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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대림4주일 다해 – 133위 003°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133위 003° ‘하느님의 종’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이름 :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출생 : 1751년, 양근 감호(楊根 鑒湖)(경기도 양평군·읍 양근리), 양반
세례 : 1784년 음력 9월(이승훈 베드로 집전)
사망 : 1791년 12월(50세), 杖毒死, 서울 또는 경기도
묘지 : ①양근 한감개(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②천진암(1981년 이장)
父 : 권암(權巖)[0.1]
母 : 풍산 홍씨(豊山洪氏)
妻 : 광주 안씨(廣州安氏)
丈人 : 안정복(安鼎福)[0.2]
스승 : 성호 이익(정약전·정약용·권철신·이벽 등과 1777년[정조 1]부터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천주교 교리 연구)
子 : 福者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福者 권천례 데레사
兄 : 권철신(1736-1801, 암브로시오)[0.3]
弟子 : 이존창 루도비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성오’(省吾), 호는 ‘직암’(稷菴)으로, 경기도 양근의 한감개(大甘浦, 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1]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은 그의 형이고, 1801년에 순교한 복자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은 그의 아들, 1819년 순교한 복자 권천례(權千禮, 데레사)는 그의 딸이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일찍부터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아 학문을 닦았으며, 장성한 뒤에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 안정복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천주 교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1784년 가을 이벽(요한 세례자)이 천주교 서적을 들고 그의 집으로 와서 머물며 교리에 대해 토론한 뒤부터였다. 이어 같은 해 겨울, 그는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 사도) 등과 만났고, 그 자리에서 동료들과 함께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는데, 이것이 조선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세례식이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이때부터 천주교 전파에 열중하여 자신의 가족들은 물론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친척과 지인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다. 또 명례방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열리던 집회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1785년 봄에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금리들, 곧 범법 행위를 단속하는 형조의 관원들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는 아들 권상문과 동료들을 데리고 형조로 가서 압수한 성상을 돌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이승훈 등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데 앞장섰다. 또 1786년 봄에는 그들과 함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1.1]를 수립하였고, 그 자신이 신부들 가운데 한 명으로 임명되어 약 1년 동안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가성직 제도의 잘못을 지적받고 이와 관련된 활동이 모두 중지되자, 그는 동료들과 함께 북경 교회에 밀사를 파견하고 선교사를 영입하는 데 노력하였다.[2]
1791년에는 전라도 진산에 살던 윤지충(바오로)이 제사를 폐지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고, 이어 신해박해가 발생하였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도 박해 직후인 1791년 11월 28일(음력 11월 3일) 천주교의 교주(敎主)로 고발되었다.[2.1]
조정의 명으로 체포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서울 형조로 압송되었으며, 12월 3일(음력 11월 8일)에는 그곳에서 일곱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섯 번째 진술에서 “천주교에서의 가르침이 도리에서 벗어나는 사악한 가르침이 아닌 이상 어찌 예수 그리스도를 사악하다고 배척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면서 굳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제주도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판결, 곧 유배 죄인의 거처에 가시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게 하는 판결을 받고 전옥서(典獄署)[2.2]에 수감되었다.[3]
이후에도 형조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유혹했지만, 그는 결코 여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12월 10일(음력 11월 15일)에는 갑자기 그가 ‘마음을 바꾸었다’는 상소문을 바친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형조에서는 이튿날 그 내용을 임금에게 보고하였고,[4] 임금은 그의 유배지를 제주도에서 충청도 예산으로 변경하는 동시에 10일 동안의 말미를 줌으로써 노모를 만날 수 있도록 판결하였다.[5]
그러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집으로 가서 노모를 만날 수 없었다.[6] 형벌 과정에서 얻은 장독 때문에 길을 떠나자마자 순교했기 때문이다.[7]
[註]__________
[0.1] 권일신의 증조부 권흠(權歆, 1644년 인조22-1695년 숙종21)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나(1693년 숙종 19) 갑술옥사(甲戌獄事, 1694년 숙종20)로 관직을 잃고 경기도 양근으로 낙향한다. 이후 조부인 진사 권돈(權敦)이며, 부친 권암(權巖)에 이어 여느 남인계 집안처럼 큰 벼슬 없이 실세하였다. 권일신과 그의 맏형 권철신도 벼슬을 포기하고 경학(經學) 공부에 열중하였다. 두 형제는 1759년(영조 35) 이익(李瀷)의 문하에서 기호남인계 학자들인 이병휴(李秉休), 안정복(安鼎福), 신후담(愼後聃), 홍유한(洪儒漢), 이기양(李基讓)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이익·이병휴의 사망 후에 형성된 권철신 녹암계(鹿庵系)에 이총억(李寵億), 홍낙민(洪樂敏), 이승훈(李承薰), 정약용(丁若鏞) 형제 등이 들어 왔다. 녹암계는 정통주자학을 비판하고 양명학 등을 깊이 탐구하며 자유로운 경전해석을 통한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학문을 탐구하다가 서학(천주교)에 이른다.
[0.2] 안정복(安鼎福, 1712-1791) : 숙종 말기에 태어나 정조 말기에 세상을 떠난 실학자. 조선 후기에 경기도 광주는 실학의 종장(宗匠)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문하에서 이벽, 정약용 등 근기 남인계 지식인들과 함께 수기치인(修己治人)·경세치용(經世致用)의 근기실학(根機實學)을 형성하였다.
안정복은 개혁파이면서도 성리학적 명분론을 중시했다. 그는 실학자 중 가장 앞장서서 서학(천주교)을 배격했다. 안정복이 내세운 천주교 반대 논리는 박해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안정복은 일찍이 40대 중반에 스승 이익을 비롯하여 이익의 제자이자 천주교 교인인 권철신에게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자신의 견해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73세(1984년)에 퇴직하고는 저술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면서 천주교에 대해 더욱더 날이 선 비판을 한다. 동문수학한 정약종과 사위 권일신, 사돈 권철신 등이 박해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천주교를 이론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안정복은 74세(1785년) 때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집필하였다. 현실 문제 해결을 주창하며 명분론을 중시하는 성리학자 안정복은 내세를 목표로 하는 천주교에 긍정적일 수 없었다.
당시 성호학파는 천주교에 대해 비판적인 안정복 계열과 수용적인 권철신 계열로 갈라진다. 안정복계를 성호우파, 권철신계를 성호좌파라 부른다. 안정복은 79세(1790년)에 그 품계가 가선대부(종2품)에 오르고, 동지중추부사로서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진다. 안정복은 80세(1790년)에 죽었다. 사후(순조 원년)에는 천주교를 비판한 공이 인정되어 자헌대부(정2품) 의정부좌참찬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총관이라는 벼슬에 추증되었다.
[0.3] 1791년 10월 윤지충이 자수하고 권상연이 잡히자, 권일신도 이승훈과 함께 서학책을 간행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승훈은 이미 배교했다는 변론이 수용되어 석방되었으나 관직은 박탈당했다. 권일신은 노모의 간청으로 회오문(悔悟文)을 지어 바쳐(하지만 이 상소문은 대필조작으로 보인다) 배교를 인정받고 제주도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형에서 예산 유배형으로 빠뀐다. 출발 전에 노모를 만나라는 열흘 말미를 받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출발 전인지 예산으로 이동 중인지 확실치 않지만, 1791년 12월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장독사(杖毒死)한다. 그의 맏형 권철신은 동생이 죽자, 그 충격과 슬픔에 빠져 10년 동안 칩거하였다.
[1]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15-16, 472; 안정복, 『순암집』, 6권, 여권성오일신서(與權省吾日身書), 임인; 『안동 권씨 족보』.
[1.1]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 1785년 3월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신자들이 체포되면서(을사추조적발사건),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인 이벽(李檗)은 죽고(1785.7.19.), 이승훈(李承薰)은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바쳐 배교하자 교회의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다.
1786년 가을, 사건이 가라앉자, 이승훈은 권일신 등과 함께 신자들을 결집하여 신앙생활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을 재결집하고 신앙실천을 강화하기 위해 ‘가성직제도’를 시행하였다. 이승훈이 미사와 견진성사를 집전해야 한다는 신자들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다른 10명의 신자에게도 미사를 거행하는 신부와 하급 성직 권한을 이승훈이 분배하였다. 신부는 이승훈, 권일신, 홍낙민, 이존창, 최창현, 유항검 등이 맡았으며, 주교와 하급 성직을 맡은 이는 누구였는지 알 수 없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신부로 구성된 사제단이 교회를 운영하고, 미사와 성사를 거행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고, 신자용 예절서와 교리서에 있는 설명을 참조하여 사제단을 구성했다.
임명된 신부들은 각자 자기 임지로 가서 설교하고, 미사와 각종 성사를 집전했다. 당시 미사는 여러 책과 시과경(時課經, 성무일도)의 내용을 참조하여 거행되었다.
신자들은 열성적으로 미사와 성사에 참여했고, 이를 통해 신앙을 전파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789년에는 신자 수가 1,000명이 될 정도로 교세가 성장하였다.
그런데, 유항검이 교리서(敎理書)를 자세히 본 결과 신부의 자격과 신부를 임명한 것이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하여 큰 의심을 품게 되어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주교님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문의하였다. 이승훈과 권일신은 가성직단 운용과 제사에 관한 문의 서한을 1789년 陰10월과 1790년 가을에 걸쳐 두 차례 권일신의 제자 윤유일 편에 북경 북당(北堂) 구베아 주교님에게 전달하였다. 1790년 10월 22일 윤유일이 가져온 구베아 주교님의 답신을 받자마자 가성직단을 해체하였다. 이때부터 ‘성직자영입운동’이 전개되는 한편, ‘조상제사’가 금지되어 양반 신자들에게 문제가 되어 1791년 ‘진산사건’이 촉발된다(달레 교회사 上, pp.322-329).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님이 사천(泗川) 대목구장 생 마르탱(Jean Didier de Saint-Martin, 馮若望, 1743-1801) 주교님에게 조선의 조상제사 문제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
“조선 교회에서는 지난 1790년 자신들이 궁금해하는 여러 가지 의문과 질문 사항들을 보내왔는데, 그중에 조상들의 신주를 만들어 모셔도 되는지, 또한 이미 모시고 있던 조상들의 신주를 계속 모셔도 되는지에 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1715년 교황 클레멘스 XI 칙서 ‘Ex illa die’(강경한’ 제사금지)와 1742년 교황 베네딕토 XIV 칙서 ‘Ex Quo singulari’(중국 儀禮 논의 자체를 금지 및 중국 내 선교사 교황칙서 준수서약)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하여 아주 단호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2] A. Daveluy, Ibid., ff. 16-34; 『추안 및 국안』, 1801년 2월 11일 최창현; 이만채 편, 『벽위편』, 2권, 을사추조적발; 『정조실록』, 33권, 1791년 11월 5.8일; 「조선인 Hiuen-chen(정약전?)이 이 베드로에게 보낸 서한의 사본」과 「이 베드로가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1789년 말경)」,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 소장 문서(SOCP 67, ff. 453-458).
[2.1] 폐제분주(廢祭焚主)로 ‘진산사건’을 일으킨 윤지충이 1791년 10월에 자수하고 권상연이 잡히자, 천주교를 공격하던 공서파(攻西派)인 목만중(睦萬中)과 목인규(睦仁圭) 등이 사발통문을 돌려 권일신을 천주교 교주(敎主)로 지목하였다. 홍낙안(洪落安)이 상소를 올려 권일신을 고발하여 1791년 11월 28일 체포하였다.
[2.2] 전옥서(典獄署) : 전옥서는 재판하는 과정에서 미결수를 구류하는 곳이었다. 전옥서 죄수들은 판결이 날 때까지 심리 장소인 형조와 구류 장소인 전옥서를 왕복해야 했다. 전옥서는 중부 서린방(瑞麟坊)에 위치하였는데, 현재 종로구 서린동 종각역 부근에 있었고, 형조는 현재 세종문화회관 앞 보도 위에 있었다. 전옥서에 구금되어 형조에서 재판을 받던 교우들은 형신(刑訊)을 받아 몸이 상했을 경우 전옥서와 형조가 멀어 삼복더위나 엄동설한에 왕복하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3] A. Daveluy, Ibid., ff. 42-44;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일곱 번째 문초 때 그는 “공·맹 유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천주 교리는 인간의 오륜을 어그러지게 하고 제사를 폐지하기까지 하며, 사람의 마음을 빠뜨리는 사악한 학문이다.”라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이는 형관들의 유도 심문에 따른 진술이거나 꾸며 낸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4]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옥중에서 작성했다는 ‘상소문’은 그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거나 형조 관리들에 의해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5] 『승정원일기』, 정조 15년 11월 12~16일;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12.16일. 정약용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바쳤다는 상소문을 ‘회오문’(悔悟文)으로 기록하였다(정약용, 『여유당전서』, 제1집 15권, 녹암 권철신 묘지명).
[6] 『사학징의』, 1권, 정법죄인질, 권상문; 정약용, 『여유당전서』, 제1집 15권, 녹암 권철신 묘지명; 이만채 편, 『벽위편』, 3권, 제죄인 처분.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옥에서 나온 뒤 이윤하(마태오)의 집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있다(A. Daveluy, Op. cit., f. 44).
[7] 순교한 뒤에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시신은 고향인 한감개 뒷산에 안장되었으며, 1981년에 발굴되어 천진암(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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