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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이해
- 곽 노 윤 목사
1. 죽음이란?
인간이란 태어나서 자라고 발전하며 성숙되고 노쇠하며 죽게 된다. 이렇게 삶과 죽음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 지닌 정상적인 궤도이다. 공자는 일찍이 "삶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삶을 철저하게 이해하면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o, 1450~1519)가 충만된 낮의 생활도 수면의 기쁨을 주지만 인생은 죽음의 기쁨을 준다"고 하였듯이, 죽음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현상이며 인생은 죽음을 전제로 한 삶인 것이다. 삶 한가운데서 우리는 죽음에 둘러싸여 있고 죽음에 대한 질문도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뜻이며 불가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서 자라며 발전하고 성숙되며 노쇠하여 죽는다. 이렇게 삶은 인간이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자기 스스로를 개발하고 형성해 나가면서 성숙한 사람으로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다.
삶과 죽음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 지닌 정상적인 상태이다. 인간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일상적인 생활사를 통해 많은 사건들을 경험하지만 죽음은 되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에게 일회적인 것이며 경험의 세계를 초월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의 일회성은 삶의 허무를 말하거나 삶의 포기를 종용하는 것이 아니고, 삶이 단 한 번뿐이기에 그 중요성은 더욱 큰 것이며 나아가서는 새로운 삶으로써의 죽음, 행복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희망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성 프란치스꼬는 임종의 순간에 "형제들이여!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합시다"라고 하여 죽음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임을 말하였다.
죽음에 관해 올바른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철학자도 의사도 신학자도 법률가도 죽음에 관해 명쾌한 해답을 주지는 못하며 단지 경험적, 이론적인 견해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음은 여러 권위자들에 의해 정의되어 왔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공식적인 정의에 의하면 죽음이란 본질적으로 중요한 특징의 불가역적인 상실로 말미암아 생물체가 완전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2. 의학적인 죽음이란?
의학적 측면에서 다루는 죽음은 주로 신체적인 죽음에 해당되며 신체적 죽음은 다시 임상적 죽음과 생물학적 죽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임상적 죽음은 호흡이 없고 심장이 정지된 상태이고 뇌의 활동이 중지된 상태이다. 그러나 불가역적인 경우가 아니고 죽은지 얼마 되지 않은 경우 소생을 주도하고 치료가 적절히 수행되면 정상적인 뇌기능을 포함하여 모든 신체 장기의 기능이 회복되는 경우도 있다. 생물학적 죽음은 소생술을 하지 않거나, 소생술의 효과가 없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데, 뇌의 신경과 모든 조직이 괴사되는 과정이다. 순환이 되지 않고 약 1시간 후면 심장, 신장, 폐 등이 괴사되기 시작하며 2시간 후면 간이 괴사되기 시작한다. 피부는 몇 시간 혹은 며칠이 지나면 괴사되기 시작한다.
즉 생물학적 죽음은 신체의 건강한 상태로부터 세포 전체가 생명 현상의 정지에 이르는 점차적인 이행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의학적인 죽음의 판정 기준은 죽음에 대한 개념의 중점을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서 변화해 왔다. 과거에는 호흡 정지, 심장박동의 정지, 피부색의 변화, 근육의 이완과 경직이 죽음 판정의 지침이 되었으나 현대에 와서 의학이 발달됨에 따라 비록 뇌의 기능이 정지되어 있어도 인공호흡 보조기 등의 도움으로 호흡이나 심장박동 등의 활력 증상을 연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의학적인 죽음을 판정하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고 법적인 문제에까지 파급되었다.
죽음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소생 할 수 없는 삶의 영원한 종말" 이라고 하였고, 한국어 대사전에서는 "사(死), 입몰(入沒), 사망(死亡), 사세(死世),끝장, 죽는 일,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 세포내의 연속적인 생리적 변화가 불가역적으로 되어 정지하는 상태"로 정의되어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대한의학협회내 '죽음의 정의 위원회'에서는 1983년에 죽음을 "심장 기능 및 호흡 기능과 뇌 반사의 불가역적 정지 또는 소실"이라고 정의하였고, 1989년에 죽음을 "심장, 폐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 도는 뇌간을 포함한 전 뇌기능의 불가역적 소실"이라고 재정의 하였다.
'뇌가 죽었다'고 하는 뇌사의 개념은 이미 1800년대부터 정의되어 왔지만 뇌사를 둘러싼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 것은 1967년 남아공화국의 크리스챤 버나드 박사에 의하여 세계 최초의 심장이식 수술이 성공한 이후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뇌사가 무엇인지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고 뇌사설에 대해 사회 각계 각층에서의 찬반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1993년 대한의학협회에서 제정한 「뇌사에 관한 선언」을 함으로써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일반적으로 뇌사는 '뇌의 모든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 또는 '혼수를 넘어선 상태'를 의미한다.
엄격한 의미에서의 뇌사란 뇌세포의 사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뇌기능의 불가역적 정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신체의 혈액순환이나 다른 장기의 기능은 유지되고 있지만 뇌기능의 완전하고 불가역적인 와해를 말하며 이러한 뇌기능의 정지를 개체사로 보려는 견해가 뇌사설(腦死設)이라고 할 수 있다.
[뇌사의 관한 선언]은 다음과 같다.
① 사망은 심폐기능의 정지인 심폐사 또는 전뇌기능의 소실인 뇌사로써 판단한다.
② 뇌사의 판정은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 행위의 중단, 새로운 생명을 재창조하는 장기 공여의 경우에만 시행한다.
③ 뇌사의 판정은 대한의학협회 제정 ( 뇌사 판정기준 ) 에 따른다.
④ 뇌사 판정을 하고자 하는 의료 기관은 뇌사 판정 기준이 정한 인력과 시설을 갖추었는지에 관하여 심사와 인준을 받아야 한다.
⑤ 뇌사 판정을 한 의료 기관은 그 사례에 대한 점검 내용을 대한의학협회에 보고하여 인준받아야 한다.
⑥ 뇌사자의 장기를 이식하고자 하는 의료 기관은 대한의학협회 제정 [장기이식 의료기관 요건]을 갖추어야 하며 그 인력과 시설에 관하여 대한의학협회의 심사와 인준을 받아야 한다.
현대 의술의 발전으로 인한 뇌사 판정은 잘 적용될 경우 과학적이고 객관적일 수 있으나 뇌사가 장기이식의 효율성을 높일 목적으로 이용될 때는 사회윤리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뇌사 인정이 장기이식과 관련된 것이면 그 조건이 윤리적이어야 하며 뇌사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곧 장기이식을 마음대로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지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진지한 토론과 합의를 거쳐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뇌사를 인정하고 있다. 어떤 상태를 뇌사라 하는지 판정기준을 보면
1)외부 자극에 전혀 반응이 없는 깊은 혼수상태
2)자발 호흡의 불가역적 소실
3)양안 동공의 확대 고정
4)뇌간 반사의 완전 소실 : 광반사, 각막반사, 안구 두부반사, 전정 안구 반사,
모양체 척수반사, 구역반사, 기침반사
5)자발 운동, 제뇌강직, 제피질 강직, 경련등이 나타나지 않는다.
6)무호흡검사. ①-⑥의 검사를 6시간 경과 후에 재확인한다.
7)뇌파검사 : 위의 ①-⑥의 기준을 재확인한 후 뇌파를 건사하여 평탄뇌파 30분 이상을 확인한다.
뇌사는 흔히 말하는 식물인간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식물인간은 대뇌의 기능은 소실되었으나 간뇌나 소뇌는 살아있어 호흡이나 새체징후가 계속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즉 살아있는 상태인 것이다.'
3. 죽음의 의미
삶을 신(神)의 선물로 이해한다면 죽음 또한 같은 선물의 일부로 이해 될 수 있다. 티엘리케(Thielicke)는 죽음이란 인간이 신이 아닌 것을 잊지 말라는 신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죽음의 의미를 유형별로 알아보기로 합니다.
1) 삶의 의미를 파괴시키는 부조리한 죽음 / 의미 있는 죽음이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면 의미가 없고 부조리한 죽음이 되겠지만 시간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시간사용을 신중하게 하고 사려 깊게 의사결정을 한다면 삶의 의미는 물론 죽음도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 모두 죽음을 맞이할 터인데 어떤 죽음을 원하십니까?
2) 아름답고 평온한 죽음 / 추하고 무서운 죽음이다.
용서와 화해 사랑으로 좋은 이별을 하는 아름답고 평온한 죽음을 맞는 경우와 미움과 증오로 서로에게 화를 내다가 이별을 하는 무서운 죽음을 맞는 경우가 있다.
3) 소멸로서의 죽음 / 전환으로서의 죽음이다.
소멸로서의 죽음은 임상적인 죽음으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의식의 중단이다. 전환으로서의 죽음은 육체적인 형태를 갖는 존재에서 다른 세계의 어떤 존재로 통과하는 하나의 변화이다.
4) 벌로써의 죽음 / 보상으로서의 죽음이다.
벌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은 서구문화에 깊이 배어 있다. 구약성서의 아담과 이브는 영원히 죽지 않는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됨으로써 죄에 대한 벌을 받았다. 그들의 이러한 원죄 때문에 은총으로부터 멀어지고 인간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죽음은 또한 하나의 보상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 즉 삶의 의미를 주는 것,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맞아들이는 하나의 도전, 신의 뜻,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다.
4. 종교적인 죽음의 의미
예로부터 죽음은 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종교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임종자와 이를 돌보는 이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차이가 있다고 본다.
동양 종교의 죽음관
(1) 한국의 무속 신앙과 죽음
우리의 옛 풍습에서는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 버리면 정말 죽은 것이고, 그 영혼이 다시 그 육체 속으로 돌아오면 살아난다고 생각한다. 한 인간이 호흡을 멈추면 그 사람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 한가운데로 가서 북쪽을 바라보며 그 사람의 이름을 세 번 길게 부른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 혼이 다시 몸에 합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을 고복(皐復) 혹은 초혼(招魂) 이라고 하며 이렇게 해도 살아나지 않으면 그때에야 비로소 '죽음'으로 규정한다.
한국인의 영혼관은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사람이 죽은 후 저승으로 가는 사령(死靈)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깃들여 있는 생령(生靈)이다. 이와 같이 무교에서는 영혼을 평안히 모셔서 저승으로 잘 가게 하는데 특색이 있다. 한국인은 영혼에 대한 모습과 성격 규정을 살아있는 사람과 동일하게 인격적으로 대우한다. 죽음을 '돌아가셨다'라고 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 살다가 늙어 수명이 다하면 저 세상으로'돌아가서 살게 된다' 는 한국인의 생사관의 반영이다.
(2) 중국의 유교 사상과 죽음
공자의 제자인 계로가 공자에게 "죽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태어나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유교는 내세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죽음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공자도 경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유가는 죽음 자체의 의미나 죽어서 시작하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삶과 죽음을 대자연의 법칙에 의한 신귀과정으로 봄으로써 형이상학적 문제로 돌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삶과 죽음 때문에 앞뒤로 연장될 수 있는 상념을 처음부터 단념하고 거의 일회적인 인생 자체에 몰두하게 되었다.
공자가 한 것처럼 귀신과 죽음의 질문을 뿌리치면서 사람과 삶에의 정열적 관심과 사랑을 나타낸 것이 유가였다.
죽음은 인생을 시작해서 엮어가다가 마치는 엄숙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생사에 대한 생물학적 또는 종교적 관심에서 벗어나서 자기 책임 아래 인생을 엮어간다는 자율의 도덕론적 관심으로 정착된 것이다.
(3) 도교 사상과 죽음
도교는 중국 고대의 민간 신앙을 바탕으로 삼는 신선설(神仙說)을 중심으로 불로장생을 주목적으로 하는 현세 이익적인 자연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도교는 죽음을 문제시하지 않고 죽음을 단지 자연 변화의 일부로서 도(道)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장자의 도교적 입장의 죽음관은 특이하다. 그는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삶은 죽음의 동반자요, 죽음은 삶의 시작이니, 어느 것이 근본임을 누가 알랴? 삶이란 기운(氣運)의 모임이고 기운이 모이면 태어나고 기운이 흩어지면 죽는 것인데 이같이 사(死)와 생(生)이 같은 짝을 만나면 무엇을 조심하랴. 내 생애를 잘 지냈으면 죽음 또한 의연하게 맞이해야 한다."
(4) 인도의 힌두교와 죽음
고대 인도인은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세상을 야마(Yama)라고 불렀고 이것이 불교에 들어오게 되면 염라(閻羅)라고 음역된다. 그러나 후기 베다시대(기원전 8세기경)에 이르면 야마의 왕국에서 조차 삶과 죽음이 있다는 논쟁이 일어나서 윤회 사상이 싹트게되었다.
인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가사의를 죽음이라고 생각하였다. 인도인의 죽음관을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죽음이란 것을 낡은 옷을 벗고 새옷을 갈아 입듯이 새로운 생명을 얻어 껍질을 벗는 새롭고도 영원한 재생으로서 파악하였는데 이는 죽음을 바로 생명 과정의 하나로보는 것이다.
인도인들의 사상 속에는 인간의 본질적 자아가 생사의 순환을 벗어난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에 현세의 죽음을 정복할 뿐만 아니라 내세의 생명과 죽음까지도 정복하기를 열망한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때 죽음의 공포는 자취를 감추고 생사의 순환에서 자유로우며 육신의 죽음은 깨달은 자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아니라고 본다. 죽은 것은 육신이지 본질적 자아는 아니기 때문이다.
(5) 불교 사상과 죽음
불교에서는 죽음을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보았다. 이 현실의 냉혹한 자각을통해 죽음이라는 실상을 초연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진실을 체득함으로써 현실적 죽음의 문제가 극복된다는 것이 붓다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이 극복을 통해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 전반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후(死後) 의 존재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인식이었다. 즉 삶에도 번민하지 않고 죽음에도 번민하지 않는, 생명에 대한 추구였다.
말하자면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업과 윤회를 벗어난 경지로서 번뇌를 꺼 버린다는 원의를 지닌 열반이다. 죽음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불교의 궁극적 인식인 '생사 즉 열반 (生死卽涅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방도가 된다. 불교에서의 죽음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로 귀결되며 마음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무심(無心) 의 상태, 즉 적정(寂靜) 이며 열반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때 해결된다.
5. 성경에서의 죽음이해
성경은 죽음을 철저히 죄와 연관시키고 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타락으로 말미암아 덧붙여진 것이지, 창조질서에 고유하게 속하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성경은 단언한다.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여부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이 본문은 성경에서 죽음에 관해 언급한 최초의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죽음이란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불순종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의 죽음은 단지 육체적 사망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물론 창2:17절에 나타나는 '죽는다'는 의미의 동사 'muth'는 일차적으로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에 대해 하나님의 형벌을 언급한 부분에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고 한 것이다.
그러나 사망은 육신 적인 죽음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성경은 영적인 죽음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은 영적인 사망 상태에 있다는 말과 같다. "범죄 하는 영혼이 죽으리라"(겔18:4,20)는 에스겔서의 말씀은 문맥 속에서 볼 때, 영적인 죽음이나 영원한 죽음을 가리킨다. "만일 그 죄인이 자신의 사악한 길에서 돌이킨다면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21-22)는 말씀이 문맥 속에 이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점은 확실하다.
또한 신자나 불신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육신 적인 죽음을 경험한다는 사실로부터 추론해 볼 때 여기서의 죽음은 분명히 육신 적인 죽음일 수 없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고 한 바울의 표현 가운데 사망과 대조를 이루는 말, 영생은 그것의 짝인 사망의 성격을 규정한다.
여기서의 사망이란 육신 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임을 가리킨다. 여하튼 그 어떤 종류의 사망이든 간에 그것이 죄로 왔다는 사실은 변개치 못할 성경의 진리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라는 바울의 선언은 창세기 2:17에 반향(反響)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죽음이란 바울이 보여준 대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고전15:21). 이 점은 바로 죽음이 죄의 결과이지,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본래적인 의도 가운데 한 부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인간은 죄를 짖지 않을 수도 그래서 죽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죽음은 창조구조에서 비 본래적이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낮선 것이며 더구나 원수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 구원받은 뒤 죽음의 의미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10) 죽음을 종식시키고 생명을 드러내시는 일이야말로 메시아께서 이루실 구속사역의 핵심 부분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속량하셨을 뿐 아니라, 죄의 모든 결과들로부터도 그들을 구속하셨다는 사실은 명명백백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롬6:9; 히2:14-1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죄를 정복하셨다면 그리하여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부터도 자기 백성을 구속하셨다면, 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들이 여전히 죽어야만 하는가? 물론 죽음을 맛보지 않고 직접 하늘에 들어갈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 있을 자들이다(고전 15:52). 왜 이러한 일들이 한정된 그리스도인에게만 적용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등등의 문제들은 매우 난해한 것들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The Heidelberg Catechism)]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교리서 16번째 주일에 해당되는 제 42문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우리가 또 죽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러하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보상이 아니라 단지 죄에는 죽고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문답서를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성경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성도들의 죽음은 결코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둘째, 죽음은 성도들로 하여금 죄짓는 일을 종식시킨다
는 점이다. 셋째, 성도들에게 있어서의 죽음이란 영생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란 사실이다.
이제 신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더 이상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들을 해방하였기 때문이다.(롬2:1-2) 형벌의 의미는 성도의 죽음에서 제외되었으며 죽음에는 오히려 다른 차원의 목적이 발견된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12:6).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신자들은 죽음에서 훈련과 징계라는 성화적 차원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육신 적인 죽음 자체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악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경륜 속에서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은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게 하며 육욕을 억제하게 하고 또한 죽음을 준비하게 한다.
이처럼 성화의 차원에서 영적인 유익을 제공하는 죽음은 또한 구원의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죽음은 죄 짓는 일을 종식시킨다. 이 최후의 날이 이르기까지는 비록 신자일지라도 그 심령 속에 그치지 아니하는 탄식을 경험하게 된다." 이(피조물)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성도의 이 모든 탄식은 죽음과 함께 종식을 고한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생에 들어가는 관문이다. 신자들은 지금 여기서 이미 영생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죽음의 관문을 통과한 후 경험하지 못했던 영생의 풍성함은 더욱 넘칠 것이기에 죽음에 준비해야만 한다. 그것도 늘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일방통로이며 생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순간이요,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심각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6. 말기 환자의 자신의 죽음에 대한 반응
죽음에 대한 태도와 반응은 다른 모든 태도나 느낌처럼 개인에 따라 다르며 비록 비슷한 삶의 배경을 가진 자라도 서로 매우 다를 수 있다.
1) 두려움
① 미지에 대한 두려움 : 임종환자는 가까운 장래에 죽는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갖게 된다. 죽음에 대한 무지 ( unknown of death ) 는 다음과 같은 두려움을 가져온다.
* 삶의 과정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없을까 ?
* 이 세상 삶 후에는 어떤 운명이 될 것인가 ?
* 죽은 후의 나의 육체는 어떻게 될 것인가 ?
*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
* 다른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
* 생의 계획과 목표는 어떻게 되는가 ?
* 몸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
* 감정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
▶ 어떤 질문은 즉각적인 대답이 가능할 것이고 어떤 것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또한 어떤 것은 이 세상에서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대답이 가능한 것은 해 주는 것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며 환자를 무거운 짐에서 부분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고 공포에 대처하고 극복 하도록 도울 수 있다.
②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 외로움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을 선고받은 환자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이다. 현대에 와서는 많은 죽는 이들이 아픔과 괴로운 환경에 홀로 남게 되고 친밀한 환경(가정)에서 소외되고 병원이란 기관에 머물게 된다. 홀로 투쟁하고, 아픔을 견디고 두려움을 견디어야 한다는 외로움 고독 통증은 현대인에게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 불확실한 환경에서는 다른 이의 존재가 환자에게도 위로와 확신과 안정을 준다. 죽음 직전의 환자들이 괴로워하면서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사랑하는 가족들이 함께 해 준다면 가장 큰 위안이 되겠죠.
③ 가족과 친구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 을 때 슬프고 두렵지만 죽어가는 환자는 전부를 다 잃어 버려야 하 기 때문에 두려움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④ 자기 조절 능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 질병이 깊어감에 따라 자신의 신체나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점과 타인의 힘을 빌리고 의존해야 하는 신체적인 부담, 정신적인 부담과 경제적인 부담감을 가져야 하며 자기 비하의 느낌과 과정을 경험해야 하는 두려움이다.
▶ 환자에게 남은 시간 중에도 어느 정도 조정과 조절이 가능함을 납득시키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격려하여 자아 존중과 자기 결정을 하도록 하고 자기 자신을 필요 이상의 비하에서 헤어 나오도록 해 준다.
또한 환자가 어떤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더라도 그의 자존심을 생각하고 존중하며 의견을 물어 사소한 것이라도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⑤ 육체의 상실과 무력감에 대한 두려움 : 육체는 자아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질병으로 인한 육체의 상실이나 불구, 기능 저하, 마비 등은 자기 자신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아상의 무너짐은 부끄러움과 부적절함, 죄의식, 사랑 받지 못함, 원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 우리는 환자가 자기 상실에 대한 슬픔을 충분히 슬퍼하도록 기회를 주고, 또한 자아 존중감이나 자기 통합의 상실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지해야 한다.
⑥ 고통과 괴로움에 대한 두려움 : 괴로움에 짓눌려 소리치며 죽어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고통 그 자체이며 이러한 고통이나 통증은 수술 후의 통증과는 다르다. 환자가 통증 후에 완화될 수 있음을 알면 아픔을 덜 느끼게 되지만 죽음의 고통은 완화가 없는 것이다. 즐거운 미래를 기대할 수 없고, 왜 이런 고통속에서 삶을 지속 해야 하는가라는 회의 속에서 살게 된다.
▶ 따라서 통증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고통 중에 홀로 남게 되지 않고 통증이 완화될 수 있음을 알면 환자는 휠씬 고통을 잘 견디어 낼 수 있다.
⑦ 정체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 ; 인간적인 접촉, 관계, 가족, 친구 관계의 상실, 육체의 구조와 기능, 자기 제어, 자신의 정체성을 협박하는 모든 의식의 상실은 그것들이 자기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져온다.
▶ 자신의 삶의 부분으로 접촉하던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 줌으로 인해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 주며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고 전생애에 있어서 한 부분임을 인정하도록 도와준다.
⑧ 슬픔에 대한 두려움 : 임종환자는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상실을 슬퍼 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자기 자신을 잃는 것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
·조절 능력의 상실
·자립의 상실
·신체적, 심리적 기능과 사고 능력 상실
·중요한 사람과 외적인 것, 익숙한 환경의 상실
·자기 자신의 어떤 특성과 정체성 상실(자신의 유능함, 사랑스러운 면, 자신의 매력의 가치 상실)
·의미의 상실, 세상과 그 안의 모든 사람과의 관계 상실
죽음의 한 과정으로서 상실을 생각할 때,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지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체험하도록 하며, 특히 모든 상실이 전부 일어나지 않음을 알려 준다. 또한 예측할 수 있는 슬픔은 받아들이고, 만족감을 즐기며, 성취감을 느끼도록 삶을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
⑨ 퇴행에 대한 두려움 : 죽음이 가까워짐에 따라 환자는 퇴행에 대한 두려움이 더 현저해 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절 능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마지막 행동과 관련이 된다. 죽음이 가까워지면서 신체적 능력 저하와 의식의 불명료, 퇴행의 느낌, 현실감의 상실, 자기 자신과 타인과의 구분의 불명료, 시간과 공간의 느낌 상실 등이 환자를 두렵게 하는 것들이다.
▶ 환자가 편안하게 현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도록 도와 주며, 자신의 위축됨과 승복을 인정하고, 심리적 죽음의 신호와 현실적 삶의 충격으로부터 피하도록 해준다.
⑩ 절단과 부패, 매장에 대한 두려움 : 이러한 두려움은 특별히 죽음의 과정에 포함되지 않으나 임종환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두려움 입니다. 가령 죽은 후에 육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몸이 매장된 후 벌레들에게 먹히는 두려움 등 죽음과 매장에 관하여 무서운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
▶ 이러한 것에 대해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의학의 정확성과 조심성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2) 우울, 의기 소침
우울은 죽음에 직면한 환자의 또 다른 정서적 반응입니다. 임종환자의 슬픔의 한 부분으로서 즉각적인 상실을 인식하는 자연스런 반응이다. 우울은 하나의 기전으로서 사랑하는 것을 모두 잃게 되는 것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 우울은 환자가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도록 격려하며 허용하는 태도로 환자를 지지해 주면 도울 수 있습니다.
3) 분노와 적개심
분노와 적개심은 임종환자와 그 가족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이는 미래를 지속할 수 있는데 자신은 미래의 삶을 박탈당한 것이다. 다른 이가 삶을 사는 동안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며 남은 시간 동안에도 아픔으로 괴로워해야 하며 주위 사람들의 생소한 반응으로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환자는 '내가 왜 ?' 라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흔히 죽음 직전 불치병의 환자들은 이러한 감정을 다른 이에게 전이시키기도 하며 이러한 감정들은 더 깊은 아픔과 슬픔, 공포를 은폐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 먼저 적개심이나 분노로서 대항하는 환자의 공격적인 행동 이면에 분노, 적개심, 슬픔, 공포 등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환자가 자신의 분노, 적개심을 비판이나 판단 받지 않고 표현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수용해 주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분노의 표현에 제한을 둘 수 있으나 만약 환자가 좌절과 분노를 말로 표현하거나 신체적 활동으로 나타내면 공격심의 정도는 감소될 수 있다.
4) 죄의식과 수치심
임종 상태에 있는 환자들은 흔히 죄의식을 갖는데 정당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과장하고 상상하게 된다. 우선 환자는 자신의 병이 과거의 잘못에 대한 응보의 형태로 믿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의 감정이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으며 자연스러운 슬픈 감정의 체험도 어떤 이들에겐 죄의식을 갖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환자가 자신의 평정을 잃고 울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 환자가 죄의식을 갖는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질병은 죄의 결과는 아님을 이야기해 주고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면서 가족들에게 지은 잘못들을 성찰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나를 용서해 주시고 받아들여 주시고 살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자비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 준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는 자신의 신체적 혹은 심리적인 결함 때문에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다.
환자는 자기 신뢰, 자기 조절, 독립심, 자율성 등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포기하도록 요구되며 이러한 이유로 환자는 질병 자체로도 부끄러움을 일으킨다.
▶ 환자를 돌볼 때는 어떤 여건 속에서도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 주어야 하고 환자의 사생활, 사적인 면을 최대로 보장해 주어야 하며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환자 스스로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일상의 생활은 환자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 좋다.
7. 말기 환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경험하게 되는 심리단계
- 퀴블러 로스(E. K bler Ross, 1968)의 죽음의 5단계 -
① 부 정 ( Denial )
임종에 가까운 대부분의 환자가 경험하는 첫 단계는 부정으로 환자 들이 자신의 병이 치유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부정은 환자의 언어나 행동에 의해 나타난다.
즉 " 아니야, 난 믿을 수 없어, 나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어. " 라는 표현을 흔히하게 되고 환자는 진단을 잘못 내렸다는 생각과 좀더 나은 진단이 내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의사와 여러 병원을 찾아 다니게 되며 환자는 검사 결과가 다른 사람의 것과 바뀌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한다.
부정의 단계에서 부정을 표현하는 환자의 말과 행동의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 다른 사람의 일인 것처럼 심각하지 않게 증상을 이야기한다.
* 죽음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으며 죽음에 대한 말이 나오면 즉시 말을 돌린다.
* 공개적으로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 비의학적 치료법이나 신을 통해 치유받고자 노력한다.
* 자신의 질병이나 증상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 증상이 자연히 없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치료를 거부한다.
* 신체나 외모의 급작스러운 변화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 질병을 가벼운 것으로 이야기한다.
* 아직 죽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 어떤 병인지 알지만 자신은 꼭 회복될 것이라고 확언한다.
▶ 먼저 환자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가족이나 의사 간호사) 환자가 부정의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환자에게는 부정할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함을 이해해야 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다음 환자가 사실을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때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병에 대해서 좀더 현실적인 견해를 갖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만일 환자가 그의 임박한 죽음에 관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고통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것이다.
② 분 노 ( Anger )
환자는 "하필이면 내가"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에게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혹은 병원 직원에게 또는 신에게까지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이 분노의 단계는 가족들이나 직원들이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분노가 수시로 바뀌고 감정을 주위 환경에 전가시키기 때문이다. 가족에게나 간호사에게 자주 불만을 터뜨리며 의사에게도 불만이 많다.
▶ 환자의 가까이에 있는 사람(가족이나 간호사)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더 자주 환자의 분노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경우 간호사는 환자가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환자의 이러한 태도는 주위의 건강한 사람들의 건강을 질투하는 것이며 일찍 죽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환자는 자신은 곧 죽게 되고 사람들이 자기를 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고 불평을 하며 주위로부터 관심을 끌려고 노력한다. 이때 간호사나 의료진이 환자의 분노의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사적인 일로 받아들이며 분노에 반응을 보인다면 환자는 더 심한 분노를 일으킬 것이며 환자의 적대적 행동은 심해질 것
이다. 만일 간호사나 가족이 환자로 하여금 그의 분노를 표현하도록 한다면 환자는 편안해 하고 목적 없이 간호사를 자주 부르거나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환자가 존경과 이해와 관심을 받으며 그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을 알면 그의 목청은 한결 낮아지고 성난 요구도 훨씬 줄어들게 되며 자신이 아직도 가치있는 인간, 보살핌을 받는 사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활동이 허락된 인간임을 알게 될 것이다.
③ 타 협 ( Bargaining )
첫 단계에서는 슬픈 현실을 대면할 수가 없고, 둘째 단계에서는 사람들과 신에게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현하고 나면, 환자는 타협을 시도합니다. 그래서 불가피한 사실을 어떻게든 연기 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착실한 행동을 보이고 특별한 헌신을 하기로 맹세함으로써 그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소망은 생명을 연장하는 것, 며칠이라도 좋으니 통증이나 신체적 불편 없이 보냈으면 하는 것이다.
타협은 대개가 절대자와 하는 타협들이다. 그래서 그 언약은 비밀로 붙여지거나 다른 말속에 언뜻 비치거나 원목실에서 사사로이 말하거나 한다. 자기 몸의 일부나 전체를 의학 발전을 위해 기증하겠다고 언약하는 환자들도 있다.
▶ 심리학적으로 언약이라는 것은 죄의식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의료진은 환자의 행동이 미성숙하며 어린아이 같고 환상에 젖어 있으며 어른으로서는 적당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환자의 소망을 묵살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간호사는 이러한 행동이 정상적이며 환자가 다음 단계를 위해 준비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④ 우 울 ( Depression )
회복의 가망성이 없는 환자가 자기의 병을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게 될 때, 증상이 더 뚜렷해지고 몸이 현저하게 쇠약해질 때, 환자는 더 이상 웃어넘기지 못하게 된다. 초연한 자세와 무감동, 분노와 격정은 머지않아 극도의 상실감으로 바뀌며 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이 단계에는 두 가지 종류의 우울증이 있는데, 그 하나는 반작용적인 우울증이라 부르며 이것은 과거나 현재의 손상과 관계된다.
환자는 부모 없이 남게 될 아이들에 관하여 또는 막중한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될 가족에 대한 걱정을 한다. 또 다른 우울증은 그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과 물건, 그 자신과 그에게 중요했던 모든 것의 손실과 관련이 되었을 때 일어나는 예비적 우울증이며, 이 단계에서 환자는 아주 조용히 있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 이 시기에는 환자가 슬픔에 젖도록 놓아두어야 하며 그가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필요로 할 때 옆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혹은 이야기를 하며 조용히 귀담아 들어 주고 부드럽게 대해 주는 것이 좋다.
이러한 우울증에 빠질 때 환자는 별로 대화를 원하지 않으며 환자는 자기와 같이 느끼고 슬퍼하며 자기 옆에 있어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⑤ 수 용 ( Acceptance )
환자가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또한 앞서 기술한 과정을 거치면서 도움을 받았다면, 그는 자기 '운명'을 두고 분노하거나 우울해 하지 않는 다음 단계에 들어간다. 그는 이전에 자기 심중을 거쳐간 감정들을 털어놓을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산사람과 건강한 사람에 대한 질투와 분노를 이야기할 것이고 머지않아 자기는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과 정든 곳을 잃게 되리라고 한탄할 것이며 또 어떤 기대를 가지고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볼 것이다. 환자는 대개 극도로 지치고 쇠약해지며 감정의 공백기를 가진다.
수용을 행복한 감정의 단계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고통이 지나가고 몸부림이 끝나면, "머나먼 여정을 떠나기 전에 취하는 마지막 휴식"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 임종환자가 일종의 평안과 수용의 단계로 들어감에 따라 그의 관심의 세계는 점점 좁아진다.
그로 인해 환자는 혼자 있고 싶어하고 때로는 문병객을 달가와하지 않으며, 사람이 방문을 해도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닐 때가 많다. 의사 소통은 언어보다도 무언의 대화로 바뀐다. 임종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침착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이 침묵의 순간이야말로 가장 뜻깊은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사람의 느낌을 수용할 때 환자와의 의사소통에 놀라운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버림받지 않았다는 확신에서 큰 위로를 받게 되며 동시에 자신은 사랑받고 있으며 값있고 소중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 시기는 환자 못지않게 가족이 도움과 이해와 격려를 필요로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물음에 실제적인 환자의 임종준비에 대해 알려 주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가족의 상실감을 포용해 주어야 한다.
8. 임종환자의 권리
여러분의 임종 때는 어떤 권리를 갖고 싶습니까?
*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
* 희망을 심어주는 자에 의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
* 간호를 받는 것과 관련되어 최선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참여할 수 있는 권리
* 자신에 맞는 방법으로 임종에 관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
* 통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
* 자신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 받을 수 있는 권리
* 자신의 욕구에 맞도록 노력해주는 예민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에 의해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권리
* 혼자 외롭게 죽지 않을 권리
* 평안과 위엄 속에서 죽을 수 있는 권리
* 죽음 후에 존경되어질 수 있는 권리
* 인체의 고결을 기대할 수 있는 권리
위와 같은 권리를 대개 갖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주위에서 돌보는 가족들은 세심한 배려와 사랑으로 환자가 좋은 이별을 할 수 있도록 해야하고 환자도 자신의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수용의 자세로 남은 여생을 가치 있고 의미가 있는 죽음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