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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 13:3-8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는 네 종류의 밭 즉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밭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씨는 하나님의 말씀,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님(37절), 밭은 사람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비유에서 핵심은 밭 즉 사람의 마음입니다. 결실을 맺고 맺지 아니하고는 씨나 씨를 뿌리는 자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가, 돌밭, 가시떨기는 똑같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어떻게 하여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길가 밭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마 13:4).
<해석>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19절).
1. 길가 밭의 특징
길가 밭은 밭과 밭 사이에 나 있는 좁은 길을 말합니다. 이 길을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 보니 굳고 단단해져 그 위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린 것입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새들’ 즉 ‘악한 자’가 와서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는 뜻입니다.
말씀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무관심
길가 밭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려워서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기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돈 버는 이야기나 우스갯소리에는 졸다가도 눈을 번쩍 뜨지만, 설교가 시작되면 졸거나 다른 생각으로 설교만 끝나기를 학수고대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만
설교 시간만 되면 눈을 감는 사람이 있습니다. 팔짱을 끼거나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 회개, 전도, 헌금과 같은 설교에는 듣기 싫다는 듯 귀를 닫아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들으라는 소리냐’라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해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을 ‘씨도 안 먹히는 사람’이라고 하듯이 길가 밭이 바로 그러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15절).
‘듣기에 둔하고’에서 ‘둔하다’란 귀가 어두워서 못알아 듣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귀를 막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눈은 감았으니’에서 ‘감다’란 억지로 눈을 감는 것으로, 이는 진리를 진리인 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은 밥을 먹어야 살 수 있지만, 영혼은 영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귀와 눈을 닫고 말씀을 외면한다면 그들의 영혼은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어 버리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살려면 귀와 눈을 뜨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입을 열고 헐떡였다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0, 131).
하나님은 비록 우둔한 자일지라도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헐떡이듯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헐떡이다’란 ‘거칠게 숨 쉬다’, ‘신음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시 42:1) 말씀을 사모한다는 뜻이며, 목마른 사람이 물 한 방도 흘리지 않고 마시려는 것 같이 갈급한 심령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뜨고 그리고 귀를 열고 헐떡이듯 말씀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말씀의 결실은 물론 새들 즉 악한 자로부터 영혼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목회자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
목회자와 좋지 않은 감정으로 설교에 귀를 닫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겠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화해를 하든지 아니면 교회를 옮겨서라도 영혼을 보존해야 합니다.
2. 길가 밭의 최후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19절).
‘빼앗다’란 ‘잡아가다’, ‘데려가다’라는 뜻으로 전쟁에서 포획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는 ‘새 곧 악한 자’를 포획자라고 했으며, 마가는 “사탄”(막 4:15), 누가는 “마귀”(눅 8:12)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온 목적은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 10:10)라는 말씀처럼 인간의 영혼을 사냥해서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욥 22:29)라는 말씀처럼 귀와 눈을 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했던 교만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멘’하며 헐떡이듯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랑의 씨앗이 떨어질 때 사랑의 결실을 맺으며, 믿음의 씨앗이 떨어질 때 믿음의 결실을 맺기 때문입니다.
Ⅱ. 돌밭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5, 6절).
<해석>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20, 21절)
돌밭이란 흙이 얇아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는 밭으로,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지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21절).
‘넘어진다’라는 뜻은 죄에 빠지거나, 배교 즉 교회를 그만두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면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벧전 1:6)라는 말씀처럼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사람이 살다 보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고난을 맞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십니다. ‘미쁘사’란 ‘신실한’, ‘믿을만한’, ‘신뢰할만한’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우리가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때론 피할 길을 열어 주시고, 때론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최종적으로는 구원하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신앙으로 인해 어려움이 따르고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라는 말씀처럼 많은 환난이 있기 마련이며, 성도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으므로 환난과 박해는 불가피한 일입니다(요 15:18, 19).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고 고백한 것처럼 달려갈 길을 마치는 그날까지 믿음을 지키며, 환난과 박해에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Ⅲ. 가시떨기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7절).
<해석>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22절).
가시떨기(thorn)란 ‘가시나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씨가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의미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를 뜻합니다.
첫째, 세상의 염려
사람이 염려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마귀가 사람의 생각 속에 넣어놓은 염려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의 염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하지만 염려나 불안은 마귀의 작품입니다. 사람이 염려하는 이유는 마귀가 사람의 생각 속에 넣어놓은 염려를 받아들임으로써 염려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는 말씀에서 ‘맡기라’는 염려를 주께 내던지라 즉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가시떨기 염려가 올 때는 마귀의 수작임을 인지하고 즉각 엎드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라는 말씀에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기도와 간구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3) 가시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7-10).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가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지만, 두통, 안질, 간질 등 육체의 질병으로 보기도 하고, 끊임없이 뒤따르는 박해로 보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것이 떠나기를 “세 번 주께 간구”(8절)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 세 번이란 문자 그대로 세 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여러 번 간절히 구했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돌아온 응답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응답이 거절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거절도 하나님의 응답으로 믿고 도리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9절).
여러분도 응답만 은혜가 아니라 환난도 은혜요, 거절도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가시떨기 염려로 인해 믿음에서 이탈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재물의 유혹
말씀을 듣고도 결실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재물의 유혹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7절)에서 ‘막았고’와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22절)라는 말씀에서 ‘막혀’는 ‘숨 막히게 하다’, ‘질식시키다’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돈 걱정으로 가득해 말씀을 듣지 못하니 질식해서 죽을 것 같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물질에 대한 신앙관 즉 사람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신앙적 사고방식으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7.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7-10).
이 말씀을 보면 재물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함(7) - 시험과 올무에 빠짐(파멸과 멸망 초래)(9) -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믿음에서 떠남(10) – (그러므로) 족한 줄로 알아야 함(8).
예수님은 한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이유는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며(마 13:22), 재물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기 때문입니다(막 10:23).
그러므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기를 바랍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 6:17).
Ⅳ. 좋은 땅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8).
<해석>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23절).
‘좋은 땅’이란 식물이 잘 자라기에 적합하도록 돌과 잡초가 제거되고, 수분과 햇볕이 잘 드는 개간된 땅을 가리킵니다. 본 비유에서는 본문에 기록된 대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를 말하며, 누가복음을 보면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라고 기록된 것처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닫고, 지키고, 인내로써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하게 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깨닫는 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13:23).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를 결실한 이유는 말씀을 듣고 깨달은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이하여 인간으로서는 그 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말씀을 갈망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눈과 귀를 열어주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이를 성령의 조명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의 조명에 의해 말씀이 깨달아질 때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이며 얼마나 교만한 자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천천 금은보다 좋으며(시 119:72, 127),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단 말씀(시 19:10, 119:103)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는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라는 말씀처럼 아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사무엘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라고 고백한 것처럼 순종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둘째, 지키는 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천 번 만 번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들어도 지키지 않는 자는 길가 밭이나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처럼 결실할 수 없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라는 말씀을 들었다면 들은 대로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백 배든, 육십 배든, 삼십 배든 결실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라’라는 말씀을 들었다면 회개라는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에 따른 기도의 결실은 물론 성령의 선물을 받기 때문입니다(행 2:38).
셋째, 인내하는 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를 결실한 데에는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얻기 위해 길이 참듯이 오래 참아 견딘 인내의 결실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7).
‘길이 참으라’는 뜻은 ‘오래 참다’, ‘인내하며 견디다’라는 뜻입니다.
인내하며 견딘 결과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본 대표적인 사람 중에 욥이 있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약 5:11).
욥은 열 자녀를 잃고, 그야말로 ‘억’ 소리 나는 재산을 한순간에 잃었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인내하고 견딘 결과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욥 42:12)라는 말씀처럼 인내의 결실을 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었다면 결실할 때까지 길이 참아야 합니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은 인내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길 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들 즉 마귀가 와서 낚아채 가버렸고,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버렸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은 결국 마귀에게 끌려다니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뜨고 귀를 열고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라는 말씀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목회자와의 갈등도 속히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이란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라는 시편 기자처럼 헐떡이듯 말씀을 사모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면 죄 때문인지, 기도하지 않아서인지, 목회자와 불편한 관계 때문인지를 찾아서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풀것은 풀어야 합니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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