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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교회의 정치적 중립은 타당한가?
교회는 정치적 문제에 중립을 취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교회의 세상적 책임과 연관해서 일어나는 매우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이다.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 있다. 세상을 떠나 존재하는 교회는 하나도 없다. 교회가 세상 한복판에 있다는 말은 교회는 정치적 문제의 한복판에 있다는 말이다. 물론 교회는 정치적 문제에 무관하고 초연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즉 정치적 문제에 중립을 취하는 입장을 교회는 견지할 수 있다. 그러면 교회의 정치적 중립은 정당한 것인가?
대체로 보수적인 경향을 띠는 신학자들 가운데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는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자기의 본질적인 과제를 망각하고 정치적인 문제에 너무 깊이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가 데모하는 단체가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교회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 정치적인 문제는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가 아니다. 이와 같은 것이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는 보수적인 경향의 신학자들의 관점이다.
그러나 교회의 정치적 중립은 많은 진보적 신학자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해방신학자들은 교회의 정치적 중립은 사실상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교회가 영합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왜 그러한가? 해방신학자들의 관점에 의하면 교회의 정치적 중립은 불의한 지배자의 지배를 사실상 방관함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지배를 영속화하는 데 기여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힘센 자가 힘 약한 자를 불의하게 구타해서 힘 약한 자가 피를 흘리고 거의 빈사 상태가 되었다고 할 때 이런 상황에서 중립이란 무슨 의미인가? 이런 상황에서의 중립은 결국 힘센 자가 계속해서 힘 약한 자를 구타하는 것을 사실상 방조하는 것이 되고 힘센 자가 힘 약한 자를 죽이는 데 기여한다.
해방신학자들에 의하면 교회의 정치적 중립이란 결국 지배자의 편을 드는 것이기 때문에 사악한 중립성이라고 규정한다. 이 사악한 중립성 때문에 가난하고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의 고통은 더 강화된다.
해방신학자들에 의하면 교회의 정치적 중립이란 없다.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외치는 자들은 내면적으로는 지배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이다. 교회의 정치적 중립이란 현존하는 불의한 구조를 영속화하고 개혁 의지를 거룩한 신의 이름으로 저주하는 잘못을 범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치적 중립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해방신학자들은 교회는 정치적 중립이 아닌 가난한 자들의 편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방신학자 보프(L. Boff)에 의하면 교회는 가난한 자와 한 당이 되어야 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와 같은 정신은 다음의 보프의 주장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여러분이 일할 장소는 정당정치다. 여러분은 여러분 과업에 알맞은 이데올로기와 전략을 지닌 정당을 세우고 조직해야 한다.” 이상의 정신은 교회가 어떤 정파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정신이다. 교회는 정치적 중립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가난한 자, 약한 자와 한편이 되어야 하고 그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
교회는 정치적 중립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가난한 자의 편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교회 내에서 보수적 정신과 진보적 정신 사이에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갈등 중의 하나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교회는 공동선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공동선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중립이라는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정치적 중립이란 개념은 사회 정치적 문제를 교회의 비본질적인 과제로 인식하고 초연한 자세를 견지하려는 정신인 데 반해 공동선이란 개념은 사회 정치적 문제 한복판에서 그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힘센 자가 힘 약한 자를 불의하게 구타할 때 초연한 자세로 있는 것은 잘못이다. 이 경우 교회는 약한 자를 위해 불의한 지배가 종식되도록 일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갈등의 상황 속에서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자 편에서만 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 속에도 엄청난 죄악과 이기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지배자의 불의를 고치는 동시에 가난한 자의 죄악도 고쳐 양자 모두의 공동선을 이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9.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전위대인 교회
하비 콕스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전위대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 건설의 전위대란 말은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사탄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 위에 수립하는 싸움의 제일선에 서 있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라는 말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전위대라는 말은 우선 교회가 하나님 나라 자체와는 구별된다는 말이다. 가톨릭의 옛 교회론의 전통 속에는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세상은 마귀의 세계이지만 교회만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런데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나라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를 통해 마귀가 역사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도구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사탄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평화의 통치를 세워나가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결정적 도구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서만 확장되어 나가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주역은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다. 교회가 오만하게 하나님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면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스스로 건설하신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건설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활동 도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지만, 교회 밖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교회 밖에 존재하는 정치인, 타 종교 신자들, 선한 사람들을 동원해서 하나님 나라 건설의 도구로 유용하게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활동에 봉사할 뿐이다. 하나님의 활동은 교회의 활동 범위보다 넓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방 왕 고레스를 통해 그의 뜻을 이루시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을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특별히 교회 밖의 선한 사람들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선하게 이바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이 교회 밖의 선한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이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성서 속에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은 전도를 불필요하게 만들고 구원론에 매우 복잡한 혼란을 일으킨다. 우리는 교회 밖의 선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그들은 단지 선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선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인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동역자가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가톨릭 사목 헌장 92항은 그리스도인은 평화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모든 인류와 협력할 수 있고 또 협력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고, 사목 헌장 93항은 그리스도인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연대하여 지상에서 완수해야 할 위대한 과업을 추진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 교회를 통해서만 이룩되어 나간다는 것은 매우 편협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편견이 오늘의 한국교회 속에는 상당히 많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보수적인 교회일수록 이원론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마귀의 자식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모든 활동을 마귀의 활동으로 이해하는 심각한 편견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괜찮다고 할지라도 교회 밖의 모든 활동을 마귀의 활동으로 생각하는 것은 교회 밖에서도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활동과 은총에 반응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교회 밖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많은 선한 동역자를 잃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 밖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많은 선한 동역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전위대는 교회이다. 교회 이상의 신실한 하나님 나라 건설의 도구는 사실상 찾기 힘들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제일선에서 싸우는 공동체이고 이 싸움을 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일할 일꾼을 양성하는 공동체이다.
10. 교회의 하나 됨
주후 381년에 제정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의 교회를 믿는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 신조는 사도신조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가장 권위 있는 교회의 신조로 인정받고 있다. 이 신조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종교개혁 시대 이후로 교회는 하나가 되기를 이미 멈추었다. 교회는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가 되었고 급기야는 수백 개의 교회가 난립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장로교회, 감리교회, 루터교회, 침례교회, 오순절교회 등 그 명칭을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의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같은 장로교회도 분열되어 통합측, 합동측, 기장측, 고신측, 대신측 등 수없이 많은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교회는 왜 하나 됨을 상실했는가? 교회는 어떻게 하나 됨을 다시 유지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질문은 쉽지만,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한 신학자들의 중요한 답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교회가 하나 됨을 상실한 것은 교회의 죄악 때문이고 교회의 수치라는 이론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교부라고 알려진 칼 바르트는 교회가 하나 됨을 상실한 것은 교회의 죄악 때문이고 교회의 수치라고 보았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가 지역적으로 구분되고 서로 다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의 분열이 아니다. 지역적, 환경적, 문화적, 언어적 차이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교회 사이의 차이는 교회의 본질적인 분열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교회 안에 있는 다양성이다. 지역적으로 구분되면서 자신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고린도 교회, 에베소 교회, 로마 교회 등의 존재는 교회의 분열이 아니다. 또한 바르트는 교회의 획일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교황청에 의한 획일적인 교회를 만드는 것을 진정한 교회의 일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의 다양성은 하나의 교회의 풍부함이자 장엄함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일치는 동일한 복음과 동일한 주님과 동일한 성령에 의한 일치이다. 그러므로 획일적인 하나의 제도가 없다고 해서 교회의 일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역적인 교회의 차이나 형식적인 외적인 제도상의 일치가 없는 것이 아닌 신앙고백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나는 다수의 교회들의 존재는 어떻게 되는가? 나치 시대에 있어서 고백교회가 아닌 나치에 연합한 독일의 국가교회는 어떻게 되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이것은 명백한 교회의 분열이고, 이것은 교회의 죄악이고 수치이다. 그러면 이 분열은 왜 일어나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분열은 교회가 한 분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딴 음성을 듣기 때문에 분열되는 것이다. 한 분 주님의 말씀은 동일하다. 이 교회에서의 설교와 저 교회에서의 설교가 상호 모순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교회가 이 한 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면 결단코 교회의 분열은 없다. 그러나 교회가 이 한 분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다른 인간의 이기심이 전하는 말이나 자기 정파의 유익을 위한 말이나 인간적인 죄악의 말을 듣고 따르기 때문에 교회는 분열되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다수의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교회를 지배하는 “다수의 주가, 다수의 영이, 다수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교회의 분열을 관용하는 것은 참 주님을 따르는 것의 포기를 의미한다. 또한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임시로 분열을 봉합하는 것도 참 주님을 따르는 것의 포기를 의미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일치를 위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회개가 그 관건이다.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고 순종하는 데 있는 것이지 인간적인 의견을 내세우는 데 있지 않다. 그러므로 참된 에큐메니컬 운동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모든 교파의 겸손과 회개 및 순종이 그 열쇠가 된다. 각 교파의 교만은 에큐메니컬 운동의 결정적 장애물이다.
2) 교회가 다수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이론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에 의하면 교회가 다수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카이퍼는 역사의 노정 위에 있는 교회는 다수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진리가 다수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역사의 노정 위에 있는 교회는 아직 완전한 진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9~12). 카이퍼에 의하면 그 어떤 교회도 아직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모든 교회의 지식은 아직 흐리고 상대적이다. 카이퍼의 견해를 오늘의 신학적 관점에서 비유를 통해 설명하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아들들에게 설명하라고 하면 맏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과 둘째 아들, 막내아들이 얘기하는 것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이럴 경우 맏아들의 증언을 기초로 한 맏아들 형의 교회가 있을 수 있고, 막내아들의 증언을 기초로 한 막내아들 형의 교회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다시 오늘의 교회의 모습에 적용하면 바울의 사상에 기초를 둔 바울 형의 교회가 있을 수 있고, 야고보의 사상에 기초를 둔 야고보 형의 교회가 있을 수 있다. 또한 바울의 사상과 야고보의 사상을 50:50으로 섞은 혼합형의 교회가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각 교회들은 다른 교회를 정죄할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방을 관용하고 이해하면서 협력해야 한다. 이렇게 협력하면서 대화를 통하여 서로의 잘못들을 고쳐나가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비록 객관적인 진리가 하나라고 해도 주관적 인식의 고백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역사의 노정 위에 있는 교회는 지식의 불완전성 때문에 교회가 다수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이 경우 에큐메니컬 운동의 원칙은 상대방을 정죄할 것이 아니고 상호 이해와 관용의 정신 위에 있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교회가 다수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는 종교개혁 시대 이후 수많은 전쟁 및 교파 간의 갈등으로 많은 생명이 참혹하게 희생된 역사를 생각해 볼 때 매우 심각한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장로교, 감리교, 루터교, 성공회 등의 모든 교파들이 부분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모두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이지 장로교나 감리교를 믿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장로교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많이 강조하고, 감리교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성을 많이 강조했고, 이로 말미암아 상호 간에 심각한 갈등의 역사가 있었지만, 사실상 이 갈등은 양쪽 교회 모두의 지식의 유한성 때문에 일어난 갈등이었다. 하나님의 예정 및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성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3)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한 신학적 해결
그러면 이 두 개의 견해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물론 두 견해 모두 그 주장의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도 있다. 어쩌면 두 견해가 상호 보충적일지도 모른다. 우선 첫 번째 견해를 먼저 살펴보면, 첫 번째 견해는 교회의 지식의 유한성에 따른 교회 간의 불가피한 신조 상의 차이가 있을 가능성을 제외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 상호 간의 관용이 부족할 위험이 있고 서로 상대방을 정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교회 분열의 절대다수가 인간의 죄악에서 발생했다는 역사적 교훈에 비추어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타당성이 있다. 두 번째 경우는 기독교 신앙이 상대주의로 떨어질 큰 위험을 안고 있다. 그 어느 교회도 절대적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통과 이단을 구별할 수 있는 표준이 없어진다. 바울 형의 교회와 야고보 형의 교회가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신약 성서적으로 볼 때 바울과 야고보를 이해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한스 큉(H. Küng)에 의하면 바울과 야고보는 바울의 사상에 기초를 두고 야고보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만이 올바른 해석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이미 바울의 사상을 전제로 하고 있었고 바울 사상을 기초로 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고보의 사상에 기초를 두고 바울을 해석한 신학에 근거를 둔 교회는 잘못된 교회이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주장을 살펴보면 율법주의를 고수하려는 유대교적 그리스도인을 거짓 형제 곧 적그리스도의 영역으로 이해하고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훔쳐서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은 없다(갈1:7)고 말하고 있고,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갈1:10)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한스 큉에 의하면 복음의 핵심에 관한 한 사도들은 분명한 주장을 했고, 서로 다른 구원관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의 진리의 핵심에 관한 한 상대주의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교회의 일치라는 대 명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핵심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물론 예외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의 분열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올바른 행위가 될 수 있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의 고백교회 운동은 분명 기존의 독일 국교회의 분열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미 히틀러의 앞잡이로, 사단의 도구로 전락한 독일 국교회에서의 분열은 적그리스도와 싸우는 교회의 불가피한 행위라고 평가되어야 한다. 교회는 적그리스도와 싸워야 하고 교회 안에 존재하는 적그리스도 때문에 교회가 불가피하게 분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칼빈(J.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그것을 어떻게 교회를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병사들이 자기 위치를 이탈했을 경우에 어느 누가 군기를 높이 쳐들고 각자 자기 위치로 되돌아오라고 소리친다면 그것을 분리 운동이라고 하겠는가?”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리 파수에 대한 열정이 도를 넘어 교회의 분리를 마구잡이로 정당화시키는 데 악용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사실상 교회 분열의 절대다수는 인간의 죄악 때문이었고, 진리 파수라는 것은 겉치레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1054년에 있었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분열의 겉치레 명분은 성령의 출원 문제에 대한 양쪽 교회 사이의 이견 때문이었지만, 사실상 이유는 양쪽 교회 사이의 주도권 싸움에서 비롯된 역사라는 것이 교회사가들의 대체적인 결론이다. 1950년대부터 핵분열하다시피 분열한 한국교회 분열의 역사는 또 어떠한가? 한국교회의 분열 중 그 어떤 분열이 히틀러 시대의 독일의 고백교회 운동과 비교될 수 있는 명분을 갖춘 분열이라고 할 수 있는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분열의 경우 그 분열의 주역들은 한결같이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독일 고백교회 운동의 지도자들은 그 운동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얻은 이익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파면당했고, 감옥에 갔고,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분열은 고난과 형극의 길을 걷는 삶과 연계되어 있다. 분열을 통해서 자기 정파의 이익이 되는 분열은 그의 예외 없이 죄악된 분열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인간의 지식의 불완전성 때문에 오는 불가피한 차이점의 관용이란 면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파와 루터파가 제휴하려고 하다가 성찬론 하나에 서로의 신앙의 차이점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결렬된 역사는 관용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불행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의 핵심에 대한 신앙이 동일한 한, 한두 가지 신조 상의 차이 때문에 서로 정죄하고 이단시해서는 안 된다. 100% 완전한 신조 상의 합일은 역사의 노정 위에 있는 교회로서는 불가능하다.
이제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을 요약해 결론을 맺으면 다음과 같다.
① 100% 완전한 신조 상의 일치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부분적인 신앙의 차이는 관용하는 터전 위에서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② 100% 완전한 신조 상의 일치는 불가능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근본적인 신앙의 동질성은 존재해야 한다. 이 신앙의 동일이 교회의 하나 됨의 뿌리이다. 이 신앙의 동일성을 판단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표준 중의 하나는 주후 381년 확정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이다. 교회는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에 대해서는 투쟁해야 한다.
③ 교회의 분열 중 많은 원인은 교회의 죄악에 있다. 따라서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회개와 순종이 필요하다.
♣ 참고
◈ 니케아 신조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은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곧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아버지와 본질에서 같으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생겨났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어 육신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분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나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는 비존재에서 생겨났다거나, 다른 히포스타시스(hypostasis) 또는 우시아(ousia)에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는 하느님의 아들은 창조되었으며, 변할 수 있으며,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서 파문한다.]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디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