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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장희 / 생애와 작품작성자靑野|작성시간10.01.10|조회수1,024목록댓글 0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사진출처: 대구 두류공원의 이장희 시비 / 나무와 시인>
이장희(李章熙)
1900년 11월 9일 ~ 1929년 11월 3일. 한국의 시인이다. 호는 고월(古月)이다.
생애
190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구의 부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이며, 어머니는 박금련이다. 다섯 살때, 어머니를 잃고 이후 계모 밑에서 크며 아버지와 불화했다. 아버지 이병학은 두 번째 부인과 5남 6녀를 두었고, 이장희가 죽기 5년 전에 세번 째 결혼을 했다. 이장희 자결 당시 형제는 모두 10남 8녀로 매우 복잡한 가계였다. 대구 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경도중학을 졸업하였다. 교우관계는 양주동, 유엽, 김영진, 오상순, 백기만, 이상화 등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부친이 중추원 참의로서 일인과 교제가 빈번하여 시인에게 중간 통역을 맡기려 했으나, 시인은 한 번도 복종하지 않았고, 총독부 관리로 취직하라는 지시도 거역하여 부친은 시인을 버린 자식으로 아주 단념하였다 한다. 그래서 극도로 빈궁한 삶을 버리지 못하였다. 1929년 11월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1]
작품 활동
1924년 《금성》 5월호에 〈실바람 지나간 뒤〉, 〈새한마리〉, 〈불놀이〉,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의 시 작품과 톨스토이 원작의 번역소설 〈장구한 귀양〉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신민》,《생장》,《여명》,《신여성》,《조선문단》등 잡지에 〈동경〉, 〈석양구〉, 〈청천의 유방〉, 〈하일소경〉,〈봄철의 바다〉등 3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요절하였기에 생전에 출간된 시집은 없으며, 사후 1951년 백기만이 청구출판사에서 펴낸 《상화와 고월》에 시 11편만 실려 전해지다가 제해만 편 《이장희전집》(문장사, 1982)과 김재홍 편 《이장희전집평전》(문학세계사, 1983)등 두 권의 전집에 유작이 모두 실렸다.
평가
시인 생존시에 이루어진 평으로는 박종화와 이상화의 것이 있다. 박종화는 《조선문단》 1925년 10월호 〈9월의 시단〉에서 《여명》에 실린 이장희의 시〈청천의 유방〉과 〈비오는 날〉을 평가하면서 〈청천의 유방〉은 "기괴를 쓰랴는 마음, 상징을 위한 상징시라는 것을 나는 말할 뿐이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하고 말했으며, 〈비오는 날〉은 "작자에 착각적 정서로 부터 나온 작품이다. 다만 한 때에 마취된 감흥의 씌운 붓장난이라 할 것이다."하고 혹평했다.[2] 반면, 이장희와 동향 친구였던 이상화는 같은 해, 《개벽》 6월호에서 이장희의 시 〈고양의의 꿈〉과 〈겨울밤〉을 이채 있는 시라고 하면서, 이상화를 정관(靜觀)시인이라고 고평하였다. 다만 생명에서 발현된 열광이 없음을 덧붙였다.[3]
조연현은 1920년대 시단의 낭만주의적 풍조의 전개를 다루면서 감각적인 예민성은 거의 이장희의 독자적인 특성으로서 이 무렵의 감각적인 경향을 대표하는 유일한 시인이라고 평가했다.[4]
정우택은 비속한 현실에 맞서 절대 자유, 절대 자아의 순전함을 추구했던 이장희의 삶은 곧 그의 시라면서 그의 미적 태도를 '미적 근대성의 자기 파괴적인 양상'으로 명명하였다. 또,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이장희는 근대적 주체의 자율성을 옹호하기 위해 예술의 자율성과 미적 근대성을 절대적인 지점까지 추구했던 시인으로 기록되어야 한다고 했다.[5]
<자료: 위키백과>
이장희 작품(詩) 모음
(대구광역시 두류공원에 세위진 이장희 시비)
청천靑天의 유방乳房
어머니 어머니라고
어린 마음으로 가만히 부르고 싶은
푸른 하늘에
따스한 봄이 흐르고
또 흰 볕을 놓으며
불룩한 유방乳房이 달려 있어
이슬 맺힌 포도송이보다 더 아름다워라.
탐스러운 유방을 볼지어다.
아아 유방으로서 달콤한 젖이 방울지려 하누나.
이때야말로 애구哀求의 情이 눈물겨웁고
주린 식욕食慾이 입을 벌리도다.
이 무심한 식욕食慾
이 복스러운 유방......
쓸쓸한 심령이여 쏜살같이 날라지어다.
푸른 하늘에 날라지어다.
봄은 고양이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香氣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찬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生氣가 뛰놀아라.
고양이의 꿈
시내 위에 돌다리,
달 아래 버드나무.
봄안개 어리인 시냇가에, 푸른고양이
곱다랗게 단장하고 빗겨 있소, 울고 있소.
기름진 꼬리를 쳐들고
밝은 애달픈 노래를 부르지요.
푸른 고양이는 물오른 버드나무에 스르르 올라가
버들가지를 안고 버들가지를 흔들며
또 목놓아 웁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칼날이 은銀같이 번쩍이더니,
푸른 고양이도 볼 수 없고,
꽃다운 소리도 들을 수 없고,
그저 쓸쓸한 모래 위에 선혈鮮血이 흘러 있소.
실바람 지나간 뒤
님이시여
모르시나이까?
지금은
그리운 옛날 생각만이,
시들은 꽃
싸늘한 먼지
사그라진 촛불이
깃들인 제단祭壇을
고이고이 감돌면서
울음 섞어 속삭입니다.
무엇을 빌며
무엇을 푸념하는지요.
석양구夕陽丘
바람소리는 아니고
실낱같은 소리가 있어
푸른 잎사귀 너머로
나직하게 나직하게 들리도다.
멀리서 부르는 꿈 노랜지
야릇한 소리는 끊임없이
고운 향기에 녹아들어
쓸쓸한 이 가슴에 사무치어라.
가을에 속삭이는 물결같이
풋어린 설움이 흔드는 대로
나도 몰래 들가의 지름길은
보리 심은 언덕으로 오르나니
보아라, 새까만 큰 바위 사이에
높이 받들은 성聖 마리아,
새맑은 모래 위에 꿇앉으며
우러르고 구부린 수녀修女들을
두 팔을 가슴 위에 맞대이고
끝없이 기리는 독경讀經의 소리
혹惑시 떨리고 혹惑시 그윽하여
수녀修女들은 성상聖像밑에 깃들이도다.
오, 신앙信仰의 기쁨이여
넘치는 영광榮光에 젖은 수녀修女들의 소리여
나의 고달픈 령靈, 거칠은 몸은
무거운 묵시默示에 느껴울다.
어느덧 늦은 바람은 한숨짓고
빗발같은 사양斜陽을 가로받은
교당敎堂의 붉은 벽돌, 둥그런 유리창琉璃窓은
갸륵한 금金빛에 빛나여라.
아, 지금 수녀修女들의 고운 소리는
동산 넘어 깊이도 사라지고
물같이 갈앚은 모래언덕은
속 아픈 명상瞑想에 저물어 간다.
비오는 날
쓸쓸한 정서情緖는
커어튼을 잡아 늘이며
窓 너머 빗소리를 듣고 있더니
불현듯 도깨비의 걸음걸이로
몽롱한 우경雨景에 비틀거리며
뜰에 핀 선홍鮮紅의 진달래꽃을
함부로 뜯어 입에 물고
다시 머 ─ㄴ 버드나무를 안고 돌아라
달밤 모래 위에서
갈대 그림자 고요히 흩어진 물가의 모래를
사박 사박 사박 거닐다가
나는 보았습니다 아아 모래 위에
자빠진 청개구리의 불룩하고 하이얀 배를
그와 함께 나는 맡았습니다
야릇하고 은은한 죽음의 비린내를
슬퍼하는 이마는 하늘을 우러르고
푸른 달의 속삭임을 들으려는 듯
나는 모래 위에 말없이 섰더이다
무대舞臺
거미줄로 짠 회색灰色 옷을 입은 젊은 사나이
흰 배암 문의紋儀로 몸을 꾸민 어여쁜 새악시
젊은이들은 철없이 반기며 妙한 춤을 추도다.
아, 그러나 향로香爐의 연기는 가늘게 떠올라라.
조용한 촛불은 눈물을 흘리며 꺼지려 하는 것을.
보아라, 푸른 달빛과 같은 애처로운 꿈이 아니뇨.
오, 춤추는 사람들의 애젊은 환영幻影이여.
눈물짓는 촛불의 가냘픈 숨결이여.
겨울밤
눈비는 개였으나
흰 바람은 보이듯 하고
싸늘한 등불은 거리에 흘러
거리는 푸르른 유리창(琉璃窓)
검은 예각(銳角)이 미끄러 간다.
고드름 매달린
저기 저 처마 끝에
서울의 망령(亡靈)이 떨고 있다
풍지같이 떨고 있다.
- [생장] 5호, 1925년 5월-
<사진출처: 대구 두류공원의 이장희 시비 / 나무와 시인>
이장희李章熙 (1900. 11. 9 ~ 1929. 11. 3) 시세계
─ 감각, 색채어, 공감각적 이미지의 선구자
이기철 (시인 · 영남대학교 교수)
고독, 시, 염결성, 요절, 스물아홈의 짧은 삶, 냉방에 앉아 그린 금붕어, 극약 과 자살......
이같이 그 동안 출간된 몇 권의 『이장희 전집』 표지에 새겨진 말들은 한결같이 비통하다.
자살......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남긴 것은 시뿐인 고월...... 제해만 편,
『이장희 전집』, 문장사, 1982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면도날보다 푸르고 예리한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시를 썼던 이장희......
김재홍 편, 『이장희 전집, 평전』, 문학 세계사, 1983년
위와 같은 말들이, 영원히 우리 가슴에 소년으로 남아 있는 시인 이장희에 대한 추억과 애도와 찬사들이다. 그리고 「봄은 고양이로다」, 「실바람 지나간 뒤」, 「청천의 유방」, 「동경」, 「봄철의 바다」 같은 맑고 깨끗한 시가 그의 삶과 문학을 비춰 주는 거울이다. 그런가 하면, 그가 남긴 유일한 시론, "시는 푸라티나 선이라야 한다.
광채도 없고 탄력성도 없고 자극성도 없는 굵다란 철사 선은 시가 아니다"는 이름하여 이장희의 "푸라티나 시론"이다. 푸라티나 선은 백금 선을 말한다. 시는 백금과 같아야 한다. 굵고 녹슬고 둔탁하고 휘어지는 금속과 같은 시는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장희는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봄은 고양이로다」 전문
이와 같은 투명하고 촉감적인 시를 쓸 수 있었다. 이 시는 『금성 3호』(1924)에 발표한 시로서 그야말로 푸라티나 선같이 투명하고 신선한 감각의 시이다. 이 시의 고양이는 실제로는 없는 고양이, 이장희의 순수 지각에 떠오른 고양이의 감각적 묘사 시이다. 밝음과 생동하는 이미지의 이 시는 부드럽고 금방울 같고 고요하고 날카로운, 생동하는 고양이의 이미지화에 이바지한다. 이장희의 시 가운데서 고양이를
주체로 한 시로는 「고양이의 꿈」이 또 있지만 「봄은 고양이로다」와 「고양이의 꿈」은 매우 대조적이어서 전자는 상승적 이미지를 지니고 후자는 하강적 이미지를 지닌다.
이장희는 푸라티나 시론을 "시론"이라는 형식을 통해 문자화한 일은 없다. 다만 양주동이나 오상순, 백기만 등 몇 사람 안 되는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던, 시에 대한 그 자신의 견해의 피력이고 주장일 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범상한 말이 아니다. 나는 이 말을 이장희의 이미지즘에의 천명, 텐션Tension론에의 접근, 쉬르론, "자극"은 쉬르리얼리즘에의 우원한 언명으로 이해한다.1) 이로 미루어, 뛰어난 감
각의 소유자였던 이장희는 1920년대 초두부터 유럽의 첨단 이론이었던 이미지즘, 텐션 이론 쉬르리얼리즘 이론을 흡수했거나 받아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같은 주장을 수용할 때, 이장희의 쉬르리얼리즘 수입은 한국 시문학사의 최초의 사건이 된다는 것도 함께 수용해야 한다. 그만큼 그는 첨단 시인이었고 첨단 감각의 소유자였다. 이장희의 시에서 쉬르리얼리즘의 시적 수용이 실현되었다는 점을 용인한다면 우리 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초현실주의 시의 실험보다 이장희의 그것이 앞선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만 스문아홉이라는 짦은 생애, 극약을 먹고 자살한 비극적인 삶, 대구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학교에서도 늘 낡고 해진 옷을 입고 다녔던 가난한 아이, 21명이나 되는 엄청나게 많은 형제자매 가운데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한 번도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불우한 소년 시절, 다섯 살 때 맞은 어머니 박금련의 죽음, 교토중학 시절 잠시 사귀었다고 전해지는 일본 소녀 에이꼬와의 덧없는 사랑, 방학 때 귀국하여 다시 돌아가지 않은 일본, 결혼은 했으되 첫날밤을 부인과 함께 지내지 않았다는 그의 애정 없는 결혼 생활, 일본어에 능해 중추원의 어떤 직무를 맡아달라는 아버지의 이병학의 청을 거부한 후 곟속된 아버지와의 불화, 손꼽을 정도밖에 사귐이 없는 극히 좁은 교우 관계, 길을 가다가도 "권태다, 권태다"라고 혼자 외치거나, 이세상 사람들을 모두 속물이라고 선언했다는 그의 비사교적인 성격과 고고벽孤高癖..
이것이 이장희의 생애에 대한 전반적인 요약이다. 그러나 그의 시적 감각과 희원은 더없이 크고 넓고 다감한 것이었다.
외떨어진 샛별이여
내리 봄이 어디런가
남빛에 흔들리는 바다런가
바다이면 아마도 섬이 있고
섬이며는 고운 꽃 피는 수국이리라
오, 잊을 수 없는 머나먼 동경이여
─「동경」 부분
어머니 어머니라고
어린 마음으로 가만히 부르고 싶은
푸른 하늘에
따스한 봄이 흐르고
또 흰 볏을 노으며
불룩한 유방이 달려 있어
이슬 맺힌 포도송이보다 더 아름다워라
탐스런 유방을 볼지어다
아아 유방으로서 달콤한 젖이 방울지려 하누나
─「청천의 유방」 부분
이러한 실재하지 않는 대상에의 감각과 상상은 이장희의 생애와 연계해서 생각해 보면 그가 어렸을 때 사별한 어머니에서 온 감각이나 정한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장희에게 있어서 어머니와의 사별은 정신적 상혼, 곧 트라우마가 되어 그의 시에 빈번한 그리움, 동경 등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유아 콤플렉스라 부를 수도 있는 이러한 이장희의 동경과 꿈은 그것의 상혼이 컸던 것만큼 그가 성장
한 뒤의 시편들에서도 계속 나타나는 심상이다.
대구부 서성정 1정목 103번지, 지금으로서는 대구시 서성로에서 태어난 이장희는 이상화와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던 가까운 이웃이었고 나이도 한 살 차이였던 친구였지만, 이상화의 사회적이고 사교적인 성격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자폐적인 성격의 이장희는 지역으로나 문단으로나 가장 가까울 수 있는 이상화와도 자주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장희가 자살하고 난 뒤, 이상화, 백기만, 이근상2) 등이 그의 유고와 유품을 정리하여 대구 조양회관朝陽會館에서 그의 유작전과 추도회를 했고, 백기만은 그의 유고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마침내 1951년, 『상화와 고월』을 내기까지 했지만, 그러나 이런 친구들과도 이장희는 생애 동안 자주 만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상화와 고월』은 이상화와 이장희의 최초의 시집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이 두 시인은 생전에 시집을 내지 못하고 작고했기 때문이다.
이장희는 일본 유학 시절, 교토 중학에 다니면서 일찍이 일본 시인들의 시를 읽고 그것을 시작의 원천으로 받아들였고, 일본을 통한 프랑스 시인들의 시에 심취했던 흔적이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님이시여
모르시나이까
지금은 그리운 옛날 생각만이
시들은 꽃
싸늘한 먼지
사그라진 촉불이
깃드린 제단을
고이고이 감돌면서
울음 섞어 속삭입니다
─「실바람 지나 간 뒤」부분
저기 고요히 멈춘
기선의 굴뚝에서
가느른 연기가 흐른다
엷은 구름과
낫겨운 햇빛은
자장가처럼 정다웁고나
실바람 물살 지우는 바다 위로
나직이 Vo─우는 기적의 소리가 들린다
바다를 향하여 기울어진 풀두던에서
어느덧 나는
휘파람 불기에도 피곤하였다
─「봄철의 바다」 전문
이 시들을 두고 직접적인 프랑스 시의 영향이라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지만 이장희의 다른 시편들을종합해 볼 때 그는 프랑스 시인 줄 라포르그의 시를 읽었고 그의 시에 심취했다는 흔적은 분명하다. 물론 이런 주장은 나의 생각에 따른 것이지만, 그의 시의 형식이나 어휘, 발랄한 감각의 이미지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줄 라포르그는 프랑스 상징시인으로 주지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어 T.S. 엘리엇까지도 라 포르그의 영향을 받은 받 있다. 라포르그의 시집 『피에로들』을 읽으면 곧 그런 사실을 알게 된다. 라포르그의 시와 이장희의 시가 다같이 짧은 형식, 감각적인 어휘, 발랄한 이미지들을 사용하고 있음이 그런 관계, 비교문학적으로 말하자면, "영향관계" 에 놓여 있는데, 그런 유사성은 이장희와 라포르그의 생애와 죽음, 가족관계까지도 유사하다.3)
그러나 이장희의 시에 영향을 준 것은 비단 라포르그뿐은 아니다. 라포르그의 시는 물론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읽었지만 일본어에 능한 이장희는 직접 일본어를 읽으면서 일본시의 감각이나 이미지들을 직감적으로 수용한다. 그러한 것은 이장희가 일본에 가서 유학을 했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일본문학이라 해도 당시 일본 문단에 유행했던 "백화파白樺派"의 자연주의 문학을 받아들인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발랄하고 광채 있는 이미지즘풍의 시를 받아들인 것은 그것이 이장희의 개성과 감각에 영험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한 예로, 1920년대 우리 시에서 갑자기 "고양이"가 등장한 것을 들 수 있다. 초창기 우리 시에 "고양이"가 등장한 것은 일본문학의 영향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시대 우리 시에서 "고양이"를 등장시킨 예는 황석우의 「벽모의 묘」와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뿐이다(이 점, 소설에서는 김동인의 작품에서 노란 고양이가 등장한다). 황석우의 「벽모의 묘」는 1920년 『폐허』창간호에 발표되었고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는 1924년 『금성』 3호에 발표된다. 그러니까 황석우와 이장희는 같은 20년대에, "고양이"를 주제나 제목으로 하여 시를 썼던 시인이다. 그렇지만 이장희가 황석우의 시를 모방하거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근거는 아무 데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두 시인의 "고양이" 시는 그 유형이 아주 다르고 문학의 경향도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벽모의 묘」(푸른 털의 고양이라는 뜻)는 이른바 상징주의 시의 경향이고, 「봄은 고양이로다」는 이미지즘 경향의 시이다.
이런 "고양이"에 관한 시들은 당시 일본의 영향력있는 시인인 추원삭태랑萩原朔太郞(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시 「묘猫」(고양이)와, 하목수석夏目漱石(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다」와의 밀접한 관련 아래 있다. 이런 일본 작품들은 당시 일본의 문인이나 일본에 유학했던 한국 유학생들에게는 필독서들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일본의 거장 문인들 역시 "고양이"를 주제로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자생적이거나 창조적인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활동했던 일본 시인들 역시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를 읽고 그 영향을 받은 흔적이 확연하기 때문이다. 이 때 일본 시인들이 영향을 받은 프랑스 시인은 누구인가? 바로 상징주의의 시효라고 불리우는 보들레르C. Baudelaire이다. 이미 보들레르는 그 때 프랑스어로 「고양이Les Chats」라는 시를 써서 프랑스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양이"를 주제로 한 시는 프랑스를 거쳐 일본으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을 통한 유럽문학의 우리 문학에의 이입, 그 영향 및 수수관계는, 개화기 이후, 우리 문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리에 놓인다. 정치나 사상사적으로도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을 통한 유럽의 영향이 지대했던 시기인 점을 감안하면, 이들 일본 유학파 시인들의 활동과 유럽문학 수입은 다만 흉내 내기의 작업이 아니라 우리 문학의 확장을 위해 매우 중요한 활동으로 기록될 만한 것이다.
이장희 ─,짧은 생애, 선명한 이미지, 백금의 시론, 자폐적, 비타협적 성격의 시인, 비극적 죽음, 그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진다. 그가 남긴 시와, 시의 앞날을 내다 보았던 견자적 업적은 결코 가벼이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우리 시사는 그의 시적 성취에 아직도 인색하다.
1)이 점에 대해서는 이기철 저 『작가연구의 실천』(영남대 출판부, 1986년)을 참조.
2)이근상李根庠(1903~1934):대구에서 태어나 동경 청산학원 수학, 귀국 후 병마와 싸우면서 시 「단장」,「그 별을 따르렵니다」등과 평론「문사와 유탕병」등을 썼음 (위의 책 참조)
3)이장희의 시와 줄라포르그 시와의 관련 양상에 대해서도 위 책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음.
<자료: 달빛 머무는 뜨락>
고월(古月)의 추억-요절한 奇才 시인
/ 梁柱東
요절한 시인 고월 이장희 군은 <금성> 동인 중 출색(出色)의 시인이었고, 나의 젊은 시절의 단 하나의 지심(知心)의 벗이었다. 군은 28세의 젊은 몸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내가 초하였던 다음의 절록(節錄)하는 애사(哀詞 - 落月哀想)는 그와 나와의 교분을 대강 적은 것이어니와, 나는 더구나 지금에도 잊지 못하는 몇 가지 애달픈 추억을 갖고 있다. 첫째는 그가 술도 마실 줄 모르면서 우리 주당 동인들을 늘 따라다니다가 안주만 많이 집어먹는다고 주로 웅군에게 몹시 핀잔을 받으며 심지어 모자를 벗겨 땅에 굴려도 그저 빙그레 고운 미소만 띄우던 얼굴 - 둘째는 내가 동경으로 떠날 때 혼자 역에 전송 나와서 끝내 말이 없이 홀로 플랫홈 구내를 왔다갔다 거닐다가 급기야 발차 벨이 울자 문득 내가 앉은 자리 창밖에 와서 그 뒷포켓 속에서 1원짜리 얇은 위스키 한 병을 꺼내어 창으로 들이밀고 말없이 돌아서 역으로 나가던 그 쓸쓸한 뒷모습 - 그 맥고모, 짤막한 키, 성큼성큼한 걸음걸이. 셋째는 내가 마지막 그를 그의 장사동 집 앞채 어두운 방에 찾았을 때 그가 마지 못하여 보여주었던 '연'이라 제(題)한 절필의 시 - 그 시는 뒤에 연몰되어 전치 않으나, 대강 내용만은 지금에도 기억한다. -
어느 아이가 띄우다가 날린 것인가
전선줄에 한들한들 걸려 있는 연 -
바람, 비, 눈에 시달려
종이는 찢어지고 꼬리는 잘리고
살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고나
이런 뜻을 노래하고 나서, 끝으로 다시 한 줄 -
아아, 그것은 나의 영(靈)이런가
내가 그 시를 읽고 너무나 소름이 끼치기에 그의 손을 잡고 그에게 재삼 간곡히 '든든한 삶'을 강조하고 종용했건만, 이 보잘것없는 친구의 '말'은 드디어 그에게 아무런 '구원'이 되지 못하고 그는 마침내 자기가 선택한 절대의 길을 가고 말았다.
낙월애상(落月哀想) -고월 이장희 군을 곡함
/ 梁柱東
...군과 나와 처음 교분을 맺기는 지금부터 6년 전 - 분명히 동경에 대지진이 있던 그 해 가을이다. 내가 그때 진재로 말미암아 도일하지 못하고 서울에 두류하던 중 어느 날 현빙거(현진건) 댁에서 백군의 소개로 군과 인사를 교환하였다. 당시 군과 나는 모두 예술을 동경하는, 더구나 시가(詩歌)에 정진하는 천진 다감한 청년들이었다. 무론 두 사람의 성격상의 차이는 현저치 않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군이 겸손하고 침착하고 단아한 성격임에 반하여, 나는 오만하고 조로(粗鹵)하고 호방한 듯한 그것이었다. 그러나 한편 두 사람 사이에는 성격상 일치되는 바도 적지 않았다. 군은 수줍어하는 성질 때문에, 또는 그 철저한 결벽 때문에 어디까지나 비사교적이었고, 나는 워낙 교제의 사령(辭令)이 졸하고 스스로 초연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또한 비사교적이었다. 사교를 싫어하고 피하던 이 두 외로운 청년이 예술을 통하여 친교를 맺게 된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우리는 모두 예술지상주의적 예술관을 가졌으며, 말하자면 기품과 운치와 음영(陰影)을 좋아하는 동양예술적 내지 상징주의적 예술관에 헤매고 있던 때라, 두 사람은 글자 그대로 시우(詩友)가 되었고 예술상의 공명자(共鳴者)가 되었다.
군과 나와의 친교는 날이 갈수록 밀이(密邇)하게 되었다. 내가 서울에 묵으며 <금성>을 간행하는 동안 주야로 나를 찾아서 간담(肝膽)을 비춘 이는 실로 군이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기분을 융합하였고 피차의 사상을 탁마하였고 상호의 에술을 비평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가 날마다 황혼에 나의 여사(旅舍)를 찾아와서 들창문을 가벼이 두드리며 "양형!'하고 잔잔히 부르던 소리를 기억한다. 또한 나는 어느 쓸쓸한 저녁 내가 다리 위에서 혼자 명상할 때에 가만히 뒤에 와서 나의 어깨를 치며 미소하던 군의 다정한 얼굴을 회상한다.
...생각하면 군과 나와의 최후의 봉별(逢別)은 지난 6월 하순이다. 나는 <문예공론>의 발간을 위하여 상경한 후 약 1주일간을 군의 집에 체류하였다. 원고 수집과 인쇄, 기타에 망쇄(忙殺)되어 군과 조용히 말을 사귈 기회는 오직 밤에 자기 전 몇 분간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짧은 대화 중에서도 그의 최근 생활이 극히 단조로움과 그의 지병인 신경쇠약이 거의 극도에 달해 있음을 보고 그윽히 염려하였다. 내가 잡지 간행을 위하여 주야로 고심함을 보고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 자자(孜孜)하는가 하는 듯한 태도로 미소하였고, 내가 누누히 기고를 간청하여도 그는 끝내 시고(詩稿)를 내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기의 모든 시작(詩作)의 초고를 감추기까지 하였다.
내가 총총히 퇴경(退京)하던 날, 군은 전과 같이 나를 역까지 전송하였다. 두 사람은 차시간까지 역 구내 밖의 어두운 길을 소요하며 오랫동안 무언에 싸여 있었다. ...아지 못할래라, 군은 그때 이미 흉중에 죽음의 암영(暗影)을 감추었던가. 그러나 나는 둔감스럽게도 아무런 예감을 가지지 못했음이 한이다.
...군의 시는 과연 일자 일구가 정련(精練)과 조탁(彫琢)으로 된 완벽이다. 군의 예술상 태도는 언제나 정관적(靜觀的)이요, 명상적 상징적이었다. 시단의 경향이 도도히 현실적 사회적으로 흘러갈 때에 군만은 오직 상아탑에 굳게 들어앉아서 비속한 시풍을 혼자 냉소하고 있었다. 군과 나와는 다 같이 예술지상주의에서 출발했으되, 나는 중간에 점차 색채를 달리하여 여러가지 시재(詩材)와 시풍을 시험하였다. 그러나 군은 어디까지나 나의 의도를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나의 비속화의 경향과 예술 이반(離反)의 태도에 대하여 다소의 불만과 미소를 가졌었다.
... 시인 이장희 군의 예술은 결국 남을대로 남을 것이요, 오직 아는 자라야 알 것이요, 아낄 이라야 아낄 것이다. 도도한 시대적 경향이나 현실의 입장으로 보아서는 군의 예술 - 그 초현실적 시풍은 시대적 한 고도(孤島)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노니, 이 시인의 작품은 그 순수 때문에, 그 자기에의 충실 때문에 오래 남으리라고. 사람이 뉘 절대의 경지에서 고적이 없으랴. 염담(恬淡)과 고결에의 동경이 없으랴. 비속과 혼돈의 세계를 떠나서 눈과 같이 깨끗하고 고요한 경지에 생활코자 하는 마음이 없으랴. 더구나 황홀한 예술적 삼매(三昧) 중에서 세속의 번뇌를 망각하는 척촌(尺寸)의 여유를 갖고자 원치 않으랴. 만일 그러할진댄 나는 거듭 말하려 한다 - 군의 예술은 길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리라고...... (无涯 梁柱東)
<자료: 북소리 죽비소리 철부지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