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부(李萬敷,1664-1732) 본관 연안(延安). 이재(李栽), 이형상(李衡祥) 등과 교유. 남인(南人) 학자(學者).
1697년 尙州 魯谷 息山 아래에 자리를 잡고 거하다
1710년 증조부 李襑이 거하던 聞喜 華陰山 아래로 옮기어 저술과 편찬에 몰두하다.
1712년 다시 尙州 魯谷으로 돌아오다.
1714년 魯谷精舍가 화재로 불타자 북쪽에 天雲堂을 짓다.
1721년 金陵 蟾峯(섬봉)으로 옮기고 〈遷寓對〉, 〈遷居八首〉 등을 지어 뜻을 밝히다.
1722년 魯谷으로 돌아와 時習齋와 升室을 짓고 기거하다.
1732년 12월 18일, 병으로 時習齋에서 졸하다.
※식산선생께서 지은 장암기(藏菴記)라는 글을 살펴보니 금릉 섬봉(기동)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자료를 종합해 볼 때 금릉 섬봉은 (현 지명 <기동>) 으로 보여 집니다. 다만 기동이라는 지명과 섬봉이라는 연관성의 접목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더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48> 이만부의 실학사상
이만부는 숙종대 청남의 핵심인 좌참찬 이관징(李觀徵)의 손자요, 남인의 맹장인 예조참판 이옥(李沃)의 아들이다. 연안이씨 명문 출신이다. 숙종대는 서남당쟁이 심해 아버지 이옥은 1678년(숙종 4) 선천(宣川)으로부터 시작해 12년간 정주(定州)·가산(嘉山)·안령(安寧)·회령(會寧)·갑산(甲山)·곡성(谷城) 등을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다가 1689년(숙종 15)에 겨우 방면되었다. 이를 본 이만부는 7-8세에 이르러 "정주(程朱)의 학문을 배워 도학을 밝히겠다"고 하고 벼슬길을 포기했다. 이에 할아버지 이관징은 가지고 있던 내사본(內賜本) 성리학책들을 모두 이만부에게 주었다. 그리고 25세 때에 아버지에게 과거(科擧)를 포기하고 공부만 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리하여 서호(西湖: 현 서강) 족한정(足閒亭)에서 유학 연구에 전렴했다. 그는 외고조부인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의 실학사상을 이어받고, 윤휴·허목 등 청남학자들의 수사학(洙泗學)을 이어받아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형인 이잠(李潛)·이서(李漵) 등 기호남인계 학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특히 이익에게 자기의 학문을 이어받을 것을 부탁하고 죽은 뒤에 자기의 행장을 그에게 지어달라고 했다.
이만부는 34세 되던 1697년(숙종 23) 늦가을에 선대의 연고지인 상주 노곡(魯谷)으로 내려가 은거했다. 상주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그의 후취부인은 퇴계학파의 종장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증손녀였다. 그러니 이만부는 퇴계학파의 기호계에 속하는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학문에 있어서는 당파와 학통을 초월했다. 그는 천도유경설(天道有敬說)을 지어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의 인정을 받았으나 퇴계설과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학통의 배격을 받았다. 45세(1698) 에는 조선의 <성리대전>에 해당하는 '도동편'(道東編) 을 지어 율곡학설을 넣었다는 이유로 동료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리하여 47세(1710)에는 문경의 화음산(華陰山) 청화동(靑華洞)에 숨어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 학설을 총 정리한 <지서>(志書) 15권을 지었다.
그러나 이만부는 58세 되던 1721년(경종 1)부터는 금릉(金陵) 섬봉(蟾峰)으로 옮겨 소신껏 살기로 결심한다. 그해 10월 그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모신 서원인 덕천서원(德川書院)의 원장을 5년간 맡았다. 남명의 실천철학에 공감해서이다. 그리고 탕평론자인 경상감사 조현명(趙顯命)을 도와 낙육재(樂育齋)의 절목을 만들고 상주향교의 도훈장(導訓長)을 맡는 등 흥학에 앞장섰다. 그의 실천실학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만부는 18세기 남인 실학자로서 당파와 학통을 초월해 실천실학을 일으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미진하다. 앞으로 정치한 연구가 필요하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遷寓對 / 이사를 하면서
李子居商山旣二十有餘年。將遷于金陵之蟾峰。上之元年辛丑季春也(1721년 3월)。有學者見焉曰。先生盡室而行。不有難乎。曰。吾有弊妾。一子一婦。二女子子。二小孫。簞一瓢一。可佩。篋一簏一。可擔可戴。琴一。孔氏傳一軸。可掛鞍頭。餘無葢積無貯蓄。不用車舟。卽如隕虛然已。曰。先生果行焉。其意何居。曰。無也。曰。無意而行乎。曰。無者謂不由乎我。故我無所容也。曰。奚不由我。曰。有使之者也。孰使之也。曰。天使之也。天使之如何。曰。凡莫之爲而爲。莫之致而致者。皆天也。天道運行。播分萬物。萬物流轉。動而不息。往而復續。旣極則變。變則化。變化無竆。終始宇宙。始爲終之終。終爲始之始。終始無端。夫豈有滯於一隅。限於一時。以無所變易者也。人與物囿于大化。物莫知其然而然。惟人最靈。神發知矣。乃於其間。自私用智計較避就。巧者負而拙者羨焉。夸者張而愚者泥焉。不知天命。惟意適莫。君子則不然。時止時行。乘流而往。遇坎而止。其大者。竆則獨善以求其志。達則行道。兼濟天下。小而至於一動一靜一止一行。利害得失。莫不有義。順受其命。余生長京國。三遷而居西湖。流而止大嶺之南。旣卜魯谷而復入華陰。三年而歸魯。魯圮而改築于北郭。又三年。凡人情懷土。余豈獨無。而席不煖突不黔。迨類古先貧瘁困頓。踽踽獨立。豈非天乎。詩云。昊天曰明。及爾遊衍。昊天曰朝。及爾出往。其於天何。子何不質諸前而疑乎今也。曰。然則先生將上食枯壤。下飮黃泉。離羣索居。遊於象外者與。曰。否否。金陵土膏潤。厥田惟上上若中。借人分耕。與墾淺薄。致力勤動。猶不償種者。不侔矣。且假人亭閣一區。有山川之勝。可以曠懷。金陵。亦人士之藪。可與周旋評論。有所相長也。曰。先生素食不飽。衣不輕煖。生業。商與金固等爾。至於亭閣者。是人之物也。一時假居。何能自有乎。曰。子何見之小也。夫仁者。以天地萬物爲吾一體。故曰仁者樂山。智者樂水。是以。凡峙焉者皆吾山也。流焉者皆吾水也。繇是則風月吾。煙雲吾。花吾鳥吾。四時變態無非吾。而惟亭人也。苟徒以嶙峋爲山。沄泓爲水。刁刁皓皓。爲風爲月。淡淡郁郁灼灼嚶嚶。爲煙雲花鳥。則是山人水人。風人月人。煙雲人花鳥人。而惟亭我也。我得其裏。人得其表。我有其多。人有其少。子何必以假爲嫌乎。曰。先生屢遷其居。古人亦有行之者乎。曰。孔子主顔濁鄒,蘧伯玉於衛。主司成貞子於陳。以周流天下。孟子以從者數百人。遊於齊梁滕鄒之間。太史公留滯周南。韓昌黎就食於江南。邵康節欲居洛。而洛人爲之築園。朱先生旣南遷。而若寒泉若雲谷若武夷累遷而卜焉。彼羣聖人賢人君子。道德葢天地。文章爭日月。功業垂後世。尙不免流離卒老于行。矧以下品處斯世之末流乎。於是。學者拜曰。先生行矣。小子亦從此逝矣。
前年少遷金陵蟾峰。人或疑之。作此文以解之。非直爲一時發。葢人生世間。其行止難必。有如此者也。今年又爲疾病事故所迫。還尋舊寓。商山與金陵。俱非我故園。不可以久戀而以不久忘也。噫。明年復將何之乎。又將復爲蟾峰乎。抑將仍居商乎。又老死于商乎。又流離乎南北東西不定乎。皆不可知。所謂天者命之。豈容人哉。惟可觀象而翫辭。觀變而翫占。存乎大易。勉之哉。戒之哉。亂帙中見前說。竊有感焉。遂著于篇。
遷居 八首
有突不暇黔。유돌부가검 /
有席不暇煖。유석부가난 /
我亦有畏朋。아역유외붕 /
會遇隨長短。회우수장단 /
瑣屑宿有處。쇄설숙유처 /
降衷所可亶。강충소가단 /
如何數數徙。여하수수사 /
觸境成憂懣。촉경성우문 /
遙遙轉南轅。요요전남원 /
眷焉謝侶伴。권언사려반 /
平生㓗凈地。평생결정지 /
抵死結不散。저사결부산 /
堂堂男子身。당당남자신 /
何耐久褊迫。하내구편박 /
百爾孰所尸。백이숙소시 /
夙駕循遠牧。숙가순원목 /
林嶂與合沓。림장여합답 /
脫脫有所適。탈탈유소적 /
昭光曖未敷。소광애미부 /
大颶簸坤軸。대구파곤축 /
衆竅相吐呑。중규상토탄 /
氣候變川陸。기후변천륙 /
未畢杞國憂。미필기국우 /
漠漠仰蒼極。막막앙창극 /
張翰秋思吳。장한추사오 /
邵子晩居洛。소자만거락 / 소강절은 만년에 락강에 살았네.
各有所適韻。각유소적운 /
萬事俱廓落。만사구곽락 /
惟有不繫舟。유유부계주 /
汎汎靡所薄。범범미소박 /
誕爾水雲區。탄이수운구 /
晩計隨耕牧。만계수경목 / 늙어서 농사짓고 가축키우니
旅人短功用。려인단공용 / 여행은 작은 노력으로 쓰이네.
契活甘寥寂。계활감요적 /
不私春無限。부사춘무한 / 모두에게 봄은 끝 없이
迎我萬山碧。영아만산벽 / 나를 맞이하는 만산이 푸르네
匣中三尺吼。갑중삼척후 /
篋裏萬軸藏。협리만축장 /
婉娩隨所之。완만수소지 /
孤衷到可量。고충도가량 /
天餉獨不貧。천향독불빈 /
好春以相當。호춘이상당 /
靑圍後前山。청위후전산 / 푸르름이 앞 뒤의 산마다 둘러있고
出雲簷底翔。출운첨저상 /
巷深散草木。항심산초목 /
各各含澤芳。각각함택방 /
曠然凭泬㵳。광연빙혈료 /
黃元欲自觴。황원욕자상 /
條嘯坐深夜。조소좌심야 /
未覺零露瀼。미각령로양 /
端居時序晩。단거시서만 /
高蟬蛻淸陰。고선세청음 /
遲暮卷舒志。지모권서지 /
直願學其瘖。직원학기음 /
細瑣林間雀。세쇄림간작 /亂噪亦何心。란조역하심 /
回頭見唐虞。회두견당우 / 머리 돌려 당우시절 살펴보니
宇宙多古今。우주다고금 / 우주는 예나 지금이나 많네.
采撤商嶺芝。채철상령지 / 상령(상주)에서 지초 캐는 것을 그만두고
偶傍鑑水潯。우방감수심 / 감수 깊은 곳에 머무네.
閉門對微燻。폐문대미훈 /
開門招翠崟。개문초취음 /
學稼二十年。학가이십년 /
尋常餒在中。심상뇌재중 /
流移計轉拙。류이계전졸 /
假田隨老農。가전수로농 /
盂粥故添餕。우죽고첨준 /
勉厲飢卧僮。면려기와동 /
用時有成趣。용시유성취 /
杖鞋不自慵。장혜부자용 /
高靄與墜霞。고애여추하 /
襲衣相冲融。습의상충융 /
望望秋穫憂。망망추확우 /
珍重得與公。진중득여공 /
幽卧深隱几。유와심은궤 /寤宿廢紲絆。오숙폐설반 /
鄰人稍出門。린인초출문 /
簷燕語何軟。첨연어하연 /
寂寂萬慮空。적적만려공 /
容光林日展。용광림일전 /
理義誦孔翼。리의송공익 /
憂患翫文演。우환완문연 /
盡日無來欵。진일무래관 /
虛蹊長苔蘚。허혜장태선 /
春山深復深。춘산심복심 /
虛巷惟雲樹。허항유운수
雙眸入空翠。쌍모입공취 / 두 눈이 푸른 창공에 이르니
景華無一忤。경화무일오 / 화려한 경치 하나도 거스릴게 없네
獨賞興未周。독상흥미주 /
倦卧意自裕。권와의자유 /
倘有避世士。당유피세사 /
邂逅肎相顧。해후긍상고 / 만나면 살갑게 서로 돌아보았는데
子猷去已久。자유거이구 /
無復林下迕。무복림하오 /
簾鉤下日遲。렴구하일지 /
不出成泥塑。불출성니소 /
蟾峰四事
借屋
愛此崇林廬。애차숭림려 /
靜散愜幽意。정산협유의 /
戶光凝虛白。호광응허백 /
簾影落危翠。렴영락위취 /
謝世秪自得。사세지자득 /
買山亦不費。매산역부비 /
歸來千百載。귀래천백재 /
分華自高義。분화자고의 /
分耕
失士歸于農。실사귀우농 /
無田代以力。무전대이력 /
食少僮難勸。식소동난권 /
草長牛易澤。초장우역택 /
旱蝗潦風憂。한황료풍우 /
犂鋤灌穫度。리서관확도 /
日日人競出。일일인경출 /
課趁可理策。과진가리책 /
讀書
腐儒少事業。부유소사업 /
讀書破萬卷。독서파만권 /
老去癖難醫。로거벽난의 /
閒來趣不淺。한래취부천 /
白屋禮樂謨。백옥례악모 /
丹田善利辨。단전선리변 /
珍重紫陽翁。진중자양옹 /
爲我重啓鍵。진중자양옹 /
登望
林皋綠正漲。림고록정창 /
倦興日孤往。권흥일고왕 /
畦壠野茫茫。휴롱야망망 /
雲鳥天蕩蕩。운조천탕탕 /
箇中無毫髮。개중무호발 /
底處餘魍魎。저처여망량 /
東西南北人。동서남북인 /
不違惟藜杖。불위유려장 /
歲丙申(1716)夏。魯谷圮。越三年己亥(1719)。李子命庶弟改築之。得地于府郭之北。古所稱上洛者。是也。廡東出二椽。治之爲家塾。曰時習齋。及歸自蟾峰。復於楣外。却竪小楹。輳桷爲廂。墁而室之。南戶受日月。東扉使轉入時習。李子居焉。名之曰升室。門人問曰。何居。子之命也。曰形也。邵子之室。嘗如斗矣。今吾室縱視常而橫半焉。故取之。曰。止斯而已乎。曰。量也。陶潛之粟在甁。而歎其乏矣。余得粟所計止於升。是計續則吾無求焉。故取之。曰。豈其然哉。弟子之惑滋甚。曰。子欲聞乎道。請爲子言之。自黃帝氏取竹嶰陽。吹之爲十有二律。黃鐘之管。長九寸圍九分經三。一積秬黍。中者千二百黍。爲勺。再積爲升。升之積。至於不禦。分寸之於丈引。銖兩之於匀石。一也。君子之道有如是者。故中庸曰。升高必自卑。易象曰。地中生木升。君子以。順德。積小以高大。皆積而上者也。是故。君子察於人倫。明於庶物。謹於幾微。盡性至命。知本於孝悌。竆神知化。由通於禮樂。苟反是。無老也。放莊也。寂佛也。徑約陸也。非聖人敎也。仲由有聞。未之能行。惟恐有聞。是以。行所聞爲升者。積之升聖人之堂焉。顔淵得一善。則拳拳服膺而勿失之。是以。得善爲升者。積之去聖人一間焉。余旣稟魯矣。病痼矣。年邁矣。少有志老而無成矣。余方欲警之省之。庶幾收桑楡之景。而不爲小人歸矣。然則吾之積也。升猶大焉。善乎。豈小勺而棄之。又豈以室之小名之陋。爲嫌乎。曰。弟子旣聞命矣。見人南征之吉。先生亦將有意乎。曰。非愚所及。子可問於名世者。遂幷書其說。揭吾室壁上。
余始以丁丑歲(1697)。卜魯谷。以庚寅歲(1710)。入華陰。壬辰歲(1712)。復還魯谷。以己亥歲(1719)。移城北改築。辛丑歲(1721)。遷蟾峰。壬寅歲(1722)。復還舊寓。作升室。故三處所記述。幷附魯谷記。爲附錄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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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谷記 (상주 노곡)
谷在上洛府東直十里而近。葢上洛之山。自西而東淵岳。亦俗離一枝也。磅礴崒嵂。爲鎭望。勢蹙東騖。聳于息山。息山左峙。止伊水上。崚嶒多石。木皆松。其絶頂曰鳳凰㙜。石上有大刻字。不知何時作。右奔巍峩。濱洛而捍東者曰屛城。山上有沙伐古城石堞。中出㟏㟪旣峻。而夷迤成小麓。復爲小峰曰羅浮山。自小麓西曰外魯谷。東曰內魯谷。或言以諺音相近者稱。或言上洛文獻足備。如中華之鄒魯。故襲其美者稱云。
上之二十有三年旃蒙大淵獻。大殺。明年又無年。域內顚連遍焉。世家子弟。或流離之四境。李子世守淸貧。性又拙踈。尤無以爲生理。於是稟庭旨。挈妻子踰嶺而南。就食焉。時卽强圉赤奮若季秋也。葢嶺南。古君子之邦。而以禮俗稱。上洛居上游最著。昔我曾王考贊成公避北亂。隱德玆土。且十年有餘。王考曁先子皆寓焉。洛於李卽同舊鄕者。亦可居也。李子始以上洛巨府。人物輻輳。無靚便可居。遂賃屋外谷。遠近士友多來存問。有欲其居惜其去者忠謀之。遂捐貲易得一邱焉。大抵外谷。四面周遭。自外無異觀。入其中。始幽曠可居。有泉湧。自山要轉成丫澗。西流易涸。東源旱亦不絶。自古村廬挾西澗而居。惟東有隙地。里塾在焉。名曰魯東書堂。書堂之東。卽余所占者也。澗東搆屋。以容家衆。澗西築小堂。爲燕息之所。堂凡二間。東牖北寮。堂曰天雲。寮曰養浩。堂前數步。引澗鑿小塘。植蓮。塘曰照鑑。堂之得名由此也。東數步。跨澗以石。爲小橋。通內室。橋曰淙淨。橋東北。古木交陰。築社可息。社曰詠歸。塘西小巖。平夷可坐。方芙蕖盛開。俯襲淸香。巖曰愛蓮。緣澗南上十餘步。有小齋。以待學者肄業。齋曰養正。又上三四步。剪蓊翳闢基砌。欲搆小亭而未暇。亭曰艮止。前有立石僅丈餘。傍大石盤。衍如㙜。可坐數人。澗從石竇而出。臺曰考槃。東因陂築壇。植古松。壇曰歲寒。澗旣下山數十步伏流。至考槃復湧。故曰伏泉。堂東越澗。累恠石。間植卉草。名曰積石。且內谷傍孔道。無所遮蔽。外谷近山。宅幽勢阻。內外不稱。故改內曰東魯谷。外曰西魯谷。總以名之曰息山精舍。精舍境僻而界寬。處隱而望遠。左挹鳳㙜。右拱屛城。負息山而面羅浮。其外廣野。灝氣漫漫。伊水與北溪。會于柄峙之前。注于江。又其外列峀羣巒。或遠或近。如小白紫嶽,主屹在指點間。積翠浮嵐。朝暮變態。亦精舍之勝也。息山子日處其中。與世益無交涉。講學于堂。修書于寮。皆賢聖之書。義理之說也。有朋友學者。肯來相顧。敬以與之。不敢拒之。無客則燕居守疴。有時遇境佳。發舒精神。方寸無累。有超然自得之意也。坐久而倦。倦而休。或以墨葛。寫蝌蚪大字。或焚香。援琴彈數闋而止。或凭几而投。以翫心而頤神也。興盡無事。步屧而行。倚藜而立。休于臺。坐于巖。度于橋。詠于社。俯池而觀魚。臨流而濯足。其止其行。惟意所適也。讀書之餘。得有閒暇。治園圃。易畦町。種藥蒔菜。地髓甘玉延美。附,朮,茴,芷,芎藭,昌陽。俱可服餌。萊菁消。松虀下。芋補而薑通。葵利而瓜潤。韭藿可煑。蔥蘓可炙。爽口淸膈。無羨乎珍錯也。又喜種樹。方列而襍裁。擧其著者。鬱鬱爲松。蒼蒼爲竹。覆庭爲梧蔭。巷爲柳。菊有霜英。梅有冷蘂。晩芳可賞。蹊桃園栗。娛觀而療飢也。拙於謀生。入土循俗。春陽載殷。有事西疇。理耒耜。課僮隷。辟菑畬。䟽洫溝。時雨沛然。壠畝澤矣。禾黍旣實。庶有年矣。輸租于公。爰及我私。簞瓢不繼。妻子不戚。息山子棲息於是。荏苒日月。將至十禩。年紀遲晩。貧瘁日甚。然婆娑林壑。晏然而處。不知老之將至也。夫所謂味道德之腴。躬仁義之實者。無所得焉。安土而止。任分而守。不疚於內省。而無願乎外。有可勉者。古人有放浪山水。傲睨宇宙。慕玄虛輕軒冕者。有處畎畝之中。樂堯舜之道。雖未澤及斯民。而可與聖賢徒者。彼高而莫追。此大而難至。俱非余所及。惟其志則有在焉。不敢安於自畫。陷於自誣。然才弱力淺。愈求愈遠。寸進而尺退。倀倀乎迄無所成也。於是遂逐物詠詩。以自見其志。凡精舍雜詠十有二。曰天雲堂。曰養浩寮。曰詠歸社。曰照鑑塘。曰愛蓮巖。曰淙淨橋。曰養正齋。曰艮止亭。曰考槃㙜。曰歲寒壇。曰伏泉。曰積石。山川雜詠八。曰淵嶽。曰息山。曰羅浮。曰伊川。曰鳳凰㙜。曰屛城山。曰東魯谷。曰西魯谷。閒居雜詠十有五。曰講學。曰修書。曰會友。曰燕坐。曰寫篆。曰彈琴。曰投壺。曰步庭。曰倚杖。曰觀魚。曰濯泉。曰治圃。曰種樹。曰課農。曰輸租。合三十五首。
上之二十九年昭陽協洽南至日。息山李仲舒父。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