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미니스트리 2021년 시즌 1 첫 번째 팟캐스트입니다.
2021년 1월 4일, 매주 월요일 그리스도교 일에 대한 관점을 나누는 코포스 연구소 시간으로서, 코포스 연구소 교육과정 중 기본과정인 '일의 신학'을 다룹니다.
오늘 다룬 내용은, 신학자 모델로서의 욥을 통하여 성도가 일 그리고 일상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중요한 관점 세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제1장
욥을 통하여 우리가 가져야 하는 중요한 세 가지 교훈 자세
첫 번째 시간엔 ‘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기( ppt)
창조 타락 구속 완성에서 구속사에 따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떤 순서대로 ‘일의 신학’에 관한 관점들을 나눈다면 욥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이유는 욥에게 있어서 우리가 닮고 따라가야 하는 어떤 신학자 모델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던 내용입니다만, 신학이란 것과 신학자란 것이 박사학위를 받고 석사과정으로 신학교에서 과목으로 가르치는 사람들만이 신학자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 성도들이 다 신학자 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 와 윌리암 폴켄스의 말을 인용하시는 폴 교수님은 ‘신학자가 되게 하는 것은 이해하고 독서하고 추측이란 것을 신학자가 주로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신학자가 되는 길이다’. (마르틴 루터) 또 신학은 영원토록 복을 받는 생활의 학문이다 (윌리암 폴켄스) 이야기 합니다.
이들이 하고 싶은 핵심은 결국 신학이라는 것은 삶의 학문이고 그 삶의 학문이라는 것은 결국 태어나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일이다 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은 일상의 생활에서 되어지는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질문을 하지요. 나는 누구인가, 어디 있고 일의 의미는 무언가, 이 지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우리의 일상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굉장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이제 포스트 코로나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결국 신학적인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에 신학을 다루는데 있어서 중요한 모델로서 욥을 끌어안아야 하는 이유는 욥이란 사람이 바로 삶의 모든 순간에서 어떤 기본적인 질문들을 하나님께 드렸고 그것을 통해서 그는 진정한 신학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삶의 일상에 대해서 자신의 ‘일과 쉼’ 의 모든 것에 대해서 질문하는, 그 질문은 성도로서 하는 질문이고 또한 그 사람은 진정한 신학을 하는 참된 일상의 신학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의 신학자로서 주장한 질문을 보면 첫 번째는 욥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고 또한 어떻게 영적인 친구들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을 모델로 제시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두 가지 라고 이야기 합니다.
욥의 친구를 먼저 생각해보면 욥의 고난에 대해서 같이 진심으로 울어주고 진정으로 위로해준 친구들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을 저주하고 한편으로는 이 저주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께 정말 분노를 가득안고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이런 징계를 받아야만 하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했는데 하나님을 높여 드렸는데 왜 나에게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재발 나타나서 대답 좀 해 달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은 네가 갈 때까지 갔군아, 생각해서 욥에게 알려줍니다.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 것이지, 하나님이 무슨 거룩하지 못한 분이냐 아니면 선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 당신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고난을 주겠느냐 말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욥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결국에는 하나님이 욥의 친구들에 대해서 욥은 의로웠으며 너희는 욥이 의로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럼으로 인해서 하나님도 욥도 굉장히 힘들게 하고 결국 하나님과 욥에게 온전한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다 하십니다. 그러면서 만약 욥이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세 친구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욥의 고난에 대해서 진정으로 울어주던 친구였지만 욥이 당하고 있는 어떤 고난에 대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에 대해서만 얘기를 한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제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한 것이지만 욥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나아가서 질문하고 그분을 찾는 어떤 그런 부분들의 모습들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상의 신학자들의 삶의 모습들을 바탕으로 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일의 신학에 대하여 좀 더 열린 마음, 또 한편으로는 온전한 모습으로 다가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욥이 하나님께 정직하게 나아가는 복음이라고 합니다(욥9장32-34절) “ 하나님이 나와 같은 사람이기만 하여도 내가 그분께 말할 수 있으려만 함께 법정에 서서 이 논쟁을 끝낼 수 있으련만 우리 둘 사이에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줄 이가 없군아 내게 소원이 있다면 내가 더 두려워 떨지 않도록 하나님이 채찍을 거두시는 것” 그리고 “하늘에 내 증인이 계시고 높은 곳에 내 변호인이 계신다. 내 중재자는 내 친구다 나는 하나님께 눈물로 용서한다(욥16장19-20절)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이가 땅위에 우뚝 서시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내가 살 갓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이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고(욥19장25-29절)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이 눈으로 직접 뵈올 때 하나님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와같이 중재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면서 그 중재자가 분명히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중재자가 내 친구요 그리고 구원자가 나에게 오셔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만나게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다 는 그 모든 것이 여기에 기록되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욥기에서 성도들이 발견하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복음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욥에게 대답하기 보다는 질문을 하십니다.
인류의 일은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진부한 모방으로서 절대 거칠거나 또는 위대하거나 또한 관주할 만 것들이 아니다 고 합니다. 욥은 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가운데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만 합니까. 하나님 내가 당신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벗어난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찾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욥이 했던 모든 선하게 살았다는 일, 그런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선한 일들이란 자체가 위대하거나 다른 표현으로 하면 행위구원을 받는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산 것은 맞지만 욥 자체가 워낙 의인이고 선한 사람였으며, 욥이 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선한 사람으로 인정 받았던 것이고 그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써 당연히 하나님께 선하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결국에 그 인생의 가장 힘든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성품으로는,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 이런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너는 선하고 좋은 사람이였어 너는 착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잘못했어, 이런 식으로 욥을 위로하거나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것이 무엇이냐. 욥이 하나님은 선하다고 인식했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너에게 좋은 일만 행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너는 나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경외하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욥은 그 고난에서 벗어나서 고난에 사로잡혀 있던 그 인생에서 벗어나서 다시금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일을 하시다 욥에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선한 일을 했던 안했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구속주로써 항상 온 세상에 좋은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유지 시켜 주시고 구속하시고 완성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욥은 바라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제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류의 일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세계 전부를 완전히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 한다면 창조세계 전부를 이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020-2021년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으로 굉장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욥과 같이 힘들어 하는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질문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일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중요한 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셔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시는 일을 통해서 욥이 하나님이 아닌 것을 욥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다시한번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그분의 피조물로써 내가 조종할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서 특별히 성도나 비성도 모두가 도대체 왜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습니까. 질문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해야 할 것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우리가 반드시 고백으로 나와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고백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다스리시고 선하신 분이시니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선하신 분이시기 주님앞에서 겸손히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세 번째 특징은 우리의 일상의 일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군아 그리고 단순히 개발 향상 또는 방종을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있어서 필요하고 유용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또는 유용성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서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주된 이유가 되지 않는 다는 이야기입니다.
인류를 위한 주된 일은 필요하지 않다고 연결되어 있다고 얘기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우리에게 사용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유용성의 지배로부터 우리자신의 일과 모든 것들을 잘 유효하게 만들고 우리가 겸손함으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기쁨을 위한 것이라고 인식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를 정리하면 결국에 우리의 삶에서 좋은 것 옳지 않은 것 이 모든 것들을 유용성을 놓고 이야기 하자면 항상 자신의 유용하고 필요한 것으로 기준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기준으로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게 되면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판단하게 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합당한 경외를 드리지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삶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로서의 삶에서 일상의 신학자로 살아가는 삶이라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요점 세 번째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유용성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큰 카테고리 안에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하시는 것이고, 주님 안에서 나도 결국에는 넉넉히 비통함 가운데 영원히 살지 않게 하시고 마침내 항상 우리를 즐거움 가운데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주변 상황으로 유용성에 따라서 하나님을 좋은 분 나쁜 분이라고 얘기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써 살아가는 나의 일과 일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얘기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사람으로 욥에 대한 이야기를 일의 신학의 관점에 중요한 포인트를 욥을 통하여 우리가 가져야 하는 중요한 세 가지 교훈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