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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남기신 유산을 받읍시다(3)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되십시다
2018년 1월 14일 / 대예배 / 창세기 12:1-3
‘불행을 만드는 사람 VS 행복을 만드는 사람’ 이 단어가 어떤 느낌을 주십니까? 누구나 행복을 만드는 사람을 원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12절을 흔히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팔복 가운데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이 들어있습니다. 이 화평케 하는 자를 영어로는 Peace maker라고 합니다. 피스 메이커가 존재한다면 행복 메이커도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행을 만들어 살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행복을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떤 메이커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런 의도에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고 받은 복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십시다.
창 12:1-2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너는 어서 고향을 떠나거라. 한데 어울려 사는 네 친척과 네 집안사람들을 떠나 내가 가르쳐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또한 네게 복을 내려 이름을 날리게 하리라. 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란 말만 하면 웬일인지 우리 자신이 한 없이 낮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 같은 사람이 무슨 큰일을 하겠느냐’며 차라리 있는 그대로 살다가 죽을 때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비가 오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자 비가 쏟아져서 초목이 다시 푸르게 되고 들의 곡식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었습니다(약 5:17-18). 엘리야처럼 아브라함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엘리야나 아브라함이 모두가 인정하는 큰일을 했다면 우리라고 왜 못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도 모든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소수의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1. 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먼저 버려야 할 것은 버립시다.
이제 앉아 있는 자리 혹은 누워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뜻에 동조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옮기십시다. 일어나기 전에 먼저 남을 멸시하는 마음 자세를 고치도록 하십시오.
▶ 우리가 무의식 중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 중에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다면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하면서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달란트)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릅시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도 마찬가지로 세리, 죄인, 창기와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연기만 피우다 가는 불쌍한 영혼이라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초대교회 성도를 향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하였듯이 여기에서 ‘고아와 과부’라는 사실 그대로의 고아와 과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영적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포함한다고 하였을 때에, 뒤 이어 나오는 초대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행실을 거울삼아 지금도 시정해야 할 점입니다.
약 2:1-7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여러분이 부자는 친절하게 대하고, 가난한 사람은 얕잡아 본다면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가령 여러분의 교회에 값비싼 옷을 두르고 손에 값진 금반지를 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나란히 들어왔다고 합시다. 3) 그때 여러분이 부자에게는 야단스럽게 떠받들어 교회의 특별석에 앉히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마룻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4) 결국 여러분은 나쁜 동기에 이끌려 재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택해서 믿음이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고 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선물인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6) 그런데 여러분은 그 두 사람 가운데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였습니다. 여러분을 구박하고 재판정에 끌고 가는 자는 모두 부자들이라는 것을 잊었습니까? 7) 또 여러분이 받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이름을 비웃는 자들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
교회에서 겉으로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마음과 생각에서 남을 나보다 못하게 여기거나 심지어는 나이가 조금 어리다고, 자기보다 좀 못 산다고, 자기보다 못 배웠다고 무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많습니다. 이런 것에서 빨리 벗어나야 복을 빌어주는 참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자기를 나타내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쓴 충고를 합니다.
약 4:11-12 / [서로 비난하지 말라]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헐뜯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남을 비판하거나 헐뜯는다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율법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셈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잘못되었다고 판정을 내리는 결과가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그 율법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판가름이 아니라 그 율법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12) 그 율법을 만드신 분인 하나님만이 우리들을 바르게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구원하기도 하고 멸망시키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무슨 권리로 남을 심판하거나 비판할 수 있습니까?
■ 독일 함부르크의 어느 호텔에 새로 채용된 지배인이 하인들에게 청소를 시키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정원 한가운데 깨끗한 고급 의자에 인상도 그리 좋지 않고 옷차림도 남루한 나이든 남자가 걸터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호텔 분위기가 저런 누추한 사람으로 인해 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하인을 시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나가 줄 것을 요구하는 쪽지를 건네주어 그를 밖으로 내쫓게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호텔 지배인은 호텔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누추한 옷을 입고 앉아 있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 호텔의 경영주였던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만 보고 판단했던 지배인은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사울이 계속 하나님께 불순종하자 그를 버리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왕을 다시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을 찾았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을 보자 그만 그의 외모에 반해 버려 두 말하지 않고 기름 부으려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너는 그의 용모가 특출하고 키가 큰 것만을 가지고 판단하지 마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 사람은 눈에 뜨이는 외모를 보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삼상 16:7)고 하시면서 들녘에서 양을 지키고 있는 막내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헌금함에 두 렙돈을 헌금하는 과부를 주목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부자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많은 돈에서 의무적으로 헌금을 했을 뿐이지만 과부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녀가 헌금한 두 렙돈은 액수로 보면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 외모를 보고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 / 어떤 잡지에 유명한 이스라엘의 여(女)수상이었던 골다 메이어의 수기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도 못생겨서 사람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 심지어는 부모도 나를 시원치 않게 여겼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공부나 해야겠다고 열심히 했더니 결국은 오늘에 정치가가 되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얼굴이 못생겼고, 눈도 작은 데 키도 작았다고 합니다. 종교개혁가 칼뱅도 빼빼 마른 몸에, 눈이 나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몸과 얼굴이 깡마르고 다리는 유달리 길어서 고릴라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인물 사도 바울도 키는 작고, 시력도 좋지 않아 외모적으로 보잘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은 거룩한 척하며 남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한 성경을 가지고 다니지만 불 같이 열과 빛을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기 같이 냄새만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어떠한 존재입니까? 불꽃과 같은 존재입니까? 아니면 냄새만 피우는 존재입니까?』
이들의 말은 참 거룩해 보입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거룩한 말을 해야 하고, 외모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는 달리 그들은 영적 깊이가 없어 그네들이 하는 교훈 속에는 예수님의 깊은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를 나타내려고 내뱉는 교만한 말들이 많습니다.
남을 가르치고, 전도도 해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마태복음 23:1-12을 거울삼아 나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발견하고 그러한 잘못에서 벗어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마음 먹은 것이 말로서 드러나게 되고, 말이 행동이 되어 남에게 독한 냄새만 피우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지적하고 책망하신 말씀이 나에게 주어지는 책망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마 23:1-12 / 그때에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학자(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뿐이고 실행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4) 그들은 자기들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요구를 너희에게 강요하지만 자기들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 6) 그리고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만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만을 찾는다. 7) 길에 나서면 거드름을 피우며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랍비’라거나 스승이라고 불러 주기를 바란다. 8)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불러 주기를 바라지 말라. 하나님만이 너희의 랍비이시고 너희는 모두가 형제이기 때문이다. … 11) 너희 중에 가장 낮아져서 남을 섬기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자기를 높이려면 남을 무시해야 하고, 자기를 낮추려면 남을 높여야 합니다. 그러나 남을 섬기고 높여주는 것은 곧 내가 높아지게 되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묵상할 때에도 우리는 부끄러운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지 않는다거나 자신의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마음이 없으면 자만심이 생기고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 물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골짜기 물은 굽이굽이 흘러서 시냇가로 갑니다. 시냇물은 더욱 낮아져서 강물을 이룹니다. 강물은 더욱 낮아져서 바다로 흘러가서 대양(大洋)을 이룹니다. 그리고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비가 되어 이 땅을 적셔줍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가서 다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갑니다.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이유는 ‘바다’가 다 ‘받아’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다가 이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 줄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받아주며 치료해 주려면 다른 사람보다 낮은 곳에 있어야 합니다. 자세를 낮추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리더가 되어 상대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당신의 교훈을 배워 따르려는(소금과 빛이 되려는) 제자들에게 교훈하셨습니다.
마 5:39-45 /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네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 40)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 41) 비록 가고 싶지 않더라도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44)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된다면 세상을 이끄는 빛과 같은 리더가 되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 복을 빌어주는 귀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사 60:1-3 / [새 예루살렘의 영광] 예루살렘아, 이제 일어나 환한 얼굴로 기뻐하며 네 얼굴에서 광채가 빛나게 살아라! 내가 네게로 다시 왔으니 네 빛은 바로 나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내 영광이 너를 환하게 비추어 태양과 같이 밝을 것이다. 2) 온 세상이 깜깜하여 세계 만민들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지만 너 시온산 꼭대기 위에서는 나 여호와의 빛이 환하게 밝아 오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게서도 나의 영광이 환하게 빛을 발할 것이다. 3) 나의 영광이 네게서 밝게 빛날 때 세계 만민들이 그 빛을 보고 네게로 오며 세계의 왕들이 네게서 반사되는 빛을 보고 찾아와서 시온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 그러므로 오늘부터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실천하는 일꾼들이 되십시다. 남을 비판하여 깔보고 업신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복을 빌어주는 마지막 때에 쓰임받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거룩한 발걸음을 내딛읍시다. 차가워져서 겨울왕국이 도래하는 세상에 성령의 뜨거운 불을 붙여주어 온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십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모습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마 12:18-20 / 보라, 나의 종, 내가 택한 자, 그는 내가 사랑하는 자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부어 주리니 그가 나라들을 심판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잘난 체하지도 않으며 길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자가 없으리라. 20) 그는 약한 자를 짓누르지 않으며 가장 작은 자의 희망도 억누르지 않으리라. 그는 결국 정의가 이기게 할 것이다. 21) 그의 이름이 온 세계의 희망이 되리라.
세상은 무자비합니다. 갈대처럼 꺾이고 짓밟히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세상은 냉정해서 상한 갈대 같은 사람을 아무데도 쓸데없다고 꺾어 버립니다. 작년 은행에서 감원한다고 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작년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은행권에 또 다시 감원 칼바람이 불고 있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NH농협은행은 지난 20일부터 이날까지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다. 신청 대상은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자 전원과 10년 이상 근무한 40세 이상 직원이다.’ 일을 못해서가 아니라 나이가 들었다는 것 때문에 퇴사를 시킵니다. 밥그릇이 한 귀퉁이만 깨져도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애지중지 키우던 동물도 병들고 흉한 꼴이 되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고 하셨는데 이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이십니다. 성경에서는 연약한 자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여든 군중을 보시며 목자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너무나도 큰데,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가엾은 백성들이었기 때문이었다”(마 9:36).
▶ 외모적인 모습에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병든 사람까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십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시기할 정도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사랑해주셨고 가까이 해 주셨습니다. 치료해주시고 회복시키셔서 귀한 일꾼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간직하셨던 마음(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시는 마음)을 갖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눅 15:1-7 / 부정직한 세리들과 소문난 죄인들이 가끔 예수의 설교를 들으려고 왔다. 2) 그러면 예수께서는 이런 멸시받는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를 하시곤 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이 일을 두고 빈정거렸다. 3-4) 그러자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고 들에서 없어졌다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5) 그러다가 찾으면 너희는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6)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놓고 잃었던 양을 찾은 것이 너무도 기뻐 잔치를 벌일 것이다. 7)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명보다 길을 잃었던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한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너무 감동적인 말씀으로 집을 나가 거지가 된 둘째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아버지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 마음에 메아리 쳐 옵니다.
눅 15:12-24 /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제게 돌아올 몫의 재산을 지금 나누어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후에 작은아들은 자기 몫을 다 챙겨가지고 먼 지방으로 떠났다. 거기서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면서 돈을 허비해 버렸다. 14) 돈은 이미 다 떨어진데다 그 지방에 큰 기근이 들어 그는 끼니조차 이을 길이 없었다. 15) 할 수 없이 그는 한 농부를 찾아가서 애원하다시피 하여 돼지를 치게 되었다. 16)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고 싶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넉넉히 주는 사람이 없었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계신 집에는 일꾼들까지도 양식이 풍족하여 먹고도 남는데 여기서 나는 굶어 죽겠구나! 18) 아버지께로 돌아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 봐야겠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그러니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저를 일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20) 그래서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아들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본 아버지는 측은한 마음에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빨리 집안에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다가 내 아들에게 입혀라. 그리고 보석 반지를 끼워 주고 신을 신겨라. 23) 또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잔치를 열고 기쁨을 나눠야겠다. 24)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그를 잃었다가 찾은 것이다.' 그래서 잔치가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회초리를 드는 것과 같은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물론 이 교훈을 마음에 담으면 큰 유익이 있겠지만 … .
눅 15:25-32 / 한편 밭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자기 집에서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26) 그는 종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물어 보았다. 27) 종이 대답하였다. `주인님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주인님의 아버지께서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시고자 살찐 송아지를 잡아 큰잔치를 벌이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으나 29) 그는 아버지에게 투덜거렸다. `저는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말씀하신 것 중의 어느 하나도 거역한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지금까지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주신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에게 아버지의 돈을 다 써버린 아들이 오니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시는군요.' 31) 아버지가 말하였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더냐? 32) 그러나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잔치를 벌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여기에서의 큰 아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네들에게 멸시받는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를 하신다고 빈정거리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그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낮아질 줄 모르는 쓸데없이 교만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씀이겠지요. 이러한 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악한 요소가 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과연 저들의 판단이 옳았을까요? 옳았는지 틀렸는지를 봅니다. 저들이 멸시하는 사람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도 있었을 것입니다.
2.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도 긍휼을 베푸는 의인(義人)이 되게 하소서
● 일곱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긍휼을 베푸심 / 왜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남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아니 경험해서도 안 되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상조차 못할 비참한 여인도 예수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가장 분명하게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다들 도망친 상황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오래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3년간이나 예수님과 고락을 함께 했던 제자들은 ‘낙심 반 피곤 반’하여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나마 예수님의 무덤에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전파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이 일러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였다.”(요 20:18). 막달라 마리아가 전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열 한 제자들도 의심의 자리에서 믿음의 자리로 돌아왔고 그 후 수많은 사람들이 막달라 마리아의 전도를 통해서 옳은 데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게 점령당한 사람이었습니다(눅 7:2). 몸도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모두 파괴되어서 사람으로서의 구실조차 할 수 없었던 폐인(廢人)이었습니다. 생각도 제대로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때로는 목 놓아 울기도 하고, 무덤가를 거닐기도 하고, 물에 빠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파괴된 폐인 중의 폐인 아니 폐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도 마지막 한 가닥 소망이 있건만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가느다란 소망조차 없습니다. 귀신이 들려 양심의 빛을 상실해 심령이 어두워진 정말로 불쌍한 영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심지라도 아직 남아있는 불씨를 보시고 끄지 않으신다고 하셨건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케이스도 못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은혜(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마치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에스골 골짜기에 널려있는 죽은 사람들의 바싹 마른 뼈를 보고 에스겔 선지자에게 “너 사람아, 이 뼈들이 다시 살아나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 물으시고 “주 여호와여, 그 일은 주님만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자 여호와께서 다시 말씀해 주신 것과 같은 역사가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나타났을 것입니다. 『너는 이 뼈들에게 내가 시키는 대로 이렇게 전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라! 나 주 여호와가 너희 뼈들에게 하는 말이다. 너희가 다시 살아나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너희 속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겠다! 내가 너희 뼈에서 힘줄과 살이 돋아나게 하고 그 위에 피부를 입힌 뒤 다시 살아나도록 너희 속에 네 숨을 불어넣어 주겠다. 그러면 내가 주님이라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가 아니고는 막달라 마리아가 다시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쓰레기 인간과 같은 막달라 마리아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풀어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롭게 태어남으로 폐인의 대명사였던 막달라 마리아가 거듭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며 초대교회의 중추적인 역할까지 한 막달라 마리아.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하여 막달라 마리아를 애인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예수님을 섬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귀한 섬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중 많은 시간을 상한 갈대와 같은 영육 간에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는데 전념하셨습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상한 사람, 문둥병자, 중풍병자, 맹인, 손 마른 자, 귀머거리도 고쳐주셨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쳐 갔지만 예수님은 죽어가는 그에게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정성껏 치료해 주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는 사람까지 일어나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이야 당연히 그렇게 하셨겠지요. 감히 우리가 … ’ 하며 꼬리를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마태복음 25장에 일명 ‘백보좌 심판’이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하시는 것을 보면 ‘나는 못해. 나 같은 것이 어떻게.’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 25:31-40 [마지막 심판] 인자가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32) 모든 민족이 불려 나와 인자 앞에 모일 것이다. 그때 내가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사람들을 갈라서 33)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이다. 34) 그리고 왕인 나는 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사람들아, 와서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에 들어가라. 35)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 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36)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다.' 37) 그때 그 의로운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도와 드렸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이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고 소중히 여겨 그들을 사랑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그렇게 사랑으로 섬겼음에도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그러한 적이 없었는데요?’라고 반문했던 것처럼 그 대가(代價)를 바라지 아니하고 묵묵히 이웃을 사랑으로 섬겼다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반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는 말 속에는 힘들어서 못할 정도가 아니라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히브리서의 기자는 히브리서 12:28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라고 하면서 이어지는 13장 1절에서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과 형제를 사랑하는 일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절에서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손님이란 주인이 좋아하고 원해서 초청해 온 손님이 아니라 이방인 또는 나그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형제에 대한 이해가 광범해지는 것을 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국민이나 지역주민만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종족과 국적과 피부색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신자는 다 형제이고 자매이며 남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찍부터 약자를 보호할 책임을 강조하시며 과부와 고아와 함께 나그네를 늘 잊지 않고 언급하셨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출 22:21-22, 신 10:18-19)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그네를 돌보는 것은 신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중요한 덕목의 하나이고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이렇게 손님을 잘 대접할 줄 알아야 함을 강조한 히브리서 기자는 알지도 못하는 낯선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상기시킵니다(참고 / 창 18:1-15, 창 19:1-22, 삿 6:11-23, 삿 13:2-20).
나그네들을 정성껏 대접하였는데, 그들이 얼마나 봉사ㆍ충성ㆍ섬기는 지를 테스트하려고 천사를 보내셨는데 모두가 ‘합격’을 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천사를 만나고 좋은 일이 있기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와 복과 사랑을 나그네들에게도 베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3. 나 같은 사람을 일꾼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여기에 좋은 글이 있어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메케한 냄새 / 백향목이 되고 싶었다. 성전 지을 때 사용되었던 그 우람하고 늠름한 백향목으로 세상 가운데 우뚝 서고 싶었다. 천국의 확장,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함, 하늘에서 이루어짐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 이런 말씀들은 내가 거목(巨木)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 영광을 위해 힘써 이루어 드릴 일이라 여겨왔다. 또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아닌 거목으로의 자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쓰는 자들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상급이며 보상이라 배워 왔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것 쌓아놓으려 바둥거리지만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주신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백향목이 됨이 너무도 자연스런 모습이라 여겨왔다. 때문에 가여운 이웃들의 쉼터도 되어주며 가여운 이들의 필요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거목이길 소원해 왔었다. / 삶이 엉클어지며 나의 비전은 조금은 겸손(?)하여져 갔다. 높디높은 백향목엔 독수리만 모일 뿐, 그 밑둥이에는 사나운 짐승들이 서로 저 살겠다고 우르릉 거리며 싸울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며, 나물보다 조금 큰 겨자나무로 만족하기로 했다. 비록 키는 작지만 수많은 가지엔 갸녀린 작은 새들이 모여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에 젖어 떨고 있는 작은 새를 위해 넉넉히 나뭇가지 한 자락 내어주고 싶었다. 사나운 짐승들이 꼬이는 백향목보다는 그저 소담스런 나무로 누구나 부담없이 찾을 수 있기에 더 좋을 것 같이 여기기로 작정하였다. 특히 가난하고 삶이 힘에 겨워 지쳐 쓰러질 듯 괴롭고 외로운 이웃들의 쉼터로 서 있기 그지없이 좋을 성 싶은 나무라 여기기로 작정하였다. 백향목이 아님의 아쉬움을 그렇게 나의 겸손(?)은 나를 달래가며 나물보다 조금 큰 겨자나무로 만족하기로 했다. / 아무 짝에도 쓸데없을 꼬부라지고 비틀어져버린 광야의 조각목, 땔감으로 조차 사용하기 참 어설픈 그 나무를 하나님은 성막을 지을 재료로 지정해 주셨다. 백향목만이 재료가 되리라 여겼었는데, 조금 겸손해져서 나물보다 조금 큰 겨자나무라도 재료로 사용하여 주시리라 여겼었는데, 나무라 부르기도 참 부끄러운 나무, 내리 쬐는 태양볕에 물은 턱없이 부족한 그 척박한 곳에서 살아나려 몸부림치고 발버둥 치느라 꼬부라지고 휘어져버린 그 나무를 성막의 재료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참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 나는 타다가 남은 거멓게 그슬린 조각목이다. 이 조각목이 백향목이 되려고 했다. 이 조각목이 나물보다 조금 큰 겨자나무가 되려고 했다. 타다가 남아 시커먼 재투성이인 이 나무, 그런데 휘어지고 꼬부라져 모양조차 흉물스럽건만 더욱이 아직 꺼지지 않은 불로 메케한 냄새마저 풍기는 이 나무를 가지고 성전을 지으시겠다니.. / 이젠 비전이란 말을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나의 비전이라 함은 자아발견이라함이 어울릴 것 같다. 타다 남은 조각목으로 메케한 냄새마저 피우고 있는 ‘나’임을 발견하기, 그것이 나의 비전이다. 어느 분의 말처럼 ‘공사 중 불편을 드려 너무나 죄송합니다’라는 팻말이라도 붙이고 다니면 딱 좋을 성 싶은 나의 모습을 발견함이 바로 내가 가져야할 비전이었음을 깨닫는다. 메케한 냄새로 이웃에게 눈물을 쏟게하고 검은 재는 흩날려 이웃들에게 먼지로 불편을 끼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오늘도 이 메케한 나의 연기에 콜록거리시며, 행여 내가 기침할세라 당신의 몸으로 덮어주신다. 그리곤 검게 그을린 나무를 호호 불어가시며 그 부드러운 손으로 성전을 지어 가신다. 이 비틀어지고 꼬부라진 조각목을 우리 주님은 그렇게나 사랑하시어 덮어주시며 지어 가신다.
딤후 2:20-21 / 부잣집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만이 아니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도 있어서 값비싼 그릇은 손님을 접대하는 데 쓰이고 값싼 그릇은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데 쓰입니다. 21) 만일 그대가 죄를 멀리한다면 순금으로 만든 그릇, 곧 집안에서 가장 비싼 그릇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그대를 사용하실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한 분이 바로 교만의 대명사로 자칭 의인이었던 바리새인인 패기가 넘치는 청년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삶을 살게 되어 온 땅에 복음을 전파하는 대사도가 되었는데 순교를 앞두고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자기의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
딤전 1:12-17 / [자비에 대한 감사]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어떻게 다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나를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선택하셨을 뿐 아니라 충실하게 섬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13) 과거에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방하며 다녔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며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때는 내가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또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14) 오, 우리 주님은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요. 주님은 내가 어떻게 주님을 신뢰해야 하며 또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서도 큰 죄인이었습니다. 16) 그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크나큰 관용으로 감싸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나 같은 것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7) 영광과 존귀가 하나님께 영원무궁토록 함께 하소서!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결코 죽지 않으시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유일한 분입니다. 아멘.
2018년이 시작되어 하루하루 지나면 어느덧 12월 31일이 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값지게 보내십시다. 그리하면 우리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귀한 일꾼으로 변하여 있을 것입니다.
요 15:5-8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내 안에 살고 내가 그 안에 살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6) 만일 누구든지 나를 떠나면 필요 없는 가지처럼 버려질 것이요, 말라서 다른 것과 함께 묶인 채 불에 태워질 것이다. 7)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내 안에 살며 내 말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되거든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내 참제자가 된 사람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무능한 우리가 보기에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쓸모없는 우리를 값지게 하실 수 있습니다. 고난이란 말과 복이란 말은 한 맥을 이룹니다. 상처가 없이 영광된 일들이 생길 수 없습니다. 진주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고통과 아픔을 통해 값진 인생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하십시다. 십자가의 아픔, 고통을 참지 못하고 포기해버리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죽은 믿음만 될 뿐입니다.
금년에는 좀 어려워도 잘 참고 나가시되 큰 뜻을 품고 소망을 성취하시는 한 해로 만드십시다. 믿음으로 원대한 꿈을 가지십시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꿈이 컸습니다. 갈릴리 어부인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나자 예루살렘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로마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선배를 본받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십시다.
욜 2:28 / [주님의 날에 임하시는 성령] `내가 다시 너희에게 나의 비를 부어 준 다음에, 너희 모두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들은 예언을 할 것이다. 너희의 늙은이들은 여러 가지 꿈을 꿀 것이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온갖 환상을 볼 것이다.
이런 글이 있어서 실려봅니다.
위대한 리더일수록...
"인생의 짐은 무거울수록 좋다." 리더일수록 책임이 많고 짐이 무거운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리더는 커다란 대가를 지불하기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리더는 자신에게 맡겨진 무거운 짐과 사명의 잔을 기쁨으로 마시는 사람입니다.
꿈꾸는 자는 짐을 짐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짐을 통해 체력을 단련하고 자신의 한계를 넓혀나갈 뿐입니다.
그래서 짐은 무거울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 황성주의《10대, 꿈에도 전략이 필요하다》중에서 -
역기 선수도 무거운 것을 거뜬히 들면 '장사'라고 합니다.
금메달도 따고 챔피언도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무거운 것을 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명예입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사명으로 여기고
기쁨으로 마실 수 있는 사람, 그가 리더입니다.
그 짐이 무거울수록 '위대한 리더'로 사람 앞에 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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