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불교신문 신춘문예
청벚나무의 구도(求道)
정 호
청벚 보살/ 이수진
개심사 청벚나무 가지에 연둣빛 꽃이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던 것일까
가지 하나 길게 내밀어 법당에 닿을 듯하다
꽃이 맑다
매화나무는 목탁 두드릴 때마다
꽃잎으로 법구를 읊고,
청매화는 동안거 끝에 심욕의 수피를 찢어
꽃망울 터트린다
저토록 신심(信心)을 다져왔기에
봄이 일주문에 들어설 수 있다
가지마다 허공으로 낸 구도의 길
제각각 가부좌 틀고 참선의 꽃들을 왼다
전각에서 내리치는 죽비소리
제 몸 쳐대며 가람으로 흩어지는 풍경소리
합장하듯 꽃잎들 맞이하고 있다
법당은 꽃들의 백팔배로 난분분하다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
(시평)
시인은 일상에서의 사물과 현상들을 시로 끌어들여 그 아름다움을 언어로 표출해 내는 사람이다. 시인의 시작(詩作)에서의 소재는 다양하지만 그중에 주변에서 제일 손쉽게 보고 느낄 수 있는게 사계절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이 있겠다. 꽃이 피는 모습과 향기엔 너나없이 크게 감동하지만 언어로 표출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그래서인가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시들, 누구나 크게 공감하며 즐겨 읽는 시들을 보면 그 세심한 관찰과 유니크한 발상에 무릎을 치게 된다. 많이 알려진 몇 작품을 보자.
「개화(開花)」/ 이호우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꽃 지는 저녁」/ 정호승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개화(開花)」는 꽃이 피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선운사에서」는 꽃이 힘들게 피었다가 쉽게 지는 모습을, 「꽃 지는 저녁」은 꽃이 진 후의 외로움을 노래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과 진솔한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크게 힐링을 준다.
꽃에 관한 노래도 많다. 필자가 옛날 1970년대에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 김추자가 부른 꽃잎도 있다. 신중현이 작사한 노랫말도 시 같다.
「꽃잎」/ 신중현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지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그대 왜 날 잡지 않고 그대는 왜 가버렸나
꽃잎 보면 생각하네 왜 그렇게 헤어졌나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지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꽃잎 꽃잎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꽃에 관한 시와 그 사연에 많은 독자들이 크게 공감을 하고 있다.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그냥 꽃이라고만 했지 구체적으로 어떤 꽃을 지칭하지는 않았다. 무슨 꽃인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자는 의도인가. 필자의 상상으로 말한다면, 「개화(開花)」는 매화라는 생각이 들고(봄에 맨 먼저 피니까), 「선운사에서」는 꽃무릇 같고(9월에 만개했다가 10월이면 쉽게 지니까), 「꽃 지는 저녁」은 호박꽃 같다는 생각이고(저녁에 지고 꽃은 져도 열매가 탱글탱글하고 배도 고프다니까 호박죽 생각), 「꽃잎」은 장미꽃일 거라는(꽃말이 열렬한 사랑이니까) 생각이 든다. 독자들 나름으로도 어떤 꽃인지를 상상해본다면 시 읽는 재미가 배가될 것이다.
서두가 좀 길었다. 이번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청벚 보살」을 보자.
“개심사 청벚나무 가지에 연둣빛 꽃이 눈을 떴다”라고 시작한다. 구체적인 꽃나무, 그것도 객관적 상관물인 개심사에 있는 청벚나무이다. 절로 그림이 그려지며 독자들을 편안하게 시 속으로 끌어들인다. 청벚나무를 보며 꽃이 피는 과정을 묘사하지만 “가지 하나 길게 내밀어 법당에 닿을 듯하다”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그 청벚나무에서 구도의 길에 선 수행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깨달음을 향한 희원을 “법당에 닿을 듯”한 공간적 거리감으로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매화나무는 목탁 두드릴 때마다/ 꽃잎으로 법구를 읊고,/ 청매화는 동안거 끝에 심욕의 수피를 찢어/ 꽃망울 터트린다” 청벚나무가 개화하기까지의 시간적 거리감은 구도자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도정을 암시한다. 목탁소리에 꽃잎이 벙글고 있는 모습은 청각과 시각을 활용한 공감각적 효과이다. “저토록 신심(信心)을 다져왔기에/ 봄이 일주문에 들어설 수 있다” 구도의 길은 멀지만 매화가 봄을 갈망하듯 “제각각 가부좌 틀고 참선의 꽃들을 왼다”라며 깨달음의 자세를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문장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라는 표현에서 부처님께 귀의하는 수도자의 경배심을 읽을 수 있다. 이 시를 읽는 순간 우리는 개심사 경내에 들어서서 꽃이 벙그는 청벚나무를 직접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시심이 맑은 눈을 가진 시인이 쓴 맛깔나는 시이다.