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페세미나: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중에서 “나에게 온 문장“ (I)
상민: 이 사회는 노동으로부터의 자유가 목표로 해야 할 보다 고차적이고 의미있는 인간활동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중략) 우리는 노동이 없는 노동자의 사회를 생각해야 할 사태에 직면해 있다. 노동은 인간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활동이었다. 이것이 최악의 사태라는 것은 분명하다. (53)
하무: 신 자체는 아니더라도 하늘에 있는 인간의 아버지인 신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던 근대의 인간해방과 세속화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인 지구를 거부하는 매우 치명적인 결과로 끝나야 하는가? (68)
수미: 인간의 삶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실존조건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저절로 들어왔든 인간이 노력해서 들어왔든 상관없이 인간 세계로 들어온 것은 무엇이나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 된다. (86)
재현: 폴리스가 시민들의 사생활 침해를 방지하고 각자의 소유를 둘러싼 경계선을 신성한 상태로 유지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적 소유를 존중해서가 아니다. 가정이 없는 남자는 세계의 일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거처가 없기 때문이었다. (110)
다운: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사회가 모든 발전단계에서-예전에는 가정과 가계가 그랬던 것처럼-행위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사회는 각 구성원으로부터 일정의 행동을 기대하며, 수많은 다양한 규칙들을 부과한다. 이것들 모두는 구성원을 ‘표준화’시켜 행동하도록 하는 경향성을 가지며 자발적인 행위나 탁월한 업적은 갖지 못하게 한다.(112)
유선: 어떤 상황에서도 사회는 평등화 경향을 보이는데, 근대세계에서 평등의 승리는 사회가 공론 영역을 정복했고 차별과 차이는 이제 개인의 사적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정치적•법적으로 승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113)
지영: 자신과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 살고 이 사람들하고만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며 또 실제로 도시국가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불평등한 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근대와는 달리 정의와 무관한 평등이 자유의 필수적 본질이었다. 즉 자유롭다는 것은 지배관계에 내제하는 불평등에서 벗어나서 지배와 피지배 둘 다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113)
감자: 그리스인들은 아레테로, 로마인들은 비르투스로 불렀던 탁월성은 늘 공론영역에만 주어졌다. 사람들은 공론영역에서만 타인을 능가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할 수 있다. 공론 영역에서 수행되는 모든 활동은 사생활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탁월성을 획득할 수 있다. 탁월성의 획득을 위해서는 정의상 타인의 현존이 늘 요구된다. 이 현존은 동등한 동료에 의해 구성된 형식성을 필요로 하며, 동등한 사람들이나 열등한 사람들의 우연적이고 친숙한 현존이어서는 안 된다. (131)
인정: 두 사물의 위치가 다르듯이, 한 사람의 위치와 다른 사람의 위치는 일치할 수 없다. 타자에 의해 보이고 들리는 것이 의미가 있는 까닭은 각자 다른 입장에서 보고 듣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적 삶의 의미다. (141)
만약 소유자 각자가 정치적 삶을 영위하는 데 재산을 사용하지 않고 재산을 늘리려고만 한다면, 그는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희생하고 자진하여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는 존재, 즉 필연성의 종이 되고자 하는 것과 같다. (150)
세연: 놀라운 것은 역사의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간실존과 관련된 신체적 부분, 삶의 과정 자체의 필연성과 관련된 모든 것이 언제나 사생활 안에서 숨겨지기를 요구했다는 점이다. 삶의 과정의 필연성은 근대 이전에는 개인의 생활과 종의 생존에 이바지하는 모든 활동을 포괄했다.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 삶의 필요를 위해 봉사하는" 노동자와 자신의 신체로 종의 신체적 생존을 보장하는 여자들은 숨겨져 있었다. 여자와 노예는 같은 범주에 속하며, 그들은 누군가의 소유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이 신체의 기능에 바쳐져 '근면했기' 때문에 숨겨져야 했다.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