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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濟州)
귤림서원(橘林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ㆍ정온(鄭薀)ㆍ김상헌(金尙憲)ㆍ송시열(宋時烈)
별사(別祠) ㆍ이약동(李約東)ㆍ이회(李禬) 호는 만오(晩悟), 제주 목사를 지냈다.
桐.경진년(1700)
○ 남한산성의 현절사(顯節祠)에 제향되었다. -무진년(1688, 숙종14) 봄에 상이 남한산성에 주필(駐驆)하였을 때, 고 학사(學士)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 충정공(忠貞公) 윤집(尹集), 충렬공(忠烈公) 오달제(吳達濟)의 일을 말하는 사람이 있거늘, 상이 특별히 광주 유수(廣州留守)에게 명하여 성안에 사당을 설치하게 하고 현절사라 사액(賜額)하였다. 이해에 이르러 제생(諸生)들이 상소하여 선생과 문정공(文正公) 김상헌을 병향(幷享)하였다. 또
제주(濟州)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선생 및 충암(冲庵) 김정(金淨),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제현(諸賢)을 봉안하였다.
신미년(1691, 숙종17) 봄에 제주의 유생이 서울로 와서 선생의 손자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 정기윤(鄭岐胤)을 보고는 이 일을 말하고, 또 선생의 문집을 서원에 보관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서원을 건립한 때가 정확히 어느 해인지 모른다.-
동계정온유허비 (보성초동쪽)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57
(우) 63517(지번) 대정읍 보성리 1732
송죽사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추사유배지 북쪽 두 골목째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
(우) 63517(지번) 대정읍 안성리 1661-1
안성리 대정현 기록전시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15
(우) 63520(지번) 대정읍 안성리 1591-1
대정성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247번길 102
(우) 63505(지번) 대정읍 동일리 12
대정현역사자료전시관 (대정초동쪽)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대서로 17
(우) 63508(지번) 대정읍 상모리 3862-1
064-79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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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조(李源祚) 1792년(정조 16)~1871년(고종 8)
순조 24 1824 갑신 道光 4 33 자제들을 거느리고 寒川書堂에서 朔講을 행하기로 정하다. ○ 鄭逑의 文廟從祀를 청하는 상소를 쓰다.
헌종 6 1840 경자 道光 20 49 3월, 江陵 府使가 되다. ○ 강릉에서 三政救弊所를 설치하고 弊政 개혁을 추진하다.
헌종 7 1841 신축 道光 21 50 1월, 通政大夫에 오르고, 濟州 牧使가 되다. ○ 3월, 제주에 도착하여 기민을 구제하고 군비를 확충하다. ○ 「耽羅志」를 편찬하다.
헌종 9 1843 계묘 道光 23 52 4월, 제주 목사에서 체직되다. ○ 윤7월, 형조 참의가 되다. ○ 12월, 우부승지가 되다.
凝窩先生文集卷之十四 / 記 / 松竹書院記 壬寅(1842,헌종8)在耽羅時
桐溪鄭先生謫廬遺墟。在大靜之東城。余旣竪石而表之。縣之諸儒。又建祠而妥侑之。余手書松竹書院四大字以揭之。取先生寄題詩語也。嗚呼。先生節義。天下而萬世。非一島之所敢私。今以一片之石數間之屋。表先生之墟。又以區區之松竹標號而媲美者。不其少歟。雖然先生在棘之日。旣手植之。還朝之後。又詩諗之。其所感者深矣。物有時而變遷。亦隨地而改性。惟是二物也。南山北海。同一後凋。露滋霜腓。同一特立。今夫先生之節。惟義是徇。處之以文石靑蒲。惟此個義。厄之以刀山釰水。惟此個義。圍城之刃。某里之曆。亦惟此個義。院之諸生。苟能愛先生所愛之物。培植護持。相期于歲寒。則其於尊先生之義。守先生之院。亦庶幾焉。諸生請余記。臨歸傯遽。不暇他語。只敍院之所以命名者而遺之。經始顚末。俾諸生自書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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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와집(凝窩集) 이원조(李源祚)생년1792년(정조 16)몰년1871년(고종 8)자주현(周賢)호응와(凝窩), 취송(鷲松), 나고(懶高), 호우(毫宇), 만귀산인(晩歸山人)본관성산(星山)초명영조(永祚)시호정헌(定憲)특기사항조승수(趙承洙), 정종로(鄭宗魯)의 문인.
헌종 7 1841 신축 道光 21 50 1월, 通政大夫에 오르고, 濟州 牧使가 되다. ○ 3월, 제주에 도착하여 기민을 구제하고 군비를 확충하다. ○ 「耽羅志」를 편찬하다.
헌종 8 1842 임인 道光 22 51 松竹書院記 壬寅在耽羅時
헌종 9 1843 계묘 道光 23 52 4월, 제주 목사에서 체직되다. ○ 윤7월, 형조 참의가 되다. ○ 12월, 우부승지가 되다.
凝窩先生文集卷之十四 / 記 / 松竹書院記 壬寅在耽羅時
桐溪鄭先生謫廬遺墟。在大靜之東城。余旣竪石而表之。縣之諸儒。又建祠而妥侑之。余手書松竹書院四大字以揭之。取先生寄題詩語也。嗚呼。先生節義。天下而萬世。非一島之所敢私。今以一片之石數間之屋。表先生之墟。又以區區之松竹標號而媲美者。不其少歟。雖然先生在棘之日。旣手植之。還朝之後。又詩諗之。其所感者深矣。物有時而變遷。亦隨地而改性。惟是二物也。南山北海。同一後凋。露滋霜腓。同一特立。今夫先生之節。惟義是徇。處之以文石靑蒲。惟此個義。厄之以刀山釰水。惟此個義。圍城之刃。某里之曆。亦惟此個義。院之諸生。苟能愛先生所愛之物。培植護持。相期于歲寒。則其於尊先生之義。守先生之院。亦庶幾焉。諸生請余記。臨歸傯遽。不暇他語。b121_286c只敍院之所以命名者而遺之。經始顚末。俾諸生自書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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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續集동계속집
凝.철종 3 1852 임자 咸豐 2 61 鄭蘊의 「桐溪續集」을 교정하다. ○ 8월, 玄風, 昌寧, 統營, 晉州, 錦山, 德山 등지를 유람하다. ○ 12월, 대사간이 되었으나 곧 체차되다.
桐.철종 3 1852 임자 咸豐 2 - 후손 鄭蘷弼 등이 續集을 추가하여 문집을 重刊하다.(鄭鴻慶의 重刊序)
용이와집(龍耳窩集) 권뢰(權𡋃)생년1800년(정조 24)몰년1873년(고종 10)자경중(景中)호용이와(龍耳窩), 죽담(竹潭)본관안동(安東)특기사항허전(許傳)의 문인.
철종 3 1852 임자 咸豐 2 53 3월, 덕유산 일대를 유람하고 〈遊德裕山錄〉을 짓다.
龍耳窩集卷之三 / 雜著 / 遊德裕山錄
時方刊刻桐溪先生續集。而先生宗孫第三弟鄭衡相殷老。與宋止洛潤吾。爲書寫之役。殷老則壬辰生而居本縣薑洞。潤吾則庚辰生而居三嘉並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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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桐溪集) 정온(鄭蘊)생년1569년(선조 2)몰년1641년(인조 19)자휘원(輝遠)호동계(桐溪), 고고자(鼓鼓子)본관초계(草溪)특기사항조목(趙穆), 정구(鄭逑)의 문인.
桐溪先生續集卷之三 / 附錄 / 松竹書院記 前人
桐溪鄭先生謫廬遺墟。在大靜之東城。余旣豎石而表之。縣之諸儒又建祠而妥侑之。余手書松竹書院四大字以揭之。取先生寄題詩語也。嗚呼。先生節義。天下而萬世。非一島之所敢私。今以一片之石。數間之屋。表先生之墟。又以區區之松竹。標號而媲美者。不其少歟。雖然。先生在棘之日。旣手植之。還朝之後。又詩諗之。其所感者甚矣。物有時而變遷。亦隨地而改性。惟是二物也。南山北海。同一後凋。露滋霜腓。同一特立。今夫先生之節。惟義是殉。處之以文石靑蒲。惟此個義。厄之以刀山劍水。惟此個義。圍城之刃。某里之曆。亦有此個義。院之諸生。苟能愛先生所愛之物。培植護持。相期于歲寒。則其於尊先生之義。守先生之院。亦庶幾焉。諸生請余記。臨歸偬劇。不暇他語。只敍院之所以命名者以遺之。經始顚末。俾諸生自書之。
동계집 속집 제3권 / 부록(附錄) / 송죽서원기(松竹書院記) [이원조(李源祚)]
동계 정 선생이 적거(謫居)할 때의 유허지가 대정(大靜)의 동성(東城)에 있으니, 내가 이미 비석을 세워 그곳을 표시하였다. 대정현의 여러 선비들이 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는데, 내가 손수 ‘송죽서원(松竹書院)’ 네 자의 대자(大字)를 써서 걸었으니, 선생이 부쳐 보내 준 시의 말을 취한 것이다.
아, 선생의 절의는 천하 만세가 공유할 것이고, 한 섬이 감히 사사로이 할 바가 아니다. 그러니 지금 한 조각 비석과 몇 칸의 집으로 선생의 유허지를 표시하고, 또 구구한 송죽(松竹)으로써 서원의 호를 삼아 아름다움을 견주는 것이 너무 부족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더라도 선생이 귀양지에 계실 때에 이미 손수 심었고, 조정으로 돌아간 뒤에 또 시를 지어 알려왔으니, 그 송죽에서 느낀 바가 깊으셨던 것이다.
물건이란 때가 지나면 바뀌고 또한 땅에 따라 성질을 바꾸는 것이건만, 오직 이 소나무와 대나무만은 남쪽 산이건 북쪽 바다건 간에 똑같이 시들지 않고, 이슬이 적시든지 서리가 시들게 하든지 간에 똑같이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지금 저 선생의 절개는 오직 의리만을 좇아 죽으려 한 것이니, 문석(文石)과 청포(靑蒲)에 처해도 오직 이러한 의리였고, 도산(刀山)과 검수(劍樹)로써 곤궁하게 해도 오직 이러한 의리였고, 포위된 산성에서의 칼날과 모리에서의 숭정력(崇禎曆) 또한 이러한 의리일 뿐이었다. 서원의 제생(諸生)들이 만약 선생이 사랑하던 물건을 사랑하여 이를 배양하고 보호하면서 서로 세한(歲寒)의 지절을 기약한다면, 아마 선생의 의리를 높이고 선생의 서원을 지키는 일이 또한 거의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제생들이 나에게 기문을 청했으나 돌아갈 길이 바쁘고 급하여 다른 말은 할 겨를이 없기에 다만 서원을 명명한 까닭을 서술하여 돌려보내고, 서원을 건립한 전말에 대해서는 제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기록하게 한다.
[주-D001] 선생이 …… 시 : 1624년(인조2)에 제주 목사로 떠나는 성안의(成安義)에게 준 시를 말한다. 이 시는 《동계집》 제1권에 〈증별제주목사성안의(贈別濟州牧使成安義)〉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D002] 문석(文石)과 …… 의리였고 : 궁궐과 내정(內庭)에 있으면서 송죽처럼 곧게 간언했다는 말이다. 문석은 무늬 있는 돌로 만든 궁궐의 계단이고, 청포(靑蒲)는 천자의 내정(內庭)을 말한다. 한(漢)나라 원제(元帝)가 태자를 폐위하고 정도왕(定陶王)을 태자로 책봉하려 하자, 사단(史丹)이 와내(臥內)로 들어가 청포 위에 엎드려 울면서 부당함을 간하였다. 《漢書 卷82 史丹傳》[주-D003] 도산(刀山)과 …… 의리였고 :
경성으로 좌천되고 제주로 귀양 가는 등의 곤액을 당했을 때에도 송죽의 지절을 견지했다는 말이다. 도산검수(刀山劍樹)는 지옥에 있는 혹형(酷刑)의 하나인데, 혹 극도의 위험한 처지를 비유하기도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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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生續集卷之三 / 附錄 / 松竹書院奉安文[李源祚
於惟先生。德義名節。一生成就。萬古卓絶。人獸華夷。天彝物則。苟微先生。奈何東國。瀛海迢迢。風聲凜凜。松竹之詩。遺躅是諗。牧守豎碑。尤激于心。莫曰荒貿。先享橘林。因墟立廟。陞齋爲院。藏修揭虔。意義兩襯。位板旣成。卜日以侑。魯連所蹈。夫子何陋。神理洋洋。庶不我顰。山橘海藻。物薄誠蠲。起我懦頑。永牖後人。
동계집 속집 제3권 / 부록(附錄) / 송죽서원(松竹書院) 봉안문 [이원조(李源祚)]
아 우리 선생이 행하셨던 / 於惟先生
덕과 의리 명분과 절개여 / 德義名節
평생에 걸쳐 성취한 것은 / 一生成就
만고에 우뚝해 견줄 바 없네 / 萬古卓絶
인수와 화이를 구분하였고 / 人獸華夷
본성과 천리를 밝혀냈으니 / 天彛物則
진실로 선생이 없었더라면 / 苟微先生
우리나라가 어찌 되었을까 / 奈何東國
제주 바다는 아득히 멀지만 / 瀛海迢迢
그 풍성은 늠름히 전해지네 / 風聲凜凜
소나무 대나무를 읊은 시는 / 松竹之詩
귀양살던 곳을 생각하신 것 / 遺躅是諗
목수가 여기 비석을 세우니 / 牧守竪碑
더욱 마음속에 격앙되네 / 尤激于心
거친 곳이라고 이르지 말라 / 莫曰荒貿
먼저 귤림사에 배향하더니 / 先享橘林
유허지에다 사당을 세우고 / 因墟立廟
재실을 서원으로 승격했네 / 陞齋爲院
여기서 수양하고 제향함은 / 藏修揭虔
그 의의가 서로 부합하리라 / 意義兩襯
위판이 이미 이루어졌기에 / 位版旣成
좋은 날을 가려서 제향하네 / 卜日以侑
노중련이 밟으려 한 곳이요 / 魯連所蹈
공자가 누추하지 않다는 땅이라 / 夫子何陋
귀신이란 어디에나 유행하는 법 / 神理洋洋
아마 이곳을 싫어하지 않으리 / 庶不我顰
산 귤과 바다 마름을 올리나니 / 山橘海藻
제물은 박하나 정성은 정결하네 / 物薄誠蠲
나의 나태함과 완고함을 일으켜 / 起我懦頑
영원히 후인들을 개도해 주소서 / 永牖後人
[주-D001] 인수(人獸)와 화이(華夷)를 구분하였고 :
인수는 사람과 짐승, 화이는 중국과 오랑캐이다. 동계가 갑인봉사(甲寅封事)로써 인륜을 밝혔고, 남한산성의 절의로써 오랑캐를 물리친 것을 두고 이른 말이다.
[주-D002] 노중련(魯仲連) :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이다. 그가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50리 뒤로 물렸다고 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주-D003] 공자가 …… 땅이라 :
송죽서원이 제주의 먼 변방에 있으나 누추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공자가 변방 구이(九夷) 땅에 살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곳이 누추하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자, 공자가 답하기를, “군자가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君子居之 何陋之有]” 하였다. 《論語 子罕》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3
동계집 속집 제3권 / 부록(附錄) / 상향축문(常享祝文) [이원조(李源祚)]
충성은 인륜 도덕을 부지했고 / 忠扶舜倫
의리는 춘추 대의를 지켰다오 / 義秉魯史
절해고도에 덕의 향기 남겨서 / 絶海遺芬
송죽서원에 천년토록 전해지리 / 松竹千祀
이 봄 -가을- 의 상정일을 만나 / 玆値春丁
삼가 정결한 제사를 올린다오 / 式薦明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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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享祝文 前人
忠扶舜倫。義秉魯史。絶海遺芬。松竹千祀。玆値 春秋 丁。式薦明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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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生續集卷之三 / 附錄 / 大靜遺墟碑[李源祚]
大靜之東城。有桐溪鄭先生謫廬遺墟。鞠爲茂草。且數百年。知縣夫侯宗仁。因其址闢書齋。俾居儒士。夫本土人。爲政而知所先後。可嘉也已。余修邑誌。得先生一律詩及一跋文於斷爛中。表而載之。巡路過縣。指點其墟。遂命工表石而豎之。嗚呼。先生德義名節。與天地幷立。遺躅所在。人皆敬慕。余嘗入某里。登花葉樓。奉玩崇禎曆書。過娥林之龍山齋。參菊薦於先生墓。永嘉李氏家。見先生圍城時血書。斑斑可認。不禁歎咤。今來茲土。謁先生于橘林祠。又得托石記名於遺墟。余之獲幸於先生。可謂百世而朝暮矣。余於先生爲外裔。慕先生。公耳。何敢私。
동계집 속집 제3권 / 부록(附錄) / 대정 유허비(大靜遺墟碑) [이원조(李源祚)]
대정(大靜)의 동성(東城)에는 동계 정 선생이 적거(謫居)할 때의 유허(遺墟)가 있으니, 우거진 풀밭으로 변한 지가 거의 수백 년이 되었다. 지현(知縣) 부종인(夫宗仁) 사또가 그 유지(遺址)에 서재(書齋)를 짓고 선비들을 거처하게 하였다. 부 사또는 본래 이 지방 사람으로, 정치를 행하면서 무엇을 먼저 하고 뒤에 해야 하는지를 알았으니, 가상하다고 할 만하다. 내가 《읍지(邑誌)》를 정리할 때에 선생의 율시 한 수와 발문 한 편을 찢어진 글 속에서 찾아내어 이를 《읍지》에 실어 드러내었고, 순찰하는 길에 대정현을 지나면서 그 유허지를 돌아보다가 드디어 석공에게 비석을 세워 표시하게 하였다.
아, 선생의 덕의(德義)와 명절(名節)은 천지와 나란하기 때문에 유적이 있는 곳이면 사람들이 모두 경모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모리에 들어가서는 화엽루에 올라 숭정력에 쓴 시를 삼가 완상하였고, 아림(娥林 거창(居昌))의 용산재(龍山齋)를 방문해서는 선생의 묘소에서 국화주를 올리는 제사에 참석하였고, 영가(永嘉 안동(安東)) 이씨의 집에서는 선생이 남한산성이 포위되었을 때에 쓴 혈서(血書)를 보았는데, 아롱진 핏자국을 확인할 수 있어 비탄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지방에 와서는 귤림사(橘林祠)에서 선생을 배알하였고, 또 비석에 의탁하여 유허지에 내 이름을 기록했으니, 내가 선생께 행운을 얻은 것으로 말하자면, 오랜 세대가 지났으나 아침저녁으로 자주 뵙는 듯하다고 할 것이다. 나는 선생에게 외손이 되지만 선생을 경모하는 것은 공적인 것일 뿐, 어찌 감히 사사로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겠는가!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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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生文集卷之一 / 七言律詩 / 贈別濟州牧使成安義
大靜東門有弊廬。十年曾是逐臣居。靑松四箇應盈尺。脩竹千竿想蔽除。世事浮沈俱是夢。人間榮辱本來虛。瀛洲一曲留殊域。試命歌兒唱酒餘。
동계집 제1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 제주 목사(濟州牧使) 성안의(成安義)에게 이별시를 주다.
대정성 동문에 허름한 집 한 채 / 大靜東門有弊廬
십 년 동안이나 쫓겨난 신하가 살았네 / 十年曾是逐臣居
네 그루의 푸른 솔은 한 자가 되었겠고 / 靑松四箇應盈尺
쭉쭉 뻗은 대나무도 집을 덮었으렷다 / 脩竹千竿想蔽除
세상일의 부침이란 모두가 꿈인 게야 / 世事浮沈俱是夢
인간의 영욕도 본래는 허무한 것이고 / 人間榮辱本來虛
영주의 한 굽이 특수한 지역에 머물렀으니 / 瀛洲一曲留殊域
창기더러 권주가나 한번 부르게 하렴아 / 試命歌兒唱酒餘
ⓒ 한국고전번역원 | 조동영 (역)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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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生文集卷之二 / 記 / 大靜縣東門內圍籬記 萬曆甲寅秋八月日
漢挐一支。南走百餘里。分爲東西麓。東者曰山方岳也。破古未岳也。西者曰加時岳也。毛瑟浦岳也。直南而至海。列爲松岳山。加波島,磨羅島。皆穹窿突兀。有奇狀甚。破古以爲龍。加時以爲虎。黃茅滿野。去海十里。有孤城周遭者。乃大靜縣也。縣客舍之東城東門之內。自南而北數十步許。籬以圍之者。是吾攸居。前爲民舍。太守聞吾來。空其家以處之。屋有兩脊。南北相向。北脊故而陋。其架凡四而暗黑如漆。卑不直躬。狹不容膝。煙煤滿壁。衣冠點汚。不可一刻居。南角半間。爲土床以爲寢室。蓋土俗不喜爲堗。獨此家以此見占。東北角。置木豆。藏之糧資。其外作溷舍半架。西角。加設一間爲廚所。泥以塗之。穴以明之。竹以戶之。以防狗竊。南脊之架。與北脊同。而營之未久。不甚汚陋。自東第一間。作火堗。爲婢僕所處之地。第二間空之。爲出入之路。以板戶開閉之。置臼其側。土俗有臼無舂。不得不循俗也。西二間。通其中不隔。置木平床。爲待客所。床未滿處。編竹鋪之。南北兩脊之間。相距十餘尺。太守爲吾作書室二間。背東面西。東距城堞僅四五尺。西有橘林。籬高僅見樹梢。其室之制。樑長五尺。皆用布尺 柱高四尺。椽合兩邊凡五十四箇。不礎而土。茅而不編。以厚積不漏爲度。其上密置長木。貫以大索。相爲糾纏。蓋海上多風。常有拔屋之患。故民俗皆然。北一間爲溫房。南一間爲廳事。房內長廣皆五尺。廳亦如之。以紙塗其突油之。鋪以草地衣。廳之鋪亦同。房之西壁。有小窓。南以向廳有戶。廳之東南壁。有窓皆小。其西。空而不壁。又於房東壁矢窓下。置書架二層閣。經史數百餘卷整頓不亂秩。着驄冠服道衣。居處其中。閑來展卷。睡至支頤。泊如也。舍之西簷。短不足蔽陽。乃立三柱作松簷。廣數尺。長竟二間之舍。柱用蘆。其大可兩手合圍。太守曰。此乃海上漂流之物也。似竹非竹。人言浙江有蘆如許云。吾得以珍之。竟用於此。無乃有數存乎。相與拍手。編山竹爲簟。蓋其上。名曰松簷。而松在漢挐之上。斫而輸之。動經數日。取其便易者爲之。名實雖似不孚。松與竹何擇焉。圍籬之制。雜以山竹,杻木,眞柴。厚密無罅孔。其高出屋脊之上。計可丈餘。以長木作帶。結之者四層。恐其高而易覆。內外立柱撑之。北東南三面。皆接簷。全不見天。由西方見之者若坐井者然。籬之內。東西常有餘尺。南北居三之二。向南作板門。西傍置小竅。所以通飮食也。入圍籬時。金吾郞具冠帶。據轎床坐門外。令羅將挐我入置。閉其門封之。從籬西作小扉。蓋其例然也。旣入定。遇一土民。問之曰。此地風土吾嘗聞之矣。恒雨少日。恒風少靜。䨪濕中人。人或眩仆。今來數日。大陽登輝。燥濕之侯。與內地不甚相遠。豈前所聞誤耶。其人曰。然。環瀛洲一域。莫非洋中窮島。而此縣濱海尤近。地形卑下。瘴毒之氣。三邑中最甚。自春夏交。至秋八月初。淫雨連鬱不開。盲風發作無時。瘴霧昏塞。咫尺不辨人物。當是時。棟樑窓壁。水滴如泉。衣冠牀席。潤濕如泥。是故。雖有衣貨穀米。經夏卽腐。終歸無用。至於門戶樞金。經數年。亦皆銷朽。況於血肉之軀乎。吾儕小人。生長於斯。習與性成。內地朝官。何以堪處。秋氣欲晩。西北風起。則瘴癘少開。陽精呈露。果如近日矣。然冬或不寒。夏或不暖。氣候回互。寒暑逆置。故衣食難節。疾病易生。至如蛇虺,蜈蚣,螻蚓等蠢蠕之物。皆經冬不死。草木,菁,韭,蔥,苣凡種植之類。雖冬深皆取諸圃疇而用之。擧此可知其他。余聞之。咄咄歎曰。此眞別一區也。宜吾負罪者居之。余昔年。承恩譴宰北塞。北塞風土。亦云乖常。援彼比此。不啻天淵。罪有輕重。故所居之善惡亦異。況彼專城。而此圍籬。固不可同日語。噫。以吾之罪則當死無疑。幸賴天王聖明。生放海島。今日與若等同笑語。亦莫非恩波之及。風土之善不善。何暇論說。對者噓唏而退。仍記其略。使子姪輩知吾之所處如此云。
동계집 제2권 / 기(記) / 대정현(大靜縣) 동문(東門) 안에 위리(圍籬)된 내력을 적은 기문(記文) 만력 갑인년(1614, 광해군6) 가을 8월 모일(某日)이다.
한라산(漢拏山) 한 줄기가 남쪽으로 1백여 리를 뻗어가서 둘로 나뉘어 동서의 양 산록이 되었는데, 동쪽에는 산방악(山方岳)과 파고미악(破古未岳)이 있고, 서쪽에는 가시악(加時岳)과 모슬포악(毛瑟浦岳)이 있다. 곧장 남쪽으로 가서 바다에 이르면 송악산(松岳山), 가파도(加波島), 마라도(磨羅島)가 늘어서 있는데 모두 우뚝 솟아 매우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파고(破古)가 용의 형상이라면 가시(加時)는 호랑이 형상이다. 황모(黃茅)가 들에 가득하고 바다에서 10리쯤 떨어진 거리에 외딴 성으로 둘러싸인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대정현이다.
현(縣)에는 객사(客舍)가 있고 그 객사의 동쪽이자 성의 동문 안에서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수십 보쯤 떨어진 위치에 울타리를 둘러친 데가 바로 내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곳은 전에는 민가(民家)였는데,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태수(太守)가 이 집을 비워 두도록 했다가 나를 거처하게 한 것이다.
이 가옥의 구조는 두 개의 용마루가 남쪽과 북쪽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북쪽 용마루는 오래되고 누추한 데다 시렁이 네 개가 놓여 있지만 어둡고 새까맣기가 옻칠을 해 놓은 듯하다. 집이 낮아서 몸을 바로 세울 수가 없고 방도 좁아서 무릎을 움직일 수가 없고, 그을음이 벽에 가득하여 의관(衣冠)이 더럽혀지므로 잠시도 거처할 수가 없는 곳이다.
남쪽 모퉁이의 반 칸은 토상(土床)을 만들어서 침실로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대개 이곳 풍습이 온돌방을 좋아하지 않으나 유독 이 집만은 온돌을 놓았다. 동북쪽 모퉁이에는 목두(木豆)를 놓아 두어 식량을 저장해 두도록 하였고, 그 밖에 변소 반 가(架)를 만들어 두었다. 서쪽 모퉁이에는 한 칸을 더 두어 부엌을 만든 다음 진흙으로 바르고 구멍을 내어 밝게 하였으며, 대나무로 문을 만들어서 좀도둑을 막도록 하였다. 남쪽 용마루의 시렁은 북쪽 용마루와 같은데 만든 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그다지 더럽지는 않다.
동쪽으로부터 첫째 번 칸은 화돌(火堗)을 만들어서 비복(婢僕)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삼았으며, 둘째 번 칸은 비워 두어서 출입하는 길로 삼고 판자로 문을 만들어서 열고 닫게 하였다. 절구를 그 곁에다 두었는데 풍습에 절구는 있어도 방아를 찧는 일이 없으므로 부득이 풍습대로 따랐다. 서쪽 두 칸은 중앙을 막지 않고 터놓은 다음 나무 평상을 두어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삼았다. 평상이 차지 않는 곳은 대나무를 엮어서 깔았다. 남쪽 용마루에서 북쪽 용마루까지는 거리가 10여 척이다.
태수가 나를 위하여 서실(書室)을 두 칸 만들어 주었는데, 동쪽을 등지고 서쪽을 향하고 있다. 동쪽에서 성첩(城堞)까지의 거리는 겨우 4, 5척이며, 서쪽에는 귤림(橘林)이 있는데 울타리가 높아서 겨우 나무 끝만 보인다. 그 서실의 구조는 들보의 길이가 5척이며 -모두 포척(布尺)을 사용하였다.- 기둥의 높이는 4척이고, 서까래는 양쪽을 합하면 모두 54개였는데, 주춧돌을 놓지 않고 흙에다 바로 지었다. 지붕은 띠풀을 엮지 않고 두껍게 쌓아서 빗물이 새지 않을 정도로 하였으며, 그 위에는 길다란 나무를 빽빽하게 놓고 커다란 새끼줄로 꿰매어서 서로 얽어 놓았다. 이는 해상(海上)이라서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항상 지붕이 날아갈 우려가 있으므로 민속(民俗)이 다들 그렇게 한다.
북쪽 한 칸은 온돌방으로 만들고 남쪽 한 칸은 청사(廳事)로 만들었는데, 방 안의 길이와 너비는 모두 5척이고 청사도 같다. 온돌을 종이로 발라서 매끄럽게 하고 풀을 엮어 만든 자리를 깔아 놓았으며 청사에 까는 것도 같았다. 방의 서쪽 벽에는 작은 창이 있고 남쪽은 청사를 향해 문이 있다. 청사의 동남쪽 벽에 창이 있는데 모두 작은 것이고 서쪽은 벽을 쌓지 않고 비워 두었다. 또 방 동쪽 벽 시창(矢窓) 아래에 2층으로 된 서가(書架)를 두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수백여 권을 가지런하게 잘 정돈해 두었다. 내가 총관(驄冠)을 착용하고 도의(道衣)를 입고 그 안에서 거처하면서 한가롭게 책을 보다가 졸리면 턱을 괴고 편한 자세로 조용히 쉬곤 한다.
집의 서쪽 처마는 길이가 짧아서 볕을 가리지 못하므로 기둥을 세 개 세워서 소나무 처마를 만들었다. 너비는 두어 자쯤 되고 길이는 두 칸 집의 끝까지였다. 기둥은 갈대를 사용하였는데 크기가 양쪽 손으로 잡을 만하였다. 태수가 말하기를, “바다에서 떠밀려 온 물건인데 대나무 같지만 대나무는 아니다. 사람들의 말로는 절강(浙江)에 있는 갈대가 그만큼 크다고 하는데 내가 그것을 얻어서 진귀하게 여기고 있다가 마침내 여기에다 썼으니, 이 물건에도 수(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사람들은 그 말에 박수를 쳤다.
산죽(山竹)을 엮어 대자리를 만들어서 그 위를 덮고 이름을 소나무 처마라고 하였다. 소나무는 한라산 위에 있으므로 베어서 운반해 오려면 여러 날이 걸리므로 그 편리한 것을 취하여 한 것이니 이름과 실제가 비록 맞지 않는 듯하나 소나무와 대나무를 어찌 가릴 것이 있겠는가. 둘러쳐 놓은 울타리는 산죽(山竹)과 뉴목(杻木)과 진시(眞柴)로 틈이 하나도 없이 두껍게 막았으며, 그 높이는 지붕 위를 훨씬 벗어나서 재어 보면 한 발 남짓 된다. 길다란 나무로 띠를 만들어서 묶어 둔 것이 4층인데 그것이 높아서 쉽게 무너질까 염려한 것으로 안팎에다 기둥을 세워 지탱시켜 놓았다.
북쪽, 동쪽, 남쪽 3면은 모두 처마에 닿아서 하늘을 전혀 볼 수가 없고 서쪽에서만 볼 수 있으니, 마치 우물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울타리 안에 동쪽과 서쪽은 항상 한 자 남짓 여유가 있고 남쪽과 북쪽은 3분의 2가 되는데 남쪽을 향해 판자문을 만들어 놓았다.
서쪽 옆에는 작은 구멍을 만들어 두었는데 음식을 넣어 주기 위한 것이다. 둘러쳐 놓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올 때에 금오랑(金吾郞)이 관디[冠帶]를 갖추고 교상(轎床)에 기대어 문밖에 앉아서 나장(羅將)으로 하여금 나를 잡아서 안으로 들여 넣게 하고 그 문을 닫아 봉함하였다. 울타리 서쪽에 작은 사립문을 만들었는데, 대개 그 전례가 그러하다.
이미 입정(入定)한 뒤에 토착민 한 사람을 만났는데, 내가 묻기를,
“이곳 풍토에 대하여 내가 일찍이 들으니, 항상 비가 와서 갠 날이 적고, 항상 바람이 불어서 조용한 날이 적으며, 매습(霾濕)이 사람에게 침투하면 사람이 간혹 현기증으로 쓰러진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수일 동안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데다 건조하고 다습한 기후가 육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으니, 전에 들었던 것이 잘못 들은 것인가?”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영주(瀛洲)의 전역은 바닷속에 있는 궁벽한 섬이지만 이곳 대정현은 바닷가가 더욱 가깝고 지형이 낮아서 장독(瘴毒) 기운이 세 읍 중에서 가장 심합니다. 봄여름의 교차 시기부터 8월 초순까지 음산한 비가 연일 내려서 갠 날이 없고 사나운 바람이 무시로 불며 장무(瘴霧)가 잔뜩 끼면 지척에서도 사람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가 되면 기둥, 들보, 창문, 벽 등에 물방울이 샘에서 솟는 듯하고, 의관(衣冠)과 침상 및 자리가 습기를 받아 진흙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옷이나 재물이나 곡식이 있다 하더라도 여름철만 지나고 나면 썩어서 결국 쓸모없게 됩니다. 심지어 문에 부착한 돌쩌귀도 수년만 지나면 역시 모두 녹아 버리고 마는데 더구나 피와 살로 된 몸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소인(小人)들은 이곳에서 나서 자랐기 때문에 몸에 배었습니다마는 내지(內地)의 조관(朝官)이 어찌 견딜 수 있겠습니까. 가을이 저물 무렵 서북풍이 일면 장려(瘴癘)가 조금 걷히고 햇볕이 드러나는 것이 과연 요즘 날씨와 같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간혹 차지 않고 여름이 간혹 따뜻하지 않아서 기후가 불순하고 추위와 더위가 뒤바뀌기 때문에 의복과 음식을 조절하기가 어려워 질병이 발생하기 쉬우며, 뱀, 지네, 지렁이 등 구물거리는 것들이 모두 겨울철을 지나고도 죽지 않고, 나무와 풀, 무, 부추, 파, 참깨와 같은 식물류들을 비록 한겨울일지라도 모두 밭에서 캐다가 쓸 수 있으니, 이것을 보면 나머지 다른 것은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혀를 끌끌 차며 탄식하기를, “이곳은 참으로 별다른 지역이구나. 나와 같이 죄를 지은 자가 거처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내가 전에 성상의 견책을 받고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어 북쪽 변방으로 갔었는데, 북쪽 변방의 풍토도 역시 괴상하였지만 그곳은 여기에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니다. 죄에는 경중이 있기 때문에 거처하는 곳이 좋고 나쁜 것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곳에서는 한 성(城)을 관할하였고 여기에서는 위리(圍籬) 안에 갇혀 있으니, 같이 비교하여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아, 나의 죄는 의심할 여지 없이 죽어 마땅한데, 다행히 천왕(天王)의 성명(聖明)하심을 힘입어 살아서 해도(海島)로 보내졌다. 오늘 내가 그대들과 같이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은덕의 여파가 미친 것이니, 풍토가 좋고 나쁜 것이야 어느 겨를에 논하겠는가.” 하니, 응대하던 사람이 탄식하며 물러갔다.
그래서 그 대략을 기록하여 자식과 조카들에게 내가 거처하는 곳이 이러하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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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生文集卷之二 / 序 / 送河主簿弘道還鄕序
越之流人。去國期年。見似人者而喜。況余之去國四年。而離鄕又加一期者乎。又況河君之非特似人而已者乎。今來見之。不亦樂乎。雖然。於余心。有所惑者存焉。來汝河君。請與辨之。吾與若。前有貴賤之分。後無從遊之好。特鄕里之泛然者已。翟公罷去。門外張羅。此古今人情之所共然。況余落此四罪之地。寧有再起之望乎。則人之不後地於我亦明矣。河君旣衰且老。又無子若孫。設或有後地。於河君。何有哉。利害無所據。而君意何勇來爲。古之論海者。以南海爲最。其言曰。天傾西北而海獨居南。比之三方。尤遠且險。到今親見之。然後益信其然。島之距陸千有餘里。而鯨濤險惡。颶風常多。舟往來不利者。首尾相望。人之視此海。不啻若鬼關之危而已。死生亦大矣。而君何冒死來爲。吾於鄕黨。淸濁無所失。骨肉強近之親。肩相磨也。朋友死生之契。亦不小矣。其餘淺淺者。亦豈河君之比哉。然而無一人以一來相見。發於空言。而又聞有往見者。非人情之議。其言固有理矣。人情不甚相遠。而君何違衆來爲。夫以泛泛之分。又處無所爲之地。而忘大洋之險遠。從他人之非議。而爲骨肉心交之所不能爲者。河君乎。而有心。余不能忖度之。是何帠歟。河君笑而不答。但云。生前一見。誠幸誠幸。與之相對乎寂寞中。跬步不相離。毒霧鑠肌而不以爲苦。炎風蒸骨而不以爲病。勸之休則不應。人欲與之出遊則不肯。余又試問之曰。河君一何苦哉。人之入此島。誠不易也。此地多有奇觀異跡。盍一往觀之。以自壯平生之胸膽哉。河君又笑而不答。但云。晷刻侍側。良幸良幸。余曰。咄咄河君。何其每問而不吾告耶。今之世大抵皆波。君其不欲波者耶。吾非君。惡知君之心於我之心乎。君非吾。惡知我之知君之心與不知君之心之心乎。又惡知君之不答之爲深答。而我之不知之爲眞知乎。於其去也。與之酒而不復問。
동계집 제2권 / 서(序) / 주부(主簿) 하홍도(河弘道)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전송한 서문
월(越)나라의 유배당한 사람은 고국(故國)을 떠난 지 1년이 되자 고향 사람과 닮은 사람만 보아도 기뻐하였다. 더구나 나는 도성을 떠나온 지 4년이 되었으며 고향을 떠난 지가 4년에 또 한 돌을 더하였으니 어떻겠는가. 게다가 또 하군(河君)은 단지 고향 사람과 닮은 사람일 뿐만이 아닌 데이겠는가. 지금 와서 만나 보니 또한 기쁘지 않은가. 비록 그러나 내 마음에는 의혹스러운 점이 있다. 이리 오라. 너, 하군아. 내가 너와 더불어 그 의혹을 풀어 보고 싶다. 나는 너와 전에는 귀천(貴賤)의 구분이 있었고 뒤에는 서로 잘 지낸 적도 없었으니, 단지 마을에서 예사롭게 지내던 사이일 뿐이다.
적공(翟公)이 파면되어 돌아가자, 문밖에 새 잡는 그물을 설치한 것은 예나 이제나 인정이 다 그러한 법이다. 더구나 나는 이 멀고 험한 섬에 귀양 와 있으니 어찌 재기할 가망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나에게 뒷날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하군은 이미 쇠약하고 늙은 데다 또 자손도 없다. 설령 뒷날이 있다 하더라도 하군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해를 근거할 데가 없는데 군은 어찌하여 용기를 내서 왔단 말인가.
옛날에 바다를 논하는 자가 남해를 으뜸으로 삼았다. 그 말에 ‘하늘은 서북쪽이 기울고 바다는 홀로 남쪽에 있어서 세 곳에 비하여 더욱 멀고 험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와서 직접 보고 나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섬에서 육지까지는 거리가 천여 리가 되는데 파도가 험하고 태풍이 항상 많아서 왕래하기에 용이하지 않은 배들이 서로 대기하곤 하는데, 사람들은 이 바다 보기를 저승으로 가는 관문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역시 큰 것인데, 군은 어찌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왔는가. 내가 우리 고을에서 청탁(淸濁)을 잃은 바가 없으므로 골육과 같은 지극히 가까운 친척들도 수없이 많으며 생사를 함께하자고 맹세한 벗도 적지 않다. 그 밖에 이러저러한 자들이 어찌 하군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누구 하나 찾아오겠다고 빈말이라도 해 주는 자가 없었다. 또 듣건대, 가서 보는 것은 인정(人情)이 아니라는 의논이 있다고 하니, 그 말이 진실로 그럴 듯하다.
인정(人情)이란 그다지 서로 다르지 않은 법인데, 군은 어찌 대중의 인정을 어기고 왔는가. 대저 범범한 친분으로 또 어찌할 수 없는 곳에 처해 있는데, 넓은 바다의 험난하고 먼 것을 잊고 다른 사람들의 비난하는 논의를 아랑곳하지 않고 골육이나 마음으로 사귀는 자들도 능히 하지 않은 바를 한단 말인가. “하군아, 그대가 갖고 있는 마음을 내가 헤아리지 못하겠다. 이 무슨 법인가?” 하고 물었으나, 하군은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었다. 단지 생전에 한 번 보았으니, 진실로 다행이라고만 말하였다.
조용한 가운데 서로 마주하고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으며, 독한 안개가 살갗을 녹이는데도 괴롭게 여기지 않았으며, 무더운 바람이 뼈를 찌는 듯해도 병으로 여기지 않았다. 휴식을 취하도록 권유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남들이 함께 나가서 놀고자 했으나 반기지 않았다. 내가 또 시험 삼아 묻기를, “하군은 한결같이 어찌 그리 고달프게 하는가. 사람이 이 섬에 들어오기가 진실로 쉽지 않다. 이곳에는 기이한 경치와 특이한 사적이 많은데 어찌 한 번 가서 보고 스스로 평생의 포부를 장대하게 가져 보지 않는가.” 하니, 하군이 또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잠시나마 곁에서 모시고 있으니 진실로 다행일 뿐이라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쯧쯧, 하군아. 어찌 매번 물어도 나에게 말을 하지 않는가. 요즈음 세상이 대부분 다 물결인데 그대는 물결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인가. 내가 그대가 아닌데 내 마음속에서 그대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그대는 내가 아닌데 내가 그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찌 알겠는가. 또 그대가 대답하지 않는 것이 심오한 대답을 한 것이며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인 줄을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그가 떠날 때에 술을 한 잔 주고서 다시는 묻지 않았다.
[주-D001] 월(越)나라의 …… 기뻐하였다 :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나오는 고사이다. 월나라의 유배된 사람이 고향을 떠난 지 며칠이 되었을 때는 자기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기뻐하고, 한 달 가량 되었을 때는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기뻐하고, 1년이 되었을 때는 자기 고향 사람과 닮은 사람만 만나도 기뻐했다고 한다.
[주-D002] 적공(翟公)이 …… 것 : 한(漢)나라 때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는 손님이 문전에 가득했었는데, 하루아침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자, 아무도 방문하는 사람이 없이 적막하여 참새들만 뜰에 날아와 먹이를 쪼아먹는 바람에 그물을 설치해서 잡을 정도였다고 한다. 《史記 卷120 汲鄭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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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生文集卷之二 / 記 / 鄭贊甫滿月堂記
自余爲僇人。密棘以栫之。高扄以閉之。所見不過尺天也。所步不過尺地也。耳𦗖𦗖無所聞也。目𥇙𥇙無所見也。心愂愂而不宅於軀殼之內也。本爲禦魑魅來也。反爲魑魅所侵欺迫脅者且有日。今年春暮。族弟鄭君贊甫以書來曰。吾築堂旣成。又鑿其下池之。滿月其扁也。煩兄其記之。且題詠以寄。吾將圖刻揭諸楣也。余閱書未了。心魂飛越。忽如身倚高軒。手弄素波。向之𦗖者睲。𥇙者䁷。愂者㥣。快然若沈痾去體也。飄然若病鶴之出樊籠也。洽然若御列子之風而翔乎寥廓也。噫。斯堂吾固登之也。斯池吾固見之也。其時未甚以爲奇也。是何贊甫之一書。能起余若是也。遂援筆而爲之歌。歌曰。賢哉贊甫。肯搆其堂。惟堂之敞。背陰面陽。于以鑿之。貯漣其中。惟源有水。其出無窮。煙霞不孤。風月攸居。彈琴其上。其樂只且。傍有客。見而問之曰。堂則美矣。抑其所卜之地。亦有佳致未。余又應聲而歌之。歌曰。洞號葛川。地接龍門。靑山作屛。白水爲藩。花明柳綠。古之桃源。泉甘土肥。今之盤谷。民風淳美。君子之澤。吾弟居之。爰得其直。客曰。堂池之好。洞府之勝。旣聞命矣。第未知滿月之名。其意安在。願卒聞形容之妙也。余乃沈思默會。續而歌之曰。堂高而虛。月出照兮。池淨而深。月生耀兮。到天心處。無片雲時。排窓入戶。滿屋輝輝。月愛堂乎。堂邀月乎。無心相値。以永今夕。歌罷。咄咄嘆曰。猛虎在檻。聞風矯首。神龍失水。聽雷掉尾。何者。畏約之甚。故感發之易也。山水。吾癖也。風月。吾主也。一出世路。百計歸虛。孤囚窮島。與死爲隣。於斯時也。贊甫之請及之。其不爲聞風之虎乎。其不爲聽雷之龍乎。狂歌之作。烏可已也。客噓唏而退。因書其歌以寄之。歌凡三章十二句。又以四韻一首。題于左。題之者誰。桐溪鼓鼓子也。年月日何。萬曆乙卯之夏四月辛巳也。
동계집 제2권 / 기(記) / 정찬보(鄭贊甫)의 만월당(滿月堂)에 대한 기문
내가 죄인이 되고부터 빽빽한 가시나무로 둘러치고 빗장을 높이 걸어 가두었으니, 보이는 것은 한 자 남짓한 하늘에 불과하고 걷는 곳도 한 자 남짓한 땅에 불과하다. 귀는 이명(耳鳴)이 생겨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고, 눈은 눈꺼풀이 내려와 아무것도 볼 수가 없고, 마음은 산란하여 몸 안에 있지 않았다. 본래는 이매(魑魅)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데, 도리어 이매의 침노를 받고 협박을 받은 것이 벌써 며칠이 되었다. 금년 늦은 봄에 족제(族弟)인 정군 찬보(鄭君贊甫)가 편지를 보내오기를, “내가 지은 집이 이미 완성되었고 또 아래에 못을 파고 그 편액을 만월(滿月)로 하였으니, 형이 그 기문(記文)을 지어 주기 바랍니다. 또 시를 지어 부쳐 주시면 내가 장차 판각을 하여 문미(門楣)에 걸어 두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서찰을 다 읽기도 전에 마음이 나는 듯하여 갑자기 몸이 높은 헌함을 기대선 듯하고 손으로 하얀 물결을 만지는 듯하였다. 전날 들리지 않던 귀가 밝아지고 보이지 않던 눈이 밝아지고 산란하던 마음이 온화해지면서 흔쾌하기가 마치 고질병이 몸에서 떠난 듯하고, 산뜻하기가 마치 병든 학이 조롱에서 벗어난 듯하고, 흡족하기가 마치 열자(列子)가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듯하였다.
아, 이 집은 내가 진실로 올랐던 곳이며, 이 못은 내가 진실로 보았던 곳이다. 그때에는 그다지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었는데 어찌 찬보의 서찰 한 통이 나를 이렇게 흥기시키는가. 드디어 붓을 들어 노래를 적었다. 노래에 이르기를,
훌륭하다 찬보여 / 賢哉贊甫
기어이 그 집을 지었네 / 肯構其堂
집이 통창한 것은 / 惟堂之敞
음지를 등지고 양지를 향했기 때문이라 / 背陰面陽
그리고 못을 파서 / 于以鑿之
그 속에다 물을 가두었네 / 貯漣其中
근원 있는 물이 되고 보니 / 惟源有水
그 솟음이 다함이 없어라 / 其出無窮
연하는 외롭지 않으리 / 煙霞不孤
풍월도 함께 있는 바로다 / 風月攸居
그 위에서 거문고를 타면 / 彈琴其上
즐겁기도 하겠네 / 其樂只且
하니, 곁에 있던 손이 보고서 묻기를, “집은 아름답다 하려니와 잡은 집터도 역시 아름답다 할 수 있겠는가?” 하기에, 내가 또 그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에 이르기를,
골짜기 이름은 갈천이라네 / 洞號葛川
위치는 용문에 인접해 있고 / 地接龍門
청산으론 병풍을 삼았으며 / 靑山作屛
백수로는 울타리를 삼았네 / 白水爲藩
꽃이 밝고 버드나무 푸르니 / 花明柳綠
옛날의 도원이런가 / 古之桃源
샘은 달고 흙은 비옥하니 / 泉甘土肥
오늘날의 반곡이어라 / 今之盤谷
민풍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니 / 民風淳美
군자의 은택이로다 / 君子之澤
나의 아우가 살고 있으니 / 吾弟居之
이에 그 가치를 얻었어라 / 爰得其直
하였다. 객이 이르기를, “집과 못이 좋고 동부(洞府)가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거니와, 다만 만월(滿月)이란 이름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오묘한 형용을 마저 듣기 원하노라.” 하므로, 내가 잠자코 생각하다가 이어서 노래 부르기를,
집은 높고 텅 비었으니 / 堂高而虛
달이 떠서 비추도다 / 月出照兮
못이 맑고 깊으니 / 池淨而深
달이 나서 빛나도다 / 月生耀兮
중천에 뜰 때가 그렇고 / 到天心處
구름 없을 때가 그렇다 / 無片雲時
창을 열면 방 안으로 들어와 / 排窓入戶
온 집 안이 가득 빛나도다 / 滿屋輝輝
달이 집을 사랑하는가 / 月愛堂乎
집이 달을 맞이하는가 / 堂邀月乎
무심히 서로 만나서 / 無心相値
이 밤을 길이 함께하노라 / 以永今夕
하였다.
노래를 마치고 혀를 끌끌 차며 탄식하기를, “사나운 호랑이가 우리에 갇혀 있다가 바람 소리를 듣고 머리를 드는 듯하고, 신룡(神龍)이 물을 잃고 천둥소리를 듣고 꼬리를 흔드는 듯하다. 왜 그런가? 두려움이 심하여 감정이 발로되기 쉬워서 그렇다. 산수(山水)에 대한 내 마음은 치유할 수 없는 병이며, 풍월(風月)에 대한 내 정서는 이미 주인이 되었다. 그런데 한 번 세상에 나갔다가 백 가지 계획이 허사로 돌아가고 궁벽한 섬에 외로운 죄수가 되어 죽음과 이웃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찬보가 요청을 해 왔으니 바람 소리를 들은 호랑이가 되지 않겠으며, 천둥소리를 들은 용이 되지 않겠는가. 광기 어린 노래를 어찌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손님이 탄식하며 물러갔다.
그래서 그 노래를 써서 부쳐 주었는데, 노래는 3장(章) 12구(句)였다. 또 4운 1수(首)를 왼쪽에다 썼다. 쓴 사람은 누구인가? 동계(桐溪) 고고자(鼓鼓子)이다. 연월일은 언제인가? 만력(萬曆) 을묘년(1615, 광해군7) 여름 4월 신사일(辛巳日)이다.
[주-D001] 열자(列子)가 …… 날아오르는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열자가 바람을 타고 가니 시원스레 좋다. 15일 뒤에야 돌아온다.”라는 말이 있는데, 성현영(成玄英)의 소(疏)에, “열자가 풍선술(風仙術)을 익혀 바람을 타고 돌아다닌다.”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동영 (역)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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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속집 제1권 /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 만월당(滿月堂)에 제영(題詠)을 부치다. 2수(二首)
반 이랑 모난 못가의 만월헌이여 / 半畝方塘滿月軒
눈 앞의 광경으로는 용문산이 넓게 트였네 / 面前光景豁龍門
이와 같이 맑은 뜻은 아는 이가 적을 테고 / 一般淸意人知少
팔완당의 고풍에 이런 손자가 있었구려 / 八玩高風有是孫
제주에 유배된 오늘 슬픈 회포 일어나고 / 鵩賦愁懷今橘海
무릉도원 찾던 옛날을 꿈속에서 생각하오 / 漁舟夢想舊桃源
어느 때나 풀려나서 그곳으로 달려가서 / 何時放赦那邊去
밝은 달빛 함께 대하고 다시 술을 마실까 / 共對明輝更倒樽
일찍이 고헌에 올랐을 때 술을 많이 권했는데 / 曾上高軒勸酒多
편액을 새로 달았다기에 그대 위해 노래하오 / 更聞新扁爲君歌
동봉에 계수나무 토하면 빛이 먼저 들어오고 / 東峯桂吐光先入
서령에 두꺼비 기울어도 그림자가 굽지 않네 / 西嶺蟾傾影不阿
거울 같은 맑은 물결은 광한전을 머금었고 / 鏡面澄波涵廣漢
오동나무 맑은 소리는 항아를 감동시키리 / 桐心淸韻感姮娥
이곳 배소에서도 만월당 속의 달을 보나니 / 圍中亦見堂中月
밤새도록 돌아갈 생각에 귀밑머리 희어지오 / 一夜思歸鬢欲皤
[주-D001] 만월당(滿月堂) :
정종주(鄭宗周)의 당호(堂號)로,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農山里)에 있다. 《동계집(桐溪集)》 제2권에 〈정찬보만월당기(鄭贊甫滿月堂記)〉가 실려 있다. 찬보(贊甫)는 정종주의 자이다.
[주-D002] 팔완당(八玩堂) :
정몽서(鄭夢瑞)의 호이다. 만월당 주인 정찬보(鄭贊甫)의 조부이다.
[주-D003] 동봉(東峯)에 …… 않네 :
동쪽 산봉우리에 달이 뜨면 만월당에 달빛이 먼저 비치고, 서쪽 재[嶺]에 달이 기울어도 달그림자가 굽지 않는다고 하여, 사방으로 확 트인 만월당의 전경을 읊고 있다. 계수나무와 두꺼비는 모두 달을 상징하는 말이다.
[주-D004] 광한전(廣寒殿) :
달 속에 있는 궁전의 이름이다.
[주-D005] 항아(姮娥) :
달 속에 산다는 선녀 이름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3
滿月堂寄詠 二首
半畝方塘滿月軒。面前光景豁龍門。一般淸意人知少。入玩高風有是孫。鵩賦愁懷今橘海。漁舟夢想舊桃源。何時放赦那邊去。共對明輝更倒樽。
曾上高軒勸酒多。更聞新扁爲君歌。東峯桂吐光先入。西嶺蟾傾影不阿。鏡面澄波涵廣漢。桐心淸韻感姮娥。圍中亦見堂中月。一夜思歸鬢欲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