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 룸비니를 생각하다
룸비니는 4대 불교 성지 중 하나로 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다.
부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이 출산을 위해 고향인 데바다하로 돌아가 던 중 룸비니 동산에서 아름다운 꽃을 보고 잠시 쉬다가, 산기를 느껴 아쇼카 나무를 잡고 오른쪽 옆구리로 부처님을 낳았다고 한다.
룸비니는 영원한 불교 성지로 남게 되었고, 수많은 순례자들 이 방문하여 기도하고 수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1960년대 전까지 는 폐허 상태로 남아 있다가 1967년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미얀마 출신 우탄트가 ‘룸비니 개발 국제위원회’를 발족시켜 세계평화센터(The Center for world Peace) 건립 계획을 세워 성역화를 추진했다.
이후 룸비니는 불자들만의 성지가 아니라 인류의 성지로 떠올랐다.
룸비니 가는 길 더위가 시작되는 5월 연휴 나는 단체 손님들과 성공적으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마치고 조금 한가해져 포카라에서 남은 일들을 마무리하며 쉬고 있었다.
어느 날 현지 직원 라주가 나한테 물었다.
“누나, 룸비니에 가보셨어요?”
사실 몇 년 전부터 룸비니는 종교가 없는 나에게도 묘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의 귀가 번쩍 뜨였다.
반색을 하며 가고 싶다고 하자 라주는 당장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투어리스트 버스를 예약해 준다.
사실 알뜰한 라주는 로컬 버스를 권유했지만 이곳의 로컬버스는 찜통더위 속을 에어컨 없이 긴 시간 이동해야 하는 ‘고행버스’인 걸 아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투어리스트 버스를 예약하도록 부탁하였다.
다음 날 아침 7시, 포카라에서는 이제 일상이 되어버린 라주의 스쿠터 뒤에 몸을 싣고 투어리스트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늘 그렇듯 가게 주인이 개그맨 뺨치는 능청으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 탓에 어느새 나의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빵과 두찌아 (밀크티)가 놓여 있었다.
서둘러 온 때문인지, 늦은 출발을 하는 건지 모르지만 약속되었던 7시 출발을 하지 않고 거의 8시가 되어서야 출발하였다.
운이 좋게도 오른쪽 맨 앞 좌석에 앉아 시원하게 나오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약 6시간을 달려서야 룸비니에 도착하였다.
중간에 화장실도 가고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식당에도 들렀지만 가이드캠은 잘못 먹으면 배탈 날 수 있으니 먹지 말라고 했다.
오는 내 내 물 이외에 바나나 2개 먹은 게 전부였던 나는 룸비니에 도착하자 너무 배가 고팠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로컬식당에 들어가서 달밧을 주문하고도 기다리기 힘들어 가이드와 사이좋게 삶은 계란을 먼저 먹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5월의 포카라도 덥다고 생각했던 내게 룸비니의 5월은 그 이상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뜨겁게 올라오는 지열이 얼마나 더운지 알게 해주었다.
룸비니 동산에는 들어가는 게이트가 총 9개 있는데 그중에서도 5번으로 들어가야 중심부에 중요한 부분들을 먼저 볼 수 있다고 였다.
5번 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건 원숭이들이었다.
자유롭게 이 나무 저 나무를 뛰어넘기도 하고 내려와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눈싸움을 한다.
원숭이를 지나쳐 가로등과 가로수가 길게 늘어서 있는 긴 길을 한참 지나자 잘 정리된 정원이 보이고 저 멀리 마야대비 부인당이 나타났다.
이곳은 입구에 군인 들이 앉아 있고 적외선탐지기 비슷한 장비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곳은 들어갈 때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가야 한다,
입구에 들어서 면 남북을 가르는 자그마한 운하를 경계로 국제사원의 동쪽에는 소 승불교 국가들의 사원이, 서쪽에는 대승불교 국가들의 사원이 자리 를 잡고 있었는데 소승·대승 여부는 정오 이후에 음식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로 구분했다고 한다.
한국, 중국, 일본은 대승에,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은 소승에 속해 있다.
현재 룸비니에는 네팔 정부의 협조를 얻어 많은 불교 국가에서 각 나라의 사원을 세워서 자기나라와 불교를 홍보하고 있다.
일찍 부터 네팔, 티베트, 태국, 미얀마, 베트남, 스리랑카에서 사원을 건 립하였으며, 최근에는 일본과 중국에서도 큰 사찰을 세웠다.
우리 나라 사찰은 비교적 최근인 1995년에 세워졌다.
도문스님이 세운 대성석가사.
1999년에 제1요사채인 불탄무우수당, 2002년에는 제 2요사채인 대성마야부인당을 지었다.
대웅전은 황룡사 금당의 형태라 하는데,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룸비니의 우리나라 사원, 대성석가사 주변의 중국, 미얀마 등의 사원을 둘러보는데 가이드 캠이 갑자기 대성석가사로 빨리 가야 한다며 뛸 듯이 걸어간다.
아무리 물어도 답이 없다.
대성석가사 사무실에 들어가 사무직원과 인사를 한 후 가방을 내려놓더니 우선 밥부터 먹으란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급히 다른 외국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커다란 접시에 안락미와 김치 볶음, 국 등을 받아서 자리에 앉았다.
그제서야 캠이 숨을 고르더니 5시 반까지 와야 저녁을 먹을 수있어 그랬단다.
직원도 밥부터 어서 먹고 사무실로 오라고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대성석 가사는 하루 500루피를 내면 하루 세 끼와 방을 제공한다.
이렇게 저가로 숙식이 제공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어느새 유명해져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거의 모두 대성석가사로 모인다는 말을 들으니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원래는 무료였으나 주변의 항의에 최근에 돈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생각보다 맛있게 배를 채운 후 또 하나의 별미 미숫가루를 뜨거운 보리차에 타서 테이블에 앉아 가이드 캠과 이 얘기 저 얘기 나누 고 있자니 어느새 본당 정면에 화려한 연등이 켜진다.
운 좋게도 부처님 오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이런 뷰를 볼 수 있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무한리필 미숫가루
사무직원의 배려로 별관쪽에 마련된 한적한 2층에 방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곳은 동성끼리 방을 쉐어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방에 들어와 얼마 있다 가이드가 알려주는 공동 샤워장으로가 서둘러 씻고 돌아오니 젊고 예쁜 한국 아가씨가 짐을 풀고 있었다.
인도 여행을 갔다 다시 네팔로 와서 조금 지내다 다시 인도로 들어가는 여정이라고 하였다.
가지고 있던 네팔 유심 칩을 주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새벽 불공을 위해 알람을 맞추고 일찍 잠이 들었다.
하지만 밤새 물어대는 모기와 더운 날씨로 인해 몇 번씩 일어났다 잠들었다를 반복하며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둘 다 새벽 불공을 놓치고 말았다.
한 번 정도는 불공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서둘러 짐을 챙겨 같은 방을 쓴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어제 둘러보지 못한 다른 나라의 사원들을 둘러봤다.
여러 양식의 사찰들을 모아 놓고 보니 우리 절이 훨씬 수수하게 보였다.
바로 앞에 마주보고 있는 중국의 중화사만 해도 절이라고 하기 엔 외관이 너무 화려해 나는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다.
룸비니에서 치트완으로
룸비니와 대성석가사를 나서는 발걸음이 아쉬웠다.
시간이 멈춘듯 한 느낌이 드는 이 곳.
이번에는 바쁜 일정을 쪼개서 이동한 탓에 룸비니를 짧게 보고 지나가지만 다음에 마음의 안정과 수행을 원할때 가 있다면 대성석가사에 와서 장기간 머무르며 내 자신을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여기 오는 길에 국제공항 짓고 있는 현장을 지나왔는데, 룸비니를 보고 나니 앞으로 포카라 아닌 룸비니로 바로 오는 이들이 늘것 같다.
다음 목적지는 치트완이다.
역시 하루 몇 번밖에 없는 투어리스트 버스를 타고는 치트완으로 향하였다.
예상보다 버스가 깨끗하고 좋은 편이어서 충전을 할 수 있었다.
치트완국립공원은 197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희귀한 도코뿔소와 벵골호랑이의 서식지로 알려져 있으며 룸비니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룸비니와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뜨거웠다.
로컬식당에서 달밧으로 점심을 먹고는 국립공원안까지 갈 차량을 구하기 위해 캠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우리를 보더니 비교적 작은 우리나라의 관광버스 비슷한 버스인 마이크로 버스가 앞에 서서 서로 호객행위를 한다. 그중 한 대를 잡아탈 때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공원 입구까지 가서 기사와 캠이 실랑이를 하기 시작하였다.
기사는 입구까지만 가기로 한거다, 캠은 아니다, 안까지 들어 가기로 했다, 말싸움이 길어지는 듯하였다.
그동안 긴 트레킹을 함께 해오면서도 그렇게까지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모습을 처음 본 나는 몇 분을 지켜보다가 그냥 조금 더 주고 가자 하였다.
아무래 도 나에게 미안하여 더 싸운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치트완 중심거리에 내렸다.
동시에 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건다.
친척들이 거주하며 일을 하고 있단다.
사촌동생이라고 나온 동생은 자신의 차량을 가지고 나와 숙소를 알아봐 주고 데려다 주기까지 하였다.
사실 나는 벵골호랑이를 보고 싶었으나 현 지인들 말로는 이렇게 날씨가 뜨거워지면 큰 움직임이 없다며 말린다.
아닌 게 아니라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뜨거운 폭염에 모기까지 기승을 부렸다.
긴 버스 여행으로 인해 심신이 피로한 데다 날씨까지 무더워 오늘은 일단 숙소에서 쉬기로 하였다.
저녁이 되자 차가운 바람은 아니지만 룸비니보다는 그래도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한낮의 뜨거움에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어스름해지는 어둠에 아름다운 석양을 보여주었다.
치트완의 회색빛 하늘과 땅에서 주황빛이 어우러진 오묘한 느낌이었다.
더 늦어지기 전에 메인 스트리트로 나가 거리 구경을 하고 싶다는 나를 데리고 동생의 스쿠터를 타고 함께 시내로 나왔다.
시내에는 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기념품 샵들과 네팔스러운 의상을 파는 곳이 대부분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내 눈을 끈 건 허니샵이었다.
네팔은 바위에서 채취한다는 석청(rock honey)가 유명했는데 이곳이 석청으로 유명하다고.
이 꿀은 다른 꿀과는 달리 티스푼으로 작게 한 스푼만 먹으면 위장에 좋다고 알려졌다.
즐거웠던 사파리 둘러보고 있는데 메인 도로에 커다란 코끼리가 등에 사람을 태우고 그 덩치만큼 커다란 똥을 싸며 지나갔다.
어릴 때 동물원에 가서 본 것보다도 큰 덩치에 깜짝 놀란 나는 다음날 타기로 했던 체험을 취소해버렸다.
무섭기도 하고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저녁시간을 보내고 숙소에서 간단한 치킨을 시켜 먹고 방으로 들어갔더니 식사 중 물렸는지 온 다리가 모기 물린 자국투성이다.
다음에 룸비니나 치트완에 올 일이 있다면 꼭 모기퇴치제를 가지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에어컨을 강으로 맞추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주는 조식으로 아침을 시작하였다.
국립 공원이 넓어 걸어서 이동하기 힘들어 우리는 오늘도 바이크를 빌려 타고 다니기로 하였다.
우선 국립공원에 작게 마련된 박물관에 갔다.
입구에서 적은 금액의 입장료를 내면 들어갈 수 있었는데 들어가면 몇 평 되지 않은 공간에 우리나라 70년대나 있었을 전시관 을 볼 수 있다.
간단히 둘러보고 아기 코끼리 사육장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은 아기 코끼리만 사육을 하고 있었는데 어린 동물을 가두고 교육한다는 것에 다소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나의 생각과는 달리 넓은 공간에 아기 코끼리들이 자유롭게 흩어져 지내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들어가면 한두 마리 문을 열어 풀어 주고는 자유롭게 놀게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한 마리가 나를 혀로 핥기 위해 천진하게 달려들어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그 시간에 방문한 사람들과 즐겁게 웃고 떠들며 아기 코끼리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입구에 얼기설기 짜인 엉성한 다리를 지나자 자유롭게 헤엄치는 하마도 물오리도 모두 얽매여 있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동물원처럼 쇠창살 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지프를 타고 약 1시간 동안 공원 안을 돌아보기로 하였는데 날씨가 더워 먼발치에서 누워 있는 호랑이를 보거나 수영을 하는 코뿔소 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나름 즐거운 사파리였다.
무엇보다 도 동물들이 억압되지 않고 편안히 지내는 것이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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