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내리는 날
조광현
이틀 전 태풍 오마이스가 지나가며 곳곳에 물 폭탄을 쏟아놓더니, 아직도 세찬 비바람이 수시로 이어진다. 가을장마의 시작이란다. 이 지역의 배수로는 대부분 온천천에 연결된다. 온천천은 부산의 대표적인 도심하천으로 좌우에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다. 온천천에 모인 물은 수영강에 합류하여 부산 앞바다로 나간다. 오늘따라 잔뜩 불어난 흙탕물이 온천천 둑을 넘어 범람할 기세다.
30여 년 전, 그날도 폭우가 쏟아졌다. 당시 근무하던 병원은 상당한 고지대에 있는지라, 출근길에 승용차를 몰고 저 아래 큰길에서 병원까지 오르느라 애를 먹었다. 그날 폭우를 뚫고 응급실로 실려 온 환자가 있었다. 앉아 있어도 숨쉬기가 힘든 15세 소년 J의 질병은 심장 중심부에 큰 결손이 있는 타고난 심장기형이었다. 판막에도 결손이 있어 유아기에 수술을 받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질병인데 학교생활은 어떠하냐 물었다. 힘이 달려 매사 어렵다고, 별명마저 ‘꼴찌’라고 했다. 나이 들수록 차츰 더 힘들었지만, 대학병원 진료는 처음이란다. 왜 그랬을까? 경제적인 문제라면 심장병 환자 후원 단체가 있다고 했더니, 아이에게 너무 무심했다며 부모는 눈물을 훔쳤다.
이 환자의 수술엔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됐다. 이미 발생한 심부전증을 가라앉힌 후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의 근간은 패치를 대어 결손을 잘 메우는 것, 즉 심장을 좌우로 확실하게 분리하면서 판막을 정상적으로 수선하는 것이었다. 며칠 후 수술실에 무영등이 켜졌다. 체외순환을 가동하고 심장을 정지시킨 후 수선 작업이 시작됐다. 수술은 대부분 정교한 바느질이다. 어긋난 부분을 교정하며 한 바늘, 한 바늘 뜰 때마다 엉뚱한 손상을 주지 않으려 잔뜩 긴장했다.
수선을 끝내고 심장을 소생시키는 순간. 대개는 제세동기를 이용하여 심장 표면에 가벼운 전기 충격을 주면 심장박동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심장이 박동하지 않았다. 이런! 피를 말리는 긴장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심장근육에 손상이 심했나, 수술이 잘못됐나? 빛의 속도가 빠르다고 하지만 생각의 속도는 더 빠른 것 같다. 온갖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데, 어느 순간 심장을 쥐고 있는 손에 꿈틀하는 작은 움직임이 감지됐다. 조금 후 드디어 심장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후유!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수술 후 회복 또한 순탄치 않았다. 새로 발생한 부정맥으로 몇 차례 위기를 넘기며 달포가 지나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그 뒤 오랫동안 경과를 지켜봐야 했지만, 수년 후 타지로 이사한 탓에 그 지역 병원으로 진료기록을 넘겨주고 추적 관찰을 그만 접어야 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어느 날, 그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아주 건강하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타고난 질병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그가 마흔 초반에 모 중견 기업체의 간부사원까지 됐다고 하니, 대단한 반전이다 싶었다. 얼마 후 그와 저녁을 같이하게 됐다.
“이게 얼마 만인가. 자네 정말 건강해 보이네!”
“죽을 뻔했던 저를 살려주셨잖아요. 교수님이 제 운명을 바꿔났어요!”
금세 눈시울을 적시는 그를 보며 나도 잠깐 숙연해졌다.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그래. 자네가 운명을 극복한 것이지.”
그때 비가 많이 내렸는데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병원 가는 날 폭우가 퍼붓더라고 했다.
“그래, 그랬어!”
서로가 힘들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어떤 아늑한 기운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 잔잔히 스며드는 듯했다. 그저 넉넉한 저녁이었다.
운명! 운명이란 무엇인가? 순응해야만 하는 것인가, 극복하여 바꿀 수 있는 것인가?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처럼 어떤 어두운 결말을 뜻하는가, J와 같은 인생 반전을 의미하는가? 현자들은 어떻게 말할까? 답답하여 인터넷을 뒤졌다. 제닝스 브라이언이란 사람은 ‘운명은 우연이 아닌 선택이며, 기다리는 게 아니라 성취하는 것’이라 한다. 우드로 윌슨은 ‘사람은 어떤 운명을 만나기 전에 자신이 그것을 만들고 있다’라고 한다. 대부분 ‘운명이란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주어진 여건에 대한 도전과 극복의 산물’이라는 점에 방점을 둔 듯하다.
세월이 더 많이 흘렀다. 오랫동안 심장수술을 집도하며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어떤 운명에 기뻐했다면 어떤 운명에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했다. 아무튼 질병과의 전투에 도전하고 극복하는 것이 의사의 의무일 것이다. 평소에 부지런히 습득한 전투력으로 최선을 다해 싸워야 했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순응이고 또 극복이라 여겼다.
대학병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햑요양병원에 근무한 지 벌써 7년이다. 이곳에도 항시 긴장은 있다. 그래도 치열한 전장 같은 곳은 아니다. 퇴역한 장수가 지난날을 회상하듯, 나를 스쳐 간 환자들을 회상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있었다. 지금도 가끔 찾아오는 분이 있으니 감사할 뿐이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 모르지만, 가능하면 좋은 마무리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전국적인 폭우! 저녁 TV 뉴스에 부산의 온천천 물이 크게 불었다는 보도가 떴다. 천변 산책로가 완전히 물에 잠긴 채 흙탕물이 출렁이는 화면도 떴다. 지나가는 화면 속에 내가 사는 아파트가 언뜻 보였다. 그 아파트 19층에서 창문을 열면, 훤히 내려다보이는 온천천의 수위가 오늘따라 영 심상치 않다. 여태 그런 일 없었다고 하지만, 이번엔 정말 하천이 범람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