지요.
답대는 방아 찧는 일입니다. 대는 방아 碓자입니다.
밟을 踏자. 디딜방아지요.
방아를 찧기를 經八月餘(경팔월여)라→
8개월 동안 그런 일을했어요.
이 모습이 벽화에 많이 그려져 있지요.
혜능 스님이 행자 때, 혼자 방아를 찧는데
그 몸이 가벼우니까 돌을 짊어지고...
그러면 몸무게가 무거워 지니까 디딜방아가
잘 내려가서 방아를 찧기가 쉬웠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돌을 짊어지고 방아 찧는
그 그림이 6조 스님의 행자 때의 모습이지요.
그것은
爲法望求(위법망구)라.→법을 위해서 이 몸을 돌보지 않고,
고생을 많이 한다하는, 뒷사람들에게 큰 교훈으로 그렇게
그림을 그려놓게 됩니다. 8개월 동안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지요.
祖一日(조일일)은→조사가 하루는
忽見慧能曰(홀견혜능왈),→홀연히 혜능을 보고,
‘아 이놈이, 일이나 하라고 그렇게 보냈는데...’
그러고 나서 늘 5조 스님은 그 행자. 盧(노)행자.
이 혜능 생각을 했겠지요?
그래서
하루는 와서 혜능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와서 위로도 하고, “사실은 내 속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8개월 쯤 이렇게 지난 뒤에, 찾아오니까
대중들이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 아니겠어요?
처음에는 ‘야 이거 심상치 않다.’ 라고 생각을 했다가,
8개월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묻지도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는 일도 없고 가는 일도 없으니까,
대중들이 다 잊어버릴만한 그런 시기가 됐습니다.
그 때쯤 돼가지고 조사스님께서 오셨으니...
하루는 와가지고서 혜능을 보고는,
吾- 思汝之見(오- 사여지견)이→
그대의 소견이 可用(가용)이나→
쓸 만해. 내가 생각하기에
그대의 지견이 쓸 만하나, 가용이나,
恐有惡人(공유악인)이 害汝(해여)할까 하야→
혹, 악한 사람들이 그대를 해칠까 그것이 두려워서,
遂不與汝言(수불여여언)이니→
드디어 그대로 더불어서 말하지 아니했어.
그러니
汝知之否(여지지부)아→“그대는 혹시 내 속뜻을 아느냐?”
이렇게 물었어요.
慧能(혜능)이 曰(왈)
弟子亦知師意(제자역지사의)하고→
“제자도 또한 스승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不敢行至堂前(불감행지당전)하야
令人不覺(영인불각)케 하나이다.→
“감히 스님이 계시는 집 앞에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입니다.
거기 얼씬 하면 다른 사람이 그걸 보고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거거든요.
“당전에 가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느끼지 못하게 그렇게 처신을 해왔습니다.
” 이렇게 서로 깊은 속뜻을 주고 받게 된 것이지요. 속으로 그야말로
以心傳心(이심전심)으로 다 서로가 느끼고 있었던 그런 상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