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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거룩한 내맡김 영성의 출발, 무형의 성전 "마리아처럼"
2. 이해욱 신부님이 거룩한 내맡김 영성을 만들었다(?)
3. 거룩한 내맡김 영성의 뼈대가 된 두 저서
4. 거룩한 내맡김 영성은 소화데레사 영성이기도 하다.
5. 왜? 내맡김의 영성이 최고라고 떠드는가?
6. <거룩한 내맡김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7. <끊임없는 기도모임>의 탄생
8. <거룩한 내맡김 영성>에서는 묵주기도와 미사를 거부한다(?)
9. <거룩한 내맡김 영성> 도서, 음반 발간 및 굿뉴스 '소리도서' 등재
10. 거내영의 하느님 체험 나눔은 코로나 팬데믹에도 멈추지 않는다.
11. 맺음말
1. 거룩한 내맡김 영성의 출발, 무형의 성전 "마리아처럼"
<거룩한 내맡김 영성>은
서울대교구 사제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1982년 서품)에 의해
2009년 12월 다음(Daum) 포털에 '무형의 성전, 마리아처럼' 카페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누가 내맡김의 영성에 돌을 던지는가
moowee 2017.07.27.
하느님 뜻대로 살아오지 못하던 그 사제의 입에서는 화살기도가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화살기도는 그의 머리를 채우고 마음을 채우고
마침내는 그의 영혼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그의 영혼을 가득 채운 그 자리에
또 마침내는 그의 참아버지께서 자리하시게 되었다.
그의 영혼을 차지하신 아버지께서는 그 영혼 안에만 머물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는 자신 안에 머물고 계신 아버지를 전하기 위해
타볼산을 오르내리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무형의 성전 마리아처럼"을 건립하였다.>
2. 이해욱 신부님이 거룩한 내맡김 영성을 만들었다(?)
"내맡김의 영성"은 한글이며,
한자로는 "委托(위탁)의 靈性"이다.
수많은 성인들이 추구해 오던 "의탁의 영성"이 <위탁의 영성>이며,
위탁의 영성을 우리말로 "내맡김의 영성", 더 정확히 말해서
하느님께 맡기기에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다.
이 내맡김의 영성은 그 사제(이해욱 신부)가 만들어낸 영성이 아니다!
오히려 구약의 <아브라함의 영성>이며 <하느님 신앙의 영성>이다!
또한 신약의 <성모 마리아의 영성>이며,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성>이다!
이 신부는 늘 <거룩한 내맡김 영성>은 자신이 만들어 낸
영성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또한 이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저는 감히
"내맡김의 영성에 돌을 던지는 행위는 곧,
아브라함과 성모 마리아와 그리스도 예수님이 사신 삶(영성)을 부정하는 행위"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분들의 삶이
하느님 아버지께 "의탁(위탁)하는 삶"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특히 제가 "위탁(의탁)의 영성"을
우리말로 "내맡김의 영성"이라는 말로 사용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를 만들어준 책이 바로 <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인데,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살았던 이 책의 저자 프랑스의 영성가
예수회의 '코사드의 요한 베드로 신부님'의 영성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3. 거룩한 내맡김 영성의 뼈대가 된 두 저서
이해욱 신부님은 몸에 병을 얻고 "이러다가 죽는 것이구나!"를 체험한 후,
지리산으로 들어가 2006년 2월부터 2011년 2월까지 5년간 살면서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틈틈이 기록하셨다.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란 용어는 이 신부 자신의 체험과 놀랍게도 흡사한,
마치 자신의 체험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두 가지 저서
장 피에르 드 코사드 신부(프. 예수회 1675–1751)의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과
동 비딸 러오데 신부(프. 트라피스트회 1857-1948)의 '거룩한 위탁'을
통해 만들어졌다.
4. 거룩한 내맡김 영성은 소화데레사 영성이기도 하다.
<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이 책에는
<성녀 소화 데레사>에 대한 영성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는데,
성녀 소화 데레사가 말하는 "작은 길(Little Way)"이야 말로
<내맡김의 영성>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내맡김의 영성에 돌을 던지는 행위는 곧,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에 대해 돌을 던지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
(1)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pp. 25-27
성녀 데레사가 늘 주장하기를,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행위의 탁월성이나 위대함이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행하는 보잘것없고 가장 하찮은 일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사랑을 위해 행해지는 경우라면
그것이 최고로 중요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의 마음에 작용하는 사랑에 따라
그분이 판단하신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행위들을 실천할 수 있음을
성녀는 선언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200여 년 전에 코사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고의 성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자신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 여러분은 삶을 눈여겨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삶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행위들로 채워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런 것들에 대해 만족해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행위가 되어져야할 때 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완덕을 추구하는데 연출해야 할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성녀 데레사에게 되돌아가 보자.
성녀는 한 조수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자매님의 생활은 겸손하고 숨겨진 생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앞에서는 아무것도 미소하지 않음을 기억하세요.
자매님은 사랑으로 처리하고 있는 모든 것을 행하도록 하십시오."
병상에서,
성녀는사람들에게서 이 세상을 하직한 다음
성녀에게 맡겨진 모든 영혼들에게 무엇을가르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즉시 이르길
"신뢰와 완전한 위탁의 길인,
영적 어린이의 길에 그들이 나서도록 권고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한 성녀의 자서전 안에 언니 마리아에게 보내는 글, 마지막 장에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으셨던 비밀들" 을 말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말을 이러하다.
"예수님은 결코 드러나시지도 않고
당신의 목소리를 나로 하여금 듣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은밀히 저를 가르치시지만
당신 사랑의 신적 용광로에로 이끄는 유일한 통로를
저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품 안에 두려움 없이 잠든 아기처럼 완전한 위탁과도 같습니다.
... 예수님은 위대한 행동들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은
자기를 온전히 내맡김이며 감사드림입니다.
... 오! 예수님,
당신의 측량할 수 없는 자애에 대해
모든 '작은' 영혼들에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보다 더 연약한 영혼을 만나신다고 하고
그 영혼이
당신의 무한한 인자를 굳게 믿어 그 자신을 온통 내맡긴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에게 더 큰 은혜를 즐겨 넘쳐흐르도록 내려 주실 것 같이
생각됩니다."
우리는 코사드가
"현 순간의 성사(the sacrament of the present moment)" 라고 일컫는 것에 대해
주장하는 바를 고찰해 보고 있노라면,
성녀 데레사가 남긴 다음의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만약 제가 매순간 단순하게 살지 않는다면,
저로서는 인내심을 갖기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현재만을 바라볼 수 있고
과거를 잊으며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무척 조심합니다.
우리는 실망하고 또 실망감을 느끼는데,
이유는 과거와 미래를 곰곰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조용히 쉬지 않고
안달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짓은 없습니다."
성녀 데레사의 "작은 길(Little Way)" 의 전 목적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이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만인이 하느님 뜻에 조금도 남김없이 내맡김으로써 거룩하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 외에" 아무것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녀는 성녀 체실리아를 두고 자기가 좋아하는 성녀라고 말했다.
"저를 특별히 기쁘게 한 것은
성녀가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긴 것이었고,
그분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심이었습니다."
위탁과 신뢰,
이것은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열쇠가 되는 두 개의 단어들이다.
(2) 거룩한 위탁 역자 후기(後記) pp..614-615
저 영해 예수의 귀여운 소화 「데레사」성녀가
최근 온 세계의 신자에게 그처럼 탁월한 솜씨로 가르친
「영적 유아(靈的幼兒)의 길」은
사실은 거룩한 위탁의 길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유아(幼兒)의 본성은 온전히 그리고 조금도 남김 없이
착한 어머니의 품안에 그 몸을 맡겨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자의 착한 어머니란, 바로 천주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본서는
단지 「리쥬」의 사랑스러운 성녀에 의하여
현대의 사람들에게 새로이 불러 일으켜진 길을
이론적 교의(理論的敎義)와 다른 많은 성인들의 생활한 모범에 의해서 증명
하는데 불과합니다.
이 길은 근본에 있어,
그리스도교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오래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그 영웅적인 모범과 그 숭고한 가르침에 의해서
제시하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5. 왜? 내맡김의 영성이 최고라고 떠드는가?
moowee 10. 04.16
< 왜, 내맡김의 영성이 가장 탁월한 영성인가? >
"교회 역사상, 수많은 성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영성이 최고의 영성이라 생각하여
수도공동체를 세워 나름대로의 여러 수덕방법과 기도방법과
덕행방법을 내세우고 펼쳐왔는데---
내맡김의 영성이 왜,
하느님과 일치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에는,
누구나 다 나름대로의 접근 방법이 있는 것인데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만이
꼭 유일한 접근 방법이 아니지 않느냐?"하는 질문입니다.
참으로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내맡김의 영성"만이 하느님께 나아가고 그분과 일치하는 데에
꼭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를 이루는 길은
우리 교회 역사상 참으로 훌륭한 많은 성인들께서 그분들의 삶으로
이미 우리에게 직접 증명해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요한 4,17)
하느님께 나아가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길이 아무리 많고 다양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모두의 공통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말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 ,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사람은,
그 사랑을 닮은 "작은사랑"입니다.
하느님은 "큰사랑"이십니다.
작은사랑은 큰사랑을 본받아 점점 커져야 합니다.
작은사랑이 큰사랑이 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을 큰사랑에 내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서로의 사랑을 "믿고" 내맡길 줄 압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랑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샘솟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지 못하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며,
그러한 사랑에는 "걱정과 두려움 더나아가 절망"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은 "참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참주인"이십니다.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께 내맡기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분께 내맡기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십니다.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의 희망"이 되어 주십니다.
가끔,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을
"구속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분도 계시는데
그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서로에게 구속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로에게 묶이고 구속되는 것이 오히려 "자유로운 삶"입니다.
사랑으로 서로에게 묶이길 원하지 않는 사랑은 "거짓사랑"입니다.
거짓 사랑은 "무책임"합니다.
끝이 있습니다.
일시적 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께 내맡기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자유의 근원이신 당신의 "참사랑이라는 자유"에 묶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미래를 영원히 행복하게 책임져 주십니다.
끝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사랑을 위해 자기 뜻을 기꺼이 희생할 줄 압니다.
서로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인 것입니다.
"왜, 내맡김의 영성이 가장 탁월한 영성인가?"에 대한 답은 "사랑"에 있습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저에게 가르쳐 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사랑만이 답입니다. 정답입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면,
당신의 뜻이 우리 안에 오셔셔 우리를 살아주십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통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삶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삶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2,20)
"하라, 하지말고 하라!
하지마라, 네가 하지마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하시게 하라!
살라, 삶없이 살라!
살지마라, 네가 살지마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사시게 하라!"
5. <거룩한 내맡김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첫째로, 하느님의 뜻대로 살 '굳은 결심'을 미사를 통해서
하느님께 봉헌해 드리는 것이다.
둘째로, 루카 복음의 예수님 말씀(루카 18, 1;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과
사도 바오로의 말씀(1테살 5, 17. 18;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대로
하루의 모든 시간을 화살기도 성가를 통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다.
6. <끊임없는 기도모임>의 탄생
(1) 거룩한 내맡김 영성은
하루의 모든 시간을 화살기도 성가를 통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끊임없는 기도모임>이라는
'거룩한 내맡김 영성 단체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2018년 8월 8일 서울대교구 평신도 (사립)단체 승인을 받았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민범식 신부님의 감수가 있었습니다.
(2) <끊임없는 기도모임> 단체 승인을 위한 담당사제 의견(2018. 05.27)
4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국방문으로 한국교회는
신자수, 사제수 증가 등 교회성장에 큰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 교세 통감을 보더라도 '프란치스코 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해가 갈수록 주일미사참례자 수(19.5%)는
줄어들고 각 교구 신학교와 수도회 입회자 숫자도 다름이 없는 실정이다.
이미 유럽에서는 성당이나 교회가 다른 용도로 팔려 호텔, 식당, 연주회장, 창고,
심지어 술집으로 변모하는 성당과 교회들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인데
가장 큰 원인은 신자수 감소라고 한다.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이런 현상을 신앙의 위기로 판단하시고
이미 지난 2012년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이하여
<신앙의 해>를 선포하셨었다.
그 이후 5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교회는 그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러한 현상은 세계적인 추세, 한 마디로 <탈종교화 시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종교에서 저마다 '탈종교 원인'을 여러 면으로
분석하여 발표하였지만, 저는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탈종교의 원인을, "자신의 종교가 싫어져서!" 라고!
저는 다른 종교를 차치하고 우리 가톨릭 입장에서만 생각해 볼 때,
그 원인을 <하느님 체험>에 두고 있다!
하느님을 체험한 신자들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체험>이 매우 중요하다.
체험, 그것도 <깊은 체험> 없으면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으니 오래 갈 리 만무하다.
적지 않은 영세자들이 세례 후 1, 2년 내에 성당에 발길을 끊는다.
재미가 없다, 아무리 재미를 붙이려 노력해 봐도 너무 재미가 없다.
아니 교회밖에 재미있는 것이 너무 많다, 널려 있다.
그것은 신앙체험 즉 <하느님 체험>,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제가 몸에 병을 얻고 산으로 들어간 것이 2006년 2월,
약 12년 전 저는 병으로 "죽는 것이 별거 아니구나!"를 체험한 뒤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지리산 속으로 들어갔다.
질병에서 빠져나오려 그렇게도 열심히 많은 건강법들에 매달렸건만,
<하느님 섭리 앞>엔 그 어떤 약제도 요법도 그 무엇도 다 무용지물이었고
마침내 < "아, 이러다 죽는 모양이구나!">를 외치게 되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사제직>에 대한 꿈을 갖고 소신학교 3년, 대신학교 6년
그리고 사제생활 24년, 전문인으로서의 33년을 뒤로 하고 산으로 들어간 나는
오랜세월 너무도 허망하게 살아온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 이러다 죽는 모양이구나!> 하는 체험 앞에선
<어떤 거짓>도 자리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바로 내 앞에 와 계시기 때문이다.
죽음과 마주한 지리산 생활에서
나는 <끊임없는 화살기도>를 체험하게 되었다.
나는 그 화살기도를 어떤 일이 생길 때나 어려움에 처한 누구를 떠올리며
가끔가끔 바치는 <짧은 기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화살기도란 <끊임없이 반복해서 바치는 짧은 기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교회의 오랜 전통 중의 하나가 바로 화살기도이다.
<초기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공동기도 시간 외의 일하는 시간에도
그들의 입에서 기도가 떠나지 않게 생활했다.
그들은 일할 때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짧은 성경구절>이나 <주님의 기도>나
<거룩한 짧은 말>을 끊임없이 계속 되풀이하였다.
현대 영성의 대가 <토머스 머튼>신부님의 말씀, "자꾸자꾸 반복하여 말하고 되뇌어라! 수시로!
그리고 끊임없이! 그것이 기도이고, 기도는 하느님과 깊은 관계이다."는 바로
<끊임없는 화살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18, 1절 이하>에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하지 않으셨고, 분명히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 하시면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려주셨다.
바오로 사도 또한 <1 테살 5, 17>에서 테살로니아인들에게 그냥
<기도하십시오 또는 열심히 기도하십시오,>하지 않으셨고,
"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려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처음으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바로 <끊임없는 화살기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역시, 나를 따라서 일상생활 속에서도 늘 끊임없는 화살기도를
바치는 이들도 나와 똑같이 누구나 <하느님을 체험>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나는 이 세상 그 누구나 <끊임없는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동안 <끊임없는 기도>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한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이 <끊임없는 기도모임>이다.
회원들은 기도 체험을 심도있게 나누고 하느님 체험을 주고받으면서
신앙생활의 기쁨과 활기를 더해 가고 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복음의 기쁨 31항)의 믿을만한 방법 중의 하나로
<끊임없는 기도모임>을 제안하는 바이다.
신앙의 해 개막미사 강론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언급하신 말씀 그대로,
오늘날 <복음화라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변화시켜주신 새 삶을 증언>하고 그 증언을 통하여
<나아갈 길을 가리켜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끊임없는 기도모임>은 하느님을 갈망하는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는 법'을 안내할 것이다.
<끊임없는 기도>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고,
그 체험은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참 생명,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에
마음과 정신을 열도록' 빛이 될 것이다.
6. <거룩한 내맡김 영성>에서는 묵주기도와 미사를 거부한다(?)
<moowee 10.11.18
전능하신 하느님이 무엇이 부족하시다고
우리 인간의 부족한 기도와 우리의 행위들을 바라실까?
우리가 매일미사에 참여하고 매일 묵주기도 백단씩을 받으신다고
하느님이 매우 기뻐하시며 엄청 흡족해 하시겠는가?
매일미사를 하지 마시라는 것이 아니고,
매일 묵주기도를 하지 마시라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이사1,13)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으며 바치는 모든 기도는
하느님께 역겨움을 느끼게 해 드릴 뿐이다.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만이 "참 기도"이며,
참 기도만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에 대한 "진실한 사랑"밖에 없다.
하느님이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만을 원하신다.>
<moowee 11.07.01. 16:59
제가 화살기도 성가를 모든 기도를 끊고 3달간 하시라는 이유는
이곳의 여러 곳에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이 내맡김의 화살기도는
다른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기도의 핵심요약이며
주님의 기도 이외에 사실 다른 기도는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다른 모든 기도를 다 끊어도 좋을 만큼
'주님의 기도'가 가장 완벽한 기도이며
그 기도의 핵심요약이기에 불안해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단 3개월 동안만입니다.
무슨 일이든 3개월을 집중하면 그것이 아주 몸에 베이게 되며,
그 효과도 3개월이 지나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3개월 후에는
잠을 자면서도 화살기도가 저절로 입에서 마음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내맡김의 영성(삶)'을 살기 위한 각오와 새 전기를 마련하기 위함
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원하시는 대로 기도하시면 됩니다.>
7. <거룩한 내맡김 영성> 도서 및 음반 발간 및 굿뉴스 소리도서 등재
(1) 2016년에는 <거룩한 내맡김 영성>을 살며
하느님께서 변화시켜주신 새 삶을 사는 33인의 증언집,
<딸랑 이거 하나로 >가 '가톨릭출판사'를 통해 출간을 했으며
지금까지 8쇄, 1만 6천 권을 발행되었다.
가톨릭출판사 역사상 가장 많이 발행한 증언집으로 기록되고 있다.
(2) 2019년 5월 <끊임없는 내맡김 화살기도 성가> 모든 곡이
서울대교구 출판검열 위원회로부터, 출판 승인을 받았고,
화살기도문도 감수를 받았다.
<끊임없는 내맡김 화살기도 성가>
1. 사랑하게 하소서 (기존 내맡김의 화살기도1)
2. 내맡김의 화살기도 (기존 내맡김의 화살기도2)
3. 부족한 저를 통하여 (기존 내맡김의 화살기도3)
4. 주님 감사합니다
5.주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Ⅰ (김효근 곡, 송기창 노래/10개국어 화살기도 성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Ⅱ (김효근 곡, 이현주 노래)
6. Mio Padre.(나의 아버지)
(3) 2019년 10월 '가톨릭 출판사'에서 이 신부님의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
"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부" 이름으로 출판되었고
지금까지 4쇄, 9천 부를 발행하였다.
이 책은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부님들께서 해외 신자분들을 위해
영어로 번역해 주신 덕분에 22년 6월 말 영어 번역본이 출간될 예정이다.
4) 굿뉴스 소리도서 <딸랑 이거 하나로>, <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부>
서울 성동 장애인 복지관 녹음 봉사회의 녹음으로
<딸랑 이거 하나로 >는 2018년 12월 7일에
<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부>는 2020년 2월 29일에 굿뉴스 소리도서에 등재되어
지금까지 시각장애인 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신앙인들의 영혼에도
그들의 귀를 울리고, 마음을 울리고 있다.
10. 거내영의 하느님 체험 나눔은 코로나 팬데믹에도 멈추지 않는다.
2020년 11월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 의해 <온라인 화상 나눔>을 시작하였고
이 화상 나눔에는 서울대교구 신자들뿐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 또 해외 신자들까지
함께 하여 뜨거운 나눔의 장을 이루었고,
끊임없는 기도모임의 유튜브 채널에서도 하느님 체험의 뜨거운 증언들을 누구나 들을 수 있다.
온라인 특성상 교구를 망라한 이 화상나눔은 단체 사목을 관장하는
교구 행정지원팀의 허락과 지원을 받았다.
11. 맺음말
이번 '호(護) 거내영 이론'을 준비하면서, 다소 마음에 부담은 되었지만
끊임없는 화살기도를 하면서 아버지께 내맡겨드렸습니다.
거룩한 내맡김 영성 안에는 너무나 주옥같은 자료들이 넘치고 넘치는 가운데
외부의 반대세력에 당당히 맞설 자료를 이끌어주시는 대로 찾으면서
거룩한 내맡김 영성에 대한 더 깊은 자부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해욱 신부님의 복된 병으로 시작된 거내영의 지나간 발자취를 돌아보니
자랑스러운 거내영의 역사에 부족한 제가 함께 할 수 있음이
얼마나 아버지의 큰 축복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보조교사로서 아직도 너무나 부족한 저를 보여주셔서
더 많이 알고 익혀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으며,
또 새롭게 제 안에 거내영을 더 다져가는 시간을 주신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타이틀만 보조교사가 아니라 진정 예수님의 보조교사라는 자부심을 더욱 굳건히 하여
아버지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드리는 거내영의 사도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2022년 거룩한 내맡김 영성의 새로운 도약의 해를 맞이하면서
거내영을 통한 영혼 구원을 방해하는 영적 세력이 더욱 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더욱 더 거내영에 대하여 잘 알고,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무장하여
막가파 사도가 되어 외풍으로 부터 잘 지켜내겠습니다.
부족한 저를 이끌어주신 아버지께 깊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거내영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 홀로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첫댓글
8. 거내영은 하느님체험이라는 감성에 치우쳐 있다?
무형의 성전 마리아처럼에는 많은 영적 도서와 여러 사제들의 가르침, 심지어 뉴에이지 강사의 가르침으로 영적, 지적 지평을 넓혀 은총의 그릇을 키워가고 있다.
9, 나의 거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