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듣건대, 세상의 걱정거리를 없애는 자는 반드시 온 세상의 복을 누리고 세상의 의리를 붙들어 세우는 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이 난다고 하였는데, 그 방법은 시세를 이용하여 기미를 살피고 재빨리 도모하는 데 있습니다.
아, 병자·정축년의 일은 하늘이 우리를 돌봐주지 않아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짐승같은 것들이 핍박해 와 우리를 남한 산성으로 몰아넣고 우리를 삼전도에서 곤욕을 주었으며, 우리 백성을 도륙하고 우리 의관(衣冠)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우리 선왕께서는 종사를 위해 죽지 아니하고 백성을 위해 수치심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피눈물을 흘리며 부끄러워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한번 치욕을 씻고자 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해가 여러 번 바뀌니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가 가득 찼습니다. 오늘날 북쪽의 소식에 대해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추악한 것들이 점령한 지 오래되자 중국 땅에 원망과 노여움이 바야흐로 일어나 오삼계(吳三桂)는 서쪽에서 일어나고 공유덕(孔有德)은 남쪽에서 연합하고 달단(韃靼)은 북쪽에서 엿보고 정경(鄭經)은 동쪽에서 노리고 있으며 머리털을 깎인 유민들이 가슴을 치고 울먹이며 명나라를 잊지 않고 있다 하니, 가만히 태풍의 여운을 듣건대 천하의 대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에 있는 나라로서 요충 지대에 처해 있고 저들의 뒤에 위치하고 있어 전성의 형세가 있는데도, 이때 군대를 동원하고 격서를 띄워 천하에 앞장서서, 그들의 세력을 가르고 마음을 놀라게 하여 천하의 근심을 같이 근심하고 천하의 의리를 붙들어 세우지 않는다면, 칼을 쥐고도 베지 않고 활을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쏘지 않는 것이 애석할 뿐만 아니라, 실로 우리 성상께서 유업을 계승하려는 마음이 우리 조종과 선왕을 감격시키거나 천하 후세에 할말을 남길 수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우리 신종 황제가 우리를 위해 천하의 병력을 동원하고 대부(大府)의 막대한 재정을 들였으며, 문관 무장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7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르다가 남해에서 군사를 거두면서 물불 속에서 건져내 편안한 자리에다 올려 놓았습니다. 멸망해 가려는 것을 일으키고 넘어지려는 것을 붙들어 세운 그 덕이 하늘처럼 끝이 없으니, 고금을 통해 속국으로서 중국에게 이처럼 힘입은 적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소경 대왕께서 힘으로는 은혜를 갚을 수 없고 사세 또한 조화에 수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종신토록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아, 마치 물이 만 번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향해 흐르는 것처럼 굳건한 뜻을 보이셨으며,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크게 써서 명나라 장사의 사당에다 붙여 두어 우리 자손과 신하들에게 뚜렷이 보이셨으니, 그 뜻과 계획이 또한 애절하고 원대하다 하겠습니다. 우리 인조 대왕께서 매달 초하루마다 절하고 슬퍼하신 일과 효종 대왕께서 조정에 임하여 탄식하시던 마음은 성상의 마음 속에 뚜렷하고 천지의 귀신이 실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아, 효종 대왕께서는 10년 동안 왕위에 계시면서 새벽부터 주무실 때까지 군사 정책에 대해 묻고 인사를 불러들여 사전에 대비하셨으니 어찌 북쪽으로 전진해 보려는 마음을 하루라도 잊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안배도 완전하게 하였으며 부서도 두기 시작했으나, 하늘이 순리대로 돕지 않아 중도에 승하하시어 웅장한 계획과 큰 뜻이 천추에 한을 남기고 말았습니다만, 이는 천명이 아직 이르지 않아 그런 것으로서 전하께서 근심해야 합니다. 선왕께서 크고 어려운 일을 남기어 뒷사람에게 주셨으니 우리 성상께서는 참으로 큰 뜻을 세우고 좋은 말을 널리 받아들여 하늘을 받들고 조종을 계승하며 유지에 따라 일을 해, 잔폭하고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고 큰 의리를 붙들어 세우며 큰 수치를 씻을 것을 도모하여 천하에 허물을 사과하고 천하의 복을 맞이해야지 구차하게만 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때는 쫓아갈 수 없으며 기회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시기를 이용하고 사세를 틈타 자신의 보존을 도모하는 것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志)에 ‘때가 이르렀는데도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도리어 어지러움을 당하게 되고 하늘이 주는데도 가지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오직 지금이 그러한 때입니다.
송나라 주문공(朱文公)016) 의 상소에 ‘신은 하루아침에 상제가 크게 노하여 초야에서 참람하게 난을 일으켜 의리의 기치를 들고 일어나게 하거나 오랑캐들이 밖에서 얕잡아보고 잘못을 추궁하려고 군사를 일으키게 할까 두렵다.’ 하였는데, 지금 오랑캐의 운수가 전환되어 오삼계가 난을 일으키자 중국 안이 뒤숭숭해졌으니 일역(日域)의 힘이 넉넉히 천하를 뒤흔들 수 있으며, 정인(鄭人)의 마음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스스로 수립하지 못하면 저들이 우리보다 먼저 채찍을 추켜 들고 우리를 나무라거나 혹은 광복이 된 날에 우리들이 그들과 협심하고 끝끝내 마음을 고쳐 먹지 않은 내막을 추궁한다면 비록 지혜가 있는 자라 하더라도 나라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정예로운 병력과 강한 활솜씨는 천하에 소문이 난데다가 화포와 조총을 곁들이면 넉넉히 진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병사 1만 대(隊)를 뽑아 북경을 향해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 등을 치고 목을 조이는 한편, 바다의 한 쪽 길을 터 정인과 약속해 힘을 합쳐서 심장부를 혼란시킵니다. 그러고는 연주(燕州)·계주(薊州)·요하(遼河) 이북 야춘(野春)의 모든 부서와 일역의 여러 섬, 그리고 청(靑)·제(齊)·회(淮)·절(浙) 등지에 격서를 전하고 서촉(西蜀)까지 알리어서 그들로 하여금 함께 미워하고 같이 떨치어 일어나게 한다면 그들의 교활한 마음을 놀라게 할 수 있으며 천하의 충의로운 기운을 격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혹은 그들 스스로가 추악한 것들을 서로 무찌르거나 혹은 개돼지 같은 것들로 하여금 웅거한 곳을 잃게 하여 사람들이 그들을 앞다투어 쫓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의려(醫閭)017) 에 가로질러 웅거하여 유주와 심양을 조여들면서 천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명령해 줄 것을 청하고 제실(帝室)을 붙들어 세운 주나라의 문공(文公)이나 환공(桓公)같은 역할을 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의 기강을 닦아 하늘에 보답하고 수치를 씻어 군부(君父)에게 보답하며, 조종을 빛내고 자손을 보호하며, 지난날의 허물을 지우고 앞으로 천하 사람들이 입을 화를 막으려면 이 일 말고는 다른 할 일이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주역》의 도리는 이로운 것으로써 의리를 조성하고 《춘추》의 의리는 패배하더라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때가 이르렀고 일도 할 만합니다만, 결단을 내려 실천하는 것은 성상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반드시 신의 말을 거듭해 읽고 깊이 유념하여 굳센 덕을 분발하고 신명한 도략을 펴서 마음에 결단을 내리시되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서 큰 계획을 정하며, 용맹한 장수를 등용하고 인걸을 두루 초빙하여 성상을 돕게 하되 망설임이 없게 하며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 대업을 끝마치소서. 그러면 실로 천하와 종사를 위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월, 嘉義로 자급이 오르고 부제학 겸 선혜청 제조가 되다. ○ 尹鑴가 北伐에 관한 책자를 올리니 民力과 時勢의 불가함을 이유로 반대하다. ○ 2월, 병조판서 겸 동지경연에 제수되고 훈련도감, 어영청 제조를 맡다. ○ 5월, 文衡이 되어 춘추관, 관상감, 교서관 제조를 겸하고 實錄廳 堂上이 되다. 李觀徵과 李同揆를 탄핵하다. ○ 윤휴가 주장한 戰車 제작에 반대하다.息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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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2권, 숙종 1년 2월 7일 을미 1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정언 이수경이 청대하여 상벌의 시비를 바로 할 것을 주청하다
정언(正言) 이수경(李壽慶)이 청대(請對)하여 기밀(機密)한 일이 있다 하였다. 먼저 전에 아뢴 것을 아뢰고, 또 말하기를,
"빈청(賓廳)의 제신(諸臣)은 파직하기만을 청할 수 없으나, 국구(國舅)가 중죄를 입으면 중전(中殿)께서 피전(避殿)하시는 일이 있을 것이라 하므로 말감(末減)161) 하여 논계(論啓)하였는데 끝내 윤허받지 못하였으니, 상벌·시비가 이처럼 문란하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남구만(南九萬) 등의 일은 더욱이 해괴하거니와, 근일 실지(失志)한 무리가 이 말을 만들어 내어, 오늘날의 거조(擧措)가 모두 환시(宦侍)의 말을 따르는 데로 돌아갔다 하여 뒷날 송시열(宋時烈)이 번안(翻案)162) 할 계책으로 삼으니, 어찌 흉험하고 참혹하지 않습니까? 또 정유악(鄭維岳)은 반복(反覆)하는 사람입니다. 윤선도(尹善道)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또 송시열에게 붙었으니, 그 사람됨이 이러합니다. 정재희(鄭載禧)가 아뢴 것은 더욱이 매우 형용할 수 없어서 수놈이 부르면 암놈이 화창하는 것이 마치 참으로 사실이 있는 듯이 하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신은 권간(權奸)을 배척하되 용납하는 바가 없이 하여 뒷날 왕장(王章)·조조(晁錯)가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급암(汲黯)의 충성이 되야 하지, 어찌 왕장·조조가 되겠는가?"
하였다. 이에 앞서, 이수경이 상소하여 ‘한선(漢船) 열 두 척이 해서(海西)의 은율(殷栗)에 와서 정박하였다는 말을 김효증(金孝曾)에게서 들었다.’고 아뢰었으나, 김효증이 그때 평안도의 수막(帥幕)에 있었으므로 유혁연(柳赫然)이 김효증과 은율현(殷栗縣)에 물었더니, 다들 본디 이 일이 없었다고 하였는데, 이수경이 말하기를, ‘그 말을 바꾸는 것이 이렇게 믿을 수 없다면, 적의 배가 바닷가에 와 닿더라도 누가 이 지극히 위태로운 말을 알리려 하겠는가?’ 하였다. 대개 이수경은 윤휴(尹鑴)의 북벌(北伐)하자는 의논에 부회(附會)하였는데, 그가 말한 적의 배에 관한 일이 헛소리가 되었기 때문에 이 공동(恐動)하는 말을 하였다. 그 이른바 기밀한 일이라는 것이 이것인데, 또한 겉으로 나라를 위하여 깊이 염려하는 것이요 오로지 제신을 죄주기를 청하기 위하여 청대(請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려는 뜻이기도 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말한 것은 나라를 위한 지극한 정성이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으나. 김수흥(金壽興)·남구만 등의 일은 이수경이 힘껏 아뢰어도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임금이 승지(承旨) 권대재(權大載)에게 말하기를,
"예(禮)를 그르친 송시열은 이미 논죄(論罪)하였거니와, 윤선도에게는 의정(議政)을 추증(追贈)하라."
하였는데, 이튿날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윤선도의 소(疏)는 예만을 논하였을 뿐이 아니라, 쓸데없는 말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고, 장령(掌令) 오정창(吳挺昌)이 말하기를,
"쓸데없는 말이라는 것은 송시열의 허물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하고, 허적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을 보도(輔導)하지 못하여 함궐(銜橛)의 근심163) 을 가져왔다는 것을 송시열의 죄안(罪案)으로 삼았으니, 어찌 쓸데없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증직해야 마땅하기는 하나, 의정은 너무 지나칩니다."
[註 163] 함궐(銜橛)의 근심 : 말이 사나 와서 재갈이 벗겨지고 굴대가 부러져 수레가 전복하는 화환(禍患).
蓋壽慶附會尹鑴北伐之議, 而渠所云敵船事, 歸於虛謊, 故爲此恐動之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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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2권, 숙종 1년 2월 9일 정유 1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허적·윤휴 등을 불러 자강하는 방책·영칙하는 복색 등을 논의하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윤휴(尹鑴)·호조 판서(戶曹判書) 오정위(吳挺緯)가 청대(請對)하니, 허적(許積)도 같이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윤휴가 또 전에 말한 것을 아뢰고 배칙(拜勅)하지 말 것을 청하여 허적·오정위와 서로 비난하였는데, 그 말은 크나 마땅한 것이 없었다. 오정위가 말하기를,
"신이 전에 윤휴에게 묻기를 ‘영칙(迎勅)할 때에 위에서 배례(拜禮)하신다면 그대는 어떻게 자처(自處)하겠는가?’ 하였더니, 윤휴가 답하기를 ‘주상께서 내 말을 따르지 않고 마침내 무릎을 꿇으면 내가 어떻게 홀로 배례하지 않겠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이러하니, 접때의 학자 【송시열(宋時烈) 등을 가리킨다.】 보다 훨씬 낫다.’ 하고 서로 농담하였습니다."
하고, 허적이 말하기를,
"이제 나가 맞이하지 않으면, 저들이 의심을 낼 것입니다."
하고, 윤휴가 말하기를,
"의심을 내서 군사를 동원한다면 바로 기회를 타기 좋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스스로 10만의 정병(精兵)이 있고 양서(兩西)의 식량도 쉽게 장만할 수 있으므로 열흘이 못되어 심양(瀋陽)을 차지할 수 있고, 심양을 빼앗고 나면 관내(關內)가 진동할 것이니,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염려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대개 윤휴는 겉으로 되[胡]를 친다는 이름을 빌어 다시 벼슬길에 나왔으므로 굳이 이런 고담(高談)을 하여 남의 이목을 가렸으니, 참된 말이 아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강(自强)하는 방책은 먼저 강구해야 하겠으나, 이제 나가 맞이하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의심을 낼 것인데, 뒷날의 근심을 어떻게 수습하겠는가?"
하니, 윤휴가 말하기를,
"지금 밖으로는 세 가지 일이 있는데, 북벌(北伐)이 첫째이고, 바다를 건너 정(鄭)165) 과 통하는 것이 둘째이고, 북(北)과 화호(和好)를 끊는 것이 세째이며, 안으로는 숙위(宿衛)를 엄하게 하는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무릇 이 몇가지를 서둘러 꾀하지 않으면, 화환(禍患)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칙(迎勅)할 때에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
하매, 허적이 말하기를,
"영칙할 때에는 흑색포(黑色袍)를 입고, 조제(弔祭)할 때에는 최질(衰絰)을 입고, 사사로이 만날 때에는 백포(白袍)을 입는데, 듣건대 중국 사신을 만날 때에는 사사로이 만나더라도 감히 백포를 입지 못한다 합니다."
하고, 윤휴가 또 말하기를,
"흑색포를 입고 견양(犬羊)에게 절하면 어떻게 이 뜻을 존양(存養)하겠습니까? 이것은 따르지 않으면 오히려 저들이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허적이 말하기를,
"이것도 오활(迂闊)한 말입니다."
하여, 곧 흑색포로 정하였다. 이날 윤휴와 허적이 변론(辨論)할 때에 언사(言辭)가 모두 격하였다. 임금이 오정위에게 말하기를,
"소현궁(昭顯宮)에서 바친 황금(黃金)도 내어 주라."
하매, 윤휴가 말하기를,
"이는 성상의 아름다운 뜻이기는 하나, 만금(萬金)의 중보(重寶)를 한꺼번에 내어 주면 그들도 어찌 간수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5,6백냥을 주고 해마다 조금씩 이어서 주는 것이 곧 그들을 위하여 멀리 염려하는 방도이며, 또 나라의 저축이 다 비었을 때에 그것으로 국용(國用)을 돕는 것도 괜찮습니다."
하고, 허적이 말하기를,
"이것은 몰수한 재물이 아니라, 인조(仁祖)께서 그것을 둘 곳이 없기 때문에 호조(戶曹)에 두셨고, 효종(孝宗) 때부터 미두(米豆)로 바꾸어 주셨으니, 대개 연장(年長)하기를 기다려서 내어 주려 하신 것입니다. 국가가 가난하더라도 어찌 그 물건을 빌어 쓰겠습니까? 내어 주어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서 처분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겠습니다."
"북경(北京)에 잘못 전해진 말로 조선(朝鮮)이 정금(鄭錦)과 합세하고 있다는 설이 있어 서로들 놀라 동요를 일으켰다가 신들을 보고서야 그 와전된 말이 비로소 멎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금을 혹은 정경(鄭徑)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창이 아뢰기를,
"‘금’과 ‘경’이 중국 발음으로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들리는 말로는 북경에서 팔월에 대군을 동원하여 오삼계(吳三桂)를 공격하는데 청국 군대 11만 명, 몽고 군대 1만 5천을 동원, 황제가 직접 정벌에 나선다고 했는데 꼭 그렇게 할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고, 오삼계가 주씨(朱氏) 자손을 옹립했다는 설도 문보(文報)에는 나와 있지 않아도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상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