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그런 경우가 없지만 왕조시대만 해도 사람의 잘못을 땅과 싸잡 아 단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특히 역모를 꾀하거나 부모를 죽이는 것 과 같은 패역무도한 사건이 일어난 곳에 대한 처벌은 상상할 수 없을 정 도로 가혹했다. 제 아무리 행정 지리적으로 중요한 부(府)의 위상을 지닌 곳이라 하더라도 그런 불미스런 일이 일어난 고장은 어김없이 군(郡)이나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현인 경우에는 아예 폐현 당하여 이웃 현에 통합되 는 수모를 받았다. 그런데 그같은 수많은 사례들 중에 김천시 개령 땅이 겪은 수난은 애석함의 차원을 넘은 황당함 바로 그 자체였으니, 그 발단은 선조 33년(1600년) 6월에 있었던 제주도 역모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 개령 고을(지금의 아포읍 제석리)에서 태어난 길운절(吉云節)은 그 패륜 행각이 극에 달해 개령 향유(鄕儒)들에 의해 쫓겨나 이웃 선산 고을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때 정여립의 사촌 처남으로서 연좌죄에 몰려 떠 돌이 중 행세를 하다가 정유재란 덕분(?)으로 승장(僧將)이 되어 승군을 이 끌고 금오산성을 수축하러 왔던 소덕유(蘇德裕)를 만났던 게다. 소덕유가 길 운절의 집에 기식하면서 두 사람의 타고난 반골 기질이 의기 투합됐던 것 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 아닌게 아니라, 소덕유는 모반의 거점으로 삼았 던 제주도로 먼저 건너간 후 길운절을 그곳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길운절의 고변으로 모반은 결국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정작 웃기는 해프닝은 그 단죄 과정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길운절이 선산 사람이라 하여 선산부를 현으로 강등하였는데, 1601년 9월 도체찰사가 길운절이 태어난 곳은 선산 땅이 아닌 개령이라는 장계를 올림으로써 선산현은 즉각 선산부로 환원되고, 개령현은 폐현되어 금산군에 병합되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고향에서 쫓겨나면서 유생들에게 앙심을 품었던 길운절이 제주도 역모 사건에 이언룡(李彦龍)을 위시한 6명의 개령 유생들이 연루돼 있다고 거짓 증언함으로써 그들이 서울 의금부로 압송되어 무고한 옥고를 치른 점을 감안하면 이건 숫제 세상 돌아간 꼴이 영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뿐 아니다.
길운절의 생가터는 관례법에 따라 파헤쳐진 후 못(池: 현 재 제석리의 吉池)터로 만들어졌는데, 아무리 충과 효를 사회 운용의 으뜸 덕목으로 여겼던 사회였고, 또한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럴듯 한 처벌 방법이 필요했다 할지라도, 대자연의 위대한 베풂을 어찌 그런 엉 뚱한 행태로 앙갚음했다는 것인지 필자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죄가 있다면 사람에게 있지, 어찌 아무 죄 없는 땅을 애꿎게 탓할 수 있었느냐는 말이다. 왕이 태어날 집터가 따로 있고, 역적이 태어날 집터 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그 모든 행태는 사실 인간의 심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편협된 ‘터’관념에서 비롯된 작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정작 문제되는 것은 그런 역사적인 사실이 결코 아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개령 땅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지리연구가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사람들은 요즘도 개령 땅에 대해, “개령에서 금오산을 바라보면 그 산이 도적과 같은 형상(적봉·賊峰)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예로 부터 그 고장에서 길삼봉과 같은 큰 도적이 나오고, 또한 모반이 자주 일 어났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것은 결코 신빙성이 있는 말이 아니다.
철 종 13년(1862년)에 있었던 개령민란만 해도 그렇다. 당시에 삼정(三政)이 문란하여 영남에서 호서지방에 이르기까지 20여 고 을에서 민란이 연쇄적으로 일어났지만 개령의 그것만을 유독 길운절 모반 사건과 함께 엮어 금오산의 적봉 지세 탓으로 돌릴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실제 개령 땅을 답사하여 그 터가 지니고 있는 장단점을 논리적으 로 언급하는 가운데 그 터의 결점을 지적하는 것은 아무리 지나쳐도 괜찮 다. 하지만 과거에 한낱 우스개로 붙여놓은 개령 땅에 대한 지리적인 해석 에 집착하여 그 터를 작금에 이르러서도 무책임하게 폄하한다는 것은 양심 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개령면기(開寧面基)의 풍 수성은 알고보면 그 어떤 고을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외부 관찰자들이 그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개령 땅을 이해하든지, 그 터 자체는 예나 지금이 나 변함없이 산수 조화로울 뿐더러 맑고 깨끗하다는 말이다. 게다가 개령 조상들의 풍수 행태가 오히려 다른 고을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진대 어찌 그 터를 함부로 폄하할 수 있으리오. 개령면기는 산과 강, 그리고 들판이 잘 어우러져 있는 터다. 감문산( 甘文山)을 배경으로 동남향으로 판국이 열려 있는데, 앞쪽으로는 감천(甘川) 이 동북류하며 그 하천변에는 기앞들과 옥샘들 같은 비옥한 들판이 펼쳐져 있다. 삼한시대때 그곳이 감문국의 도읍터였다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한눈에 사람이 살만한 터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퍽 짜임새 있는 모 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면기 왼쪽은 취적봉(吹笛峰)에서 관학산(觀 鶴山), 그리고 유산(柳山 혹은 柳東山)까지 내리뻗은 지맥이 좌청룡을 이루 고, 그 오른쪽은 감문산에서 남산(南山)까지 이어진 지맥이 우백호를 이루어 , 좌우로도 어느 정도의 균형을 갖추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주산격인 감문산보다 안산격인 감천 너머의 비봉산(속칭봉화재 혹은 逢友재 )이 더 높고, 산자락에 기댄 마을터가 강변으로부터 쑥 들어앉아 있어 다 소 답답한 느낌을 준다는 것과, 지금처럼 하천제방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감천의 범람이 주민들에게 적잖은 걱정을 가져다 주었을 법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령의 옛 조상들은 그같은 삶터의 결점을 어떤 식으로 비보( 裨補: 지리적인 결점을 보완함)하였던 것일까. 우선 하천변에는 남수(南藪)를 조성하여 읍기를 수환(水患)으로부터 보호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 輿地圖書)’에는 김숙자(金叔滋, 1389∼1456)가 개령현감으로 왔을 때 수(혹은 쑤)를 조성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고려조 윤진(尹珍)의 시(詩)에, “온 길을 그늘로 덮은 것은 어느 대의 나무이며(一道層陰何代樹), 평평한 들의 빼어난 빛은 어느 집의 곡식인고(平原秀色幾家禾)”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수는 이미 그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조성되었을 법하다. 우묵한 삶터 판국의 답답함을 해소한 방법은 더욱 흥미롭다. 면기와 접 한 감문산 지세를 이른바 호랑이가 잠자고 있는 듯한 숙호형(宿虎形) 지세( 개령초등학교 뒷산봉우리가 호랑이 머리에 해당함·일명 虎頭山)로 상정한 후 , 감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 바라보는 아포읍 대동(大洞 혹은 大新里)의 동 쪽 산을 움추린 개의 형상(狗項山 혹은 狗隱山)으로 비유한 것만 해도 그 렇다. 그런 관념적인 지명 비보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도 싶지만 대동 사람 들이 호랑이 형상의 감문산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마을 이름을 함곡(陷谷 )으로 바꾼 적도 있고 보면, 비록 정서적인 차원이었을망정 주산격인 감문 산을 호랑이 형상으로 의미부여한 것이 개령 주민들로 하여금 주체성 있는 삶터 의식을 가지게 하는 데 나름대로 의미있는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옛 개령 땅의 풍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역시 적현면 초곡리( 지금의 남면 서원마을) 감천변에 있었던 덕림서원과, 여러 산기슭과 산봉우 리 위에 터잡았던 정자(亭子)의 입지성이 틀림없어 보인다. 세조 14년(1468 년)에 군수 변심(卞 )이 유산 봉우리 위에 두어 칸 되는 정자를 짓고 매 일 거기에 올라가 너른 들판의 곡식이 되어 가는 형편을 보면서, 주민들의 애로 사항을 일일이 보살펴 주었는데, 그 당시 그 정자의 이름을 지어주 기를 부탁받은 사가(四佳) 서거정의 기문이 그야말로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 다. 그 내용인즉 “누각이나 정자를 세우는 까닭은 아름다운 것을 보기 위한 것만 아니라 손님을 접대하고, 때의 형편을 살피는 데에 있는 것이다 . 하물며 군자는 쉬고 노니는 곳을 높고 밝은 곳에 가지고 있어 기상이 답답하지 않고 뜻이 침체하지 않으며, 보는 것이 옹색하지 않고 총명이 막 히지 않게 해야 한다. 아전은 가혹하고 백성은 완만하며, 정사는 번잡하고 세금이 과중하여 굶어 죽은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가난하여 집 안에 아 무 것도 없다면 비록 누각이나 정자가 있다한들 원(員)이 자기 혼자서 즐 길 것인가. 이제 공의 은택이 백성들의 마음에 있어 서로 믿음으로써 즐거 움을 나눌 수 있으니, 위와 아래가 서로 같이 즐기는 것을 나는 이 정자 에서 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 이름을 동락(同樂)이라 짓는다”는 것이다. 지금 유산 위에는 물론 그 동락정이 없다. 하기야 저 남산 위에 있던 팔승정(八勝亭)도 면사무소 구내로 옮겨 놓은 마당인데, 그 동락정이 있었 다한들 예전의 바로 그 합당한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쏜가. 의미있고 내용있었던 지리적 입지상(相)이 무의미하고 형식적인 입지상으 로 전락한 것은 비단 그런 정자뿐만이 아니다. 비보숲은 유산(柳山)과 양천 (楊川)이라는 곳이름만 남겨 놓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고, 일견 무척 질서있어 보이는 천박한 신작로 가로수들만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주산인 감문산에 묘를 쓰면 마을 공동 우물터인 쌍샘물이 솟구치면서 뒤집어진다 하여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주민들이 온 산을 이잡듯이 뒤 져 암장한 묘를 찾아냈다지만 감문산 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던 그 두 샘물터 중의 남아있는 한 곳마저도 이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 듯하니, 감문산이 앞으로 언제까지 주민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지 그것도 의 문이다. 그런 우려는 마을주민들이 남수와 동락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관학 산 아래에 있는 낙파 류후조의 묘터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 있는데서도 뚜 렷이 확인된다. 게다가 1999년에 아포읍 대신리와 개령 동부리를 잇는 다리 를 놓으면서 그저 한글로 대동교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는데, 확인해 본즉 양 쪽 지역의 머릿글자를 따 그런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편의 위주의 대동교(大東橋)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형식적인 지리관의 발로에 다 름아니다. 예전의 개령 조상들이었다면 아마도 그 두 지역의 화합과 단결을 의미하는 뜻에서 같은 이름자라 할지라도 대동교(大同橋)라는 이름을 썼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점이 바로 개령 땅이 함유하고 있는 전통적인 지리 정신인지도 모른다. 개령 땅은 알고보면 결코 반역지향으로 매도될 수 없는 곳일뿐더러 이기적인 묘터 발복풍수가 삶터의 대동적인 풍수를 압도할 수 도 없는 곳이다. 유동산 옆 궁궐지(池)와 옛 양천숲터에 몇 그루 남아 있 지 않은 노거수들이 바로 그런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지 않은가.
풍수학자·지리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