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문화연구회>
1회 답사
장소:안동 퇴계 이황 관련 유적지
참석자:이세희 반경호 이가경 이유인 이혜순
답사일:11월 22일 월요일
저희 선비문화연구회에서는 안동을 첫번째 답사지로 하여 퇴계 이황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의 학문과 정신과 인품을 더듬어 배우고 본받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운전과 해설을 맡아주신 이세희 선생님과 추운 날씨임에도 먼 길 달려와주신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첫번째 지방답사였습니다
원래는 1박2일 일정을 계획하였던 코스였으나 여러 사정상 당일답사로 진행하였습니다
뜻깊고 보람된 답사였습니다
《퇴계의 발자취를 따라》
안동터미널에서 10시 30분에 만나 첫번째 답사지로 출발하였습니다
운전하시면서 이세희 선생님이 옛날 안동과 예안은 다른 행정구역이었고 일제강점기 시절에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퇴계는 예안 출신이므로 안동터미널에서 한참을 달려야했습니다
가는길 내내 여기는 어디고 저기는 어디라는 말씀만으로도 안동에 얼마나 뛰어난 인재가 많고 유적지가 많은지 설명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첫번째 답사지에 도착하였습니다
<하계마을독립기념비>
하계마을독립운동 기념비입니다
이 하나의 비석이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비석이 스스로 오늘 답사의 결론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퇴계 후손이 3대에 걸쳐 2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무릇 선비정신의 표본이 그런 것이 아닐까요?
충과 효가 유교 사상의 두 중심축이라면 선비의 갈 길을 눈에 잘 띠지도 않는 이 비석이 웅변하고 있습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훼손하지 않음이 효의 시작이라면서 자신의 목숨을 통째로 바친 사람들
충과 효과 충돌할때는 충이 우선한다고 했습니다
그 산 증거를 이 곳에서 보았습니다
퇴계선생은 언덕위에서 굽어보시며 참 흐뭇하실것 같습니다
<양진암지>
퇴계의 나이 46세가 되던 1546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퇴계가 이곳에 작은 집을 짓고 양진암養眞庵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선생은 이 곳에 터 잡고 살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살고자하셨나봅니다.
이 곳이 마땅치않아 오래지않아 옮겨가셨지만 이곳에서 지척인 수졸당에 그 후손들이 대대로 터잡아 살고 있습니다.
<퇴계묘소>
양진암터를 지나 선생이 잠들어 계시는 곳으로 향합니다.
겨울을 준비하느라 잎들을 다 떨어뜨린 커다란 참나무가 먼저 인사를합니다.
선생의 높은 뜻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이 하늘을 향해 쭉쭉 가지를 뻗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나무들 사이로 수졸당이 보입니다.
선생의 묘소를 가는 길에 먼저 며느님 봉화금씨의 묘를 만났습니다.
시아버지의 배려와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죽어서도 시아버지를 섬기겠다며 그 밑에 묻어달라고 했다는데 많은 세월이 흘러 지극히 속된 시각으로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지않나하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여전히 잘 관리되고 있고 선생의 묘를 오르내리는 사람들 모두 이 곳을 지나며 그녀의 효심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까요?
가파른 계단을 올라 드디어 선생이 계신 곳에 도착했습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수많은 묘소들과는 달리 선생의 묘는 작은 산봉우리의 정상에 있었습니다.
아래로는 하천(원래 토개천이었으나 지금은 퇴계천 )이 흐르고 또 후손의 사는 모습도 굽어볼 수 있어 사후에 계실 장소로 이 보다 더한 곳을 찾기가 쉽지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 올라와 보고서야
답사 올 때마다 "저 위에 선생의 묘소가 있어. 다음에 시간되면 올라가봐."라고만 하고 올라가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보기에는 낮아보이는데 꽤 가파르고 제법 많이 올라가야합니다.
선생은 70세가 되던 1570년(선조3년)에 세상을 떠나시면서 조정에서 내리는 예장禮葬을 사양하고 비석을 세우지 말것이며 작은 돌의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간단하게 본관과 조상의 내력,그리고 입지와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조정에서는 지관을 보내 예장을 권하였으나 후손들이 거절하였고 다시 조정에서 예장을 권하여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생의 뜻을 반영하여 비석에 관직을 기록하지 않고 비석의 위치도 정면을 향하지 않으며 제사 때는 제물도 간소하게하여 훗날에까지 영남유림들의 본이 되었다고합니다.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그리 초라하지도 않은 그런 묘소입니다
<수졸당>
<동암종택> 또는 <하계종택>이라고도 불리는데요 퇴계의 3번째 손자 동암 이영도가 결혼해서 분가해 살 던 집이어서 그의 호를 따서 <동암東巖종택>라고하고 진성이씨 하계파의 종택이어서 <하계종택>이라고도 합니다.
동암의 아들 이기李岐의 호가 수졸당守拙堂이어서 당호를 수졸당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원래의 위치는 양진암 아래 하천쪽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에 따른 수몰위기때문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였다고합니다.
안동 지역의 대부분의 고택이 같은 이유로 이전하여 원래의 위치와 구조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이 큽니다.
이왕이면 이전하기 전의 사진자료를 표지판에 같이 표시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이 곳에는 여전히 퇴계의 후손이 살고 계시면서 고택숙박체험도 가능하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이용해봐야겠습니다.
위쪽에서 내려다 보면 수졸당 재사가 완벽한 ㅁ자 모양입니다.
구조는 안채, 정자인 수졸당, 그리고 재사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단독건물의 이름이 수졸당이기도 합니다.
수졸당 건물 뒤편에 사당이 있습니다.
동암 이영도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산소 아래에 집을 지어 살았습니다.
어째 시묘살이의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됩니다.
한편으로는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뒤에서 지켜봐 주시니 얼마나 든든할까 싶기도 합니다.
함부로 허튼 행동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였을까요?
동암은 임진년의 왜란 때 구국의 길에 앞장을 섰고 후손들은 또 그 뒤를 이어 독립운동의 험한 길을 걸었나봅니다.
춥고 외롭고 험한 길을 갈 때에도 할아버지의 따뜻한 미소가 함께하고 어머니가 포근한 눈빛으로 지켜봐 주신다면 어떤 길이든 마다않고 갈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요?
예던길 전망대에서 청량산도 바라보고
육사기념관앞에 잠시 쉬었다가
퇴계종택과 계상서당에도 갔지요.
몽실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퇴계나신 퇴계태실에 갔습니다.
이인화의병장의 생가인 온계종택에 들렀습니다.
일인들이 불을 질러 사당을 제외하고 전부불에타 다시 지었습니다.
고산정에는 지난번에 갔을 때 없었던 전망대가 있었습니다.
농암 이현보가 살던 농암종택을 들러
도산서원에 갔더니 벌써 짧은 겨울해가 저물어갑니다
그렇게 퇴계의 발자취를 따라 숨가쁘게 하루를 보내고 오는 길에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이세희 선생님이 고향지역으로 답사오는 회원들을 위해 미리 안동에 들러 요즘 핫하다는 맘모스제과에 들러 맛있는 빵을 준비하시고 안동의 명물이라는 버버리찰떡과 안동식혜를 준비해 개인별 포장으로 준비히주셨습니다.
유리병에 담긴 안동식혜를 보며 포장이 너무 고급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직접 한병한병 담으셨다는 선생님 말씀에 기가 막혔습니다.
맛있는 식혜를 먹으려는데 병의 입구가 작아 내용물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밤새 포장하셨을 선생님을 생각하며 밥 한 알 남기지 않고 다먹었습니다.
후기에 이런 내용을 담지 않으려하였으나 너무 감동적이라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글을 쓰는데 몇번씩이나 날아가 버려 이제아 후기를 올리는 것 너그러운 이해도 함께 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