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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학. 상주문화원 금요사랑방 118강 | 상주학/상주학 제9권
興巖書院의 歷史와 文化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1. 머리말
2. 흥암서원의 설립배경
3. 配享位 동춘당 宋浚吉 4. 흥암서원의 연혁
5. 흥암서원의 文化遺蹟 6. 흥암서원의 儀禮
7. 맺음말 |
흥암서원의 역사와 문화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1. 머리말
흥암서원(興巖書院)은 조선말 서원훼철령에도 존치된 47개 원사중에 옥동서원(玉洞書院)과 함께 상주에 남아 있는 2개 서원 중에 하나로 기호학맥(畿湖學脈)의 종장(宗匠)으로 세칭하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을 독사(獨祠)로 배향한 서원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영남학맥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상주의 정치적 환경에서 영남 최초의 기호학맥 계열의 흥암서원이 설립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으며, 설립 후 성만징(成晩徵), 신석번(申碩蕃), 채지면(蔡之沔) 등 많은 명현을 배출하여 상주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남의 상주라는 지역적 한계에서 그 활동 범위가 좁을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하여 대부분의 상주 인사들은 이른바 기호계열의 인물과 학문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여 어찌면 경도(傾倒)된 성향을 면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근자에 까지 이어져 상주 학술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옛 인물과 문화유적의 현창에 대한 학술적 접근도 인물과 문적(文籍)의 수적인 우위에 따라서 영남학맥에 관한 내용으로 경도(傾度)되고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필자는 지난 2017.10.17.일 대구향교에서 개최된 “조선 중기 사상계(思想界)의 동향과 노소재(盧穌齋)” 라는 주제로 이동환(李東歡)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의 학술강연을 듣고 충격을 받은 바 있어 그가 서술한 맺음말 일부를 여기에 옮겨 보기로 한다.
16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조광조(趙光祖)의 도학근본주의(道學根本主義)가 표방되어 소격서 (昭格署)의 혁파를 계기로 하여 도교(道敎)와 도가(道家)를 위시하여 불교의 잔류분 등, 어 찌면 우리 재래의 비도학적인 풍습까지도 숙정(肅靜)을 받았을 것이다.
축소되어 가던 고려적인 다양성 마저도 아주 사라질 지경이었다. 사상계는 곧 도학으로 일원 화 되어 갔다. 그러나 후일 이황의 주자학절대주의(朱子學絶對主義)에 비하면 최소한의 다양 성은 그래도 확보되어 있었던 샘이다.
조광조 시대의 도학은 정주학(程朱學)을 중심으로 그 외곽에 있던 기학(氣學), 상산학(象山 學)을 포함한 도학이었고 이 도학의 자유로운 학습과 사유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 광조의 도학적 권위는 일종의 범도학(凡道學)이 인정되는 바탕 위에서의 것이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시대에 오면 사상의 다양성은 이제 거론할 여지가 없게 되어 갔다. 사대부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이황에 의하여 추동(推動)된 주자학 유일화는 조광조 시대에 허용되었던 최소한의 다양성마저도 보장되지 않았다.
기학 상산학이 비판 내지 통제의 대상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식(曺植) 남언경(南彦 經) 사상에 섞여있는 한 성분에 불과한 장자적(莊子的) 요소마저도 이황의 눈에는 주자학 의 순수를 위해 척결해야 할 대상이었다.
노수신은 바로 이러한 이황의 주자학 유일화에 반기를 든 사상가이다. --- 중략 ---
나는 17세기 송시열에 이르러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죄율로 사상을 억앞했던 주자학(朱 子學) 교조주의(敎條主義)의 성립은 이 16세기 조광조의 도학근본주의와 이황의 주자학 절 대주의 추동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이황의 주자학 절대주의에 저항한 노수신의 사 상사적 위상과 의의는 자명하게 드러난다.
이동환 교수의 핵심적 주장은 조선시대 학문적 사상은 특정 인물이 집요한 자기의 주장에 의하여 합리적 사회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고, 종말에는 선진된 문물에 대한 수용이 늦어지는 가운데 나라가 기울어 졌다는 것을 은연중 표출한 것으로 본다.
우리 상주의 조선시대 학술적 맥락은 단연 영남학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일찍이 이황의 학문에 저항을 하였던 노수신 같은 출중한 인물이 있었고, 서계(西溪) 김담수(金聃壽)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우리 상주 중동에 터잡아 문명을 얻었다. 그리고 숙종 년간에는 기호학맥의 종장인 송준길을 종사(從祀)하는 흥암서원이 설립되어 영남의 어느 지역보다 다양한 학술적 환경을 지닌 고장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오늘의 우리지역 학술계에서도 이교수의 주장을 새겨 역사적으로 다양하였던 상주의 학문세계에 대한 학술적 가치를 알려서 균형있는 사고로 그 지평을 넓여야 할 것으로 본다.
2. 흥암서원의 설립배경
서원은 조선조 중기에부터 보급된 민간의 사학 교육기관으로 존현(尊賢)을 기반으로 하여 양사(養士)를 목적으로 설립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安珦)을 배향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하고 뒤이어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 재직 당시 국가에서 공인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명종 임금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賜額)을 받아 사설 교육기관으로 후대에 까지 이어졌다.
사액서원(賜額書院)에 속하는 사람은 군역(軍役)을 면제받았고 국가에서 간행하는 모든 서책을 배부받아 새로운 학문으로 지식을 넓히는 도장으로 육성하였으며 서원에 속한 토지에는 세금을 면제하는 등 특혜를 주었다.
서원의 본격적인 확산은 16세기 중엽(중종,인종,명종,선조 대) 정계에 진출해 있던 사림(士林)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된 이후 자신들의 학문적 우위와 정치적 입장의 강화를 위해 선배 도학자들을 문묘(文廟)에 제향(祭享)하는 문묘종사 운동을 전개하면서 확산되어 명종 때 이미 29개소가 설립되었고 선조 때는 124개소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특전에 따라 인조 22년(1644)에 영남관찰사 임담(林潭)이 서원 남설(濫設)에 따른 상소가 제기되고부터 효종· 현종 연간을 거치면서 간헐적으로 서원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가 일어나 서원 설립 허가제와 첩설 금지령(疊設禁止令)이 발포되었다.
그러나 숙종 초까지만 해도 남설로 인한 서원의 문란상은 심각하게 인식되지 않아서 서원옹호론이 우세하였으나 1703년(숙종 29)에 이르러 서원에 대한 통제가 적극성을 띠기 시작하였지만 숙종시대에 사색당파가 극심한 가운데도 300여개소의 서원이 새로 설립되었다. 그 원인은 서원에 당색이 유도되면서 허가과정에 집권세력의 주관적인 견해가 작용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효종 현종 시대에 1,2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을 거치면서 당쟁이 한층 격화되었고 1696년(숙종 22)에 송시열을 배향한 화양서원(華陽書院)이 설립되어 그 해 바로 사액을 받아 호서지방(湖西地方)의 노론 중심서원으로서 정치적 기반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에서 노론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지지세력이 열세이었던 남인 세력권의 영남지역에 자파 기호학맥 세력 기반을 구축하는 일환으로 흥암서원이 설립되었다고 하는 것이 대체적인 사실이다.
그기에다가 상주는 영남 남인 당파의 주요 거점으로서 지리적으로 기호지방과 접경이므로 소통 교류에 유익할 뿐만아니라 흥암서원에 배향된 동춘당 송준길은 노론학맥의 종장(宗匠)이었고, 퇴계학맥의 제전제자(再傳弟子)인 거유(巨儒)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사위라는 점이 흥암서원 설립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동춘당과 우복 가문과는 보통의 처가 관계 이상으로 각별하고 깊은 관계를 이어갔다. 동춘당이 결혼 후 얼마되지 않아 큰 처남 정심(鄭杺 ; 1597~1625)이 작고하고 10년째 되던 해에는 장인이 위독하였다. 이 때 그는 장인으로부터 “ 내가 죽거던 나의 염빈상장(殮殯喪葬)과 관계된 일, 문집의 편찬, 그리고 아직도 어린 손자를 잘 보살펴 주기 바란다”고 하는 유언을 받았다
.
우복이 별세할 때 송준길의 나이는 28세 였고 장례에 사제(師弟)의 복을 입어 예를 다하였으며 이 후 장인의 유언을 잘 수행하였다고 한다. 그는 장인의 행장을 지었고, 연보와 문집 편찬에 관여 하였으며 시장(諡狀)과 시호(諡號)를 받는 일에도 앞장서서 주선하였다.
우복의 시장(諡狀)은 그와 막역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어 시호가 내려진 뒤에는 그 전달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하였다. 그는 수시로 처조카 정도응(鄭道應)과 우복집 간행에 따르는 협의를 하면서 처조카의 학업에 대한 기대와 칭찬을 잊지 않았으며 정도응이 조부와 고모부의 기대 만큼 학업을 성취하여 벼슬에 천거되자 그 출처에 대한 조언과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그를 지방관으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두 가문의 인연은 후손들에게 까지 이어졌다.
동춘당은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민씨 가문의 민유중(閔維重)을 사위로 맞이하였고, 민유중의 딸이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되었으니 인현왕후와 우복은 외 증손녀와 외외 증조부 간의 척당관계가 이루어 진 것이다. 이에 따라 송씨와 민씨 집안에서는 후대에 와서도 우복을 지칭할 때 “우복선생”이라 하지 않고 “우복 할아버지”라고 지칭할 정도로 존경과 친밀한 인연을 가졌다고 한다.
우복 가문은 정도응의 손자인 정주원(鄭冑源 ; 1686~1756, 호는 燁洞)대에 그 동안의 세거지 였던 청리 율리를 떠나 우산(愚山)으로 이거 할 때에 영조 임금이 우복의 학덕과 종사에 미친 공적을 기려 우산 일대의 동서 5리, 남북 10리에 이르는 토지를 사패지(賜牌地)로 내린 것이 큰 요인이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이 때 그 일을 주선한 이가 상주목사 송요좌(宋堯佐 ; 1678~1723 호, 默翁)와 경상도관찰사 민백상(閔百祥 ; 1711~1761, 시호 正獻)이었는데, 이들이 각각 송준길과 민유중의 증손자이다.
이 후의 일이지만 인현왕후와 관련한 정치적 사건으로 영조 34년(1758)에 상주에서 일어난 우복신도비 건립에 대하여 상주문화원에서 간행하는 『상주문화 26~27호, 2016~2017』에 졸고 「청대일기에 전하는 상주문화」의 기록 일부를 여기에 전재하여 그 당시 정파간에 민감하였던 실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신도비는 관내 공검면 부곡리에 있다. 현존 기록에 의하면 “정경세 선생의 증손자 정석교가 경상감사 이명준(李命俊)으로부터 기증을 받은 남포석에 비각작업을 하고, 세우지 못하던 것을 현손 정주원(鄭冑源)이 음기를 찬(撰)하고 1758년에 6대손 정종로(鄭宗魯)에 의하여 건립 되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비를 세우기 까지의 속사정이 일기에 소상히 기록되었으니 그 내용을 살펴 보기로 한다.
- 1758년 3월 28일자에 손자 복인이 검호(* 공갈못)에 있는 우복 선생의 비석 만드는 곳에 갔다. 이 비문은 본래 조용주(趙龍洲 *용주는 趙絅의 호)가 찬한 것을 중간에 이갈암(李葛巖 *갈암은 李玄逸의 호)이 찬한 자손록으로 인하여 이전에 새긴 것 까지 깎아내어 올봄에 다시 빗돌을 갈아 ---하략---
라고 하였고 같은해 4월 4일자에는
우복선생의 신도비 새기는 일은 다 마쳐 간다고 한다. 비석이 아주 넓어서 글자의 모양도 크다고 한다. 이 신도비는 숙종 임진년(1692)에 정석교가 석공을 모아 비석을 세우려고 이갈암에게 자손록을 청하였는데, 인현왕후가 선생의 외증손녀가 되고 또 그때 물러나 살았기 때문에 꺼리는 것이 있어서 감히 쓰지 못하였다.
갑술년(1694 * 숙종 24)에 복위되고 몇 년 뒤 사또 송병익(宋柄翼)이 상주목사가 되자 율리 본가에 시켜 그 비문을 깎아 내게 하였다. 그 후에 잘 처리 하기가 곤란하여 그냥 두었다가 올봄에 다시 새기기 시작한 것으로 조용주가 지은 비문만 쓰는 것이다.
위 일기의 내용을 살펴보건데 우복 신도비문은 당초 용주 조경이 찬한 것에 갈암 이현일이 중간에 자손록을 추기한 것인데 그 자손록에는 필시 숙종의 계비이자 우복의 사위인 동춘당 송준길의 외손녀로서 우복의 외증손녀가 되는 인현왕후가 들어 있었으나 인현왕후는 노론 정파 출신이었지만 이른바 장희빈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정파가 집권하게 되는 기사환국(1689)이 일어나 자손록 작성 당시에는 폐서인의 신분이 되었으므로 하여 그 내용을 감히 쓰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다시 노론 정파가 정권을 되 찾게 되는 갑술옥사(1694)가 일어나 마침내 인현왕후는 복위를 하게 되었고, 그 몇 년 뒤 송준길의 손자인 송병익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우복 본가에 조경(趙絅)과 이현일(李玄逸)이 쓴 비문을 깎아내고 조경(趙絅)이 지은 비문을 다시 새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상주의 문화재〉에 수록한 우복 신도비의 찬술자는 정주원이 아니고 용주 조경이 확실하므로 수정함이 마땅하다. |
동춘당이 처가에 대한 대소사의 노력으로 상주지역에서 그에 대한 위상도 높아졌고, 그의 뛰어난 학문과 덕망, 그리고 정치적인 영향력은 영남인들과 맺었던 인연을 한층 더 강하게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흥암서원 설립은 동춘당 사후 30년이 지난 숙종 28년(1702)이고 3년 후에 사액이 내려졌다. 그 당시 상주에는 이미 선조 년간(1606년 선조 39)에 영남의 수학궁으로 세칭하는 도남서원이 설립된지 70여 년이 경과한 1676년(숙종 2년)에 사액이 내려진 바 있으나 인조 년간(1633년, 인조 11)에 난계 김득배와 영천자 신잠을 배향한 옥성서원을 두고 사액이 내려진 것은 집권세력의 파격적인 정치적 결단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동춘당의 학문과 덕망 그리고 우복 가문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노론의 영남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하는 집권세력과 상주의 친 노론세력 사류들 간의 협력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동춘당은 처가인 상주를 중심으로 자신에게 우호적인 세력 기반을 가진 주요한 인물로 우복의 제자 신석번(申碩蕃)가문과 난재 채수의 후손으로 우암 송시열의 제자 채지면(蔡之沔) 가문을 들 수 있다.
당시에 이들과 함께하는 명문의 사류들로 청죽 성람의 후손으로 우암 송시열의 적전인 권상하의 문인으로 이른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로 세칭하는 성만징(成晩徵)과 낙동의 상산김씨, 화동의 청도김씨, 함창의 인천채씨와 의령남씨‧ 평산신씨 등 일부 유력한 사족들의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3. 배향위(配享位)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가. 연보(年譜) 약전(略傳)
송준길은 조선조 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요 예학(禮學)의 대가이며 문묘에 종사(從祀)된 우리나라 현사 18원의 일원이다. 관향(貫鄕)은 은진(恩津)이고 대전 송촌(松村)이 선향(先鄕)으로 자는 명보(明甫),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이며 시호는 문정공(文正公 )이다.
1606년(선조 39) 서울 정능동 외가에서 아버지 송이창(宋爾昌)과 어머니 광산김씨 김은휘(金殷輝)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3세에 아버지를 따라 회덕(懷德)으로 내려와 9세부터 독서 하기를 시작하였는데 재주와 촉명이 유별하고 특별히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이 때에 한집안에 13촌 숙질간이고 이종사촌간 이면서 마지막까지 정치생명을 같이 하였던 우암 송시열과 같이 글을 배워 남다른 우의를 가져 이른바 양송(兩宋)으로 세칭하였다.
15세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 1578~1631)의 문하에 집지(執贄)하고 16세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상기를 마치고 다시 사계 문하로 가서 공부를 하다가 스승인 사계가 타계하자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 1574~1656)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8세에 우복 정경세의 사위가 되었다. 우복은 퇴계학맥의 적전인 서애 류성용의 고제(高弟)로서 학덕이 겸비된 현사이고 조선 예학에 사계와 쌍벽을 이룬 예학자로서 동춘당의 학문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1642년(인조 2)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22세가 되던 1630년(인조 6)에 부친을 여의고, 26세에는 스승인 사계의 복을 입었다.
1633년(인조 11) 28세에는 장인 우복이 타계하자 회장(會葬)을 치루고 그 다음 해 3월에는 율리에 장모를 찾아 뵈온 후 창석(蒼石) 이준(李埈)과 도남서원을 찾아 낙동강에 배를 띄워 유상을 하였다. 이 해 4월에는 우암과 함께 선산을 거쳐 인동에 여헌 장현광(張顯光)을 심방하고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묘우에 배알하였다.
40세(1645년, 인조 23)에 소현세자가 승하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원손의 위호(位號)를 일찍 정할 것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을 부르시어 원손 보전의 책임을 맏길 것을 상소하였다. 그 다음해 41세에 장인 우복의 년보를 초(草)하였다.
44세(1649, 인조 27)에 인조 임금이 승하하여 관아에 나아가 거애(擧哀) 하였다.
따라서 효종이 즉위하고 사헌부집의를 제수 받아 통정대부 경연참찬관이 되어 당시에 권력을 농단하고 청나라에 아부하던 김자점, 원두표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고 우암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 후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를 하므로 청조가 사신을 파견하여 효종을 문책하자 그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8년 여간 학문에 주력하였다.
50세(1655년, 효종 6)에 우복의 따님인 정부인(鄭夫人)이 졸하여 상처를 당하였다.
54세(1659년, 효종 10)에 효종의 죽음은 곧바로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문제로 예송이 일어나자 서인은 예경기년설(禮經朞年說)과 국제(國制)를 참고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고 남인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의례참최장(儀禮斬衰葬)을 근거로 3년복을 주장하였으나 동춘당은 우암과 함께 서인의 기년복 주장에 동조하여 관철시켰다
현종초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윤선도(尹善道)에 의해 재론된 예송관계로 사직을 하고 60세(1665, 현종 6)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제수되어 세자를 교도(敎道)하였으며 현종에게 도통의 주인이 될 것과 경연을 자주 열 것을 권하였다.
그 후 대사헌, 좌참찬 겸 좨주, 찬선 등 여러 관직이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72년(현종 13) 12월 2일 향리 회덕의 동춘당에서 영면하니 향년 67세였다.
1674년(현종 15) 효종의 왕비 인선대비가 죽자 또 한 차례의 복상문제가 일어나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설이 서인의 대공설(大恭說 9개월 상기)을 누르고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니 남인의 정파인 허목(許穆) 등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되었다.
1680년(숙종 6)에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관직은 회복되었다.
1681년 숭현서원(崇賢書院)에 봉향되고 그 해 6월에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 다음해에 왕명으로 『동춘당문집』이 간행되었다.
1702년(숙종 28) 흥암서원에 배향되고 1756년(영조 32) 문묘(文廟)에 종사배향(從祀配享)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상례비요(喪禮備要)』, 『어록해(語錄解)』, 『향음주례(鄕飮酒禮)』 등 많은 저술이 동춘당문집에 전한다.
나. 동춘당의 예학사상
동춘당 시대 17세기의 조선사회는 산림(山林, *士林의 별칭)의 시대였고 또한 예학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조반정 이후에 전개된 일련의 숭용산림정책(崇用山林政策)은 산림예가(山林禮家)들에 의한 예질서의 재건과 예학의 정립이 시대적 과제로 부각하는 여건을 제공했다. 동춘당은 이시기의 대표적 산림예학자였다.
그는 스승인 김장생, 김집 부자의 문하에서 예를 배워 그 예학의 적전(嫡傳)이었다. 김장생과 그의 문인들로 구성된 호서 예학파는 율곡(栗谷)을 종장으로 하는 기호학파의 정맥으로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존신(尊信)하였고 이 예서를 집중적으로 연구 보완하는 학파의 임무로 인식하였다.
그것은 16세기에 퇴계와 율곡에 의하여 조선의 성리학이 형성되었으므로 이제는 그 실천의 학문인 예학이 연구 정리되어야 한다는 인식의 소산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가례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와 변례(變禮)에 대한 예문답서의 계술적인 제작은 이들 호서예학파의 예학적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동춘당은 호서예학파의 적전으로서 김장생 부자와의 예문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계예학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와 우암 그리고 이유태(李惟泰)가 사계 부자간과 오간 예문답의 회수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동춘당의 예문답서 질문회수
김장생의 《의례문해(儀禮文解)》 총 543개 문항 | 김집의 《의례문해속(儀禮文解續)》 총 151개 문항 | ||||
질무자 | 분야별 질문 문항수 | 합계 | 질문자 | 분야별 질문 문항수 | 합계 |
송준길 | 가례도(家禮圖) 4 사당례(祠堂禮) 14 관혼례(冠婚禮) 5 상례(喪禮) 141 제례(祭禮) 75 | 239 (44%) | 송준길 | 사당례 3 관혼례 1 상 례 11 제 례 1 | 16 (10%) |
송시열 | 관혼례 3 상 례 17 제 례 2 | 22 (4.1%) | 송시열 | 상 례 5 제 례 1 | 6 |
이유태 | 관혼례 5 상 례 28 | 33 (6.1%) | 이유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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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도표에 의하면 동춘당 송준길이 다른 두 사람 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히 많고 그가 가지고 있던 예학적 관심은 가례중에서도 상례에 치중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인조에게 올린 상소에서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데 예의(禮義) 3백 조항과 위의(威儀) 3천 조항은 모두 하늘이 정한 차서이며 등 급이지만, 선왕들의 신둥한 뜻은 특히 상례에 대해서 더욱 정성을 기울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상사의 변고는 실로 천리와 인정의 망극한 일이기에 후박(厚薄)의 등급과 융쇄(隆殺)의 절차 가 마치 혼란시킬 수 없는 천경지위(天經地緯)와 같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여 생자가 사자에게 영결을 고하는 엄숙한 예로서 자연히 효심과 인정이 가장 발휘되는 예인만큼 그가 상례 연구에 치중한 근원적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그는 영남예학의 종장으로 세칭하는 우복 정경세의 사위가 되어 호서예학과 영남예학의 교류와 조선의 제변예(諸變禮)에 대한 예학적 검토를 증대시키므로써 호서예학이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조선의 제예속(諸禮俗)을 조화롭게 종합하여 조선예학의 주역이 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시청언동(視聽言動)이 천리에 맞으면 예에 이르는 것”이라고 인식하였고 주경(主敬)의 삶을 통하여 천리를 보존하고 이에 기초하여 산림적 예치주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모든 예제상의 의문을 주로 정례(情禮)에 따라 결단하고자 하였고 합리적이고 통일적인 예제를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는 또 왕조례(王朝禮)의 특수성을 부정하고 왕조례와 사대부례를 하나의 종법적(宗法的) 잣대에 의해 일원화 하고자 하는 통상하(通上下) 천하동례(天下同禮)의 보편지향적 예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다. 동춘당 의 도학정신
17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로 퇴계와 율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던 성리학자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도학의 실천자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17세기 조선사회의 개혁에 참여하였다.
이들 도학자들은 사회의 중심세력을 형성하고 시대이념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른바 산림학자(山林學者)들 이었고 동춘당이 그 중의 한 분이다.
그는 율곡의 적전(嫡傳)이라 할 수 있는 사계(沙溪)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을 뿐만아니라 퇴계의 고제인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의 적전인 우복의 사위로서 양대 문하의 전통을 모두 접하여 같은 기호학파의 학자들과 다른 개성적 특색을 갖게 되었다.
그는 우암과 함께 사계와 신독재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율곡 이래 기호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중점적으로 계승하면서 퇴계를 자신이 본받고자 하는 사법(師法)으로 존숭(尊崇)하였다.
그는 율곡의 자경문(自警文)을 벽에 걸어 놓고 자신을 반성하는 가르침으로 삼았을 뿐만아니라 퇴계의 사상을 사법으로 삼아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사표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성리학의 주요 이론에서 율곡의 학문 뿐만 아니라 퇴계의 인간적 삶을 사표로 삼아 평생투록 견지하였다.
퇴계와 율곡의 철학적 이념은 복잡하고 심오한 학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다만 동춘당의 사상이 율곡의 학맥이면서 퇴계의 거경궁리(居敬窮理)하는 삶을 인격 형성에 지표로 삼았다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4. 흥암서원 연혁의 고찰
『흥암서원지』에는 년도별로 일목요연하고 구체적인 연혁이 수록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필자가 2006년에 간행한 『흥암서원지』에 수록한 「흥암서원사실록(興巖書
院事實錄)」 등 제 문헌과 같은 해 상주청년유도회에서 간행한 『상주의 서원』 흥암서
원 조목을 상고하여 년차별로 정리한 것이다.
아울러 주요한 연혁에 대하여는 곁들여서 그 사실을 살펴보기로 한다.
ㅇ. 1702년(숙종 28, 임오) ; 동춘당 송준길의 문인과 상주 사림의 공의로 상주시 연원동 현재의 구서원마을에 건립하다. 봉안제문(奉安祭文)은 추담(秋潭) 성만징(成萬徵)이 찬(撰)하다.
ㅇ. 1705년(숙종 31, 을유)11월 4일 ; 숙종의 사액이 내려져 예조좌랑 오수경(吳守經)이 치제(致祭)하였다.
ㅇ. 1716년(숙종 42, 병신) ; 11월 숙종 임금이 어필편액(御筆扁額)과 비망기(備忘記)를 내리다. 이때 왕명으로 좌부승지 유숭(兪崇)이 치제하였다. 비망기는 의정부좌참찬겸세자좌빈객(議政府左參贊兼世子左賓客) 민진후(閔鎭厚)가 교서를 받들다.
ㅇ. 1722년(경종 2, 임인) ; 어필을 모사하여 비각을 세우다. 어필비(御筆碑) 음기(陰記)는 권상하(權尙夏)가 짓고 글씨는 상주목사 조정만(趙正萬)이 쓰다. 이때 임금의 당저윤음(當宁綸音)이 내려지다.
ㅇ. 1751년(영조 22, 신미) ; 김재현(金載顯) 공이 지은 서재중수기(西齋重修記)가 남아 있으니 이 해에 서재를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ㅇ. 1762년(영조 39, 임오) ; 풍수지리에 오공입지형(蜈蚣立地形)으로 세칭하는 연원동 769번지 오늘의 위치로 이건하다. 이를 주선한 사람은 창령인 성이한(成爾漢) 이고 력천(櫟泉) 송명흠(宋明欽)과 서신 왕래가 있었다.
ㅇ. 1768년(영조 44, 무자) ; 동춘당 문집 본집과 별집을 중간하다. 이를 주선한 사람은 우암의 적전제자인 권상하(權尙夏 ; 1641~1721)와 동춘당의 외손 민진원(閔鎭遠 ; 1664~1736), 민진후(閔鎭厚 ; 1659~1720) 형제 그리고 동춘당의 증손자 송요좌(宋堯佐 ; 1768~1723)와 현손 송명흠(宋明欽 ; 1705~1768)이다.
이때에 문집의 체제를 개편하여 초간본의 내용 일부를 첨삭하고 초간본 별집의 동춘당 선고(先考)의 연보 등을 본집에 포함시키고 초간본 별집에 들어있던 우복 정경세의 연보를 빼내었다.
이때 간행한 동춘당문집 중간본 본집은 15책 28권으로, 이를 판각한 것이 1,095매 이고 별집은 4책 8권으로 판각한 것이 358매 이며 속집 8책 12권으로 판각한 것이 550매이다.
살펴보건데 동춘당의 문집 본집에 그의 장인인 우복 정경세의 연보가 수록되었다는 것은 옹서간(翁婿間)에 특별하고 깊었던 관계를 엿보게 한다.
ㅇ. 1771년(영조 47, 신묘) ; 흥암서원 하반청(下班廳)을 신건(新建)하고 신건기(新建記)를 남기다. 하반청신건기문의 주요 냐용은 다음과 같다.
- 신분의 높고 낮음이 비록 다르다 하겠으나, 하반들이 조용히 거처하며 맡은 직무를 대강하고 모두 다 편안함으로 전횡하니 이것은 하반청이 없기 때문이다. 본 서원이 이건한 후 백가지 폐단이 함께 일어나니 원생을 청에 머물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에 명륜당의 서쪽 모서리에 금년 봄 하반청을 짓는다.
살펴보건데 하반(下班)이라고 함은 이 서원에서 신분이 낮은 계층의 원생을 말하고 그들이 서원에서 상주하고 있어서 그들만의 별도 생활공간을 마련하여 상층 신분과의 위상을 달리하는 조치라고 보여진다.
ㅇ. 1811년(순조 11, 신미) ; 서원운영절목(書院運營節目)을 새로 재정하다.
- 선출된 임원이 비난 받을 일이 있음에도 물러나지 않으면 그 자손을 면박하여도 감수하여야 한다.
- 화양서원에는 별유사 제도가 있으나 본원에서는 유독히 없으니 두말 말고 지금부터라도 기호의 선비 중에서 뜻있는 분을 골라서 별유사로 할 것.
- 유사는 종전과 같이 윤번으로 하고 도내의 장의는 두 사람을 선출하되 한 사람은 본향, 한사람은 도내 유림으로 하여 영구히 실행 할 것.
- 원생 80명 중에 30명을 나누어 수리소에 배치하여 춘추로 서원을 보수토록 할 것. 이 절목을 어긴 사람은 고장의 선비들이 입을 모아 문책토록 할 것.
ㅇ. 1860년(철종 11, 경신) ; 돈사절목(敦事節目)을 새로 재정하다. 절목의 수창자는 송래희(宋來熙)이다. 절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제임의 천출은 타 서원의 관례에 따르되 명부를 마련하여 원장에게 둘 것.
- 별유사는 본손으로 천출 할 것이며 청렴한 인물을 선임하고 재산의 관리상황을 본손에게 보고토록 할 것.
- 서재중(西齋中)에서 혹 불근(不謹)한 허물이 있으면 원중에서 종아리를 치거나 나무라되 내치지 말고 동재에서 잘 지도 할 것.
- 회덕의 본손 중에서 돈 10량씩 찬조를 자청해 왔으므로 받아 들일 것이며 창건당시 재력의 부족으로 동서재를 짖지 못한 바 이에 대한 모책을 강구 할 것.
- 외동 장천의 녹갈포(鹿葛浦)에 개간을 한 논 11두락은 거두어 들일 것.
- 흥암서원이 6,25 전쟁시에 인민군 전방통신사령부로 많은 군인이 주둔하면서 목판을 땔감으로 사용하는 것을 자기의 아버지가 보고 사정 사정하여 남은 것을 보존하게 된 것이다.
- 이 때 동춘당의 위패를 이안하여 보리가마니 속에 보전하였다가 전쟁이 끝나고 환안하였다.
- 흥암서원 소유 재산이 많았으나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 되고 토지개혁을 하면서 소작인들이 상환농지로 차지하게 되었다.
- 이 후 서원 건물이 퇴락하여 부득이 소유 재산 일부를 매각하여 수시로 보수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ㅇ. 1942년 7월 ; 김익주(金翼周) 원장이 다음과 같은 기문(記文)을 남기다.
ㅇ. 1946년 ; 상주고등학교 창설시 임시교사로 사용함.
ㅇ. 1985년 ;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61호(85.10.15)로 지정됨.
이 사업 완공후 흥충보존위원 김상익(金相翼) 공이 중수기를 남기다.
ㅇ.興巖書院(흥암서원) ; 1716년 숙종이 친히 쓴 해서체 글씨로서 머리에 “御筆”이라고 적었다.
ㅇ.備忘記(비망기) ; 1716년 숙종이 어필을 내릴 때 치제관이 함께 가지고 온 숙종의 글인데 누구의 글씨 인지는 미상이다.
崇政大夫行議政府左參贊兼知經筵春秋館事 世子左賓客 臣 閔鎭厚 奉
숭정대부 행 의정부 좌참찬 겸 지경연춘추관사 세자좌빈객 신 민진후가 임금의 명을 받 들어 교서하다.
ㅇ. 興巖書院 ; 강당의 전면에 걸어 둔 이 서원의 현판으로 묘우에 興嵒祠의 “암”자와 글자를 달리한 예서이다.
ㅇ. 진수당(進修堂) ; 강당의 당호(堂號)로 해서체 글시이다.
ㅇ. 강당의 동서 양 협실의 당호 ; 진수당 동편실은 거덕재(據德齋)이고 서편실은 거업재(居業齋)로 각각 현판이 게시되었다.
3) 동서재(東西齋) ; 동재의 당호는 의인재(依仁齋)이고 서재의 당호는 집의재(集義齋)이다.
4) 존성재(存誠齋) ; 묘우 동편에 제수를 보관하는 장찬소(掌饌所)로 일명 전사청(典祀廳)이라고도 한다.
5) 어필비각 외삼문 ; 서원의 서편에 어필각(御筆閣)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숭정기원후 95년(1722년 경종2) 임인년에 새우다.
이상 소장 문적 중에 대표적인 서류만 상론하는 것으로 그친다.
가. 향사일(享祀日) ; 3 ‧ 9월 초(상)정일(三九月初(上)丁日)
정일(丁日)은 육갑(六甲) 천간(天干)의 네 번째 ‘丁’에 해당하는 날자이다.
국조사전(國朝祀典)에 따르면 사(祀)에는 대중소(大中小) 삼사(三祀)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 종류와 날자를 다음과 같다.
2) 중사(中祀) ; 문묘석전(文廟釋奠 * 성균관, 향교)은 2 ‧ 8월 상정일이고 지방의 서원은 2 ‧ 8 중정일(中丁日) 이후로 한다.
3) 소사(小祀) ;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대한 제사 또는 기독제(旗纛祭) 등
이에 따라서 흥암서원은 3 ‧ 9월 상정일로 정하였다.
祝’ 이라는 글자를 사전에 아르기를, 빌 축 ‧ 축문 축 ‧ 하례할 축 ‧ 축 읽을 축 ‧ 축 읽는사람 축 이라고 풀어 놓았다.
이에 따라서 축문(祝文)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제례(祭禮)에 신명(神明)에게 고(告)하는 글’ 이라고 정의 하였다.
전통적인 축문의 형식은 순 한문으로 되어있어 현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하여 제향에 참여는 하였으되 독축하는 내용이 무슨말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맹목적으로 읽고 듣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필자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간혹 전통의례 행사에 참사(參祀)할 때마다 자괴감(自愧感)을 금할 수 없었다.
위 축문의 구문(句文)을 부분적으로 나누어 보면 대개 6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⑨ ~ ⑪항 ; 어느 위치에 있는 누구가 제향의 주사자(主祀者)로서
이때 “某朔(모삭)”이라는 말은 행사 당월의 초하룻날 일진(日辰)을 기재한다. 초하룻날 일진을 상고 하는 것은 행사 날자를 정확하게 규명하기 위함이라는 설이다
‧ 朔(삭) ; 초하루 朔, 천자가 제후에게 나누어 주던 삭
⑭ ~ ⑰항 ; 남기신 훌륭한 행적을 축약한 천양문(闡揚文)으로 이 축문의 핵심이다
⑱ ~ ⑴항 ; 이에 좋은 날을 받아서 법식에 따른 제사를 드리오니 강임하셔서 저희들 후학들을 게도하여 주시옵기
지금부터 행사를 시작하겠아오니 마음과 몸을 가다듬어 주시기 바랍니다. 올해 ㅇㅇ 년 ㅇ월 초 하룻 날 일진이 ㅇㅇ일인 ㅇ일 오늘의 일진이 ㅇㅇ일에 후학 ㅇㅇㅇ는 감히 밝혀 고하나이다. 이에 좋은 날을 받아서 법식에 따른 제사를 드리오니 강임하셔서 저희들 후학들을 계도하여 주시옵기 높이 숭상하여 받들어 올리나이다. 바라옵건데 |
흥암서원의 홀기는 여타 서원의 홀기와 유사하므로 여기에서 생략한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 영남지역에 기호학맥의 대표적 서원으로서 상주학맥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상주문화 창성의 다양성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2. 『 尙州의 書院 』 , 2006, 상주시청년유도회
3. 『 尙州誌 』, 1989, 상주시‧ 상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