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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譜』-남보 김영진(성균관대 한문학과) 1. ‘南譜(남보)’는 南人(남인) 名家(명가)의 주요 가계를 수록한 종합적 성격의 黨派譜(당파보)로, 十二支(십이지) 가운데 남방[午(오)]의 의미를 따서‘午譜(오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노론보는‘簪纓譜(잠영보)’1), 소론보는‘簪譜(잠보)’, 남인보는‘南譜(남보)’, 북인보는‘北譜(북보)’라는 명칭으로 존재하였다. 현존하는 당파보로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1760년대 소북 淸風金氏(청풍김씨)가에서 만든『北人譜(북인보)』(필사본 1책, 단국대 연민문고 소장)이고, 1800년을 전후하여 만들어진 고려대 신암문고 소장『南譜』(필사본 1책)가 이른 시기의 것이나 당파보의 완성과 성행은 대개 19세기 중엽 이후이다. 이 시기에는 당파보 뿐만 아니라 명문가에 대한 본격적인‘綜合譜(종합보)’인『諸家譜(제가보)』2), 『縉紳譜(진신보)』,『簪纓譜(잠영보)』,『萬家譜(만가보)』등도 편찬되기 시작했다. ‘당파보’를 포함한 이들‘종합보’는 全的(전적)으로 양반 명문가만으로 구성되었다. 엄격한 신분 구별과 嫡庶(적서)에 대한 차별을 적용한 것으로 이는 조선후기‘종합보’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 된다. 그 중에서도‘黨派(당파)’라는 특수한 역사 배경 속에서 등장한‘黨派譜(당파보)’는 동아시아 각국의 족보 가운데 조선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사례이다. 19세기 중엽 ‘당파보’ 및 ‘종합보’가 성행하게 된 배경에는 哲宗(철종) 연간과 大院君(대원군) 執政期(집정기)의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집권층에서 상대편을 자기 당파로 흡수하여 정치적 힘을 확대하려는 柔化策(유화책)의 일환으로 이전 시기‘逆(역)’이나‘邪(사)’로 규정된 불명예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伸寃(신원)과 官爵(관작) 회복을 시행한 것이다. 한편 시대가 내려올수록 인구 증가에 비례하여 庶孼(서얼)들이 많아지고, 常賤民(상천민)의 양반 冒稱(모칭)과 족보에의 投託(투탁) 編入(편입)이 증가한 것은 또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당파보는 당파 내의 결속과 유대의 유지 및 증대에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名家(명가)의 내력과 인물에 대한 정보를 얻고 婚姻(혼인)할 가문의 물색 및 인재 등용을 위한 참고자료로서의 기능도 겸하였다. 아래의 자료들은 17세기∼ 18세기초 조선의 보첩류에 대한 개략을 알게 해주는 것들이다. 당파보 및 종합보 등장의 연원으로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姓氏(성씨)는 본국의 土姓(토성)은 三韓(삼한) 및 三國(삼국) 王公(왕공)의 후예가 많다. 그 외 혹 하사받은 姓(성)과 혹 중국으로부터 온 姓이 있어 각각 系譜(계보)를 이루고 있으나 중국만큼 姓氏가 혼란하여 고증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譜牒(보첩)으로 증빙할 수 있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東國諸姓譜(동국제성보)』20권 丁時述撰(정시술찬),『姓苑叢錄(성원총록)』任慶昌著(임경창저)【『述先錄(술선록)』에 任慶昌(임경창)、丁時述(정시술)、鄭四川(정사천):(정곤수-필자주)은 譜學(보학)의 大家(대가)이다. 라고 하였다】『氏族譜(씨족보)』53권 朴思正著(박사정저),『百家譜(백가보)』10권 許涵著(허함저),『氏族源流(씨족원류)』李景說著(이경설저),『氏族源流(씨족원류)』7권 趙從耘著(조종운저),『閥閱通考(벌열통고)』4권 내 조부(이덕무-필자주)가 윤색 수정 보완하였고 불초손 圭景(규경)이 또한 修補(수보)하였다. 『八八帖(팔팔첩)』碧珍李姓著(벽진리성저),『萬姓叢譜(만성총보)』兪彦䥧著(유언선저),『東喬錄(동교록)』20권 撰人闕(찬인궐),『搢紳世譜(진신세보)』는 八世(8세)까지 기재한 것과 十世(10세)까지 기재한 것이 있다.『文譜(문보)』、『武譜(무보)』、『蔭譜(음보)』、『司馬譜(사마보)』等編(등편)이 있다.『明衛譜(명위보)』는 高麗人(고려인) 所著(소저)로 松京(송경)에 있다고 한다.『海東姓氏錄(해동성씨록)』梁誠之著(양성지저),『百家譜略(백가보략)』撰者闕(찬자궐)이 있다. 이 외에 姓氏에 관한 책은 몇 종이나 있는지 알 수 없다.”3) “성종조에 南原君(남원군) 梁誠之(양성지)가『海東姓氏錄(해동성씨록)』을 지었다. 明憲公(명헌공) 李坡(이파)4)는 우리나라 씨족에 대하여 대대로 미미한 경우라도 모두 그 支派(지파)를 분변하였다. 또 고려의 여러 科擧(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무 榜(방) 第(제)몇째를 인명마다 일일이 세었는데, 한 사람도 착오 나지 않게 하였다. 西川府院君(서천부원군) 鄭崑壽(정곤수)는 성씨의 譜牒(보첩)에 뛰어나 서울과 지방 士族(사족)의 역대 이름자와 出處(출처)의 사적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혹 와서 그 世系(세계)의 내력을 물으면 반드시 하나하나 짚어 가며 상세히 설명해 주기를,‘그대의 선대는 아무개에서 일어났고 아무개 아무개를 거쳤으며 몇 대가 현달하고 몇 대가 벼슬하지 않았다’하여 마치 직접 눈으로 보고 말하는 것처럼 하였다. 洪汝河(홍여하)는『海東姓苑(해동성원)』을 지어 그 선조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찾아 먼 三代(3대)까지 모두 자세히 상고하여 써 놓았다. 또 그 音(음)이 소속된 五聲(오성)의 구분을 상고하여 변별해서 연계시켜 놓지 않은 것이 없다. 그 鄕貫(향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추구한 부분에서는 멀리는 중국, 가까이는 우리나라에 있어 모두 깊이 있게 分派(분파)를 찾아 기록하여 각기 그 보첩을 얻게 되었다. 현감 趙仲耘(조중운)은『氏族源流(씨족원류)』를 지었고 典簿(전부) 丁時述(정시술)은『諸姓譜(제성보)』를 지었는데, 모두 譜學(보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文簡公(문간공) 李宜顯(이의현)은 우리나라의 성씨를 모아 李、金、朴、鄭、尹、崔、柳、洪、申、權、趙、韓의 12성을 가장 잘 알려진 성이라 하고, 그 다음으로 16성, 또 그 다음으로 25성, 또 그 다음으로 41성, 또 그 다음으로 19성, 또 그 다음으로 38성, 또 그 다음으로 136성을 모았다. 또 複姓(복성)으로 南宮(남궁)、皇甫(황보)、鮮于(선우)、石抹(석말)、扶餘(부여)、獨孤(독고)、令孤(령고)、東方(동방)、西門(서문)、司馬(사마)、司空(사공)을 모아 11성을 찾았으니, 모두 298성이다.” 앞의 글은 五洲(오주) 李圭景(이규경)의「姓氏譜牒辨證說(성씨보첩변증설)」(『五洲衍文長箋散稿(오주연문장전산고)』), 뒤의 글은 橘山(귤산) 李裕元(이유원)의 〈明卞氏族譜(명변씨족보)〉(『林下筆記(임하필기)』권18,「文獻指章編(문헌지장편)」)이다. 이를 통해 조선조 譜牒類(보첩류)의 현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한편 ‘藝文志(예문지)’성격의 책으로 영조 연간에 만들어진『海東書冊(해동서책)』(필사본 1책, 수경실 소장)이 있는데 이 책의 ‘譜牒類(보첩류)’에는『瓊源錄(경원록)』,『聖源錄(성원록)』,『宗族記(종족기)』(以上(이상) 3종 高麗(고려) 任景肅(임경숙)),『璿源錄(선원록)』(太朝<태조>),『海東姓氏錄(해동성씨록)』(梁誠之<양성지>),『萬姓通譜(만성통보)』(丁時<정시>5)),『源流譜(원류보)』(趙中耘<조중운>6)),『姓源總錄(성원총록)』(任慶昌<임경창>),『窮源錄(궁원록)』7)(閔鎭遠<민진원>),『璿源譜略(선원보략)』,『姓苑叢寶(성원총보)』,『氏族源流(씨족원류)』(丁必東<정필동>8))가 著錄(저록)되어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 개별 姓氏의 연원 및 명문가의 간략한 계보를 제시한 책들이다. 18세기 초까지는 아직 黨派譜(당파보) 성격의 책은 보이지 않는다. 당파보 성격의 책으로 시기가 가장 올라가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18세기 중엽의 청풍김씨가의『北人譜(북인보)』(필사본 1책, 단국대 연민문고 소장)와 1800년경의 고려대 신암문고본『남보』이다. 한편‘南譜’는 아니지만 남인 명문가의 계보를 정리한『儒紳近系(유신근계)』(표제‘文蔭近系(문음근계)’, 필사본 1책, 수경실 소장)란 책이 있다. 이 책은 崔鶴羽(최학우)가 연안이씨가를 비롯한 82家(가)의 南人家(남인가) 중 近者(근자)에 文科(문과)에 급제하거나 蔭官(음관)을 지낸 인물의 先系(선계) 5世와 외조 및 처부를 필사해둔 것이다. 끝에 다음과 같은 小識(소식)가 있다. “(전략) 삼가『儒紳近系(유신근계)』를 살펴보니 이는 우리 黨(당)의 文科(문과), 蔭官(음관) 五世譜(5세보)이다. 延城(연성):(연안-필자주)李氏(이씨)、豊山洪氏(풍산홍씨)、安東權氏(안동권씨)、平康蔡氏(평강채씨)、同福吳氏(동복오씨)、泗川睦氏(사천목씨)、押海丁氏(압해정씨)、晋陽姜氏(진양강씨)같은 경우는 東方(동방)의 世臣(세신)이요, 南人(남인)의 巨室(거실)이다. 지금 五世(5세)의 사이에 그 出入(출입)의 자취와 浮沈(부침)의 이치를 역력히 기억할 수 있으니 비록 두 세 대부는 밝은 조정의 羽儀(우의)가 되고, 관원 사이에 名族(명족)이 되었으나 예전의 이른바 宅揆(택규)(정승)、銓衡(전형)(이조판서)、方伯(방백)(관찰사)、連帥(연수)(병사) 등은 적막하여 들리지 않으니 어찌 이다지도 앞 시대에는 번성하고 뒷시대엔 쇠락했단 말인가. 이에 마음에 유감이 있으니 이는 당파의 폐해가 아니겠는가. 드디어 이를 써서 붕당에 대한 경계로 삼는다. 崇禎紀元後三辛丑(숭정기원후삼신축)(1781) 完山(완산) 崔鶴羽(최학우)는 쓴다.”9) 위와 같이 自己(자기) 黨派(당파)의『文蔭譜(문음보)』및 자기 가문과의 連婚(연혼)이 있는 집안을 정리한『瓜葛譜(과갈보)』(고려대 소장 연안이씨가의『瓜葛姓彙(과갈성휘)』가 대표적이다) 등은 본격적인 당파보가 나오기 전의 초보적 단계의 譜牒類(보첩류)라고 생각된다. 南人(남인)은 仁祖反正(인조반정)(西人<서인> 주도) 이후 이른바 야당으로 존재해 왔고, 경신환국(1680)과 갑술환국(1694)을 거치면서 정치적 쇠퇴를 거듭하였지만, 西人(서인)(老論<로론>)의 견제세력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학문적으로는 退溪(퇴계) 李滉(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고, 지역적으로는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북과 서울 경기권을 주요 근거지로 삼았다. 영남 지역의 남인을 嶺南南人(영남남인), 서울 경기 지역의 남인을 近畿南人(근기남인)이라고 한다.‘남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의 붕당 연원과 과정 속에 남인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이 先務(선무)이다. 2. 남인이 東人(동인)에서 갈라져 나와 정치적 부침을 겪는 과정은 李重煥(이중환):(1690~1752)의『擇里志(택리지)』「人心(인심)」조에 잘 기술되어 있다. 기축년(1589) 鄭汝立(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자 동인인 李山海(이산해)는 이 사건의 처리를 주도한 鄭澈(정철)을 축출하고 동인이 국정을 전담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후 1592년 이산해가 영의정에서 파면되면서 정철이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서인이 편당지어 다툴 겨를이 없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 이산해가 사면되고 그의 아들 李慶全(이경전)이 이조전랑으로 천거되었는데, 이중환은 이 사건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된 직접적인 계기로 보았다. 즉 柳成龍(유성룡)의 제자인 영남 사람 鄭經世(정경세)가 이경전이 전랑이 되는 것을 반대하여 이산해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미움을 샀고, 이산해가 南以恭(남이공)을 시켜 유성룡을 탄핵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황의 문인인 유성룡이 영남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성룡과 그를 따르던 李元翼(이원익)·李德馨(이덕형)·李睟光(이수광)·尹承勳(윤승훈)·李光庭(이광정)·韓浚謙(한준겸) 등을 남인이라 하였고, 이산해의 집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이산해와 그를 따르던 柳永慶(유영경)·奇自獻(기자헌)·朴承宗(박승종)·柳夢寅(유몽인)·朴弘耉(박홍구)·洪汝詢(홍여순)·任國老(임국노)·李爾瞻(이이첨) 등을 북인이라 하였다. 이 즈음의 남인의 수는 적었다. 선조 말년까지 10년간 북인이 국정을 담당하였으며, 광해군이 즉위하자 서인과 남인이 함께 세력을 잃었다. 廢母論(폐모론)이 대두되자 北人(북인)이 각각 大北(대북)과 小北(소북)으로 나뉘었는데 大北은 李爾瞻(이이첨)을 영수로 삼고 許筠(허균)·韓纘男(한찬남)·李省(이성)·白大珩(백대형) 등이 그를 도왔으며, 小北은 남이공을 영수로 삼고 奇自獻(기자헌)·朴承宗(박승종)·柳希奮(유희분)·金藎國(김신국) 등이 그를 도왔다. 이경전은 이이첨과 사이가 틀어져 소북이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북인 정권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남인과 소북을 일부 등용하였다. 이후 소북은 그 세력이 영세하여 남인이나 서인으로 전향한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상당수는 당색을 유지하면서 자기들만의 친목을 공고히 유지하였다. 인조는 반정공신을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인 편을 들어주기도 하였는데 金瑬(김류)에 의해서 남인들은 이조참판까지만 벼슬을 할 수 있었으며 이조판서 이상 정승 자리는 허용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李聖求(이성구:이수광의 아들)만이 예외적으로 정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한편 남인들이 세력을 키우고 정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현종 말년부터이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인 慈懿大妃(자의대비)의 服喪(복상) 문제를 두고 남인과 서인이 논쟁을 벌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기해예송이다. 적장자가 사망했을 때 부모는 3년복을 입고 차자가 사망했을 때는 1년복을 입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자의대비는 1년복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서인인 宋時烈(송시열)·宋浚吉(송준길) 등은 1년 복을 건의했고, 남인인 許穆(허목)·尹攜(윤휴)·尹善道(윤선도) 등은 3년 복을 주장했으나 결국 서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현종 말년에 이르러 허목·윤휴·윤선도 등이 이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송시열과 송준길을 공격하자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또 1674년 효종비인 仁宣王后(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갑인예송이 일어났다. 서인들은 次子婦(차자부)의 입장에서 大功服(대공복)(9개월)을, 남인들은 長子婦(장자부)의 입장에서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서인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숙종 즉위 후 남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숙종 초에 남인 許積(허적)이 영의정으로 있었는데 金錫胄(김석주)가 허적을 비롯한 남인 세력을 끌어들여 송시열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이중환은 이 일로 서인과 남인이 다툼의 단서를 열었다고 기술하였다. 숙종 때 남인은 淸南(청남)과 濁南(탁남)으로 분화하였다. 서인 처벌에 대한 태도와 정국 운영의 방식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이 원인이었는데, 탁남에는 허적을 비롯, 閔黯(민암)·閔熙(민희)·吳始壽(오시수)·睦昌明(목창명)·柳命天(유명천) 등이 속했다. 민암은 이후 폐비 문제로 사사되었으며, 민희·오시수·목창명·유명천 등은 경신환국 때 사사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청남은 서인의 죄를 강력하게 추궁해 문죄할 것을 주장했는데, 허목을 비롯, 윤휴·洪宇遠(홍우원)·權大運(권대운)·李鳳徵(이봉징)·李沃(이옥)·吳挺緯(오정위) 등이 속했다. 1680년에 허적의 서자인 許堅(허견)이 麟坪大君(인평대군)의 아들 福昌君(복창군)과 福善君(복선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車裂(거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경신환국(경신대출척)이다. 이로 인해 허적·윤휴·吳挺昌(오정창)·柳赫然(유혁연)·李元禎(이원정)·李德周(이덕주)가 죽거나 유배되는 등 남인이 물러나고 서인이 다시 진출하게 되었다. 또 1682년에는 김석주·金益勳(김익훈) 등이 남인의 잔여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남인 유생 許璽(허새) 등이 福平君(복평군)을 추대하고 대왕대비를 수렴청정하게 한다고 무고하여 처형시킨 일이 있었다. 이 허새의 옥사로 서인이 또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노론이 남인들을 다 죽이려고 하자 소론이 다른 태도를 보였으므로 갈리게 된 것이라고 이중환은 논하였다. 경신년 이후 남인들은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권력을 차지했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들에게 권력을 잃게 되었으며, 이후로는 남인의 정권 참여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기사환국 후 권력을 장악한 남인의 주요 인물로 민암·권대운·閔宗道(민종도)·李義徵(이의징)·金德遠(김덕원)·李聃命(이담명) 등을 들 수 있고, 영남 출신의 주요 인물로는 李玄逸(이현일)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율곡 이이의 성리설을 비판하고 이황의 학설을 옹호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18세기 초에 근기남인들은 門外派(문외파), 門內派(문내파), 跨城派(과성파)로 3분되었다. 문외파는 남인 중의 별파라는 의미인데, 沈檀(침단)·權以鎭(권이진)·李仁復(이인복)·李重煥(이중환)·吳光運(오광운)·姜樸(강박)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경신환국 때와 기사환국 후의 남인들과 거리를 두고서 허목의 정치적 입장을 계승하는 한편 허적·윤휴의 정치적 신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문내파는 기사환국 후 남인의 지도자인 권대운·김덕원의 손자인 權重經(권중경)·金華潤(김화윤) 등으로 문외파의 의견과 행동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이들은 1728년 이인좌의 난에 적극 가담했다가 완전히 몰락했다. 이 무렵 근기남인들은 학문적으로도 17세기 남인들의 영향을 받으며 다양한 변화를 보였다. 李瀷(이익)은 安山(안산)을 근거지로 많은 제자를 길러‘(星湖<성호>)學派(학파)’를 형성했다. 이들은 중앙 정계와는 인연이 깊지 않았다. 權哲身(권철신)·安鼎福(안정복)과 같은 인물들이 그의 학풍을 계승했으며, 丁若鏞(정약용) 또한 이익의 학문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당대 조선 사회를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앞선 시기의 전통을 계승하여 국가개혁의 논리를 정밀히 다듬고 주자학적 사유와는 다른 견지에서 경서를 재해석하고자 하였으며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였다. 한편 이 시기 영남남인들은 중앙 정계로 진출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지만, 향촌사회의 구심을 이루고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며 문제의식을 확장해 나갔다. 주요 인물로는 李裁(이재)·金聖鐸(김성탁)·李象靖(이상정)·李光靖(이광정) 등이 있다. 영남남인의 학문은 19세기에 李震相(이진상)에게로 이어졌다. 남인의 학문은 대체로 이황의 학설에 영향을 받았으나 영남남인과 근기남인 간에는 성향에 많은 차이를 보였다. 영남남인들은 이황의 학설을 계승·발전시키는 방향, 곧 주자학의 틀 속에서 학문의 방향을 설정하고 있었다면, 柳馨遠(유형원)·이익·정약용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근기남인들은 다양한 학술·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인 사회 및 국가 개혁론도 구상하였다. 영조대에 들어와 탕평정치가 펼쳐지는 가운데 정계에 진출한 남인은 오광운·권이진 등의 청남계였다. 특히 이 시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은 오광운으로, 그는 영조의 탕평책에 적극 동조하였다. 또한 적지 않은 남인들이 정계에 진출하게 되는데, 蔡濟恭(채제공)이 그 중심에서 남인들을 이끌었다. 이때의 주요 인물로는 李獻慶(이헌경)·丁範祖(정범조)·李益運(이익운) 등이 있다. 정조대 남인들의 활동은 정조의 탕평 정치와 채제공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영조대에서보다 훨씬 활기를 띠었다. 李家煥(이가환)·정약용과 같은 인물들은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아 辛亥通共(신해통공) 정책, 華城(화성) 건설, 사도세자 신원 등을 주도하면서 정조가 추진한 탕평 정치를 뒷받침했다. 한편 정조대 남인들 중에는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尹持忠(윤지충)·權尙然(권상연) 등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珍山(진산) 사건 이후, 내부 분열을 일으켜 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攻西派<공서파>)이 믿는 사람들(信西派<신서파>)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16세기 말 붕당정치가 본격화되면서 등장한 남인은 이후 조선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한 중요한 정치세력이었다. 영남과 서울·경기가 지역 기반이었으며, 이황의 학문은 그 학술 근거였다. 남인을 구성하는 범위가 넓어 인재 역시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들이 중앙의 권력을 장악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정치·학술면에서 그들만의 개성 있는 업적을 풍부하게 남겼다. 영남남인의 경우, 이황의 학술을 심화시키는 차원에서 주로 활동했으므로 성리학의 틀을 쉽게 벗어나지 않았으나, 근기남인들은 당대 학술계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조선의 사회 및 국가 제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논리들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였다. 이 시기 대두한 새로운 학풍인 실학의 주요 담당자는 바로 이들이었던 것이다. 3. 『남보』의 이본으로는 규장각과 성균관대에 소장된 9책본이 最善本(최선본)으로서 가장 상세하고, 6책본(유홍렬 구장본), 5책본(경기대), 4책본(규장각, 장서각, 부산대 등), 3책본(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성균관대 등), 2책본(국립중앙도서관 등), 1책본(고려대 신암문고, 계명대 등)이 있다. 현존본들의 편찬 및 필사 시기는 19세기 이후가 대부분이고 거개가 19세기말이다. 그러나 완정한『남보』가 만들어지기까지 그에 先行(선행)한 단순한 성격의 類似(유사) 자료들이 있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善山(선산) 전주최씨가의『儒紳近系(유신근계)』(필사본 1책, 수경실 소장)와 尙州(상주)연안이씨가의『瓜葛姓彙(과갈성휘)』(필사본 1책, 고려대 신암문고 소장)는 대표적인 사례다. 『儒紳近系(유신근계)』(표제는 文陰近系<문음근계>)는 崔鶴羽<최학우>10)가 연안이씨가를 비롯한 82家의 南人家(남인가) 중 近者(근자)에 文科(문과) 급제했거나 蔭官(음관)을 지낸 인물의 先系(선계) 5世와 외조 및 처부를 기록한 것으로『남보』와 유사한 자료로서 시기상 매우 이르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아울러 연안이씨가에서 만들어진『瓜葛姓彙(과갈성휘)』는 계보도로만 구성된 것과 12段(단)의 계보로 작성된 것 각 1책이 있다. 편찬시기는 19세기 말로 보이지만 이러한 종류의 보첩류가 발생한 시기는 훨씬 소급될 수 있기에11) 당파보 등장의 연원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南譜’로서 시기가 가장 이른, 1800년을 전후하여 작성12)된 고려대 신암문고본『남보』에는 총 27姓 76본관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과 같다. 전주李、연안이、여주이、한산이、廣州이、경주이、평창이、함평이、진보이、광양이、재령이、우계이、고성이、성주이、예안이、양성이、신평이、영천李、안동金、光州김、김해김、경주김、원주김、예안김、의성김、강릉김、서흥김、순천김、고령金、밀양朴、함양박、무안박、순천박、죽산朴、진주柳、문화유、풍산유、전주柳、청주한、남양홍、풍산홍、부계홍、파평윤、남원윤、해평윤、해남윤、한양조、양주조、풍양조、순창조、고령신、평산신、안동권、동래정、초계정、진주정、청주정、청송심、진주강、양천허、나주丁、동복오、평강채、사천목、여흥민、삭녕최、강릉최、전주최、기계兪、창원황、의령남、광주안、은진송、여산송、창녕성、거창愼(이하 낙장) 科擧(과거), 蔭職(음직), 官職(관직)만 기재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圈點(권점)을 쳤을 뿐 妻父(처부)는 기재하지 않았다. 초기『남보』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한편『便譜(편보)』(필사본 4책,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는 영남 남인 명가 칠곡 광주이씨가에 내려오던 책이다.13) 내용은‘南譜’에 해당한다. 19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제 필자가 지금까지 조사한『남보』이본들을 제시한다. 인동장씨가에서 1894년 전후로 필사하고 소장했던 9책본『남보』는 일반적으로 널리 유통되던『남보』는 아닌듯하다. 일반적으로는 3책 또는 4책본이 널리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본 중의 하나인『便譜(편보)』를 구체적으로 살펴 본다.(다음은 서울역사박물관의 해제를 轉載(전재)한 것임) 본문에서는 전주이씨부터 가문별로 계보를 간략하게 기록해 두었다. 계보와 그에 따른 성명, 아울러 성명 옆에는 관직, 과거급제의 여부 등을 표기해 두었다. 또한 성명의 좌측에는 붉은 색으로 표식을 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과거급제나 관직의 재직 여부 등을 알기 쉽게 표기한 것이다. 대체로 문과 합격자의 경우에는 붉은 색으로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려서 표시하고, 생원이나 진사의 경우에는 점 두 개를 찍어 두었다. 또한 사마시를 하지 않은 경우에도 관직(음직)을 지냈으면 마찬가지로 점 두 개를 찍었다. 아울러 여말이나 조선초기의 인물 중에서는 封君(봉군)되거나 고관직을 지내는 등 비중이 큰 인물은 별도로 동그라미 세 개를 표시하였다. 도서에 등재된 성씨들은 이씨를 비롯하여 4책에 걸쳐 기술되어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책(元): 李氏(전주, 연안, 한산, 광주, 경주, 여흥, 함평, 평창, 진보, 전의, 재령, 고성, 성주, 신평, 광양, 영천, 우계, 예안, 양성, 흥양, 함안, 원주, 인천) 1성 23본관. 제2책(亨): 金氏(안동, 경주, 선산, 원주, 강릉, 의성, 풍산, 광주, 예안, 김해, 고령, 서흥, 순천, 청도, 해평, 함창), 鄭氏(동래, 초계, 청주, 진주, 경주, 해주, 하동, 온양, 철원), 崔氏(전주, 삭녕, 강릉, 강화, 영천, 화순), 朴氏(밀양, 함양, 무안, 순천, 죽산). 柳氏(진주, 문화, 전주, 풍산), 安氏(순흥, 광주). 申氏(평산, 고령) 등 7성 44본관. 제3책(利): 宋氏(진천, 여산, 은진). 沈氏(청송). 許氏(양천). 南氏(의령, 영양, 고성). 成氏(창녕), 姜氏(진주), 吳氏(동복), 丁氏(나주), 蔡氏(평강). 睦氏(사천). 兪氏(기계). 閔氏(여흥). 禹氏(단양), 曺氏(창녕, 옥천). 張氏(인동). 盧氏(광주, 교하), 愼氏(거창). 徐氏(부여), 羅氏(나주, 안정). 全氏(옥천, 평강), 都氏(팔거), 河氏(진주), 孫氏(경주, 일직), 裵氏(성주), 琴氏(봉화), 康氏(재령), 邊氏(원주), 呂氏(성주), 高氏(개성), 具氏(능성), 文氏(남평), 南宮氏(함열), 卞氏(밀양) 등 33성 42본관. 제4책(貞): 尹氏(파평, 남원, 해평), 權氏(안동), 韓氏(청주), 趙氏(한양, 양주, 풍양, 순창, 평양), 洪氏(남양, 당성, 풍산, 부계), 黃氏(창원, 상주, 장수) 등 6성 17본관. 이상 총 47姓 126本貫을 수록하고 있다.16) 다음으로 이번에 영인하게 된 9책본에 대해 알아본다. 우선 규장각본은 목차가 다음과 같다. 1冊: 全州 李, 延安 李, 廣州 李, 慶州 李, 載寧 李, 咸平 李 等 6姓貫, 2冊: 韓山 李, 驪興 李, 安東 金, 慶州 金, 光山 金 等 24姓貫, 3冊: 義城 金, 禮安 金, 善山 金, 密陽 朴, 潘南 朴, 順興 安, 竹山 朴 等 23姓貫, 4冊: 靑松 沈, 宜寧 南, 英陽 南, 豊壤 趙, 晋州 姜, 丹陽 禹 等 18姓貫, 5冊: 東萊 鄭, 草溪 鄭, 全州 崔, 江陵 崔, 慶州 崔, 陽川 許, 杞溪 兪 等 19姓貫, 6冊: 安東 權, 禮泉 權, 淸州 韓의 3姓貫, 7冊: 文化 柳, 豊山 柳, 坡平 尹, 南原 尹, 平山 申, 驪興 閔 等 13姓貫, 8冊: 同福 吳, 羅州 丁, 南陽 洪, 豊山 洪, 缶溪 洪 등 3姓貫, 9冊: 礪山 宋 , 恩津 宋, 昌寧成, 居昌 愼, 仁同 張, 昌寧 曺, 玄風 郭, 咸悅 南宮氏 等 41姓貫 성균관대 존경각 소장본(11단)에는 첫 면에‘玉山後人萬卷樓信’, 끝 면에‘長宜子孫’이란 印이 찍혀 있다. 옥산은 경상도 인동의 다른 이름으로 인동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성씨로는 張氏가 있다. 규장각본과 동일하게 11段으로 필사되어 있고, 文科는 朱圈, 蔭職은 黃卷, 小科는 朱點, 武科는 靑圈이 가해져 있다. 1冊:이씨(全州, 延安, 廣州, 慶州, 載寧, 咸平) 6本貫, 2冊:이씨(韓山, 驪興, 驪州, 眞寶, 平昌, 全義, 固城, 陽城, 永川, 羽溪, 禮安, 龍仁, 星州, 碧珍, 光州, 興陽, 新平, 牙山, 泗川, 原州, 咸安), 김씨(安東, 慶州, 光山) 等 2姓 24本貫, 3冊:김씨(義城, 禮安, 善山, 豊山, 原州, 江陵, 商山, 金海, 瑞興, 順天, 咸昌, 靑道), 박씨(密陽, 咸陽, 順天, 務安, 竹山, 高靈, 潘南), 안씨(광주, 順興, 죽성, 竹山) 等 3姓 23本貫, 4책:권씨(安東, 禮泉), 한씨(淸州) 차씨(延安) 3姓 4本貫, 5책:오씨(同福), 丁氏(羅州) 홍씨(南陽, 豊山, 缶溪) 3성 5본관 6책:유씨(文化, 晉州, 豊山, 全州), 윤씨(坡平, 南原, 海平, 海南, 茂松), 신씨(平山, 高靈, 鵝州), 민씨(驪興) 等 4성 13本貫 7책:심씨(靑松), 남씨(宜寧, 英陽, 고성), 조씨(한양, 양주, 豊壤, 순창, 평양, 횡성), 목씨(사천), 강씨(晋州), 우씨(丹陽) 等 6성 13本貫 8冊(규5책):鄭氏(東萊, 草溪, 淸州, 海州, 晉州, 慶州, 延日, 河東, 溫陽, 鐵城), 최씨(全州, 江陵, 朔寧, 江華, 永川, 慶州, 和順), 허씨(陽川), 유씨(杞溪) 等 4성 19本貫, 9冊:송씨(礪山, 恩津, 진천, 야성), 채씨(평강, 인천), 원씨(원주), 서씨(부여), 장씨(인동, 안동), 황씨(창원, 장수, 상주, 평해), 성씨(昌寧), 愼氏(居昌), 노씨(광주, 교하), 曹氏(昌寧), 곽씨(玄風, 청주), 여씨(성주), 나씨(안정, 나주), 변씨(밀양), 배씨(성주, 흥해), 금씨(봉화), 구씨(능성), 하씨(진주), 손씨(경주, 밀양, 일직, 평해), 변씨(원주), 全氏(평강), 고씨(개성), 길씨(해평), 주씨(상주), 도씨(팔거), 南宮氏(咸悅) 等 25성 41本貫 도합 50姓 148本貫 규장각본과 존경각본은 일부 표지 책 순서의 차이(두 본의 제1~3책, 제9책은 동일하고, 존경각본의 제4책은 규장각본의 제6책, 존경각본 제5책은 규장각본 제8책, 존경각본 제6책은 규장각본 제7책, 존경각본 제7책은 규장각본 제4책, 존경각본 제8책은 규장각본 제5책으로 순차가 다름)만 보일 뿐 내용은 물론 제9책 끝에 부록처럼 육십갑자를 칸으로 만들어 해당 년의 주요 사건이나 인물 정보를 기입한 것까지 동일하게 필사된 것으로 보아 동일 저본으로 필사한 것임이 명백하다. 이 육십갑자를 통해 주요한 단서 몇 가지를 얻을 수 있다. 즉 甲子(“新羅王朴赫居世元年 漢宣帝五鳳元年 馬韓王箕勳二年”)로 시작해서 戊寅(“高麗太祖元年”), 乙未(“高麗太祖統一元年”), 己卯(“是歲宋亡, 元主統一”), 壬申(“本朝 我太祖大王元年 高麗亡四百七十五年”), 甲申(“明毅宗殉于社稷 淸主順治元年”), 己丑(“有鄭汝立獄, 大生殺戮”), 庚申(“有許堅獄, 大生殺戮”), 戊申(“有麟佐亂”), 壬午(“賊臣尙魯等謀害莊獻世子”), 丁酉(“眞宗追崇”), 壬子(“以某年事嶺儒上萬人疏”), 辛酉(“有邪獄, 正刑諸罪人”), 壬申(“有西賊, 平定”) 등은 주요 사건의 기록에 해당하고,“金佔畢齋生”,“鄭一蠹生”,“金寒喧生”,“權冲齋生”,“趙靜庵生”,“李晦齋生”,“李東皐生”,“李退溪生”,“金七峰17)生”,“盧蘇齋生”,“金開岩生”,“鄭藥圃生”,“崔松泉(崔興源)生”,“金鶴峰生”,“金東岡生”,“柳西厓生”,“鄭寒岡生”,“李梧里生”,“沈一松生”,“韓久庵生”,“李五峯生”,“張旅軒生”,“李白沙生”,“李蓮峯生”,“李漢陰生”,“鄭愚伏生/李芝峰生”,“鄭桐溪生”,“金荷潭生”,“趙龍洲生”,“許觀雪(許厚)生”,“吳東巖(吳端)生”,“許眉叟生”,“趙晩閑(趙壽益)18)生”,“龜沙(吳挺一)生”,“水邨(吳始壽)生”,“權霞谷19)(權愈)生”,“李星湖生”,“吳藥山生”,“尹邵南生”,“安順庵生”,“蔡樊巖生”,“丁海左生”,“丁茶山生”,“丁巳(1857년)-晩竹20)生”등은 인물 탄생 정보에 해당한다, 맨끝에“甲子(1864)-當宁元年”,“甲午-31년”이라고 쓰여 있다. 당저(지금 임금)는 고종을 가리키며 그 갑오년(1894)이 당저 31년임을 나타낸 것이다.21) 이로 보아 본서의 필사 시기는 1894년 직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규장각본에 부전지로 추가된 부분(인동장씨)이 존경각본에는 그대로 반영되어 필사된 것으로 보아 규장각본이 약간 먼저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인동장씨 부분은 존경각본이 매우 상세하다.22) 인동장씨가에서 가지고 있던 책이기에 상세한 追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성주배씨’등도 존경각본에는 더 추기되어 있다). 반면에 규장각본은 밀양변씨 변혁조-변익용 以下에 부전지로 변정상과 그 세 아들 영만, 영로, 영태가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제9책의 姓氏 순서가 규장각본은 宋、蔡、元、黃、成、愼、張、盧、徐의 순서로 되어 있음에 비해 존경각본은 宋、蔡、元、徐、張、黃、成、愼、盧의 순서로 되어 있다. 張氏家에서 가지고 있던 책이란 점이 관련이 있는 듯하다. 본서는『남보』의 명칭에 걸맞게 東人의 입장에서 附加 기술이 된 곳이 많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린 이후는 南人과 小北의 입장에서 기술되었다. 예컨대 해주정씨 鄭造의 옆에 “文, 大司諫, 首倡廢母議, 癸亥誅”등이 그것이다. 번암 채제공에 대해 존숭하는 입장도 보이니 동래정씨 鄭彦仁의 옆에“文, 司諫, 疏害樊巖”이라고 적혀 있다. 아울러 타 당파에 대한 추가 정보도 종종 있다. 예컨대 삭녕최씨 최동립-최종주의 아래에는“小北”이라고 적어 놓았으며, 여산송씨 송시길-송증-송정규 아래에도“北人”이라고 적어 놓았다. 은진송씨 宋鍈 宋銓 형제의 경우“反北(북인으로 돌아갔다)”, 거창신씨 愼憙 … 愼後成 … 愼世翊 아래에“反老(노론으로 돌아갔다)”라고 적혀 있다. 한편 인물 정보에“退溪門人”,“鶴峯門人”,“寒岡門人”,“旅軒門人”,“星湖門人”,“大山門人”처럼 師承을 기재하였다. 남인 학통 사승에 대한 기재가 다른 당파보에 비해 상세한 편이다. 다른 당파보, 종합보와 마찬가지로 庶에 대한 기재는 거의 드문 편이다. 거창신씨 신수근의 후손 懋( “進士, 學行, 觀雪門人, 晩湖”) 및 신후담의 아들 伸, 창녕조씨 曺偉의 동생 曺伸 및 曺植의 아들 次石, 양천허씨 허적의 아들 堅, 선산김씨 金壽煃(金宗相의 아들로 御醫를 지냄) 정도가 庶子로 기재되어 있다. 伏誅에 대한 기록은 종종 보인다. 예컨대 나주나씨 나홍언-나계태에“庚戌(1730)誅”라고 적혀 있다. 9책본『남보』의 최대 장점은 어느 집안을 막론하고 號에 대한 기재가 상세하다는 점이다. 일례로 나주정씨 다산 가문을 보면, 정재원(荷石), 정약용(茶山), 정학연(酉山), 정학유(耘逋處士), 정대림(蓮史), 정대무(硏園), 정대번(芸堂), 정대초(香畹) 등의 호가 별도로 적혀 있다.『나주정씨족보(동원공파)』에조차 정약용과 정학연의 호‘다산’과‘유산’만 적혀 있을 뿐 다른 이들은 전혀 호가 나와 있지 않은데 반해 본서에는 이처럼 유용한 호가 대거 추가되어 있다. 호를 확인함으로써 실학박물관에 소장된『兒學編』(필사기:“계유년 芸堂居士가 鐵馬山에서 쓰다”)이 다산의 손자 정대번이 1873년에 쓴 것임을 확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기도 광주와 그 인근에 주로 세거한 廣州安氏家(덕흥대원군 사위 安滉과 그 아들 應元 應亨-아계 이산해의 사위- 등 4형제 대에 특히 가문이 興했다. 순암 안정복은 應元의 5대손이다)에 내려오는『남보』(全3책)는 1950∼60년대 순암의 傍孫인 小泉 安鍾福(1900∼1977)이 필사한 것으로 집안에 전해오는『남보』를 저본(현존 유무는 미상)으로 하여 재정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근기남인가『남보』”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음과 같이 총57姓 160本貫이 수록되어 있다. 제1책-李: 전주(양녕대군, 효령대군, 성녕대군, 경녕군, 온녕군, 근녕군, 희녕군, 익녕군, 선성군, 수도군, 덕천군, 광평대군, 영응대군, 임영대군, 담양군, 계성군, 안양군, 익양군, 무산군, 금원군, 숭선군)、연안、광주、한산、용인、여흥、진보、성주、벽진、함평、경주、전의、평창、영천、우계、양성、고성、재령、신평、광주、원주、흥양、예안、아산、함안、사천.(以上 1성26본관) 제2책-朴: 밀양、함양、무안、반남、순천、죽산. 安: 죽산、광주、순흥. 金: 안동、상주、경주、강릉、풍산、광주、선산、예안、김해、함창、부안、청도、의성、연안、고령、순천、원주、서흥. 韓: 청주、당진. 趙: 한양、양주、풍양、평양、순창、횡성. 權: 안동、예천. 鄭: 동래、하동、진주、연일、해주、철성、청주、초계、온양、봉화、경주. 尹: 파평、해평、남원、무송、평산. 申: 평산、고령、아주.(以上 9성56본관)23) 제3책-崔: 전주、강릉、삭녕、강화、경주、화순、영천、수성. 柳: 전주、풍산、진주、문화. 成: 창녕、蔡: 평강. 睦: 사천. 丁: 창원、나주. 沈: 청송. 洪: 남양、풍산、부계. 姜: 진주. 許: 양천. 黃: 창원、장수、평해、상주. 兪: 기계、창원. 元: 원주. 吳: 동복. 宋: 여산、은진、양주、진천、야로、신평. 張: 인동. 呂: 성주. 徐: 부여. 南: 영양、의령、고성. 曺: 창녕. 閔: 여흥. 愼: 거창. 羅: 나주、안정. 郭: 현풍. 盧: 교하、광주. 河: 진주. 孫: 경주、밀양、일직、평해. 禹: 단양. 高: 개성. 邊: 원주. 裵: 성주、흥해. 文: 남평. 卞: 밀양. 白: 수원. 嚴: 영월. 全: 옥천、평강. 都: 팔거. 琴: 봉화. 康: 재령. 具: 능성. 丘: 평해. 南宮: 함열. 周: 상주. 任: 풍천. 林: 순창. 辛: 영월. 吉: 해주.(以上 47성78본관) 광주안씨가의『남보』이기에 당연히 광주안씨에 대한 기록은 매우 상세하다(단, 영천과 밀양으로 낙향한 광주안씨 家系는 소략하다).“근기남인계『남보』”의 성격상, 근기남인가에 대한 정보는 상세한 반면 영남남인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기술이 소략함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영남의 한산이씨 대산 이상정가, 여주이씨 회재 이언적가, 여주이씨 기우자(이행)파, 진보이씨(장인에 대한 기재가 아예 없음), 재령이씨(갈암 이현일가), 성주이씨, 벽진이씨, 영천이씨, 무안박씨 영덕파, 반남박씨 영주파(소고 박승임 후손), 해남윤씨, 인동장씨가 등이 다른『남보』에 비해 기술이 소략하다. 경상도 문경, 상주, 선산, 칠곡 등에 세거한 남인 가문에 소장된『남보』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근기남인계『남보』”와“영남남인계『남보』”의 성격이 명료히 변별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영남남인계『남보』”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가지고 있는『남보』를 발굴하는 것이 시급하다. 아울러 양산, 기장, 밀양 등에 세거한 남인가에서 舊藏하였던『남보』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가장 전형적인 근기남인계『남보』와 영남(안동/경남)남인계『남보』의 각각의 양상 차이를 고구하는 것은 향후 과제로 남긴다. 1)『 잠영보』는 4색 당파의 명문가를 모두 수록한 본과 노론 명문가만을 수록한 본으로 나뉜다. 성균관대 17책본은 前者의 경우인데 善本으로 필체도 좋고 연대도 純祖 연간까지 올라간다. 2)『 제가보』역시 4색 당파의 명문가를 모두 수록한 본과 小北 명문가만을 수록한 본으로 나뉜다. 3) “我東姓氏, 本國土姓, 多三韓、三國王公之苗裔, 其餘或賜姓, 或自中原出來, 各有譜系, 不如中國姓氏之淆亂難考也. 譜牒之可徵者, 亦略列于下.『東國諸姓譜』二十卷, 丁時述撰,『姓苑叢錄』, 任慶昌著【『述先錄』中, 任慶昌、丁時述、鄭四川, 爲譜學大家】,『氏族譜』五十三卷, 朴思正著, 禮山縣人,『百家譜』十卷, 許涵著,『氏族源流』, 李景說著,『氏族源流』七卷, 趙從耘著,『閥閱通考』四卷, 我王考潤色修補, 不肖孫圭景, 亦有修補.『八八帖』, 碧珍李姓著,『萬姓叢譜』, 兪彦䥧著,『東喬錄』二十卷, 撰人闕,『搢紳世譜』, 有八世, 有十世成譜者,『文譜』、『武譜』、『蔭譜』、『司馬譜』等編.『明衛譜』, 高麗人所著, 在松京云.『海東姓氏錄』, 梁誠之著,『百家譜略』, 撰者闕, 此外姓氏之書, 未知有幾種否也.” 4) 1434∼1486. 본관 한산. 호 松菊齋 또는 蘇隱. 시호 명헌. 5) 나주 丁時述(蔭, 典翰, 典簿)의 誤寫이다. 顯宗 때 인물이다. ‘만성통보’는 ‘諸姓譜’, ‘東國諸姓’ 등으로도 불렸다. 6) 趙從耘(1607∼1683) 본관은 풍양, 자는 伯農, 호는 松窓. 창강 조속(1595∼1668)의 조카다. 조종운 편『씨족원류』(필사본 7책, 조용진 소장)는 1991년 보경문화사에서 영인된 바 있다. 7) 민진원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장서각에 전5책 중 제4책이 결락된 본이 현존하고 있다. 8) 정필동의 생몰년은 1653∼1718. 9) “(전략) 謹按儒紳近系, 乃吾黨文蔭官五世譜也, 至若延城之李、豊山之洪、安東之權、平康之蔡、同福之吳、泗川之睦、押海之丁、晋陽之姜, 東方之世臣, 南人之巨室也. 今五世之間, 夷考其出入之跡、升沈之理, 歷歷可記, 雖有二三大夫羽儀明廷, 銅魚皀盖間, 出名族, 而向所謂宅揆銓衡方伯連帥, 寂廖無聞, 何其前盛而後衰也, 於此有所感於心者, 玆豈非黨倫之獘也歟. 遂書之以爲朋黨之戒云爾. 崇禎紀元後三辛丑(1781)獺祭魚節哉生魂, 完山崔鶴羽識.” 10) 1762년생. 1798년 생원. 善山에 세거한 명문가 출신이다. 남인가이면서 소북쪽과도 연혼 관계가 있었다. 李鈺의「與病花子崔九瑞狀」은 바로 최학우에게 보낸 변려체 편지이다. 11)『 婚姻譜』(필사본 1책, 한국연구원 소장, 定宗의 넷째 아들 宣城君을 포함한 여러 성씨의 혼인 계보도)도 있다. 작성시기는 면밀한 고구가 필요하다. 12) 원 필체(후대 추가 필체와 확연히 구별됨)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풍산 柳台佐(1763~1837)의 경우 朱圈과 함께 ‘文’만 적혀 있는데 그가 문과에 급제한 해는 1794년이다. 원 필체의 인물 정보 기록의 하한이 1800년 즈음인 증거는 매우 많다. 13)『 조선의 명가 광주이씨: 불굴과 휼민의 정치』, 서울역사박물관, 2007, 126면. 14) 고종 때 필사. 고종을 ‘當宁’라고 표기하고 있음. 15) 小田은 小田省吾(1871∼1953). 상권: 李(24본관)、金(16본관)、朴(7본관)、權(안동, 예천)、韓(청주)、柳(문화, 진주, 전주, 풍산) 6姓54本貫 하권: 洪(3)、尹(5)、趙(6)、鄭(10)、安(3)、崔(7)、申(3)、沈(1)、姜(1)、丁(1)、睦(1)、吳(2)、허(1)、채(1)、兪(1)、성(1)、장(1)、황(4)、송(4)、愼(1)、민(1)、원(1)、曺(1)、노(2)、우(1)、백(1)、하(1)、곽(1)、남(2)、나(2)、손(2)、卞(2)、엄(1)、구(1)、여(1)、배(2)、邊(1)、고(1), 금(1) 39姓82本貫 도합45姓136本貫 16)『 오보』4책(국립중앙도서관 2518-99-18)도 대동소이하다. 16단(판심 ‘午譜’, 붉은 색 사란공권), 1900년 이후 필사. 총46姓 135本貫을 수록하고 있다. 元: 이씨(전주, 연안, 廣州, 한산, 여흥, 용인) 亨: 이씨(진보, 성주, 벽진, 함평, 경주, 전의, 평창, 영천, 우계, 양성, 고성, 재령, 光州, 원주, 흥양, 예안), 박씨(밀 양, 함양, 무안, 반남, 순천, 죽산), 안씨(순흥, 광주), 김씨(안동, 경주, 강릉, 풍산, 상주, 광주, 선산, 예안, 김해, 함창, 의성, 청도, 연안, 고령, 순천, 원주, 서흥) 利: 한씨(청주), 조씨(한양, 양주, 풍양, 평양, 순창, 횡성), 권씨(안동, 예천), 정씨(동래, 진주, 연일, 해주, 청주, 초 계, 온양, 하동, 연일, 철성, 봉화), 윤씨(파평, 해평, 남평, 남원, 해남), 신씨(평산, 고령, 아주), 최씨(전주, 강릉, 삭녕, 강화, 경주, 화순, 영천, 수성), 유씨(전주, 풍산, 진주, 문화), 성씨(창녕) 貞: 채씨(평강), 목씨(사천), 丁氏(나주), 심씨(청송), 홍씨(남양, 풍산, 부계), 강씨(진주), 허씨(양천), 황씨(창원, 장 수, 평해, 상주), 유씨(기계), 원씨(원주), 오씨(동복), 송씨(여산, 은진, 양주, 진천, 야로, 신평), 장씨(인동), 呂氏 (성주), 서씨(부여), 남씨(의령, 영양), 曺氏(창녕), 민씨(여흥), 신씨(거창), 변씨(밀양), 나씨(나주), 곽씨(현풍), 노 씨(교하, 광주), 하씨(진주), 손씨(밀양, 일진, 평해), 우씨(단양), 고씨(개성), 邊氏(원주), 배씨(성주, 흥해), 문씨 (남평), 백씨(수원), 남궁씨(함열), 辛氏(영산) 17) 김칠봉은 동강 김우옹(1540~1603)의 부친 金希參(1507~1560)이다. 저술로『七峯先生逸集』이 있다. 18) 1596∼1674. 본관 순창. 서애 유성룡의 외손자임. 19) 존경각본엔 ‘谷’자가 누락되었다. 20) 만죽이란 호는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데 방산 허훈(1836∼1907)의 장남 허숙(1857∼1942, 호 來亭)의 별호가 아닐지 추정해본다. 방산 가문과 장지연 또는 장승원의 인동장씨 가문은 같은 구미 선산에 세거했고 인척 및 사승 등 밀접한 관계가 있다. 21) 규장각본은 “을미(1895)-32년”까지 필사되어 있다. 22) 존경각본의 전주이씨 李鍾萬은 追記된 부분인데 그 장인이 張敬遠이다. 인동장씨가의 사위이기에 추기될 수 있었던 것이다. 23) 제2책의 끝에 “安小泉謹書”라고 적혀 있다. 소천은 안종복의 호이다. 참고문헌 『南譜』, 성균관대 존경각(9책본, 3책본), 규장각(9책본, 4책본, 3책본), 유홍렬본(6책본), 장서각(4책본), 국립중앙도서관(3책본, 2책본), 안병걸본(3책본), 계명대(1책본) 외. 『午譜』, 장서각(4책본), 국립중앙도서관(4책본) 외. 『縉譜』, 규장각(4책본). 이이화 편,『조선당쟁관계자료집 16: 南譜』, 여강출판사, 1983. 『儒紳近系』필사본 1책, 수경실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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