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 잘못된,- ‘장승’ 이야기.
천하의 ‘유홍준’ 박사도 ‘장승’과 ‘벅수’는 ‘나눔’하지를 못했더라.
by황 준구Dec 06. 2021
지리산, ‘실상사’ 지킴이,- ‘상원주장군’ (1985년 무렵, ‘육명심’ 사진을 ‘트리밍’한 일부분).
제3대, “문화재청, 청장”(2004-2008)을 지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兪弘濬(1949- )(예술철학, 박사)은 젊은 시절,- 전라북도 ‘부안 읍성'의 <‘서문안 짐대당산’>이, 우리나라 최초로 '솟대'(짐대)에 ‘글귀’(銘文)를 새긴, ‘짐대당산’(1689)이라는 것을 ‘발견’(1984)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 우리 ‘민속문화’의 '지킴이'(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대한민국’ 사람으로,- ‘수호신' 기능의 '벅수’法首를, '일제강점기'때의 '표현' 그대로, ‘장승’長丞으로 싸잡아서 ‘기록’을 하고 있다. 그는 "화인열전"畫人列傳의 <단원 ‘김홍도’와 조선시대 ’민화’>라는 ‘강좌’(2005)에서,- <왜, 지금의 ‘장승’들은 꼭 ‘악’을 쓰고 무섭게 ‘인상’을 쓰야 하나?.>라는 ‘주제’로,- ‘장승’이 무섭게 만들어져야 만 ‘장승’인 줄 알고 있어, ‘장승’을 보는 것이 하나도 즐겁지를 않고, ‘거부감’만 생기는 것을,- 왜, 만들어야 하는가?, ‘이해’ 할 수가 없다,라고 꼭 집어, '지적'을 하였다. 그의 ‘장승’이라는 ‘표현’은,- '장승'(길라잡이)이 아닌, ‘벅수’('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문화재청’의 ‘청장’을 지낸 사람이,- ‘벅수’를 ‘장승’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짓’이었다. 너무나 잘못된 '표현'이다. 그리고,- '역참 제도'때 ‘안기도’安奇道의 '찰방'察訪을 지낸, '김홍도'를 '이야기'하면서, '장승'에 관한 '이야기'는 아예 까먹었더라,-
‘역참驛站제도’ 때,- ‘단원’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일본'에서 '사망'說)는 <‘안기 역도’安奇驛道>의 ‘찰방’察訪으로 2년 반 동안,- ‘안동 땅’에서 ‘근무’(1783,12-1786,5) 하면서, 수많은 ‘그림’을 남겼지만, ‘역참’과 ‘관련’된, '길라잡이' 기능의 <‘장승’>에 관한 ‘그림’은 아직, ‘발견’ 되지를 않고 있다. ‘안기도’의 10리마다 세운 ‘작은 장승’(小堠)과,- 30리마다 ‘설치’된 12개의 ‘역참’에는, 크고 훌륭한 ‘길라잡이' 기능의 '큰 장승’(大堠)을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매년 “사월 초파일”에 ‘역참’의 ‘평안’平安을 바라는,- <‘오토안마제’五土安馬祭>라는 ‘잔치’를 베풀었었다. ‘김홍도’는 직접, ‘장승’과 관련이 깊은 중요한 ‘인물’이다. 하지만,- ‘김홍도’의 공식적인 <‘장승, 이야기’>는 남겨진 ‘기록’이 없다.
‘조선시대’ 때, 찰방’을 지낸 또 다른 유명 ‘화가’들은,- 경상도 ‘진주’의 <‘소촌도’召村道, 찰방>을 지낸,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1711-1775)과,- 1793년부터 1795년까지 경상도 ‘신령 땅’의 <‘장수도’長水道, 찰방>을 지낸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1756- 1813? )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린, ‘역참’과 ‘관련’된 상세한 '그림'은, 아직 ‘발견’이 되지 않고 있다. 다만,- 1796년에 그려진 ‘화성성역 의궤’華城城役儀軌와 1797년에 ‘훈민정음’으로 풀어쓴 책,- ‘뎡니의궤’에는 ‘영화역’을 그린 <‘영화 역도’迎華驛圖>만 남겨져 있을 뿐이다. '장승'의 모습은 없다.
‘유홍준’은,- 경상남도 '하동 땅'의 <'삼신산, 쌍계사’>에 있는 ‘나무뿌리’를 뒤집어쓰고 있는 ‘귀신’ 같은 ‘모습’의 ‘장승’은, ‘거부감’을 전혀 주지 않고 있으며,- 경기도 광주, ‘엄미리’의 ‘장승’을 보면, 현대 ‘조각가’가 ‘부랑쿠지’(Constantin Brancusi,1876-1957)가 만든, ‘조각’ 같은 느낌이 난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시대에 이런 ‘장승’은 안 만들고, 요즘의 ‘장승’을 보면, ‘외면’外面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다. ‘시각공해’(visual pollution)다. ‘지리산'의 '실상사’ 돌’장승’은 ‘사찰 장승’이 가지고 있는, ‘사천왕’의 ‘이미지’이며,- ‘위압적’인 것으로 <‘명작’이다.>라는 ‘극찬’極讚을 하였다.
하지만,- ‘실상사’의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1731)이라는 돌‘벅수’는, 우리의 ‘토종 장군’이 아닌,- ‘중국’의 ‘주’周 나라, 장군을 ‘표현’ 한 것이다. '설화'說話에 의하면,- '중국 땅'에서 '발생'하여 '조선 땅'으로 세차게 밀려오는, <'천연두'天然痘와 '잡귀'雜鬼를 막아내기 위하여, '조선 땅'으로 '파견'派遣 된, '중국'의 '장군'이다.> ‘가슴’에 ‘글귀’(銘文)로 쓰여 있다.
‘부여’가 아닌,- <‘보령’땅 ‘성주사’聖住寺 옛 터의 오래된 ‘사찰 장승’ 이야기>는 완벽한 '엉터리'였다. 본디, ‘성주사’에는 ‘장승’(벅수)이 없다. 이웃하여 있는, ‘부여’ ‘무량사’無量寺 들머리의, <‘무량마을, 당산’>을 ‘착각’ 한 것이다. 천하의 ‘유흥준’도 ‘혼돈’混沌을 자주 하더라,- <‘장승?'> 만을 '고집'하여, 이러쿵저러쿵(云云) 말을 하는 그도 역시, 우리의 "벅수 문화"에는 관심이 없다.
왜?, <‘문화재청’ 사람(민속학자)들>은,- 아직도 ‘장승’과 ‘벅수’를 서로 ‘나눔’하지를 못하고 있을까?. 그들이 쓴 ‘글’과 ‘논문’에는, ‘벅수’라는 ‘표현’을 아예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은,- ‘일제강점기’때, ‘쪽발이'들이 '조작'을 하여 '왜곡'된, '조선'의 '민속문화'를 '공부'한, <‘민속학자’ 1세대>들의 직계直系 ‘제자’弟子들 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벅수’를 ‘장승’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한국미술사’나 ‘동양미술사’를 정통으로 ‘연구’를 한 ‘외국’의 ‘학자’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장승’과 ‘벅수’를 '확실'하고 '명확'하게 서로 ‘나눔’을 하고 있었다. ‘아이로니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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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준구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