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 곤양군(昆陽郡) 경계까지 28리이고, 남쪽으로 같은 군 경계까지 4리이며, 서쪽으로 진주 경계까지 24이고, 북쪽으로 같은 주 경계까지 31리인데, 서울까지는 9백 87리의 거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다사군(多沙郡)인데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이 진주에 예속시켰고 명종이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때에 남해현(南海縣)을 합쳐서 하남현(河南縣)이라 부르고, 영(令)을 두었다가 뒤에 다시 쪼개서 현감으로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한다사(韓多沙)ㆍ하남(河南)ㆍ청하(淸河).
【성씨】 본현 정(鄭)ㆍ곽(郭)ㆍ이(李)ㆍ하(河).
『신증』 【풍속】 습속이 검소하고 솔직함을 숭상한다 관풍안에 있다.
【형승】 산을 지고 바다에 임했다 정양(鄭穰)의 기문(記文)에 있다.
【산천】 양경산(陽慶山) 현 북쪽 3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옥계산(玉溪山)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금오산(金鰲山) 현 남쪽 3리 지점에 있는데 산 동남쪽은 곤양군 경계이다. 소묘산(小卯山) 현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차점(車岾)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이맹점(理盲岾)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전설에는, 동경(東京) 비보산(裨補山) 꼭대기에 옛날 용지(龍池)가 있었다. 이 때문에 동경 사람은 소경이 많으므로 많은 사람이 괴로워하였다. 그리하여 화철석(火鐵石)을 그곳에 넣었더니, 용이 곤양 진제(辰梯) 밑 깊은 소로 옮겨 간 뒤부터는 사람이 소경이 되지 않았다 한다. 해점(蟹岾) 현 서쪽 17리 지점에 있다. 장령(長嶺) 현 동쪽 28리 지점에 있으며 곤양 경계이다. 바다 현 남쪽에 있다. 목도(牧島)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합진(蛤津)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조수가 드나드는 곳이다. 횡포천(橫浦川)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지리산에서 나오며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간다. 남포(南浦) 현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현 북쪽 차점에서 나오며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며 어장이 있다. 사포(蛇浦)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조수가 드나드는 곳이다.『신증』 소근포(所斤浦) 현 남쪽 18리 지점에 있으며 어장이 있다.
【토산】 대구[大口魚]ㆍ전복[鰒]ㆍ문어ㆍ은어[銀口魚]ㆍ조개[石首魚]ㆍ모래무지[鯊魚]ㆍ홍어ㆍ낙지[絡締]ㆍ준치[眞魚]ㆍ굴[石花]ㆍ게[蟹]ㆍ차ㆍ석류ㆍ유자ㆍ백복령ㆍ주토(朱土)ㆍ대[竹]ㆍ감ㆍ해삼ㆍ실미역ㆍ미역ㆍ가사리ㆍ우무[牛毛]. 『신증』 조기ㆍ숭어[秀魚]ㆍ농어
【성곽】 읍성 현에 옛날에는 성이 없었는데 우리 세종 정유년에 양경산 밑에다가 돌로 쌓았다. 둘레는 천 19척이고, 높이는 13척이며, 성 안에 우물 다섯과 못 하나가 있다.
『신증』 【누정】 죽정(竹亭)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현 동쪽 3리 지점에 있다. 우리 세조 기묘년에 현감 최승종(崔承宗)이 옛날 읍 터에다가 지었다. 정양(鄭穰)이 기문을 지었다.
【역원】 마전역(馬田驛) 현 북쪽 16리 지점에 있다. 율원역(栗原驛) 현 동쪽 23리 지점에 있다. 횡포역(橫浦驛) 현 서쪽 29리 지점에 있다. 횡포원(橫浦院) 횡포역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불우】 쌍계사(雙溪寺) 해점에 있다. 이맹굴(理盲窟) 이맹점에 있다. 옥계사(玉溪寺) 옥계산에 있다. 대적사(大寂寺) 장령(長嶺)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남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명환】 고려 이익배(李益培) 이규보(李奎報)의 손자이다.
본조 하경리(河敬履)ㆍ정간(丁艮)ㆍ유규(柳規) 모두 현감이었고, 치적이 있었다.
【인물】 고려 정안(鄭晏) 평장사 숙첨(淑瞻)의 아들이며, 처음 이름은 분(奮)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웠다. 젊었을 때 과거에 올랐고 음양ㆍ산술ㆍ의약ㆍ음률 등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최이(崔怡)가 정권을 제 마음대로 결단하는 것을 보고 해를 피하고자 하여, 남해(南海)에 물러가 살면서 이름난 산을 두루 유람하였다. 그 뒤에 최이의 아들 최항(崔沆)이 정권을 잡고는 소환하여 참지정사로 삼았다. 최항이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자 하여 정안을 대해서, 겉으로는 비록 예우하는 모습을 갖추었으나 내심으로는 실상 시기하였다. 그리하여 근정을 비방하고 난을 꾸몄다는 것으로써 백령도(白翎島)에 귀양보냈다가 사람을 보내어 물에 빠뜨려 죽였다.
정지상(鄭之祥) 공민왕을 따라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공로가 있었으므로, 공민왕이 즉위하자 벼슬이 갑자기 올라서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이르렀다. 전라도 안렴사가 되어서는 그 경내에 들어가, 세도 부리는 집의 사람을 만나면 갑자기 볼기를 쳐서 조리 돌리니 온 도가 두려워하였다. 그 뒤에 호부시랑 어사중승으로 전임되었다. 정혼(鄭渾) 처음 이름은 종(從)이며 지상의 아들이다. 그의 어미가 홀로 되어 담양부(潭陽府)에 살다가 왜구에게 살해당하였다. 신창(辛昌) 때에 정혼이 전리좌랑이 되어 복수할 계책을 아뢰어, 소모별감이 되기를 자청하고, 박위(朴葳)를 따라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정지연(鄭芝衍) 현 아전 국룡(國龍)의 아들이다. 처음으로 가문을 일으켜서 첨의찬성이 되었다.
본조 정인지(鄭麟趾) 지연의 오대 손이다. 갑오년 과거에 나이 19세로서 장원하였고, 정미년 중시에 또 장원하였다. 대각의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고, 오랫동안 대제학을 맡았다. 여러 번 인재를 천거하는 공거(貢擧)를 맡아 그의 문하에서 당시 명사가 많이 나왔다. 정난(靖難)ㆍ좌익(佐翼)ㆍ익대(翊戴)ㆍ좌리(佐理)라는 네 가지 공신이 되어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83세까지 살았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정초(鄭招)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났고,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정수충(鄭守忠) 경사(經史)에 정통하고 행실이 있었다. 세조조에 좌익(佐翼) 공신으로써 하원군(河原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신증』 정경조(鄭敬祖) 인지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평안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정여창(鄭汝昌) 8세 때에 중국 사신 장녕(張寧)이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여창이라 이름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성종이 특히 참봉으로 제수하여 표창하였다. 과거에 올랐다가 무오년 사화에 걸려 들어서 귀양갔다가 죽었다. 지금 임금 13년에 의정으로 증직하여 봄ㆍ가을에 제사를 내리고 해마다 그의 집에 양식을 보냈다.
【제영】 일변호호연창해(一邊浩浩連滄海) 정예(鄭枻)의 시에, “일변은 넓디넓은 창해와 연했고, 삼면은 높고 높은 벽산(碧山)이 솟아 있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세조 7년에 치소(治所)를 섬강(蟾江)가로 옮겼다 옛 치소는 양경산(陽慶山) 남쪽 3리에 있다. 숙종 28년 섬강을 관문으로 삼고, 진주(晉州)의 악양(岳陽)ㆍ화개(花開) 등 사면을 나누어 소속시키고, 이듬해에 치소를 진답면(陳畓面) 두곡(豆谷)으로 옮겼다가, 또 이듬해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영종(英宗) 6년에 치소를 나동(螺洞)에 옮기고, 21년에 또 항촌(項村)으로 옮겼다. 읍호는 청하(淸河)이다.
【토산】 닥종이[楮]ㆍ김[海衣].
【누정】 해산루(海山樓)ㆍ계영루(桂影樓) 부내(府內)에 있다. 서해루(誓海樓) 강소(舡所). 평사역(平沙驛) 북쪽으로 40리에 있는데, 진주로부터 와서 소속되었다.
【방면】 동면(東面) 처음이 37리, 끝이 50리이다. 고현(古縣)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팔조(八助)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마전(馬田)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서량곡(西良谷)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진답(陳畓) 서북쪽으로 처음이 1리, 끝이 15리이다. 북면(北面)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내횡포(內橫浦) 동쪽으로 끝이 40리이다. 외횡포(外橫浦) 동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적량(赤良)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악양(岳陽)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이다. 화개(花開)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1백여 리이다.
【진도】 두치진(豆治津) 서쪽으로 5리, 통광(通光)의 남쪽이다. 섬진(蟾津) 남쪽으로 30리이다.
【창고】 읍창ㆍ두곡창(豆谷倉) 섬강 가에 있다. 고읍창(古邑倉) 양경산(陽慶山) 남쪽에 있다. 해창(海倉) 사근포(沙斤浦)에 있다. 목도창(牧島倉) 목도에 있다.
【고읍】 악양 서북쪽으로 40리, 본래 신라 소다사(小多沙)인데, 경덕왕 16년에 악양이라 고쳐 하동군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에 진주에 소속되었다가, 본조 중종 13년에 의창(義倉)을 두었고, 숙종 28년에 와서 소속되었다. 화개 북쪽으로 30리, 본래 신라현 땅인데, 경덕왕 16년에 합포(陜浦)라 고쳤다. 고려 현종 9년에 진주에 소속되었다가 후에 강등시켜 화개부곡이 되었다. 본조 숙종 28년에 와서 소속되었는데, 동쪽으로 진주와 1백 10리, 서쪽으로 악양과 20리 떨어졌다. 이상 두 현은 지리산 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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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 경상도(慶尙道)
곤양군(昆陽郡)
동쪽으로는 사천현(泗川縣) 경계까지 28리이고, 북쪽으로 진주 경계까지 37리이며, 서쪽으로 하동현 경계까지 9리이고, 남쪽으로 남해현 경계까지 45리인데, 서울까지 거리는 9백 5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곤명현(昆明縣)이며, 신라 때 칭호는 자세하지 않다. 고려 현종이 진주에 예속시켰고, 본조 세종 원년에 군 북쪽 소곡산(所谷山)에다가 어태(御胎)를 안치하고, 남해군(南海郡)을 합쳐서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시켰다. 19년에 다시 갈라서 남해현을 설치하고, 진주 김양부곡(金陽部曲)을 내속시켜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곤명(昆明)ㆍ곤남(昆南)ㆍ철성(鐵城)ㆍ곤산(昆山).
【성씨】 본군 유(兪)ㆍ전(全)ㆍ문ㆍ현ㆍ백, 강(康)ㆍ유(柳)ㆍ조(趙) 모두 내성(來姓)이다.유실(有實) 이ㆍ성. 다음(多音) 문 속성(續姓)이다.
『신증』 【풍속】 습속이 검소하고 솔직함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산천】 동곡산(銅谷山) 군 북쪽 3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소곡산(所谷山) 군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봉명산(鳳鳴山) 군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산에 봉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우산(牛山) 객관 남쪽에 있다. 금오산(金鰲山) 군 서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병요산(甁要山)이라 하기도 한다. 바다 군 남쪽에 있다. 노량(露梁) 군 남쪽 45리 지점에 있다. 남해현에 들어가는 자는 여기를 경유하여야 하며, 옛날에는 만호영(萬戶營)이 있었다. 아방포(牙方浦) 군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모랑포(毛郞浦)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성창포(城倉浦)ㆍ염전포(鹽田浦)ㆍ구량포(仇良浦) 아울러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율포(栗浦) 군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진제포(辰梯浦)ㆍ김양포(金陽浦) 모두 군 남쪽 18리 지점에 있다. 포곡포(蒲谷浦) 포곡소에 있다.
『신증』 대포(大浦)ㆍ강주포(江州浦) 모두 군 동쪽 20리 지점에 있으며, 모두 어장이 있다. 반룡포(盤龍浦) 군 동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진주ㆍ사천의 경계이다.
【토산】 문어ㆍ대구[大口魚]ㆍ굴[石花]ㆍ전복[鰒]ㆍ은어[銀口魚]ㆍ오징어[烏賊魚]ㆍ전어ㆍ홍어ㆍ낙지[絡締]ㆍ게[蟹]ㆍ실미역ㆍ해삼ㆍ김[海衣]ㆍ감ㆍ유자ㆍ석류ㆍ송어ㆍ표고[香蕈]ㆍ차ㆍ꿀[蜂蜜]ㆍ대[竹]. 『신증』 농어ㆍ숭어[秀魚]ㆍ조기[石首魚]ㆍ담채(淡菜).
【성곽】 읍성(邑城) 석축이다. 둘레는 3천 7백 65척이고, 높이는 12척이다. 성안에 우물 셋, 못 셋이 있다.
【봉수】 우산 봉수(牛山烽燧) 동쪽으로 진주 각산(角山)에 응한다.
『신증』 【누정】 이섭정(利涉亭) 노량(露梁)에 있다.
【학교】 향교 군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완사역(浣紗驛) 군 북쪽 18리 지점에 있다. 양포역(良浦驛) 현 서쪽 25리 지점에 있다. 봉계원(鳳溪院) 완사역 북쪽에 있다. 완사원(浣紗院) 군 동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노량원(露梁院) 노량 북쪽 언덕에 있다.
『신증』 【교량】 진교(辰橋) 군 서쪽 18리 지점에 있다. 이맹사(理盲寺) 못의 용이 이 다리 밑으로 옮겨왔다 하여 이런 이름이 되었다.
【불우】 서봉사(棲鳳寺)ㆍ영악사(靈岳寺) 아울러 봉명산에 있다. 영월사(迎月寺) 금오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의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옛 곤명현(昆明縣)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지금 곤명리로 되어 있다. 하읍 폐현(河邑廢縣) 본래 포촌현(浦村縣)이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하동군 속현으로 만들었던 것인데, 본조에서 이 고을에 이속시켰다. 유실부곡(有實部曲)ㆍ금양부곡(金陽部曲) 군 동쪽 45리 지점에 있다. 포곡소(蒲谷所)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반룡소(盤龍所)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다음향(多音鄕) 군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명환】 본조 하경리(河敬履)ㆍ남우량(南祐良) 모두 치적이 있었다.『신증』 채침(蔡忱).
【제영】 원수의촌곽(遠樹依村郭) 최선복(崔善復)의 시에, “먼 곳 나무는 마을 성을 의지했고, 긴 길은 들다리로 들어온다.” 하였다. 촌려식교조(村閭識敎條) 김효정(金孝貞)의 시에, “이졸들은 맞이하고 보내는 데에 수고하고, 여염촌 사람도 교지 조목을 안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사천(泗川)에 두었다가 이어 군으로 세웠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진보】 혁폐 노량진(露梁鎭) 노량진(露梁津) 북쪽 언덕에 있으며 옛날에 수군만호가 있었다.
【토산】 홍합(紅蛤).
【방면】 동부(東部) 끝이 7리이다. 서부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성방(城防)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가리(加利) 동북쪽으로 처음이 8리, 끝이 30리이다. 남포(南浦)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소곡(所谷)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곤명(昆明)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이다.
○ 유실(有實)부곡은 5리이고, 다음향(多音鄕)은 동쪽으로 20리, 포곡소(浦谷所)는 동쪽으로 10리, 반룡소(盤龍所)는 동쪽으로 15리이다.
【진도】 노량진(露梁津) 서남쪽으로 45리인데, 남해로 들어가는 이는 여기를 경유하여야 한다.
【교량】 진교(辰橋) 서쪽으로 18리이다. 병교(幷橋) 금성강(金城江)에 있다.
【창고】 창삼(倉三) 읍내에 있다. 제민창(濟民倉) 남산 바깥에 있다. 현창(縣倉) 금양면( 金陽面)에 있다.
【고읍】 성량(省良) 서쪽으로 45리이며, 본래 신라의 현(縣) 땅이다. 경덕왕 16년에 성량이라 고쳐 하동군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 때 강등시켜 금양(金陽)부곡이 되었다가 진주에 소속되었다. 본조 태종 때에 남해에 소속시켜 해양(海陽)이라 불렀으며, 세종 19년에 다시 진주에 소속시켰다가, 후에 다시 내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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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 경상도(慶尙道)
사천현(泗川縣)
동쪽으로 고성현 경계까지 23리이고, 남쪽으로 진주 경계까지 25리이며, 서쪽으로 같은 주 경계까지 5리이고, 북쪽으로는 같은 주 경계까지 6리인데, 서울과는 9백 7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사물현(史勿縣)이다. 경덕왕이 사수(泗水)라 고쳐서 고성군에 예속시켰고, 고려 초에는 진주에 이속시켰다. 현종이 사주(泗州)라 고쳤고 명종이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조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현감으로 만들었다가, 뒤에 진을 두어 병마사로써 판현사(判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세종조에는 병마첨 절제사라 명칭을 고쳤고, 그 뒤에 다시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사물(史勿)ㆍ사수(泗水)ㆍ사주(泗州)ㆍ동성(東城).
【성씨】 본현 이ㆍ황ㆍ오ㆍ목(睦), 서ㆍ정(鄭)ㆍ강(姜) 진주(晉州). 김 속성(續姓)이다.
『신증』 【풍속】 습속이 무예를 숭상한다 관풍안에 있다.
【형승】 최남방 요해지이다 권기(權技)의 기문에 있다. 비옥한 들판을 굽어보니 여러 봉우리가 기이하고 빼어나다 신석조(辛碩祖)의 기문에 있다.
【산천】 두음벌산(豆音伐山) 현 동쪽 6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귀룡산(歸龍山) 현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와룡산(臥龍山)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진주 편에도 보라. 성황산(城隍山) 현 남쪽에 있다. 바다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통양포(通洋浦) 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구량도(仇良島)ㆍ심수도(沈水島)ㆍ초도(草島)ㆍ저도(楮島) 모두 작은 섬이며 현 남쪽 바다 복판에 있다. 병풍지(屛風池) 현 안에 있다.『신증』 사수(泗水) 현 남쪽 4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고성 무량산(無量山)에서 나오며 서쪽으로 진주 강주포(江州浦)에 흘러든다.
【토산】 석류ㆍ유자ㆍ미역ㆍ석이버섯[石蕈]ㆍ모래무지[鯊魚]ㆍ전복[鰒]ㆍ조개ㆍ문어ㆍ황어ㆍ은어[銀口魚]ㆍ게[蟹]ㆍ굴[石花]ㆍ해삼ㆍ꿀[蜂蜜]ㆍ지황ㆍ홍어ㆍ매실ㆍ대[竹]ㆍ감ㆍ죽전(竹箭) 옥산(玉山)에서 생산된다.『신증』 조기ㆍ숭어ㆍ낙지.
【성곽】 음성 석축이며, 둘레는 5천 15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봉수】 안점 봉수(鞍岾烽燧)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남쪽으로 진주 각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같은 주 망진산(望晉山)에 응한다.
【궁실】 객관 신석조의 기문에, “우리 고을 영산(靈山) 수령 조후 보인(趙侯寶仁)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사천현에 옛날에는 성이 없었다. 임술년에 나의 선정(先正) 병조 참판께서 명을 받아 도체찰사가 되어서, 현 북쪽 4리쯤에 터를 살피다가 알맞은 곳을 구해서 성을 쌓았다. 현 태수 안후(安侯)가 관사를 옮겨 짓기 시작하였으나 공역하는 중도에 갈려 갔고, 을축년 봄에 지금 태수 송희경(宋希瓊)이 이어 왔다. 그리하여 놀고 있는 자를 부려서 두어 달이 못 되어 완성하였다. 청사와 행랑이 모두 70여 칸인데 제도가 굉장하고 단청이 선명하다. 한 고을의 해야 할 일을 마쳤으나 기문을 지을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유감이다. 내가 송후와 같은 도에서 벼슬하였고 평소부터 친분이 있으니, 자네는 나를 보아서 기문을 지어 주게.” 하였다. 나와 조후(趙侯)와는 고향 사람이요 친척이다. 또 송후의 풍채를 사모한 지 오래였으므로, 문사가 졸렬하다는 것으로써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내 일찍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상고해 보니, 사천은 본래 신라 사물현(史勿縣)이었고, 또 동성(東城)이라고도 하였다. 바닷가에 위치하여서 지역이 가장 궁벽지고 또 멀다. 고을 된 지는 오래이고, 또 왜국과는 요충 지대에 해당하나, 일찍이 성곽이 없었다. 그리하여 옛날 고려 말기에는 왜적이 침입하는 길이 되었던 것이다. 다행하게 우리 성조(聖祖)를 만나 은택과 위엄이 멀리 미치니, 이국(異國)이 모두 복종하였다. 바다에는 물결이 일지 아니하고 백성은 편하게 지내니, 요해지에 방어 시설을 하는 것이 진실로 중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편안할 때 위태함을 잊지 않는 천만 년 장구한 염려로 급하게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성상께서 특별히 살피고 염려하시어 성 터를 살피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중에 솟은 성이 금성탕지(金城湯池)와 같이 장하게 되었다. 그때 한창 옮기느라고 관아와 객관 따위의 온갖 건설하는 공역이 매우 거창하였다. 관장이 된 자가 만약 인덕과 위엄이 없고 일을 분별하는 재간이 있는 자 아니면 누가 능히 감당하였으리요. 지난 해에 안후가 이미 앞에서 잘 시작 하였고, 송후가 능히 안후의 뜻을 이어서 미처 다하지 못한 것을 더욱 닦았던 것이다. 그러나 재물을 허비하지 아니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아니하면서, 해사(廨舍)를 건축하여 읍을 옮기는 공을 성취하였다. 이 점을 특별히 적어서 후세에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조후가 남의 착함을 들춰내는 뜻도 또한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이 읍을 옮긴 시초는 우리 선인께서 모두 계획했던 것인데, 몇 십 년이라는 오랜 시일을 지나서 오늘날 기문 짓는 것을 멀리 나에게 부탁하게 되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또 들으니, 그 지역 산수가 한 지방에 첫째이며, 동헌이 빼어난 곳에 자리하여 비옥한 들판을 굽어보고, 여러 봉우리가 기이하게 빼어났으며, 시냇물이 옆에 흐르고 밀물과 썰물이 골 입구에 들어오며, 또 뜰 밑에는 못을 파고 연을 심어서 맑은 향기가 좌석에 가득하다. 그리하여 만 가지 경개가 좌석 아래에 펼쳐져 있다 한다. 만약 사명을 받들고, 한 번 가서 후를 따라 함께 관람하게 된다면, 다시 붓을 잡고 시를 지어서 평소에 한 번 보고 싶어하던 심정을 펴리라. 이것으로 기문한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남쪽으로 오면서 가는 곳마다 깨끗하게 높지 않은 곳 없네. 삼신산이 보일 듯 바다 머리 가까운 곳이라. 외딴 섬에 연기 비꼈는데 심수(深水) 저물었고, 거친 성에 해 지니 각산(角山)에 가을이로다. 놀랜 물결 밤에 교룡굴을 흔들고, 잔설의 향기가 유자 물가에 풍긴다. 사문(斯文) 양태수(楊太守)는 진중도 하다. 한 잔 술 마시며 웃는 것도 또한 풍류로세.” 하였다.
『신증』 【누정】 영화루(永和樓) 곧 객관 문루이다. 재경루(齋景樓) 객관 동쪽에 있다. 침오정(枕鼇亭) 객관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현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동계역(東溪驛)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관율역(官栗驛) 현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현 남쪽 3리 지점에 있다. 마월원(麽月院)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가곡원(可谷院)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불우】 귀룡사(歸龍寺) 귀룡산에 있다. 적선사(積善寺)ㆍ흥보사(興寶寺) 모두 와룡산에 있다. 배방사(排房寺) 옛날 명칭은 노곡(蘆谷)이며 와룡산에 있다.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 절에 우거하면서 뱀 새끼를 보고 시를 짓기를, “작디 작은 뱀 새끼 약포의 울타리를 도는구나. 온몸에 붉은 무늬가 제대로 아롱졌다. 항상 숲 밑에만 있다고 말하지 말라, 하루아침에 용되기 어렵지 않으리라.” 하였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산성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능화봉(陵華峯) 와룡산(臥龍山)에 있다. 고려 안종(安宗)을 능화봉 밑에 장사하였으므로 지금도 그 골 이름을 능화리(陵華里)라 한다. 처음에 경종(景宗)의 비 황보씨가 궁에서 나와 사제에 있었다. 하룻밤에는 곡령(鵠嶺)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었더니, 도성에 흘러 넘쳐서 모두 은(銀)바다로 되는 꿈을 꾸었다. 점쟁이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한 나라에 임금이 될 것이요.” 하니, 비는, “내가 과부인데 어찌 아들을 낳으랴.” 하였다. 종실(宗室) 욱(郁)은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다. 살고 있는 집이 비의 사제와 가까웠다. 그리하여 서로 왕래하다가 사통하여 임신하였다. 성종 때에 비가 욱의 집에서 자는데, 그 집 사람이 뜰에다가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관리들이 달려가 구원하고 성종 또한 황급히 가서 불이 난 이유를 물었다. 그 집 사람이 사실을 아뢰니 비는 부끄러워 후회하였다. 자기 집으로 돌아와 문에 이르자 말자 산기(産氣)가 있어 문 앞 버드나무를 부여잡고 몸을 풀었으나 비는 죽었다. 그 연유로 욱은 사천현에 유배되었다. 그리하여 보모를 택하여 그 아이를 길러서 마침내 욱에게 돌려보냈는데 이 아이가 곧 현종이었다. 욱이 문장을 잘하여 귀양갈 때에 압송한 내시 고현(高玄)에게 시를 지어 주었는데, “같은 날에 그대와 함께 서울에서 나왔으나, 그대는 먼저 돌아가고 나는 못 가네. 여관 우리 속에서는 스스로 원숭이같이 갇힘을 슬퍼하고, 이정(離亭)에서는 또 말이 나는 듯 달림을 부러워하네. 서울 봄 경치는 꿈속에서나 볼까. 바닷가 풍경에 눈물이 옷을 적신다. 임금의 한 말씀 고치지 않으리니, 이 몸은 마침내 바닷가에서 늙으리라.” 하였다. 욱은 또 지리에 정통하였다. 일찍이 현종에게 금(金) 한 주머니를 몰래 주면서,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지관에게 주고, 나를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歸龍洞)에 장사하여라. 그리고 반드시 엎어서 묻도록 하라.” 하였다. 욱이 귀양 사는 곳에서 죽은 뒤에 현종이 그의 말과 같이 하였는데, 매장할 무렵에 엎어서 묻도록 청하니, 술사가, “무엇이 그리 바쁜가.” 하였다. 다음해 2월에 현종은 서울에 돌아갔다. 즉위하여서는 욱을 추존하여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하고, 묘호를 안종(安宗)이라 하였다. 그 뒤에 건능(乾陵)에 이장(移葬)하였다. ○ 남재(南在)의 시에, “와룡산은 남쪽 바닷가에 있어 왕자가 그 시절에 멀리 와서 놀았네.옛 무덤 뭉개지고 가을 풀 무성한데, 찬 까마귀 울어서 석양 시름을 보내네.” 하였다.
관해곡소(觀解谷所)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성황산성 석축이며 둘레는 천 9백 41척이다. 성 안에 샘 하나, 못 하나가 있다. 통양창성(通洋倉城) 현 남쪽 17리 지점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3천 86척인데, 곧 옛날 세를 거두던 곳이다.
【명환】 본조 하경리(河敬履) 의심되는 옥사를 잘 분변하였다.
【인물】 고려 강오(姜祦) 충숙왕(忠肅王)을 도와서 공신이 되었다. 벼슬이 정의대부 상호군에 이르렀고, 진변만호(鎭邊萬戶)로 제수되었다. 목인길(睦仁吉) 공민왕을 도와서 공신이 되었고, 벼슬은 문하찬성사에 이르렀다.
본조 목진공(睦進恭) 태조조에 호조 참판이었다.
【효녀】 본조 최소하(崔小河) 일찍이 아비를 여의고 어미 하씨(河氏)는 부녀병을 앓았다. 꿈에 아비가 말하기를, “만약 산 사람 뼈를 약으로 쓴다면 병을 고칠 수 있다.” 하니, 곧 무명지를 끊어 술에 타서 먹게 하여 병이 나았다. 일이 알려져서 불러 들여 참봉으로 임명되었다.
『신증』 최석간(崔碩澗) 어미가 오래 된 병으로 온갖 약이 효과가 없었다. 석간이 손가락을 끊어 술에 타서 먹게 하였더니 병이 곧 나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려하였다. 검동(檢同) 사삿집의 천인(賤人)이다. 아비가 악질에 걸렸으므로 손가락을 끊어 술에 타서 먹게 하여서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려되었다.
【제영】 옹중고허춘초몰(翁仲故墟春草沒) 김영원(金永源)의 시에, “옹중 옛 터에 봄 풀이 무성한데, 와룡산 빛이 아직도 시름을 머금었다.” 하였다. 부감창명만장청(俯瞰滄溟萬丈淸) 김순(金淳)의 시에, “높은 다락집이 멀리 층층으로 성에 기댔는데, 굽어보니 푸른 바다가 만 길이나 맑구나. 백대의 흥망속에 인물이 변했는데, 청산만 부질없이 고금의 정을 머금었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상주내(上州內) 끝이 5리이다. 동면(東面) 처음이 5리, 끝이 25리이다. 근면(近面) 위와 같다. 중남(中南) 처음이 7리, 끝이 30리이다. 하남(下南)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상서(上西) 처음이 5리, 끝이 13리이다. 하서 끝이 5리이다. 북면(北面) 처음이 5리, 끝이 12리이다. 삼천(三千) 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이다. 고성면(固城面) 경계에 넘어가 있다.
○ 관해곡소(觀海谷所)는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진보】 혁폐 삼천포보(三千浦堡) 남으로 20리에 있는데, 진주(晉州)로부터 통양포(通陽浦)에 옮겼다. 성종(成宗) 19년에 성을 쌓고 권관(權管)을 두었는데 후에 고성으로 옮겼다.
○ 선조 정유왜란에 석만자(石曼子)가 이곳을 근거로 일어났다. 울산의 도산(島山)과 순천의 왜교(倭橋)를 삼굴(三窟)이라 칭한다. 이 보에 있는 성을 왜증성(倭甑城)이라 칭한다.
【창고】 읍창(邑倉)ㆍ병창(兵倉) 중남면(中南面)에 있다. 남창(南倉) 하남면(下南面)에 있다. 제민창(濟民倉)ㆍ통양창(通陽倉) 고려 12개 조창(漕倉)의 하나이다.
○ 창성현(倉城縣)은 남쪽으로 17리에 있는데 나무로 쌓았고, 둘레는 3천 86척으로 선조 정유왜란 때 석만자가 이곳을 또한 근거로 하였다.
【누정】 비우당(備虞堂) 남쪽으로 20리에 있는데 배가 정박한다.
【사원】 귀계서원(龜溪書院) 광해주 신해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 문묘 편에 보라. 이정(李禎) 자는 강이(剛而), 호는 귀암(龜巖), 본관은 사천(泗川)인데,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이다. 김덕함(金德諴) 자는 경화(景和), 호는 성옹(醒翁), 본관은 상산(商山), 벼슬은 대사헌(大司憲),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주-D001] 바다에는 물결이 일지 아니하고 : 이 말은 바다가 평온하여 바다 도적이 없다는 말인데, 시절이 태평하다는 말로 쓰인다.
- [주-D002] 김덕함(金德諴) : 저본에는 '金德誠'으로 되어 있으나 오류이므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익성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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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 경상도(慶尙道)
남해현(南海縣)
동쪽으로 진주 경계까지 40리이고, 서쪽으로 바닷가까지 15리이며, 남쪽으로 바닷가까지 36리이고, 북쪽으로 노량까지 38리이며, 서울까지는 1천 45리 거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이었다.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이 현령을 두었던 곳이나, 공민왕 때에 왜적에게 땅을 빼앗기고, 진주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에 우접하였다. 본조 태종조에 하동과 합쳐서 하남현(河南縣)이라 일컫다가 뒤에 다시 하동현을 설치하고, 진주의 금양부곡을 내속시켜서 해양현(海陽縣)이라 일컬었다. 얼마 안 되어 금양을 진주에 환속(還屬)하고 다시 남해라 하였으며, 세종조에는 곤명현과 합쳤다가 다시 쪼개고 그대로 현령을 두었다. 전하(殿下) 4년에 현 사람이 구례(求禮) 백성 배목인(裵目仁)과 서로 연결해서 모반했으므로 현감으로 강등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신증』 연산군(燕山君) 4년에 현감으로 강등되었고, 지금 임금 2년에 다시 현령을 두었다.
【군명】 전야산(轉也山)ㆍ해양(海陽)ㆍ전산(轉山)ㆍ화전(花田)ㆍ윤산(輪山) 관풍안에 있다.
【성씨】 본현 배ㆍ김ㆍ백ㆍ진(陳), 제(諸) 촌성(村姓)이다.난포(蘭浦) 정(鄭)ㆍ박ㆍ고 촌성(村姓)이다.평산(平山) 조(趙)ㆍ배ㆍ백ㆍ조(曺)ㆍ화(和) 촌성(村姓)이다.
【형승】 진도(珍島)ㆍ거제(巨濟)와 함께 솥발처럼 우뚝한 것이 하늘 남쪽에 훌륭한 곳이다 모두 정이오의 기문에 있다.
【산천】 망운산(望雲山)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소흘산(所訖山)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원산(猿山) 현 남쪽 16리 지점에 있다. 녹두산(鹿頭山) 현 북쪽 23리 지점에 있다. 금산(錦山) 현 동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성현(城峴) 현 남쪽 24리 지점에 있으며 요해처이다. 미조항(彌助項) 현 동남쪽 87리 지점에 있다. 노량(露梁)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적량(赤梁) 현 동쪽 41리 지점에 있다. 동천곶(凍川串)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둘레가 55리이며 목장이 있다. 상주포(尙州浦) 현 남쪽 45리 지점에 있다.
관음포(觀音浦) 현 북쪽 21리 지점에 있다. 신우 때에 원수 정지(鄭地)가 수군을 거느리고 여기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왜적이 우리에게 패전한 것은 이 싸움에서 처음이었다.
○ 정이오의 시에, “망운산 아래에서 돛배 바람 바라보니, 동서로 오가는 배가 통행한다. 영웅의 당시 일을 묻지 마소. 지금도 사람들이 첫째 공이라 기쁘게 말한다네.” 하였다.
대포(大浦)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파천포(巴川浦)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난포(蘭浦)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이상은 아울러 어장(魚場)이 있다. 차산포(車山浦) 현 동쪽 6리 지점에 있다. 평산포(平山浦)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두음포(豆音浦) 현 동쪽 22리 지점에 있다. 염전포 (鹽田浦)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호을포(湖乙浦)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모답포(毛沓浦)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가을곶포(加乙串浦) 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이상은 모두가 염밭이다. 소도(蘇島) 현 동쪽 6리 지점에 있으며, 온 섬이 모두 동백이다.
【토산】 살조개[江瑤柱]ㆍ문어ㆍ홍어ㆍ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조개ㆍ대구[大口魚]ㆍ석류ㆍ유자ㆍ석이버섯[石蕈]ㆍ미역ㆍ애끼찌[弓幹桑]ㆍ비자(榧子)ㆍ닥종이[楮]ㆍ청어ㆍ모래무지[鯊魚]ㆍ홍합ㆍ송이[松蕈]. 『신증』 낙지[絡締]ㆍ준치[眞魚]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농어ㆍ해삼ㆍ치자.
【성곽】 읍성 석축인데, 둘레는 2천 8백 76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 안에 우물 하나, 샘 다섯이 있는데 사시로 마르지 않는다.
○ 정이오의 기문에, “남해현은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진도ㆍ거제와 함께 솥발처럼 우뚝하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지역이 왜국과 아주 가까워서, 경인년부터 왜적에게 침략을 당하기 시작하여, 붙들려 가기도 하고, 이사하기도 하여 군의 속현인 평산ㆍ난포가 쓸쓸하게 사람이 없었다. 8년이 지난 정유년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진양 선천(鐥川)의 들판에 거처하였다. 그리하여 토지도 지키지 못하고, 공물과 부세도 바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판도(版圖)에 기재된 재물과 부세가 나오는 곳이, 모두 풀이 무성한 사슴의 놀이터로 되어버렸고, 왜구들의 소굴이 된 지가 46년이었다. 그러나 계모가 있는 신하와 지략이 있는 장수의 빈틈없는 책략으로 선함을 수리하여 수전에 대비하고, 성과 해자를 설치하여서 수비를 엄하게 하니, 왜적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나날이 쇠하여졌다.
지금 임금이 즉위한 지 4년만에, 우수(雨岫) 임덕수(任德秀)를 등용하여 구라량 만호(仇羅梁萬戶)로 삼고, 겸하여 이 고을의 현령이 되게 하였다. 후가 와서는 계획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어서, 이로운 사업을 일으키고 민폐를 없애니, 군무(軍務)가 정비되고 민사 또한 거행되었다. 그러나 지역이 좁고 험하여서 백성들이 옛날에 살던 곳을 생각하였다. 후가 이 말을 듣고 민중과 협의한 다음,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최유경(崔有慶)공에게 사유를 갖추어서 조정에 알리도록 청하였다. 그리고 이웃 고을, 하동ㆍ사천ㆍ명주(溟州)ㆍ고성(固城)ㆍ진해 등 다섯 고을 사람을 동원하여, 고현 외딴 섬 복판에 성을 쌓았는데, 돌로 포개어 견고하게 하고 해자를 파서 못을 만들었다. 2월에 일을 시작해서 3월에 준공하였다. 남해 백성들이 죄다 돌아와서 그 밭을 갈고 그 집을 꾸며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며 즐기고 화락하였다. 물고기ㆍ소금ㆍ벼ㆍ따위 이익이 장차 지난 날의 부유함을 회복하리니, 이에 기문이 없을 수 없다. 후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청하였다.
내 생각하니, 왕(王)이나 공(公)이 요해지를 방비하여, 그 나라를 지키는 것은 《주역》의 가르침이요, 이 성을 쌓고 이 못을 파서 죽기를 기약하고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맹자》의 격언이다. 그러므로 주(周) 나라가 북방에 성을 쌓으니, 험윤(玁狁)의 난(難)이 없어지고, 정(鄭) 나라에서 호뇌(虎牢)에 성을 쌓으니 초인(楚人)으로 인한 걱정이 없어졌으며, 우리나라에도 바닷가 고을에 성을 쌓으니 왜구의 침해가 그치게 되었다. 대개 성보(城堡)로 지키면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제어할 수 있고,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대적할 수 있으며, 편한 것으로써 수고하는 것을 대적할 수 있게 된다. 하물며 이 고을은 남방의 훌륭한 지역으로서, 해산물의 풍족함과 토산물의 풍부함이 나라 쓰임에 꼭 필요한 것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리고 진도와 거제를 부흥하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지금 바다에는 쓸만한 수군이 있고, 성곽에는 지킬 수 있는 누(樓)와 순(楯)이 있으며, 주야로 조심하는 봉수(烽燧)가 있으니, 흉악한 적을 방어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구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딴 섬, 외로운 성에 외방의 구원이 없다 하여, 베개를 높이 베고 편하게 눕지 못한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나는 장차 돛대를 두드리며 남해 터를 죄다 찾아다니고, 성루의 난간 위에서 술을 들며 국가에서 인재를 얻었음을 경하하리라.” 하였다.
【관방】 평산포영(平山浦營) 석성이 있으며, 둘레는 1천 5백 58척이다. ○ 수군만호가 1명이다.
성고개보(城古介堡) 현 남쪽 22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는 7백 60척이다. ○ 권관(權管)을 설치하여 방어한다.
우고개보(牛古介堡)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 있으며 둘레가 9백 13척이다. ○ 권관을 설치하여 방어한다.
『신증』 미조항진(彌助項鎭) 현 동쪽 87리 지점에 있다. 성화(成化) 병오년에 진이 설치되었다. 그 뒤에 왜적에게 함락되어 혁파했다가 가정 임오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석축이며 둘레는 2천 백 46척이고 높이는 11척이다. ○ 수군첨절제사 1명이다.
곡포보(曲浦堡)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9백 60척이고, 높이는 11척이다. 가정(嘉靖) 임오년에 우고개보(牛古介堡)를 혁파하고 여기에다 옮겼다. ○ 권관을 설치하여 방어한다.
상주포보(尙州浦堡) 현 남쪽 60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9백 85척이다. 가정 임오년에 성고개보를 혁파하고 여기에다 옮겼다. ○ 권관을 설치해서 방어한다.
【봉수】 금산 봉수(錦山烽燧) 북쪽으로 진주 대방산(臺方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소흘산(所訖山) 및 원산(猿山)에 응한다. 소흘산 봉수 동쪽으로 금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원산에 응한다. 원산 봉수(猿山烽燧) 동쪽으로 금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소흘산에 응한다.
『신증』 【누정】 주변루(籌邊樓)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덕신역(德新驛) 현 북쪽 35리 지점에 있다. 노량원(露梁院) 노량 남쪽 억덕에 있으며, 현 북쪽 40리 거리이다.
【불우】 보리암(菩提庵)ㆍ상도솔암(上兜率庵)ㆍ중도솔암(中兜率庵) 모두 금산에 있으며 남쪽 바다를 굽어본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19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현 산성(古縣山城) 현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1천 7백 40척이고 높이는 10척이다. 관당성(官堂城) 현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7백 20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난포 폐현(蘭浦廢縣) 본래 신라 내포현(內浦縣)이며 본 섬 안에 있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내속시켰으며, 현 동쪽 21리 지점에 있다. 평산 폐현(平山廢縣) 본래 신라 평서산현(平西山縣)인데, 서평(西平)이라 하기도 한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내속시켰으며,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우산소(于山所)ㆍ미조항고진(彌助項古鎭)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8백 35척이다.
『신증』 【유우】 본조 김전(金詮) 연산조에 귀양갔다.
【효자】 고려 함부(咸富) 낭산도(狼山島) 백성 능선(能宣)의 딸이다. 아비가 죽자 침실에다가 빈소를 차리고, 5개월이나 찬을 받들기를 생시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성종 9년에 정문하고 요역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섬에서 나오게 하고, 소원에 따라 호적을 주현(州縣)에 편입시켰다.
【제영】 운개오배삼산근(雲開鰲背三山近) 권맹손(權孟孫)의 시에, “자라 등에 구름 트이니 삼신산이 가깝고, 바람은 고래 같은 물결을 말아 올려서 만리에 아득하다.” 하였다. 염점연청해초향(鹽店煙靑海草香)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장기(瘴氣) 끼는 귀로에 풍경 적으나, 염점에 연기 푸르고 해초는 향긋하다.” 하였다. 조성편해객(潮聲偏駭客) 김조(金銚)의 시에, “조수 소리는 매우 객을 놀라게 하는데, 신기루는 벌써 물가에 생겼네.” 하였다. 이역내조수도장(異域來朝水道長) 옛 사람의 시에, “성상의 은택이 끝이 없어 바다 바라보는 느낌인데, 섬 오랑캐도 은혜를 사모하여 강포한 버릇 버렸다. 궁벽진 지역이나 편하게 지내니 밥짓는 연기 둘렀고, 이역에서 조회 오는데 물길이 멀다. 태수는 계엄(戒嚴)하면서 화각(畫角)으로 전하고, 사신은 흥이 나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았네. 좋은 때에 훌륭한 경치 만나기 어렵나니, 내 말을 꼴 먹여서 바쁘게 하지 말라.”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토산】 대[竹]ㆍ김[海衣].
【방면】 현내(縣內) 사방 5리이다. 이동(二東) 처음은 10리, 끝이 40리이다. 삼동 처음이 45리, 끝이 90리이다. 남면 끝이 25리이다. 서면 끝이 20리이다. 고현(古縣)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설천(雪川) 동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 우산소(于山所).
【진도】 노량진(露梁津) 북쪽으로 38리, 하동ㆍ곤양으로 통한다.
【목장】 금산곶장(錦山串場)ㆍ동천곶장(凍川串場).
【창고】 읍창ㆍ외창(外倉) 동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조창(漕倉) 노량에 있다.
【사원】 충렬사(忠烈祠) 인조 계유년에 세우고,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이순신(李舜臣) 아산(牙山) 편에 보라. ○ 승첩비(勝捷碑)를 사(祠) 앞에 세웠다.
- [주-D001] 왕(王)이나 공(公) : 왕(王)ㆍ공(公)은 하나의 작(爵)이 아니고 한 지방의 총 책임자로서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다.
- [주-D002] 험윤(玁狁)의 난(難) : 중국 북방, 지금의 내몽고 지방에 살던 민족을, 주 나라 시대에 험윤(玁狁)이라고 불렀고, 후에 한 나라 시대에는 흉노(匈奴)라고 불렀다. 그들은 유목 민족으로 항상 한족에 위협이었는데, 여기 말한 것은 주 나라 선왕(宣王) 때에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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