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건과 인물로 본 조선왕조 이야기 3
정도전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다
1342년 경상도 봉화의 향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 정운경鄭云敬이 과거에 급제 후 중앙 관료가 되었다. 집안이 가난했다.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서 이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1살에 과거 급제 후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며 신진사대부로서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듯 했다. 25살 때 부친상을 당했는데 조문 온 정몽주가 <맹자>책을 선물했다.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위민사상이 이 때 싹트지 않았나 생각된다.
중국대륙은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등장하는 시기. 고려조정은 원나라와 교류를 할 것인가 떠오르는 별 명나라와 교류를 할 것인가를 두고 대립했다. 이인임, 경복흥 등 권문세족들은 원나라와 정도전, 이숭인, 권근 등 신진사대부들은 명나라와 관계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1375년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이인임과 경복흥은 정도전에게 강제로 명나라 사신을 대접하라고 했다. 강직한 정도전이 순순히 따를 리 만무했다. “만약 나에게 원나라 사신을 접대하라면 목을 베어오거나 포박해서 명나라로 보내겠다”고 맞받았다. 돌아온 결과는 유배형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염흥방이 회유를 했다. “곧장 유배지로 떠나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봐라” 정도전은 “내 의견도 나라를 위한 것이지만 시중 경복흥의 의견은 왕명을 대리한 것이니 따르는 것이 도리”라 하고 미련 없이 떠났다. 부러지더라도 휘어지기는 싫었던 것이다.
그의 품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권근, 이숭인 등과 교제하면서 인생의 즐거움에 대해서 논하는데 이숭인은 “조용한 산방에서 시를 짓는 것”이라 했고, 권근은 “따뜻한 온돌에서 화로를 끼고 앉아 미인 곁에서 책을 읽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꼽았다. 이에 정도전은 “첫눈이 내리는 겨울날 가죽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평원에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문과 출신인 그에게 무사의 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유배지에서 감흥感興이란 시를 지었다.
久客尙絺綌(구객상치격) : 오랜 나그네 신세라 여름옷 입었는데 北風凄以涼(북풍처이량) : 북풍은 차고 싸늘하기만 하여라. 團團寒露至(단단한로지) : 방울방울 차가운 이슬이 내리니 蘭枯謝幽芳(란고사유방) : 난초가 말라 그윽한 꽃다움이 운다. 悠悠關山遠(유유관산원) : 관산이 아득히 머니 行行道路長(행행도로장) : 가고 또 가도 길은 길기만 한다. 何以卒歲晩(하이졸세만) : 어떻게 늦은 해를 마칠까 歲晩多繁霜(세만다번상) : 해가 다하면 서리도 많으리라. |
반원투쟁을 하다 유배 중 사망한 박상충을 위한 제문을 지었다. 강직하고 반골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의를 위해 죽는 것이 자신의 신념이었다. 유배 전에 염흥방의 회유도 아랑곳 하지 않고 훌쩍 떠났던 사례가 말해 준다.
유배생활을 하면서 나주 부곡마을 사람들과 농사짓고 막걸리 마시면서 백성들의 실상을 확인했다. 내심 국가개조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당시의 심경을 <답전보答田父>를 통해 말하고 있다. 밭에서 손에 호미를 들고 김을 매는 농부가 정도전의 죄목을 추측해 가는 형식을 빌려 조정 벼슬아치들의 삶을 비판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암시하는 내용이다.
호미질 하는 농부는 정도전을 일상적인 잡범 수준에서 국가를 좀 먹는 부패한 관료라고 단정하듯 심문하고 있다. ①하급공무원으로서 부패②군인이 공갈쳐 상급자 신임 받으려다 유배 ③전장에서는 국민생명 죽이고 국가대사 그러 치는 장수 ④고위 공직자가 되어 아부하는 놈 좋아하고 바른 선비 밀어내는 모사꾼 ⑤국가의 법률을 아전인수식으로 들이대면서 잇속만 챙기는 부패한 관료. 노인은 예상을 뛰어넘어 강직한 선비들의 삶을 예로 든다. 힘이 부족한 것도 모르고 큰소리 치고, 때도 모르고 직언하기를 좋아하고 지금에 있어 옛날 것 숭상하고 밑에 있으면서 윗사람 뒤받기 좋아하고 모든 죄 다 짓고 유배형에 처한 거 보니 참 형벌이 가볍다는 평가까지 하는 것을 보고 정도전은 예사 노인이 아님을 직감했다. 도가계열의 장저와 걸닉을 끌어들이니 세상을 피하는 선비인 것이 분명했다. |
정도전은 덥석 주저앉아 수업을 청해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달랐다. 나는 농사지어서 가족 먹여 살리고 세금 낼 테니 정치는 너희들이 알아서 잘 하라는 경고성 메시지였다. 세상을 등진 은자의 길을 갈 것인가? 유학자의 비조인 공자처럼 힘든 백성들을 새나 짐승의 무리처럼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사명감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결론은 고려 백성들의 힘든 현실을 체험하면서 도道가 없는 세상 구제하여 전傳하는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그를 유배 보낸 이인임 일파는 백성들로부터 토지를 뺏고 양민의 신분을 노비로 만들고 관직을 돈으로 팔고 사는 부정을 저지르며 호의호식했다.이에 대항하는 정도전은 과거에 급제는 했지만 지방, 향리라는 굴레를 안고 있었다. 중앙의 권문세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위치.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사상적 무장이 필요했다. 그의 사상의 근본은 성리학이다. 그저 성性과 리理를 가르는 철학적 사유나 자구字句에 얽매이는 서생의 삶이 아니라 수기치인修己治人-자기를 수양한 후에 남을 교화시킴-의 경세론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접근하여 오직 백성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양극화를 해소하는데 관점을 두었던 것이다.
송나라의 재상 범중엄이 말한 “천하의 근심은 먼저 자기가 안고 천하의 즐거움은 마지막에 취”하려는 공직관을 가지고 세상을 개조하여 구제하고 싶었다. 3년의 유배형은 풀렸지만 그를 받아주는 사람이 없어 영주, 제천, 한양을 거치면서 한양의 삼각산 아래에서 삼봉재를 짓고 후진들을 양성하는데 그마저도 자유롭지 못해 쫓겨났다. 김포, 부평으로 옮겨 다니는 집 잃은 개 같은 신세가 되어 절망과 고통 속에 8년의 세월을 보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던가, 그에게 기회가 왔다.
1383년 가을, 정몽주의 주선으로 이성계를 만났다. 1335년생의 이성계, 1337년생 정몽주, 1342년생 정도전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특히 정도전과 이성계는 지방출신의 한미한 가문이라 동질의식을 더욱 느낀 것이다. 이성계의 함경도 함주(함흥) 동북면 군영으로 찾아가 엄숙하고 정제整齊된 군대를 보고 말했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성계는 넌지시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했다.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며 얼버무렸다. 이후 두 차례정도 둘은 만났다. 무슨 말이 오갔을까. 아마도 역성혁명의 꿈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정도전은 이성계를 만나고 난 후 9년 만에 복직되어 정몽주가 명나라 사신으로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면서 공직에 다시 발을 들여 놓았고 돌아와서는 성균관 사예가 되었다가 1387년 외직을 신청하여 남양부사가 되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이후 성균관 대사성에 올라 후진을 양성하고 권력의 기틀을 다지면서 조준과 전제개혁을 하며 혁명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허수아비 공양왕도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 이성계를 경계했다. 회군이후 이색의 제자들은 3갈래로 분파가 생겼다. ①혁명을 요구하는 정도전, 윤소중. ②고려왕조의 재건을 요구하는 정몽주. ③온건파 권근과 하륜.
1391년 우왕, 창왕을 옹립한 죄로 이색, 우현보를 탄핵하려던 계획이 노출되어 역으로 정도전이 탄핵되었다. 공신녹권을 박탈하고 봉화,나주로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었다. 1392년 황주에서 사냥하던 이성계의 낙마 사고를 계기로 정국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자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와 정몽주를 척살하면서 정치, 경제, 군사의 실권을 다시 쥐게 되었다.
새 왕조의 개창에 따라 1392년 7월 28일 이성계의 <태조즉위 교서>를 작성하여 백성에게 반포했다. 교서에서 왕위에 오르게 된 경위를 밝히고, 우선 급격한 변혁으로 초래될 정치적⋅사회적 불안을 줄이기 위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는 고려의 것을 모두 그대로 따른다.”고 선언했다.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한 조치인 셈이다.
1393년 건국 왕조의 덕업을 칭찬하는 문덕곡文德曲을 지었다. 태조 이성계를 중국 전설상의 성군인 요순임금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1394년 병권을 장악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군사훈련으로 진도陳圖를 가르쳤다. 변중량이 비판하고 나섰다. 권력의 집중을 경계한 것이다.
1394년 조선경국전의 편찬했다. 1394년 3월에 국가 경영을 위한 기본적인 통치전범典範을 마련하기 위하여 주례周禮의 ‘육전체제六典體制’를 바탕으로 조선의 실정에 적합하게 편찬한 법전서이다.
1396년 한양도성을 설계했다. 인왕산 백악산 등 사산(四山)을 측량하여 도성의 범위, 궁궐과 사직을 정하고 법궁인 경복궁과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등 총 규모는 390칸으로 설계했다. 도성 8대문과 한성부 52방의 이름을 지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 숙정문(肅靖門 북문)이다.유학의 인의예지를 상징한다.
명나라와의 외교 서한에 대한 표전문사건이 발생해 정도전을 소환하라는 위기까지 초래했다.각기병 등 이유로 가지 않고 잠시 관직에서 발을 내려놓았다.
1398년 불씨잡변을 저술했다. 근본적으로 출가를 하면 인간의 최악이라 보았고 겉으로는 불교의 배척이지만 이면에는 불교가 가진 재산을 뺏어 통치자금으로 사용하려는 목적이었다.
이해 8월 9일 삼군부(국방부)를 설치하고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집중화를 통한 군권 장악을 시도했지만 왕족이 된 이방원 군사들까지 완전히 혁파하지 못했다.
왕세자 책봉에서 정도전은 방원을 배제하고 방석을 세우면서 반감을 품게 되었고, 둘은 불교를 억압하고 사병을 혁파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지만 각론에서 생각이 달랐다. 정도전은 요동정벌이라는 명분으로 서둘러 사병을 없애자는 것이고 방원은 자신의 권력을 장악 후에 사병을 혁파하려는 의도였다. 권력구조에서도 재상(신권)중심의 정치를 펼치자는 정도전과 왕권중심의 이방원은 생각의 출발점이 달랐다. 재상중심의 정치는 의정부를 통해 6조를 관할한다. 6조의 의견이 의정부를 통해 임금에게 전달되므로 재상의 권한이 강화된다. 강화된 재상은 사헌부의 제재를 받는다는 것이다. 실과를 누가 가져 갈 것인가 의 싸움이 되었다. 혁명을 정도전의 머리로 한 것이냐? 이방원의 손발로 한 것이냐?
1398년8월26일 새벽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비밀리에 모의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이유로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 들였다. 이 때 박포가 이방원에게 정도전이 음모를 꾸민 것이다. 선제조치를 하지 않으면 화를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씨 소생의 이방원 형제들은 8월 25일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조준, 하륜, 박포, 이지란 등이 군사를 동원했다. 도망간 일당을 찾기 위해 남은의 집으로 쳐들어가 정도전을 죽였다. 도전은 죽으면서 <자조自嘲>라는 시로 심정을 밝혔다.
操存省察兩加功 (조존성찰량가공)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기에 한결같이 공력을 다 기울여 不負聖賢黃卷中 (불부성현황권중) 서책 속에 담긴 성현의 교훈 저버리지 않았다네. 三十年來勤苦業 (삼십년래근고업)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쉬지 않고 쌓아온 업적 松亭一醉竟成空 (송정일취경성공) 송현방 정자에서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
돌이켜보면 정도전의 삶은 10년 주기로 변화를 가져왔다. 21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고 34살에 중앙관료들과 의견차이로 유배의 길을 걸으면서 좌절을 맛보았고 42살에 이성계를 만나서 혁명적 사고를 현실화 시키는 발판을 마련했고 52살에 조선건국의 틀을 만들고 57살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국가경영의 핵심은 재상론과 간관론이다.
먼저, 재상론은 모든 정치권력은 재상으로부터 나온다. 왕이 능력있고 청렴한 관리를 선발하여 재상으로 임명하고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보았다. 왕은 어리석을 수도 어질지 못할 수도 미치광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피해는 온전히 백성들이 보는 것이다. 권력은 재상에게 있고 왕은 단지 존재할 뿐이라는 그의 사상은 17세기 서구의 입헌군주제 원칙인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와 일맥상통한다. 그런 면에서 정도전의 생각은 서구에 비해 2세기나 앞서 있었다.
다음은 간관론이다. 언론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언론이 정치를 비판하지 않으면 부패한다. 간관은 지위는 낮지만 재상과 동등하다고 보았다. 젊고 강력한 성품의 간관과 유능하고 청렴한 재상이 통치하는 나라를 구상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백성이 근본이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는 백성이 근본인 위민정치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백성들이 먹고 남을 만큼의 곡식과 입고 남을 만큼의 의복을 소유하여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녀를 기르는데 부족함이 없고 예의를 알고 염치를 아는 나라. 여유와 행복의 범주를 설정해 주는 위민의 정치. 제나라 관중도 같은 주장을 했다. 모두 다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그가 우리에게 물려주는 유산은 정치인은 민본과 위민의 자세로 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민본과 위민정치는 세종 대에 이르러 빛을 보았다. 군주가 민심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가는 1506년 중종반정과 1623년 인조반정이 말해 준다.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 오늘날 정치를 하는 사람은 양극화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진지하게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온순한 선비의 기상과 늠름한 재상의 풍채를 갖춘 그는 현실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조선왕조를 세워 체제변화에는 성공했으나 1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투쟁에서 밀려 실패한 개혁가로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