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理尼師今立 南解太子也. 母 雲帝夫人 妃日知葛文王之女也.[或云妃姓朴 許婁王之女] 初南解薨 儒理當立 以大輔脫解 素有德望 推讓其位 脫解曰 神器大寶 非庸人所堪 吾聞聖智人 多齒 試以餅噬之 儒理齒理多 乃與左右奉立之 號尼師今 古傳如此 金大問則云 尼師今 方言也 謂齒理 昔南解將死 謂男儒理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 其後 金姓亦興 三姓以齒長相嗣 故稱尼師今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남해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며, 왕비는 일지 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이다.[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며,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한다.]
애초에 남해(南解)가 돌아가셨을 때, 유리가 당연히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유리는 대보(大輔) 탈해(脫解)가 본래 덕망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에게 왕위를 사양하였다. 탈해가 말하였다. “임금이라는 자리는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나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시험 삼아 떡을 깨물어 보시지요.” 그 결과 유리의 이 자국이 많았으므로 즉시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그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고, 왕호를 이사금(尼師今)이라 하였다. 예부터 전해오는 말이 이와 같았다.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이사금은 방언이다. ‘이사금’은 곧 ‘이의 자국’이란 말이다. 이전에 남해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너희들 ‘박’과 ‘석’ 두 성을 가진 사람 중에 나이 많은 자가 왕위를 이으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후에 김씨 성이 또한 흥기하였으므로, 세 성씨들 중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임금을 이사금이라고 불렀다.”라고 하였다.
25년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大赦
2년(서기 25) 봄 2월, 임금이 몸소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사면 대상은 누구 : 전쟁 포로라는 주장(서기14~24년, 난민의 유입)
28년 五年 冬十一月 王巡行國內 見一老嫗飢凍將死曰 予以眇身居上 不能養民 使老幼 至於此極 是予之罪也 解衣以覆之 推食以食之 仍命有司 在處存問鰥寡孤獨老病不能自活者 給養之 於是 隣國百姓 聞而來者衆矣 是年 民俗歡康 始製兜率歌 此 歌樂之始也. 王旣定六部 中分爲二 使王女二人 各率部內女子 分朋造黨 自秋七月旣望 每日早集大部之庭績麻 乙夜而罷 至八月十五日 考其功之多小 負者置酒食 以謝勝者 於是歌舞百戱皆作 謂之嘉俳 是時 負家一女子 起舞嘆曰 會蘇 會蘇 其音哀雅 後人因其聲而作歌 名會蘇曲
5년(서기 28) 겨울 11월,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돌아보다가 한 노파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몸으로 왕위에 앉아, 백성을 먹여 살릴 수 없고, 노인과 어린이로 하여금 이토록 극한 상황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밥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에게 명하여 곳곳마다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과 늙고 병들어 혼자의 힘으로 살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고 양식을 나누어 주어 부양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웃나라의 백성들이 이 소문을 듣고 옮겨 오는 이들이 많았다. 이 해에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하여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
임금은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두 편으로 나누고, 임금의 두 딸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려 편을 짜게 하였다. 이들 두 편은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새벽에 큰 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시작하여 밤 열 시경에 끝냈다. 그들은 8월 15일이 되면 길쌈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헤아려서,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이긴 편에 사례하였다. 이때 노래와 춤과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였는데, 이 행사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 이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는 소리로 “회소, 회소!”라고 하였다. 그 소리가 슬프고도 우아하여, 뒷날 사람들이 이 곡에 노랫말을 붙이고, 회소곡(會蘇曲)이라고 하였다.
32년 九年 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一云牟梁] 姓孫 干珍部爲本彼部 姓鄭 加利部爲漢祇部 姓裴 明活部爲習比部 姓薛 又設官有十七等 一伊伐飡 二伊尺飡 三迊飡 四波珍飡 五大阿飡 六阿飡 七一吉飡 八沙飡 九級伐飡 十大奈麻 十一奈麻 十二大舍 十三小舍 十四吉士 十五大烏 十六小烏 十七造位
9년(서기 32) 봄,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하사하였다. 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로 고쳤으며 성은 이(李)씨이고,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로 고쳤으며 성은 최(崔)씨,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혹은 모량(牟梁)이라고도 한다.]로 고쳤으며 성은 손(孫)씨,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로 고쳤으며 성은 정(鄭)씨,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로 고쳤으며 성은 배(裴)씨,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로 고쳤으며 성은 설(薛)씨로 정하였다.
또한 관직에 다음과 같은 17등급을 두었다. 첫째는 이벌찬(伊伐飡), 둘째는 이척찬(伊尺飡), 셋째는 잡찬(迊飡), 넷째는 파진찬(波珍飡), 다섯째는 대아찬(大阿飡), 여섯째는 아찬(阿飡), 일곱째는 일길찬(一吉飡), 여덟째는 사찬(沙飡), 아홉째는 급벌찬(級伐飡), 열째는 대나마(大奈麻), 열한째는 나마(奈麻), 열두째는 대사(大舍), 열세째는 소사(小舍), 열네째는 길사(吉士), 열다섯째는 대오(大烏), 열여섯째는 소오(小烏), 열일곱째는 조위(造位)였다.
▶성을 하사하는 풍속은 중국식 문화
34년 十一年 京都 地裂泉湧 夏六月 大水
11년(서기 34),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고 샘이 솟았다. 여름 6월, 홍수가 났다.
36년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13년(서기 36)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점령하였다.
37년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14년(서기 37), 고구려왕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40년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임금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42년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 獻之
19년(서기 42) 가을 8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을 하여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54년 三十一年 春二月 星孛于紫宮
31년(서기 54) 봄 2월, 자미(紫微)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56년 三十三年 夏四月 龍見金城井 有頃暴雨自西北來 五月 大風拔木
33년(서기 56) 여름 4월, 금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는데 얼마 후에 소나기가 서북쪽에서 몰려왔다. 5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57년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豫 謂臣寮曰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 吾死之後 俾卽大位 以無忘我遺訓 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34년(서기 57) 가을 9월, 임금이 병환이 나자 신하들에게 말했다. “탈해는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요,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여러 번 공을 세웠다. 나의 두 아들은 재능이 그를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죽은 뒤에는 탈해를 왕위에 오르게 하리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사릉원(蛇陵園)에 장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