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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에서 궁중암투 거쳐 술탄비로 인생역전…슐레이만 대제 곁에서 탁월한 외교활동
그녀는 폴란드인이었다. 태어난 곳은 지금 우크라이나 로하틴(Rohatyn)이란 곳이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이 지배했다. 그녀는 몽골 징기스칸 후예들이 세운 크림 칸국이 우크라이나를 습격하는 과정에서 붙잡혀 노예로 끌려갔다. 노예였던 그는 마침내 당대 최강의 나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비가 된다.
이 기막힌 인생역전의 주인공은 록셀라나(Roxelana)라는 여인이다. 터키어로는 휘렘 술탄(Hurrem Sultan)이라 부른다. 오스만투르크의 최고 번성기를 이루었던 슐레이만 대제(Süleyman the Magnificent)를 보좌하며 제국을 주물렀던 그의 인생 스토리는 오늘날 터키는 물론 세계인의 인구에도 회자되고 있다.
슐레이만 대제와 록셀라나 (1790, 독일 화가 Anton Hickel) /위키피디아
록셀라나(1505~1558)의 아버지는 그리스 정교 사제였고, 폴란드인이었다. 본명은 알렉산드라 아나스타시아 리소프스카(Alexandra Anastasia Lisowska)였다.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크림 칸국의 타타르인들에게 붙잡혀온 그녀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공녀로 보내졌다. 당시 크림칸국은 조공국으로 오스만투르크와 동양적 군신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슐레이만 대제의 대신이었던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şa)의 소유가 되었다. 당시 대신들은 술탄에게 젊은 여성을 헌납하는 풍습이 있었고, 그렇게 바쳐진 여성들은 하렘(harem)에서 살았다. 록셀라나는 그렇게 해서 슐레이만의 하렘에 살게 되었다.
그녀는 야심만만한 여인이었다. 하렘에 들어가서도 그녀는 궁중암투에 끼어들었다. 당시 술탄 슐레이만은 마히데브란(Mahidevran)과 귈펨 하툰(Gülfem Hatun)에게서 자식을 본 상태였다. 하렘은 슐레이만의 어머니 하프사 술탄(Hafsa Sultan)이 지엄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마히데브란이 술탄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술탄의 어머니도 그녀를 지지해 그녀의 아들 셰흐자데 무스타파(Şehzade Mustafa)가 술탄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여기서 조선시대 궁중비극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술탄의 사랑이 마히데브란에서 록셀라나로 이동했다. 군주의 사랑이 바뀌는 것은 궁중암투의 시작이다.
술탄의 어머니와 마히데브란은 록셀라나를 미워하게 되었고, 그녀를 술탄에게 바친 재상 이브라힘 파샤도 마히데브란의 아들 무스타파를 후계자로 지지했다. 그런데 1534년 술탄의 어머니 하프사가 세상을 떠났다. 이제 술탄은 어머니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슐레이만 대제 당시 오스칸투르크 영토 /위키피디아
슐레이만은 어머니가 죽자 록셀라나를 노예신분에서 해방시킨 후에 성대한 결혼식을 열고, 정식으로 술탄비로 지명했다. 술탄의 결혼은 오스만투르크 역사상 처음이었고, 술탄가의 어느 결혼식보다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오스만의 술탄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그동안의 관례였다. 하렘에 수많은 여인을 두었지만, 특정인을 술탄비로 정하지 않았다. 술탄이 죽기 전에 여러 아들 중에서 후계자를 지명하면 나머지 아들을 죽이는 형제살해의 전통이 있었다. 정식으로 왕비를 두지 않는 것은 술탄의 인척이 권력에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유목민적 습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오스만은 장자 상속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여인들 가운데 한사람을 정비를 두게 되면 후계자를 미리 정하는 것이 되어 형제들 사이에 권력 암투가 심해질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슐레이만 이전에는 왕비를 두지 않았다.
록셀라나가 1540년 폴란드 지그문트 2세에게 보낸 편지 /위키피디아
록셀라나가 마히데브란이란 연적을 제거하는 과정에 일화가 전해진다. 두 여인은 서로 술탄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당시 이스탄불에 주재하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대사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록셀라나는 제1후궁 마히데브란과 말다툼을 벌인후 스스로 얼굴을 할퀴어 상처를 내어 술탄에게 마히데브란이 한 짓이라고 일러바쳤다. 술탄은 화가 나서 마히데브란을 궁궐에서 내쫓았다.” 마히데브란은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부르사로 쫓겨났다. (마히데브란은 부르사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지만 록셀라나가 죽은후(1558)에도 삶을 이어나가 1581년에 사망한다.)
록셀라나의 암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마히데브란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지한 재상 이브라힘 파샤가 사형되었는데, 그녀의 입김이 컸다고 한다. 록셀라나를 술탄에게 바쳤던 재상은 오히려 그녀에게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또 마히데브란이 낳은 무스타파도 죽여버렸다. 이제 술탄의 후계자는 그녀가 낳은 아들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오스만 술탄의 후궁은 아들을 하나밖에 낳지 못했는데, 록셀라나는 6명의 자녀(5남1녀)를 두었다. 그중 한 아들인 셀림 2세(Selim II)가 슐레이만이 죽은후 제위를 이었다.
록셀라나가 깬 또다른 전통은 별궁에서 나와 술탄 곁에 살게 된 것이다. 슐레이만 이전의 하렘은 톱카프 궁전과 떨어져 있었지만, 록셀라나는 화재를 빌미로 톱카프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후궁과 황자들은 별궁에서 지내던 전통이 깨어지게 된다. 이후부터 술탄이 죽으면 옛 술탄의 어머니와 여자형제, 후궁과 노예들이 옛 별궁으로 밀려나고 새로운 술탄이 톱카프의 하렘을 차지하게 되었다.
슐레이만과 가까이에서 지내고 싶다는 록셀라나의 욕심은 하렘의 입김이 지나치게 세지는 여인의 시대(Sultanate of Women)를 맞게 된다. 하지만 이후 술탄들이 하렘에 틀어박혀 정치를 멀리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후 술탄비는 ‘술탄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라는 의미의 하세키 술탄(Haseki Sultan)이란 칭호를 얻게 된다.
이스탄불 슐레이마니예 모스크에 마련된 록셀라나 무덤 /위키피디아
록셀라나는 정식으로 결혼한 이후 죽을 때까지 25년간 슐레이만의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지적이었기 때문에 술탄 곁에서 외교정책에 관해 자문역을 맡아 영향력을 행사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제대로된 교육을 받은 것이 큰 힘이 되었다.
특히 록셀라나가 폴란드 국왕에게 보낸 편지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록셀라나가 살아있던 동안에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는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록셀라나와 그녀의 딸 미흐리마흐(Mihrimah)가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와 지그문트 2세에게 보낸 우호서신은 그 내용과 서신의 장식미등이 인정되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록셀라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메카, 예루살렘, 에디르네, 앙카라 등에 공공 시설을 지었을 정도로 자선가 역할을 했다.
1558년 4월 18일에 사망했으며,
이스탄불 슐레이마니예 모스크에 남편 슐레이만 술탄 곁에 묻혔다.
록셀라나 초상화 /위키피디아
고향인 우크라이나 로하틴에 세워진 록셀라나 상 /위키피디아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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