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조 감상과 동시조 창작론>
반갑다 마흔다섯 자, 우리 가락 동시조
- 《한국동시조》 2022년 상반기호에서 어린이가 쓴 동시조 살펴 읽기
1. 이제껏 잊고 살았네 우리나라 정형시
‘2018 세종 도서 교양 부문’과 국립 중앙 박물관 선정 ‘2018 휴가철에 읽기 좋은 책 100선’에 뽑힌 『김상욱의 양자 역학』(사이언스북스, 2017)에는 패러디 시 「사랑의 양자 역학」, 「퀀텀 소네트」, 「퀀텀 하이쿠!」가 한 편씩 나온다. ‘퀀텀(quantum)’은 ‘양자 역학’에서 ‘양자’이다.
퀀텀 소네트
원자는 우로 지나갔을까?
안 보면 양쪽으로 지나간다네.
원자는 좌로 지나갔을까?
보면 한쪽으로만 지나간다네.
내가 보든 말든 뭔 상관이지?
관측은 대상을 교란하거든.
내가 알든 말든 뭔 상관이지?
정보는 실체의 일부이거든.
혁명가 닐스가 자신 있게 말했어.
세상은 상보적, 모순이 공존하지.
천재 베르너가 조심스레 말했어.
세상은 불확정적, 모든 걸 알 수 없지.
원자는 이상하지만 내 몸도 원자라네.
자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원자라네.
굳이 “소네트는 영국 정형시의 일종으로 ABAB CDCD EFEF GG 형태의 각운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하이쿠(俳句)는 일본 정형시의 일종이다. 각 행마다 5, 7, 5 모두 17음으로 되어 있으며, 계절을 나타내는 키고(季語)가 들어 있다.”는 주석까지 친절하게 붙이면서 썼는데, 김상욱은 왜 우리나라 정형시 ‘퀀텀 시조’ 한 수를 안 지었을까? 평시조 3행은 14행 소네트보다 짧고, 종장(3/5/4/3) 15음절은 17음절 하이쿠보다 짧은데.
퀀텀 하이쿠!
전자경로에 / 중첩을만들다가 / 봄을당했네 //
전夏두개에 / 얽힘을만들다가 / 들켜버렸네 //
冬일상태의 / 페르미온두개는 / 서로미워해 //
유秋하지마 / 경험언어직관이 / 안통하니까 //
물리학자 김상욱뿐 아니라 우리 대부분은 교과서에서 읽은 다음부터 시조를 잊고 살았다. 이 지구에서 유일한 우리 고유 장르를!
그래서 《한국동시조》 2022년 상반기호에 시조시인뿐 아니라 초등학생, 중학생, 대학생 들이 쓴 동시조가 무려 아흔아홉 편이나 실려 있어 놀랍다. 게다가 초등학생이 쓴 동시조가 쉰세 편으로 절반이 넘는다는 사실은 더 반갑다.
2. 남들과 다르게 썼네 어여쁘다 네 생각
서른여섯 명 어린이가 보내 온 〈어린이가 쓴 동시조〉 가운데 「소금 사막 낙타」가 단연 돋보인다. 어떻게 소금 사막을 동시조 글감으로 골랐을까? 언젠가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전에서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 사진을 본 적 있는데, 이 동시조를 읽으면 낙타 캐러밴 사진 앞에 서 있는 듯 에티오피아 다나킬 소금 사막을 건너고 있는 낙타들이 눈앞에 그려진다.
태양이 지고 있는
에티오피아 소금 사막
소금을 등에 실은
낙타들이 걷고 있다
서로를
이어주는 끈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 황희성(초등 4), 「소금 사막 낙타」 전문
소금 사막을 건너는 낙타들처럼 어린이들도 서로 어깨를 겯고, 코로나19(COVID-19)라는 사막 같은 시간을 함께 잘 지나가기를! 황희성 어린이는 에티오피아 소금 사막을 건너는 낙타 사진이나 동영상을 본 것으로 짐작되는데, 강지영 어린이도 겨울철새 가창오리를 본 경험으로 「리더의 책임감」을 쓴 것처럼 보인다. 이 동시조에서는 초장과 중장에 관찰자가 바라본 가창오리 떼 모습을 그리고, 종장에서는 리더 가창오리가 할 법한 말을 상상한 부분이 재미있다.
가창오리 대형 맞춰 나란히 날고 있다
길잡이의 지시대로 높게 날고 멀리 간다
오늘밤 천수만까지 가야 한다 따라와
– 강지영(초등 6), 「리더의 책임감」 전문
「소금 사막 낙타」와 「리더의 책임감」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하다. 그렇지만 일기와 마찬가지로 동시조를 쓸 때도, 특별한 경험이나 독특한 글감만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좋은 동시조란 어린이들의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도시에 사는 어린이든 시골에 사는 어린이든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소재나 주제”(최성아, 《한국동시조》 2022년 상반기호)를 담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눈」처럼 일상에서 글감을 찾아 잘 쓰기가 더 어렵다.
학원을 나와보니 하얀눈 하늘에서
솜처럼 내려와서 바닥에 쌓여있다
집까지 안전하게 조심히 가야겠다
– 박무혁(초등 5), 「눈」 전문
동시조에 화자인 ‘나’가 나타나지 않아도, 눈이 내려서 미끄러워진 길을 걱정하는 어린이 마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초장에서 ‘학원’ 자리에 ‘직장’을 놓으면 화자가 어른이어도 괜찮겠다.
고산 윤선도(1587~1671)가 지은 시조 「오우가(五友歌)」 6수 가운데 대나무를 노래한 다섯째 수는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로 시작한다. 《한국동시조》 2022년 상반기호에는 어린이들이 이 시조를 본떠 쓴 것으로 보이는 동시조가 여럿 있다.
고체도 아니고 기체도 아닌 것이 – 박관오(초등 6), 「물」 초장
친구도 아닌 것이 가족도 아닌 것이 – 송윤환(초등 6), 「햇빛」 초장
고양이도 아닌 것이 표범도 아닌 것이 – 전유선(초등 6), 「백호」 초장
17세기 시조가 21세기에 새 옷을 차려입은 듯하다. 어린이들은 이렇게 시조와 친해질 수도 있겠다. 그리고 학교 현장에서 애쓰시는 선생님들 마음이 보여서 미쁘다.
있는 듯 없는 듯 당연한 존재이나
없으면 안 되고 있어도 잘 모른다
연약한 작은 친구가 세상에 알려지리
- 김연우(초등 6), 「공기」 전문
주변에 많이 있어 우리를 도와 주네
보이지 않지만 숨쉬기에 꼭 필요하네
색깔과 냄새가 없어서 느끼기는 힘드네
- 류주원(초등 6), 「공기」 전문
특이하게 ‘공기’를 제목으로 쓴 동시조 두 편을 읽으면서, 노래로 외웠던 ‘2차 방정식 근의 공식’과 ‘원소 주기율표’가 아직 떠오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학 용어나 수학 공식처럼 어려운 교과 내용을 쉽게 오래 기억하려면 시조로 만드는 방법도 좋겠다.
3. 즐기자 마흔다섯 자 3장 6구 4음보
김남규는 『오늘부터 쓰시조』(헤겔의휴일, 2021)에서 시조는 “번역 불가능한 장르”이므로, “시조의 리듬은 ‘한국어로만’ 온전히 구현 가능”하다고 한다. 바로 그 까닭으로 지금이야말로 시조 장르가 세계화 될 기회인가 싶다. 21세기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 문화(K-culture)에 빠져들고 있고, 한국어에 관심을 기울이는 외국인이 늘고 있다. 이때 한글로만 쓸 수 있는 시조 장르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시조를 지으려면 한글을 알아야 하고, 한글을 알게 되면 시조는 딱 마흔다섯 자로 쓸 수 있다. 시조 한 수가 길다면 일상에서 펼침막이나 손팻말에 종장 열다섯 자를 쓰면서 낯익혀도 좋겠다.
시조가 재미가 될 수 있는 시기이다. 자, 이제 우리부터 즐기자!
시조 율격에 잘 끼워 맞추는 연습을 놀이처럼 즐기면 어떨까? 정해진 시조 형식을 맞추는 일은 조각 그림이나 큐브 퍼즐 맞추는 즐거움에 견줄 수 있다.
그리고 한글은 시조 형식 맞추는 데 안성맞춤이다. 조사가 빠져도 의미 전달이 되고, 동사와 형용사 활용이 다양하니까.
형식에 갇히는 듯 답답하다고 시조에서 정해진 음절 수를 마구 줄이거나 늘여 버리면 시와 어떻게 변별할 수 있을까? 시조가 소네트나 하이쿠처럼 굳은 형식을 고집했더라면 오히려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4. 이제야 반해 버렸네 우리 가락 동시조
“나는 내 글에 반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쓰는 사람 스스로 반할 만한 글을 써야 읽는 사람도 반해 주겠지 싶어서다.
시조도 마찬가지다. 지구에서 유일하게 시조 장르를 가진 민족이면서 우리가 즐기지 않는다면 어느 나라 사람이 우리보다 더 즐겨 줄까? 어려서부터 시조를 쓰는 어여쁜 어린이들이 있으니, 이제라도 우리가 먼저 반할 만한 동시조를 즐거이 지어 보자.
『김상욱의 양자 역학』에서 양자 역학을 영국 정형시 소네트와 일본 정형시 하이쿠로 노래하면서 우리나라 정형시가 빠져 있어 아쉬웠던 마음으로, 「퀀텀 소네트」를 살짝 고쳐 쓴 ‘퀀텀 시조’ 한 수로 이 글을 맺는다. 원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이 ‘양자 역학’이고, 이 세상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자 역학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한다.
양자 역학
원자는 안 볼 때면 양쪽으로 지나간다
원자는 지켜보면 한쪽으로 지나간다
원자는 파동이면서 입자라서 그렇다
* 이 글은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비평활동지원을 받아 집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